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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ㅣ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재벌 딸을 아내로 둔 운 좋은 남자 스기무라. 걱정도 없고, 욕심도 없는 평온한 삶을 살아가는 이 남자가 탐정으로 등장한다. 물론 탐정 신분증 같은 게 있는 정식 탐정은 아니다. 그래서 더 평범하고, 힘 없는 탐정이며, 사소한 사건을 소극적으로 풀어갈 수 밖에 없다. 미미여사는 이런 아마추어 초짜 탐정을 탄생시킨 것이다.
대기업 회장인 장인의 운전기사가 자전거에 치어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개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물론 삶을 일순간에 뒤흔들어 놓을 크고, 비극적인 사건이지만, 타인의 눈으로 본다면 대단할 것도, 매력적일(?) 것도 없는 사건이다. 사지가 절단되는 연쇄 살인사건이나 수백억씩 횡령하고 도망다니는 범법자들이 판을 치는 이 시대에 이런 개인의 죽음은 차라리 소박하고 밋밋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죽은 운전기사의 두 딸들이 아버지에 대한 책을 쓰겠다며 스기무라에게 출판을 의뢰해 오면서 이 밋밋한 사건의 중심으로 스기무라는 한걸음씩 걸어가게 된다.
처음에는 아버지(운전기사)를 치고 달아난 자전거 뺑소니범은 누구인가? 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러나 사건을 조사해 나갈수록 초점은 점점 다른 곳을 향한다. 범인이 아니라, 아버지 그 자체로 옮겨졌다가, 다시 두 딸들에게로 옮겨진다. 처음의 의문이 풀리기도 전에 또다른 의문들이 딸려 올라오고,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의 문까지 열게 된다. 스기무라가 밝혀내는 마지막 진실은 그래서 전혀 엉뚱한 것이고, 그래서 더욱 잔인한 것이 되고 만다. 차라리 이 사건을 맡지 않았다면 더 좋은 결말이 나왔을 지도 모른다. 이런 소박한 사건의 한쪽 끝에 알고 싶지도 않은 전혀 엉뚱한 진실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 했던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하고 아름다운 도시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곳곳에 추악하고 무서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온전하게 양지로 둘러싸인 도시란 있을 수 없다. 어느 도시나 그늘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양지가 빛나면 빛날수록 음지는 더욱 습하고 무서울 수 있다.
진실도 그렇다. 하나의 사건에 하나의 진실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흙속에 파묻힌 반지를 찾으려 흙더미를 뒤집다보면 원하지 않던 다른 것들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흙속에서 수 많은 다른 것들을 끄집어 낸 후에야 잃어버린 줄 알았던 반지가 고스란히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음을 깨닫기도 한다. 진실은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아름답게 나타나 주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번 소설에서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을 읽는 듯한 조금은 낯선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미미여사 특유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해부는 여전히 빛을 발한다. 그녀의 소설은 늘 그렇다. 타인이 보기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은 사소한 사건이지만, 그 당사자들 사이에서는 상상도 못할 끔찍한 고통과 무서운 갈등이 존재할 수 있음을, 또 그 원인은 당사자들과 멀리 동떨어진 타인으로부터 비롯된 것일 수도 있음을, 하나의 범죄 속에는 개인과 사회의 욕망과 이기심이 모두 녹아 있음을.
이유, 모방범, 화차 같은 역작에는 못미치지만 이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재미있고,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