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 효과의 실험과 결과
사사키 아이 지음, 양하은 옮김 / 모로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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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청춘엔 어떤 마법이 필요한가요?

잊고 있었던, 속절없이 뜨거웠던 청춘의 한 페이지 같은 소설!

 

 

 

 

  불안하지만 순수했고, 서투르지만 풋풋했고, 무모했지만 솔직했던 푸른 젊은 날의 우리. 『프루스트 효과의 실험과 결과』는 유난히 뜨겁고 찬란하게 시렸던 청춘의 어느 시절을 섬세하게 그려낸 소설집이다. 누군가는 햇살 가득 쏟아지는 도서관에서 속살거리며 주고받았던 쪽지와 은근한 마음을 떠올릴 수도, 소중한 바람을 담아 만든 부적 따위를 남몰래 품었던 기억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동경했던 동아리 선배, 같은 대학에 가자고 다짐했던 첫사랑, 좋아해서는 안 되는 사람을 좋아해버린 마음들까지. 사사키 아이의 소설을 읽다보면 잊고 있었던, 속절없이 뜨거웠던 청춘의 한 페이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아련하고도 아름다웠던 나의 그 시절

 

 

 

“프루스트 효과라는 게 있어.

맛을 보거나 냄새를 맡으면 관련된

추억이 떠오르는 현상이야.

프루스트라는 작가의 유명한 소설 때문에

붙은 이름인데, 주인공이 마들렌을 홍차에 적셔 먹을 때

옛날 기억이 되살아난다는 이야기야.”

/ 「프루스트 효과의 실험과 결과」 중에서 9p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에는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를 맛보여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훗날 사람들은 냄새와 맛이 기억을 자극해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감정과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여 이를 ‘프루스트 효과’라 불렀다. 표제작 「프루스트 효과의 실험과 결과」 속 주인공인 ‘나’는 오가와의 제안에 따라 입시 공부와 프루스트 효과의 관련성을 실험해보기로 한다. 도쿄의 사립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데다 실험 동지가 되기로 한 두 사람은 이때부터 선생님 몰래 도서관에서 몰래 초콜릿을 먹으며, 앞으로 둘이 함께 할 여러 계획들을 세워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오가와는 청춘 영화의 한 대사처럼 이렇게 말한다. “첫 키스는 상상도 못할 곳에서 하자.”

 

 

 

“이 안에 도쿄 공기를 넣어왔어.”

(…) “도쿄 어디의 공기야?”

그렇게 묻지 오가와는 주저하며 좀처럼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이윽고

“당연히 네가 지망하는 학교 정문 앞이지.” / 「프루스트 효과의 실험과 결과」 중에서 21p

 

 

 




 

 

 

 

  「프루스트 효과의 실험과 결과」가 한때 내 온 마음을 흔든, 내 마음에 온갖 찬란한 빛의 자국을 남긴 아름다운 첫사랑 같은 이야기라면 「봄의 미완」은 미완으로 남아 늘 마음 한 구석에 공터처럼 남아 있는 청춘의 뒷 페이지를 떠올리게 한다. 소설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아카사카로 하여금 성장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 누구로도,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나만의 이야기를 써나가길 진심으로 응원하게 된다.

 

 

 

오가와에게는 나인데, 그것만큼은 자신과 확신이 있었는데, 확실히 알고 있었는데. 오가와의 프루스트 효과 이론을 같이 실험한 사람은 나뿐인데.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는 시간과 규칙과 대화와 선물과 웃음과 걷는 속도와 펜을 놀리는 소리와 입 안의 죽순마을과 버섯산이 녹아 섞이는 맛. 그런 것들이 새로운 것에 이토록 쉽게 추월당할 리가 없는데. / 「프루스트 효과의 실험과 결과」 중에서 35p

 

 

“아오야마, 같이 뛰자. 하지만 봄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빨리 봄을 따라잡기 위해서 뛰고 싶어.”

봄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한 대사였다. 어디를 향해 달리면 도망칠 수 있는지, 혹은 따라잡을 수 있는지, 왠지 아카사카는 알고 있는 것 같다고 잠시 생각하다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어디로 달리든 봄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 리도, 따라 잡을 수 있을 리도 없다. 너무 엉뚱하고 논리적이지도 않은, 공상 그 자체였다. 그런데도,

“달릴까?”

하고 대답하고 있었다. / 「봄은 미완」 중에서 75p

 

 

 



 

 

 

 

  당신의 청춘엔 어떤 마법이 필요한가요?

  한때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던 나는 맨홀 뚜껑의 무궁화를 밟으면 행운이 온다던 근거 없는 주문을 쫓아 쾌활한 성격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며 길거리를 돌아다닌 적이 있다. 그때의 나처럼, 수록작 「악보를 못 읽는다」 속 주인공인 ‘나’ 역시 비록 얼굴은 잘 생기지 않았지만 우연히 음악하는 모습에 반하게 된 ‘뽀글머리’로부터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좋은 주문”을 알게 되고, 그때부터 뭔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자신의 못난 부분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상처 입히고 상처 받기도 쉬운 10대 시절.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무엇이 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어 마냥 흔들리기 쉬운 이 시절엔 누군가의 한 마디가, 누군가가 부른 노래 한 마디가 마법의 주문이 되어줄 때가 있다. 그러니 무엇이든 네 청춘에 마법을 걸면서 살아보라고, 그것이 위로가 되어줄 때가 있을 거라고, 훗날 내 아이들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그래도 나는 나에게 마법을 걸면서 살아

노래하고 싶어 언젠가 나만 읽을 수 있는 악보로 노래할 거야

언젠가 그 스크램블 교차점에서 밤 아홉 시 마법은 꼭 걸릴 테니까

그 스크램블 교차점에서 언젠가 멈춰 서

아무도 멈추지 않지만 혼자 멈춰 서

그러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그 사람이 말했으니까 / 「악보를 못 읽는다」 중에서 16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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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 I-II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1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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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내면을 집요하게 응시하여 이야기로 완성해낸 작품!

거듭 되뇌지 않고서는 무너지고 있는 자아를 구할 길 없는 한 예술가의 처절한 고통과 비애!

 

 

 

  과연 ‘신비주의적 풍경화’의 표상답다. 노르웨이의 풍경 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대표작 ‘티스베르에서’(1865년)와 ‘보르그외이섬’(1867년)을 감상하다보면 빛과 어둠, 환희와 우울이 동시에 매만져지는 듯한 환상적인 풍경에 그만 넋을 놓게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면, 저 희뿌연 연기와도 같은 구름 속에서 어느 고독한 자의 음울한 뒷모습을 언뜻 본 것 같은 착각이 일기도 한다. 노르웨이의 거친 풍경 속에 환상성을 담아 낸 것으로 유명한 화가.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후원자를 만나 독일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에서 회화를 공부하며 화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았으나, 동료 화가들의 냉대를 받으며 정신병을 얻었다는 라스 헤르테르비그.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욘 포세는 자신의 대표작 『멜랑콜리아 Ⅰ-Ⅱ』를 통해 사후 12년 뒤에야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이 실존 화가의 불안한 내면을 집요하게 포착한다.

 

 

 

빛과 그늘, 과거와 현재, 현실과 망상 속을 떠돌던 한 예술가의 음울한 고백

 

 

 

  1853년 늦가을 오후, 독일 뒤셀도르프. 노르웨이 동부의 도시 스타방에르에서 독일로 유학을 온 화가 지망생 라스는 아주 멋진 보라색 코드류이 양복을 입은 채로 하숙집 침대에 누워 있다. 오늘은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의 교수인 한스 구데가 아틀리에에 방문해 그림을 보러 올 예정이다. 하지만 라스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다. 그는 오늘 아틀리에로 가지 않을 생각이다. 아틀리에에서 자신만큼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한스 구데가 자신의 그림을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림이 형편없다거나 아예 그가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라스는 침대 위에 누운 채 돌연 비관과 망상, 불안과 의심에 사로잡혀 침대 밖으로 한 발짝도 나서지 못하다 짝사랑하는 헬레네로부터, 하숙집으로부터, 동료들로부터 냉대를 받고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고야 만다.

 

 

 

  이렇듯 <멜랑콜리아 Ⅰ>은 라스 헤르테르비그가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전기에 가깝지만, 역사에 문학적 상상력을 덧입혀 정신 착란의 상태에 빠진 주인공이 느끼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는 특이성을 지니고 있다. 사실 이 작품을 읽다보면 독자인 나조차도 심리적 공황 상태에 이를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된다. 특별한 서사가 없이 특정한 리듬과 운율을 지닌 문장이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반복-강화’되는 형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거듭된 읊조림, 환상적 독백의 열거에 가까운 실험적이고도 시적인 문체는, 거듭 되뇌지 않고서는 무너지고 있는 자아를 구할 길 없는 한 예술가의 처절한 고통과 비애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천은 유혹하듯 내 입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천을 걷어 내기 위해 손을 입술 위로 가져갔다. 나는 입속에서 천을 걷어 내야만 했다. 천 때문에 숨 막히면 안 되니까. 나는 입속에서 천을 빼내야만 했다. 나는 손을 입으로 가져갔지만, 천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천을 걷어 내고 싶었지만 벌써 그것은 내 손에서 빠져나와 자취를 감추었다. 내가 천을 거머쥐려 할 때마다 천은 내 손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천이 나를 죽이려 했다. / 34p

 

 

나는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여기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천은 곧 내 눈을 뒤덮을 것이고 내 입속까지도 비집고 들어올 것이다. 천이 내 입속을 가득 채우면 나는 사라질 것이다. 나는 희고 검은 천이 되어 이곳을 맴돌다가 어디론가 사라질 게 분명하다. / 123p

 

 

 




 

 

 

 

  한편, 치매에 걸려 망각의 기억 속에서 라스 헤르테르비그를 떠올리는 누이 올리네의 이야기 <멜랑콜리아 Ⅱ> 역시 상당히 인상적이다. 올리네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지 않으면 걸을 수도 없고, 어부 스베인이 준 생선이 아니고서는 끼니도 해결할 길이 막막한 노인이다. 가장 건강했던 동생 쉬버트가 죽어가고 있는 마당에, 그녀는 당장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어쩔 줄을 모르는 자신에 대한 비참함과 계속해서 과거로 침잠해 들어가는 기억 속에서 속수무책이 되고 만다. 이렇듯 욘 포세는 지독한 망상과 우울증에 시달렸던 라스와, 치매로 기억을 잃어 일상조차 제대로 건사할 수 없는 누이 올리네를 통해 회색지대를 부유하며 떠도는 고독한 자아의 내면을 생생하게 구현한다. 덕분에 우리는 끝끝내 가우스타 정신 병원에서 도망쳐 그림을 그릴 거라던 라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집으로 가야한다고, 발이 아픈 건 참아야 한다고, 오직 앞으로, 앞으로 걷는 수밖에 없다고 되뇌었던 올리네의 담담한 걸음에서 마침내 인간의 어둠을 밝히는 찬란한 빛에 다다를 수 있게 된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림을 그릴 수 없다면 내가 존재할 이유도 없다. 빛도 사라질 것이다.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 266p

 

 

나는 그 그림이 우울할 때의 라스의 모습과 매우 비슷하다고 느꼈다. 물론 그림 속의 산과 나무배는 눈에 익은 실제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그림이 가끔 우울함에 빠져 있을 때의 라스를 연상시킨다고 생각했다. 거뭇거뭇하고 어두운 그림은 어둠에 빠져 있는 라스였던 것이다. 그것은 어둠이었다. 생명을 머금은 어둠, 빛을 발하는 어둠이라고 해야 할까.

이 그림은 너를 닮았어. / 416p

 

 

 



 

 

 

 

  한 사람을 내면을 집요하게 응시하여 이야기로 완성해낸 작품. 어쩌면 이건 욘 포세만의 특별한 문학적 성취가 아닐까 싶다. 여느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들의 작품에 비해 간결하고, 유연하게 읽힌다는 점도 이 작품의 남다른 점일 수 있겠다. 욘 포세만의 미학을 사유하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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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기 좋은 시간
김재진 지음 / 고흐의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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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돌고 돌아 헤매어도 별이 빛나고 있는 한 나는 돌아올 수 있어!

 

 

 

  비애의 그림자가 밟히는 계절이다. ‘꽃들의 체온이 그리움의 온도로 바뀌’(「수상한 계절」)고, 낙하하던 잎사귀의 마른자리가 지천에 가득할 즈음이면, 온 세상이 상실의 내음으로 코끝을 먹먹하게 채운다. 그러나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란’ ‘기쁨과 아픔이 절반씩 몸을 섞는 일’(「회상」)이라던 김재진 시인의 시처럼 이왕이면 상실이나 소멸이 아닌, 헤어지기 좋은 시간이라 달리 쓰고 싶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로 애끓던 시끄러운 마음들과 작별하고 이제는 차분하게 내려앉은 그림자와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좋은 계절이 아니겠느냐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떠나는 모든 것이 상처인 듯 아리다 해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음대에 진학했다 방송사 피디로 젊은 시절을 보낸 뒤 40대 초, 홀연 직장을 떠나 바람처럼 떠돌다 지금은 아틀리에에서 책 쓰고 그림을 그리며 명상하는 삶을 살고 있다던 시인. 그래서인지 김재진 시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눅눅한 사연을 실어 나르는 바람’(「바람의 시·1」)을 맞으며 ‘유리조각 밟듯 살아왔던 지난날’(「여름의 안부」)을 떠올리는 어느 고독한 자의 옆모습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생의 뒤편으로 물러나 존재의 비애를 마주하고, 울음과 고독 속에 놓여본 이라면, 그런 이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는 이들이라면 그의 시가 가득 와 닿을 것이다.

 

 

 

가을이 내게 쓴 몇 줄의 편지

 

 

(중략)

늘 안에서만 아픈 이빨과

이빨 대신 아프지 못해 질근거리는 세월과

언제나 바깥을 떠돌기만 하던 나의

오래되어 힘 잃은 바람기야,

늙어서 미안하다며 울먹이는

문 밖의 저 계절을 보아라.

어디로 가라는 것인지 가르쳐주지도 않는다며

투덜거리며 지나가는 아픈 날들의

수고하고 무거운 나의 짐들아,

하늘 향해 열어놓은 저 창문 좀 보아라.

바람 불면 덜커덩거릴

여려서 자주 아픈 마음 좀 보아라. / 42p

 

 

 




 

 

 

 

  또 한편으론 이쪽 가지에서 저쪽 가지로 날아가는 새와 마찬가지로, 생의 이별 앞에서 나는 그저 ‘저 별에서 이 별로 여행하러 온’(「새의 이유」) 것이라 초연히 마음을 가다듬는 자의 뒷모습을 엿보게 되기도 한다. 시 「문지리 천사의 시」에서 진짜, 라는 말에 속지 말라 ‘너는 언제나 내게 부재의 존재’라 단언했던 것처럼, 내 안에 의미의 세계를 비워냄으로써 단단해지려는 시인의 여문 마음이 시집 곳곳에서 느껴진다.

 

 

 

뻐꾸기

 

 

나는 째깍거리고

너는 두근거리지.

나는 늙었고

너는 젊다는 말이야.

그냥 그것뿐이야.

벽에 걸린 저 시계가 우리를

똑같이 만들 거야. / 16p

 

 

 

  그러나 아무리 초연해지려 해도 기어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온 마음을 다해야만 간신히 가 닿을 수 있는 존재들을 향한 절박한 마음이란 것이 있기에, 그것을 헤아리는 시들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너를 향해 다가가는 나의 보행은/ 직립이 아니라 반半직립이다./ 허리 숙여 바닥에 닿는/ 키 작은 꽃잎처럼/ 낮춰야 흐를 수 있는 시냇물이다./ 네게로 가지 뻗는 나의 나무는/ 뿌리째 무릎 꿇는 투항이다.” 시 「투항」은 미처 온전한 마음으로도 다 전할 수 없어 뿌리째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애타는 마음들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렇게 시는 우리에게 물어온다. 기꺼이, 너는, 누군가에게 네 온 마음을 바쳐본 적이 있느냐고.

 

 

 

일생

 

 

한 평생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겨울 아침

들판에 눈보라 휘몰아치는 소리

바람이 매달려 있는 풍경을 때리고 가는 소리

낙엽이 서로 살 비비는 소리

추락하는 고드름이 쨍그랑거리며

햇살과 부딪히는 소리

누가 혹시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리라.

아무것도 없으면서 가득한 항아리를

아직 비우지 못했다고. / 150p

 

 

 




 

 

 

 

찌르고 또 찔리며 연명하는

삶이라는 형벌은 누가 쓰는 무기인가

 

 

  발문에서 윤일현 시인은 이렇게 쓴다. “세상을 살아보면 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걸어가고 있을 때 가장 먼저 초롱불을 들고 마중 나와 주고, 두렵고 먼 미지의 곳으로 떠날 때, 괜찮다고, 잘될 것이라고 말해주며 가장 멀리까지 배웅해 주는 사람이 소중한 사람이다.” 김재진 시인은 상실과 비애, 생의 파고를 넘어 절망과 죽음을 통과한 언어들을 품고 있으면서도, ‘세상의 약한 것들과 연결’된 마음과 ‘우리를 품어 안는 더 큰 우리’(「연결」)를 감각케 한다는 점에서 삶이란 마냥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위안을 준다. “나는 다시 돌아올 거야./ 뭔가를 그린다는 것은 어딘가로 돌아간다는 말이지./ 별이 어디에서 빛나건/ 그것이 카페 테라스에서 빛나건/ 고갱의 머리 꼭대기에서 빛나건/ 빛나고 있는 한 돌아올 거야.”(「고흐의 별」) 아무리 돌고 돌아 헤매어도 별이 빛나고 있는 한 나는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잃지 않기를. 바로 그래야만 내 안에 드리워진 오랜 비애의 그림자와 작별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김재진 시인의 시를 읽으며 나에게 깊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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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를 위한 변론
송시우 지음 / 래빗홀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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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잃은 이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는 것, 그 안에서 발견되는 미스터리의 힘!

적절한 위트와 진지한 물음 모두를 아우르는 확신의 페이지터너!

 

 

 

  통상적으로 미스터리 소설은 ‘살인사건’, ‘살인동기와 알리바이’, ‘헛갈리는 용의자들’, ‘뜻밖의 반전’ 등의 지배를 받는 장르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한계 속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플롯과 다양한 변주를 향한 시도는 늘 독자들을 즐겁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송시우의 미스터리 소설집 『선녀를 위한 변론』은 익숙한 전래동화를 법정 미스터리로 재탄생시킴으로써 발상을 전환시킨 데에 대한 탁월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목소리를 잃은 인어와 날개옷을 빼앗긴 선녀가 현대적 사법 체계 속에서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목소리’를 획득할 수 있다면, 과연 이야기는 어떻게 바뀔 것인가?” 중요한 것은 단순한 패러디가 아니라, 대상화되고 무력했던 인물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미스터리 본연의 힘까지 야심차게 밀고 간다는 점에서 송시우의 작품들은 매우 특별하다.

 

 

 

법정과 일상, 범죄를 부추기는 커뮤니티를 배경으로 한 사회파 미스터리까지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인어의 소송」과 「선녀를 위한 변론」은 왕자와 나무꾼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유사 설정을 통해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인어공주인 에일은 주변 인물들 중 왕자를 죽일 가장 절박한 동기를 가진 인물이었기에 유력한 살인범으로 체포된다. 왕자를 구한 것으로 알려진 카스 공주와 왕자가 결혼하게 되면, 마녀의 마법에 의해 에일은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일은 자신에게 쏠린 혐의를 전면 부인하며 마녀를 상대로 ‘불공정 계약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한다.

 

 

 

  판사는 “인간이 되는 조건으로 마녀가 에일의 신체를 훼손한 정도가 너무 가혹하여 사회질서에 반하고, 맥스 왕자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면 무슨 희생을 감수해도 괜찮다는 식의 분별없는 생각에 빠진 어린 인어의 궁박과 경솔, 무경험을 이용하여 현저하게 불공정한 계약을 맺었다”며 이 계약을 무효라 선고하고, 덕분에 에일은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는다. 이렇게 목소리를 되찾은 에일은 왕자와 본인, 카스 공주 사이에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낱낱이 밝히고, 이로 인해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전면 뒤집어지며 살인 사건을 둘러싼 여러 인물들의 입장이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한다. 과연 에일은 자신의 혐의를 벗을 수 있을까?

 

 

 

  한편, 고리아 왕국이라 불리는 동아시아의 작은 반도에서도 사법 체계에 격변이 일어난다. 이때 사법 시스템과 과학수사의 첫 시험대에 오른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나무꾼 살인 사건’이다. 피해자 이쇠돌은 식구들과 점심을 먹고 오후 2시경부터 뒷마당에서 장작을 패고 있었는데, 오후 4시경 산보하러 방 밖으로 나온 이쇠돌의 친모에 의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평소 남편에 대한 불만이 누적돼 있던 선녀가 남편을 살해했다고 발표했고, 이에 심순애 변호사가 나서 선녀에 대한 유죄 판결을 규탄하고 선녀의 무죄를 주장하는 변론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앞서 「인어의 소송」에서 인어 에일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돌려주었듯 「선녀를 위한 변론」 역시, 인간 세계에 아무런 인맥도 자원도 없었던 선녀가 이쇠돌이 강요하는 삶 이외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상태로 이쇠돌의 아내로 살며 홀어머니를 부양하고 자식들을 낳았던 처지를 변론하며, 그간 동화 속에서 묵인되었던 선녀에게 새로운 목소리를 부여한다. 그런 가운데 선녀에게 쏠린 혐의를 하나씩 무너뜨리며 명쾌한 논리로 허술한 사법 체계를 파고드는 심순애 변호사의 활약 또한 흥미를 더한다.

 

 

 




 

 

 

 

“가지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눈앞에서 없어지길 원했던 거군요.” / 110p

 

 

 

  이 외에도 「누구의 편도 아닌 타미」, 「모서리의 메리」, 「알렉산드리아의 겨울」로 이어지는 작품들은 혼자 사는 여성이나 소외된 자들을 노린 범죄, 비상식적인 범죄를 부추기는 커뮤니티의 양산,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감수성 결여가 낳은 사회적 문제 등에 공감하며 현실 감각과 미스터리를 유연하게 아우른다. 특히, 특정한 세계관이 설정되고 각자 자기를 대변하는 아바타라 할 수 있는 ‘자기 캐릭터’들이 참여하여 하루에도 수천수만 건의 잔혹한 살인과 고문, 사체 유기, 학대, 능욕이 벌어지고 있는 커뮤니티의 실상을 드러낸 작품 「알렉산드리아의 겨울」은 우리 사회에 진지한 물음을 던진다.

 

 

 

“흥! 쎄 보이니까요.”

김윤주가 말했다.

“쎄 보여? 그런 게?”

“관종이니까.”

김윤주가 뻐기는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존나 금지된 게 나에겐 아니라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던 거지. 개쩔잖아. 보통 사람들은 듣기만 해도 지랄, 펄쩍 놀라면서 하지 말라고 하는 걸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이거지.” / 「알렉산드리아의 겨울」 중에서 215p

 

 

김윤주는 촉법소년 연령을 잘못 알고 있었다.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형사처벌을 할 수 없고 보호처분에만 처할 수 있는 촉법소년의 범위는 만 14세까지인데, 김윤주는 미성년자가 곧 촉법소년인 줄로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상상을 현실로 옮길 수 있었다.

죽여도 처벌받지 않을 테니까! / 「알렉산드리아의 겨울」 중에서 221p

 

 

“그거 알아요, 형사님? 아무리 해도 행복해지지 않으면. 정말 별짓을 다 해도 행복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글쎄.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면 돼요.”

음산한 목소리였다.

“그럼 내가 좀 행복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잖아요.” / 「알렉산드리아의 겨울」 중에서 237p

 

 

 



 

 

 

 

  아마도 미스터리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인물들의 오고가는 대화 속에서 쉽게 진범이나 사건의 정황을 포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점이 얼마간 아쉬울 수 있겠으나, 하드코어나 잔혹한 설정으로 일관된 미스터리와는 또 다른 담백한 맛의 미스터리를 즐기고 싶은 분들이라면 충분히 매력을 느끼실 수 있을 듯하다. 송지우 작가의 차기작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려야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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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터스 택시에는 특별한 손님이 탑니다 ㅣ 여기는 커스터드, 특별한 도시락을 팝니다
가토 겐 지음, 양지윤 옮김 / 필름(Feelm)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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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한 거랍니다!

따뜻한 언어와 신비한 이야기로 마음을 울리는 힐링 판타지!

 

 

 

  여기, 아주 특별한 택시가 있다. 택시 기사인 기무라는 유령을 볼 줄 아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종종 유령이 그의 택시를 멈춰 세우기도 한다. 택시는 이들의 안타깝고, 슬프고, 쓸쓸하며, 때로는 유머러스하다 못해 기상천외한 사연을 싣고 오늘도 달린다. 이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왜 이들은 택시에 오르는 걸까? 그 사연이 궁금하다면 유령을 태우는 택시에 올라타 보자.

 

 

 

오늘도 저희 로터스 교통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운전기사 기무라입니다.

목적지까지 짧은 시간이나마 아무쪼록 편히 모시겠습니다. / 9p

 

 

 

미스터리와 감동의 판타지로 당신을 모시겠습니다

 

 

  김재진 시인은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란 ‘기쁨과 아픔이 절반씩 몸을 섞는 일’이라 했다. 다만, 『로터스 택시에는 특별한 손님이 탑니다』 속의 ‘특별한 손님’들은 생의 끈을 쉽게 놓을 수 없을 만큼 절반의 아픔이 사무치도록 깊었던 탓에 아직도 돌아갈 곳을, 가야만 하는 곳을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유령을 보는 눈을 가진 기무라는, 비록 어수룩하고 소심한 구석은 있지만 특유의 선한 마음으로 자신의 특별한 손님들의 내밀한 사연에 마음을 기울인다.

 

 

 



 

 

 

 

  자신의 주인을 죽인 음주운전 뺑소니범에게 복수하기 위해 사람의 모습으로 분해야 했던 고양이 손님, 자식을 잃은 고통으로 괴로워했던 부모의 마음을 달래주고픈 어린이 손님, 원망과 미움만이 가득하다 못해 유령이 되어서도 서로를 끊어내지 못하고 있는 부부 손님 등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로터스 택시를 타고, 기무라에게 자신의 애끓는 회한과 미련, 비통함, 죄책감에 얽힌 사연들을 토로하면서 어느 새 응어리진 마음들을 위로받는다. 갑작스럽게 닥친 불행으로부터 마음을 회복하고, 사무치는 원한의 감정들을 해소할 수 있는 건 역시 내 곁에 함께 했던 사람들과 그들과 나누었던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언제 불의의 사고로 죽어버릴지 몰라요. 해야 할 일은 당장 시작해야 해요.” / 38p

 

 

“그걸로 충분해. 슬픈 일이나 괴로운 일은 머지않아 희미해지기 마련이니까. 하루하루 기억을 쌓으면서 과거를 덮어나가는 거야. 산다는 건 그런 거니까.”

하지만 잊진 못할 거야.

“살아있는 사람한테는 잊어버리는 편이 좋을지도 몰라. 아프고 괴롭기만 한 기억을 품고 살아가는 건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일일 뿐이니까. 추억은 옅어지다가 결국 너그러워지지. 그렇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어.” / 140p

 

 

미움받는 남자는 끝까지 이해하지 못해. 어제랑 똑같은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식이지. 그 ‘어제’까지가 문제인 거야. 해답은 전부 ‘어제’까지의 행동에 담겨 있었어. ‘어제’까지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오늘이라면, 그걸로 끝인 거야. / 198p

 

 

 



 

 

 

 

  기묘한 힐링 판타지 『로터스 택시에는 특별한 손님이 탑니다』는 죽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현재,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진정으로 타인을 이해하는 노력의 중요성을 전하는 따뜻한 소설이다. 전작 『여기는 커스터드, 특별한 도시락을 팝니다』를 읽어보진 못했지만, 작가 가토 겐은 어긋나있던 마음을 회복하는 이야기를 보드라운 언어와 다정한 정서로 전달하는 힘이 남다른 듯하다. 잔잔하게 가슴을 울리는 한 편의 동화 같은 소설을 만나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드린다.

 

 

 

당신이 무사히 돌아와 웃어주는 것.

제게는 그게 가장 큰 선물이에요.

 

오늘도 저희 로터스 교통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 290p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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