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1 - 개정판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토록 강렬한 흡인력을 가진 작품이라니!

역사 속에서 그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했던 개개인의 삶을하나하나의 목소리를 매우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구현해낸 소설!

 

 

 

 

  때는 막 20세기로 접어든 일제강점기대한민국의 항구도시 부산의 끄트머리에 영도라 불리는 작은 섬 하나가 있었다이야기는 딸 넷인 집안의 막내딸인 양진이 한쪽 발이 뒤틀리고 윗입술이 세로로 갈라진 채로 태어난 훈에게로 시집을 가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남녀 가릴 것 없이 다 굶주리고 있는 마당이니 처녀들이 식량을 구걸하는 것보다는 아무하고나 혼인을 하는 것이 나은 시절이었다장애를 지니고 태어났을지언정 다행히도 훈은 온화하고 사려 깊은 남자였고양진 역시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왔으나 집안 살림과 하숙집을 착실하게 꾸려나갔다비록 아버지인 훈은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견실하고 단단한 어머니 아래서 자라난 선자는 제 몫이 무엇인지 아는 아이였다세상은 점점 팍팍하고 흉흉해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지금처럼 서로 의지하고 성실하다면 어떻게 해서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선자의 임신은 이제껏 바라본 적이 없었던경험한 적이 없었던 세상 밖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아무리 고개를 넘고 내를 건너도

조선 땅이고 조선 사람밖에 없는 줄 알았다. - 박완서

 

 

 

  선자가 한수를 만난 건 시장에 장을 보러 갔다가 마주친 일본인 학생들로 인해 곤욕을 치르고 있을 때였다비누 향과 머릿기름의 노루발품 냄새가 나는깔끔한 양복차림에 잘생긴 데다 일본을 오가며 생선 중개상을 하는 부유한 남자에게 선자가 마음을 빼앗긴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아버지인 훈은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쳤지만선자의 눈에 한수는 늘 바닷가에 나가 있느라 비린내가 빠지지 않는 하숙집 남자들과 달리 별세계에 존재하는 이처럼 보였을 것이다이미 한수는 일본인 학생들로부터 선자를 구해주기 전부터 그녀를 쭉 지켜보고 있었기에때로는 오빠처럼 때로는 연인처럼 다정하게 그녀의 마음을 살폈고 이내 미래를 약속하기도 했다그렇게 선자는 한수를 만나 처음으로 조선 밖의 넓은 세상으로 나서는 상상을 했다하지만 한수의 아이를 가진 뒤에야 선자는 그가 오사카에 아내와 아이를 둔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상심에 빠진 선자는 다신 그를 만나지 않겠노라 밀쳐냈다.

 

 

 

그럼바쁘고말고선자야아낙네 삶이라는 게 끝없이 일하고 고생하는 기다고생 끝에 더 큰 고생이 온다꼬각오하고 있는 게 낫다이제 니도 여자가 된다 아이가그러니까 이 말을 해야겠다여인네가 잘 살고 못 살고는 혼례 올리는 사내한테 달려 있다좋은 사내 만나면 괜찮게 살고 나쁜 사내 만나면 욕보고 살고 그라는 기라어쨌거나 고생을 각오하고 그냥 열심히 일하면 된데이세상천지에 딱한 여인네를 돌봐줄 사람은 없다믿을 거는 자신뿐인 기라.” / 52p

 

 

총독부 말이야일본 군인들을 위해 중국에 데려가려고 한다고아무도 따라가지 마여자든 남자든 가릴 거 없이조선인일 거야중국이나 일본에 좋은 일자리가 있다고 말할 거고네가 아는 사람일지도 몰라조심해저런 멍청한 남자애들을 말하는 게 아니야쟤들은 그냥 불량배들이고그래도 조심하지 않으면 저런 애들이 너를 해칠 수 있어알아듣겠어?” / 60p

 

 

 



 

 

 

 

  때마침 병을 얻어 선자네 하숙집에 손님으로 오랫동안 묵고 있었던 목사 백이삭은 병이 다 나은 듯하자 선자에게 청혼을 하기로 결심했다평생 손가락질을 당할 난잡한 계집으로아이는 성도 없는 사생아가 되어 놀림 받을 것을 걱정했던 선자는 이삭의 선한 마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비록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한수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지만선자는 이삭을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생각이었다열심히 이삭을 보살피기로 마음먹고 그를 따라 오사카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했다하지만 운명은 선자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일본은 전쟁 중이었고그 속에서 조선인이자 여성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늘 가혹한 현실에 내몰려야만 했다훗날 사람들은 조선을 버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하여 자이니치(재일동포)’를 조국을 버린 이라 욕하기도 했지만선자와 그녀의 가족사를 따라가다 보면 차별과 멸시혐오와 배재로 단 한순간도 온전하게 살기 어려웠을 그들의 고단한 삶이 눈에 밟힌다.

 

 

 

일본어를 아무리 유창하게 구사해도 억양은 어쩔 수 없어서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겉모습으로만 본다면야 어느 일본인에게 다가가도 공손한 미소가 돌아오겠지만말문을 여는 순간 환영받지 못했다결국 요셉은 조선인이었고아무리 호감이 가는 성격이라도 그는 소위 교활하고 약삭빠른 족속의 일원이었다편견이 없고 생각이 바른 일본인들도 많았지만그들도 외국인을 경계하는 경향이 있었다. ‘똑똑한 인간들특히 그런 인간들을 조심해야 해조선인은 타고난 말썽꾼이야.’ 요셉은 일본에서 10년 넘게 살면서 그런 말을 숱하게 들었다. / 155p

 

 

우리 자리에 냄새 풍기지 마라.”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 여자가 말했다. “다른 데로 가.” 여자가 생선을 파는 구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선자가 마른멸치와 미역을 파는 여자들에게 다가가자 나이 많은 조선 여자들은 이전 여자들보다 더 탐탁지 않아 했다. “그 꼴불견 수레를 안 옮기면 우리 아들들한테 니 항아리에다가 오줌을 싸라고 할 거다알아들었어이 촌뜨기야?” 머리에 하얀 수건을 두른 키 큰 여자가 말했다. / 254p

 

 

김치맛있는 김치 있어예김치맛있는 김치 있어예오이시데스오이시 김치!”

이 소리가자신이 내는 소리가 익숙하게 느껴졌다자기 목소리라서가 아니라 어렸을 적에 장에 다니던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처음에는 아버지와 함께아가씨가 돼서는 혼자그다음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길을 간절히 바라는 여인으로 갔다그 시절 큰 소리로 물건을 팔던 여자들의 소리가 항상 선자의 주위에서 들렸고이제는 선자도 그 여자들처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 257p

 

 

 

  이처럼 소설 파친코』 는 일제강점기와 해방한국전쟁과 세계대전이라는 굵직한 근현대사 속에서 살아남아야했던 조선인들의 애환을 생생하게 담은 작품이다.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그래도 상관없다던 소설의 첫 문장처럼당시 조선인들의 현실은 그야말로 살아내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에 가까웠다일본 경찰들은 조선인들을 잡아다가 구타하고 굶기다 거의 죽기 직전에야 집으로 돌려보냈고여자아이들은 국수 한 그릇에 순결을 팔아야 했다일본인 학생들이 조선의 여인들을 함부로 겁탈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으며일본의 기업들은 험한 노동현장에 조선인들을 끌어다놓고 전쟁으로 폭격을 당하자 그 어떤 피해 보상이나 임금 지불조차 하지 않았다같은 조선인조차 가진 것을 지키기에 급급해서 자신들의 자리를 조금도 내어주지 않거나 훔치고 서로에게 욕을 했다.

 

 

 

  그런 가운데 누군가는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죽을힘을 다했고살아내는 것이 중요했기에 그 어떤 모욕에도 침묵했으며고향으로 돌아갈 날만을 꿈꾸며 꾸역꾸역 삶을 연명했다미래를 감히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희망은 마음 속 어딘가에서 늘 숨 쉬고 있었기에 살았고또 살아가려 했다이렇듯 소설은 역사 속에서 그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했던 개개인의 삶을하나하나의 목소리를 매우 입체적이고 사실적인 캐릭터들을 통해 생동감 있게 구현한다. 4대에 걸친 재일조선인들의 삶을 다룬 매우 방대한 스펙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굉장한 흡인력을 지닐 수 있었던 이유 역시 바로 여기에 있다.

 

 

 

요셉은 희망에 차 있는 듯했다오사카에서 살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다 나아지기 마련이었다가진 것이 돌멩이와 쓰디쓴 고난뿐이라도 얼마든지 맛있는 국을 끓여낼 수 있을 것이다일본인들이 그들에 대해 제멋대로 생각하겠지만살아남아서 성공하면 그런 것은 아무 상관 없었다경희는 이제 그들 넷이 여기에 있고 곧 다섯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함께 있으니 더 강해질 것이다. “맞지?” / 171p

 

 

조선인들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까결코 아닐 것이다그렇다면 각자 살 방도를 궁리해야 한다는 것이 조선인들이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었다가족을 지켜라자기 배를 채워라정신 바짝 차리고지도자들을 믿지 마라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이 나라를 되찾지 못한다면아이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출세하게 해라적응해라지극히 간단하지 않은가조선 독립을 위해 싸우는 애국자들이나 일본 편에 선 재수 없는 조선 놈들이 있는가 하면이곳에서나 또 다른 곳에서 그저 먹고살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수많은 동포가 있었다결국 배고픈 앞에 장사 없는 법이었다. / 276p

 

 

 




 

 

 

 

  “우리 같은 사람한테 고향은 없어.”

  1권의 말미에서 한수가 창호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냉정하지만 조선의 처한 현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나라를 위해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창호의 질문에 한수는 싱긋 웃는다진실은 자애로운 지도자 따위는 없다는 것그들이 조선을 신경 쓴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라는 것애국심은 그저 이념일 뿐이고 이념에 빠진 사람은 자신을 잃게 되는 것이라고이어서 한수는 너 같은 사람들이나 나 같은 사람이 백 명이 있어도 조선을 바로잡을 수 없다고 거침없이 말한다그저 살아남아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나 하라는 그의 말은 서글프지만 직시해야만 하는 그들의 현실이었을 테니까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태어난 조선의 아이들은 또 어떤 삶을 살아야했을까소설은 이제 선자의 아들인 노아와 모자수를 중심으로 새롭게 펼쳐질 이야기를 향해 나아간다. 2권에서는 어떠한 운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2022년 애플TV가 제작한 동명의 드라마가 공개되면서 진즉에 화제가 된 소설이지만이제야 나는 1권을 읽었다. ‘파친코라는 제목이 과연 이 소설과 어떠한 관련이 있을지역사는 선자와 그녀의 가족들을 어디로 데려다줄 것인지한수와 선자는 또 어떠한 운명을 맞이할 것인지 2권이 더 기대가 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을 전할 땐 스칸디나비아처럼 - 은유와 재치로 가득한 세상
카타리나 몽네메리 지음, 안현모 옮김 / 가디언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머로 가득한 스칸디나비아 언어와 따뜻한 일러스트가 만난 아주 특별한 책!

여행지에 데려가거나 선물하기 좋은 책으로 추천드립니다!

 

 

 

  유럽의 북단에 있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 3국을 비롯해 아이슬란드와 핀란드에 이르기까지대자연의 낭만이 살아 숨 쉬고 궁극의 복지로 유명한 곳이지만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상당히 낯선 곳이었다그나마 북유럽의 이미지가 친숙해지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이케아를 주축으로 하는 북유럽 디자인의 유행에서부터 비롯된 게 아닐까소박하고 여유로운 시간일상 속의 소소한 즐거움이나 안락한 환경에서 오는 행복을 뜻하는 덴마크어 휘게를 지향하는 라이프 스타일이 인기를 끈 것도 한 몫을 한 듯하다영화 <어벤져스>의 흥행신화와 함께 토르가 등장하는 북유럽 신화가 다수의 도서로 출간되고노르웨이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 <겨울왕국>의 흥행 역시 북유럽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토베 얀손의 캐릭터 무민이 등장하는 책을 읽고 난 뒤 북유럽만의 독특한 세계관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북유럽 신화와 스칸디나비아스코틀랜드 전설 속에 등장하는 상상 속 괴물 트롤이 하마를 닮은 귀여운 캐릭터 무민으로 탄생되었지만시종일관 어두컴컴한 숲속 골짜기를 배경으로 한 데다 독특한 북유럽식 유머를 곁들인 대화는 내겐 그리 익숙지 않은 것이었다덕분에 북유럽식 언어와 문화는 여느 문화권과는 확실히 차별화된 고유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독특하고 유별난 북유럽 문화의 분위기가 낯선 것은 나뿐 만이 아니었나보다스웨덴 남부에서 태어나 자란 마음을 전할 땐 스칸디나비아처럼의 저자 카타리나 몽네메리는 영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사람들이 스칸디나비아반도 인근 나라들이 지닌 특유의 분위기를 상당히 낯설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비록 누군가는 그들의 언어를 별난’ 것으로 표현하지만 저자는 그들만의 매혹적인 언어와 유머에 가까이 다가가다 보면혹독한 날씨와 자연 친화적인 생활에도 유쾌함을 잃지 않는 북유럽 사람의 진짜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말한다그도 그럴 것이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핀란드 4개국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관용구의 기원과 뜻올바른 사용법을 엮은 이 책을 읽다보면어느 새 스칸디나비아의 매혹적이고 넘치는 재치에 푹 빠지게 된다여기에 국제회의통역사 안현모의 번역과 코멘트가 더해진 유쾌한 해석은 책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때론 매력적이고때론 묘하고 이상한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의 진짜 속마음

 

 

  “그대는 나를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로 만들어 주었어요나의 맛있는 청어여.”

  로맨틱한 레스토랑에서 젊은 사내가 연인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워주며 이렇게 고백한다청어사람을 생선에 비유하다니그리 좋은 칭찬으로 생각되지 않는 데다 고백할 때 쓰는 표현이라는 점에서 어감이 썩 좋지 않다하지만 스칸디나비아에서는특히 덴마크에서는 청어를 대단히 고귀하게 여긴다고 한다다시 말해 열망하는 상대를 맛있는 청어라 칭하는 것은 당신이 선물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 가운데 하나라고하긴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멋진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는다면 청어인들 고등어인들 뭔들 어떻겠는가하하.

 

 

 



 

 

 

 

  만약 노르웨이 친구의 자동차를 빌렸다가 기름을 채워 넣지 않고 돌려준다면그 친구는 아마도 다음에 만날 때 이 같은 말을 할지도 모르겠다. “함께 털을 뽑을 암탉이 있어(I have a hen to pluck with you).” 말만 들었을 때는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맥락을 살펴보면 얼핏 이해가 간다그만큼 암탉의 털을 뽑는 일은 고역이라는 뜻이 아닐까이 표현은 마치 영국인들이 무언가 따질 일이 있을 때 함께 발라낼 뼈가 있다(“너에게 따질 일이 있어”)’라고 하는 것과 거의 똑같이 쓰인다고 하니문화는 달라도 이처럼 언어는 비슷한 구석이 많다는 게 참 신기하다.

 

 

 

황금과 푸른 숲을 약속해(Promise gold and green forests)

겸손한 스칸디나비아인들은 보다 현실적이고 달성 가능한 것들을 약속하죠그들은 달과 별을 대신해 호아금과 푸른 숲을 말합니다이 표현은 원래 남유럽의 황금산을 약속하다라는 말에서 유래해요그런데 덴마크는 산이 전무하다시피 하기 때문에(덴마크에서 가장 높은 지점은 대략 의자 위에 올라선 높이), 자신들의 평탄한 토지와 숲을 향한 사랑을 반영해 표현을 수정했지요. / 14p

 

 

골짜기에 무민이 없네(Not all the Moomins are in the valley)

토베 얀손의 이 사랑스러운 만화 캐릭터들은 핀란드 문화와 디자인의 필수 아이콘이랍니다그러니까 무민이 버젓이 사라졌다면 무언가 잘못됐다는 경고음이 울리겠죠무민을 활용한 이 표현은 그래서 만들어졌을 거예요멀쩡히 보고 듣고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얼빠진 사람에게 영어로 집에 불은 켜져 있는데 아무도 없다’(정신이 딴 데 팔려 있다)라고 하는 것과 동일한 맥락입니다. / 53p

 

 

 

  재능이 부족하거나 성과가 나쁘더라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격려하고 싶다면 까마귀도 제 목소리로 노래하니까(Even the crow sings with its own voice).”라는 말을 인용해보면 어떨까노랫소리가 아름다운 새는 아니지만꾸밈이나 장식이 없는 진실된 소리를 내는 까마귀처럼 최선을 다해 나다운 모습을 보여 주면 된다고 말하는 핀란드인들에게서 따뜻한 감성이 느껴진다그래꾀꼬리만 노래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구두 수선공이 떨어지고 있어(It’s raining cobbler boys)

덴마크에서는 비가 세차게 내리면 하늘에서 구두 수선공들이 떨어진다고 말합니다못과 망치 그리고 이왕이면 쇠모루까지 같이 들고 말이죠. / 73p

 

 

눈 흰자 값이다(It costs the whites of the eyes)

가격표가 없을 때는 신중하게 처신하세요십중팔구 해당 물건을 구매할 여력이 안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만약 직원에게 가격을 문의하는 실수를 저지른다면달갑지 않은 놀라움에 직면할 확률이 높습니다놀라서 두 눈이 휘둥그레 커질지도 몰라요그러니 막대한 돈이 드는 일을 두고 영어로는 팔다리 값이라고 하는 반면덴마크어로는 눈 흰자 값이라고 하는 거겠죠. / 113p

 

 

 




 

 

 

 

  유쾌하면서도 따뜻한 스칸디나비아인들의 글에 감성 일러스트가 만나니 이토록 아름다운 책이 탄생할 줄이야여행지에 데려가기에 좋은 책이자 선물하기 좋은 책으로 이 책을 추천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꽃비 내리는 날 다시 만나 - 시골 수의사가 마주한 숨들에 대한 기록
허은주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동물과 인간공존과 책임이라는 단어의 무게에 대하여!

시골 수의사가 전하는 작고 여린 온기를 지닌 생명들의 이야기!

 

 

 

  유년 시절우리 집에는 벤지라는 강아지가 살고 있었다엄밀히 말하자면 벤지라는 이름으로 두 마리의 강아지가 살았다첫 번째 벤지는 새하얀 몰티즈로워낙 어릴 적의 일이라 사실 크게 기억이 없는데 유일하게 단 하나의 장면이 아직까지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벤지는 어디에서 그토록 큰 힘을 지니고 있었던 걸까어린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차게 발버둥치는 바람에 산책 중 그만 목줄을 놓치고 말았다목줄이 내 손에서 팟하고 떨어져나가는 순간 나는 난생 처음으로 깊은 상실감을 마주했다또 반려동물에 대한 책임감과 내가 키우고 있는 동물이라고 해서 온전히 나의 소유물이 아님을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그날 부모님은 내게 말했다아마도 벤지가 자유롭고 싶었나보다 하고.

 

 

 

  그렇게 몇 년이 흐른 후초등학생이 된 나는 하교하는 길에 길거리에서 벤지를 꼭 닮은 새하얀 몰티즈를 마주했다문득 벤지를 잃어버렸다는 미안함과 이 강아지가 벤지였으면 하는 마음에 그 자리에서 꽤나 오랫동안 강아지를 쓰다듬어주었다이후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것을 안 다음에는 네 집으로 가.” 하고 손짓한 뒤 나는 집을 향해 뛰어갔다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강아지가 나를 계속 따라왔다. “어머여기 벤지랑 닮은 강아지가 집 앞에 있는데?” 내가 집으로 들어가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엄마 친구분이 집에 놀러와 있다가 아직도 떠나지 않고 대문 앞에 앉아 있던 강아지를 발견했다나를 따라왔던 그 강아지였다혹시나 강아지를 잃어버렸다는 사람이 나타나거나 전단지가 붙어 있을까 싶어서 기다려봤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인연은 이런 방식으로도 시작되는 것인가 보다 하며 신기해하면서도타인의 반려동물을 내가 빼앗은 것 같은 죄책감도 함께 느끼며우리 집에서 살게 된 벤지는 그로부터 1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했다.

 

 

 

  시간이 흘러 두 아이를 낳은 엄마가 되고 난 뒤종종 반려동물을 키우고 싶다는 아들의 바람을 듣곤 한다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로 오는 반려동물은 외면할 생각이 없지만 부러 펫숍에서 판매하는 애완견을 구매하여 반려동물을 키우고 싶은 마음은 없다아이들에게도 씻기고먹이고병원에 데려가고살뜰하게 키울 자신이 없다면 소중한 생명을 그저 귀여워서갖고 싶은 마음에 키우는 건 현명하지 못한 일이라고 딱 잘라 말해주었다두 번째 벤지가 우리 집에 들어와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사실 나는 귀여워할 줄만 알았지 씻겨주거나 병원에 데려가는 등 살뜰하게 돌봐주는 데는 이렇다 할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첫 번째 벤지를 잃어버린 트라우마 때문에 두 번째 벤지를 데리고 대문 밖을 나서볼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는데내내 갇혀 살았을 벤지를 생각하면 이것도 참 미안한 일이었다.

 

 

 

  동물과 함께 산다는 것은 우리가 이 동물의 삶과 죽음그 내면의 고통까지 이해할 수 있는 태도가 동반되었을 때 비로소 서로를 위한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다그런 자세를 여러 번 재고해보지 않고 그저 갖고 싶다는 소유의 감정으로만 다가가면 건강한 관계를 이루기 어렵다꽃비 내리는 날 다시 만나의 저자 허은주는 이렇게 말한다. ‘동물이 상품으로 유통된다는 것은 환불교환반품의 대상이 된다는 걸 의미한다반려동물이라는 말을 누구나 사용하는 지금이지만 동물들은 여전히 상품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반려라는 이름을 붙인 가족 구성원으로 불리고 있는 한편에서는 폐기처분이 가능한 상품으로 유통된다그 사이의 간격 차이가 너무 커서 자주 현기증이 난다.’ ‘반려라는 그럴 듯한 이름 안에서 상품의 가치로 매겨지는 동물들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대의 증거들인간의 편리에 자리를 내어주느라 자신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는 무수한 생명들… 인간과 동물이 진정으로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은 더 이상 오지 않는 것일까이 책을 읽으며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공존과 책임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실감했다.

 

 

 

사람인 나는 이 세계에서 아주 작은 존재였다

 

 

  『꽃비 내리는 날 다시 만나는 시골 수의사가 병원 안팎에서 마주한 생명들에 관한 기록이자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사유한 에세이다. 30대 초반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일하며 힘에 부쳤던 저자는 동물은 사람과 달리 진료할 때 말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수의사로 전향했지만 또 다른 책임과 죄책감을 맞닥뜨려야만 했던 고민을 털어놓는다아픈 길고양이를 선의로 데려왔지만 부담스러운 진료비 앞에서 책임은 질 수 없었던 사람어린이날에 어린 아들에게 두 달 된 강아지를 선물했지만 소음 갈등으로 시골 할머니네로 보내야 했던 엄마동물을 입양한 지 얼마 안 된 보호자에게 강아지의 배꼽탈장에 대해 말했다가 펫숍 주인으로부터 언성을 들어야 했던 일화 등 수의사로 있으면서 겪게 되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곳곳에 담겨 있다.

 

 

 

비용 문제였다길고양이를 데려오는 보호자들과 항상 맞닥뜨리는 문제다.

수술할 수 있을 때까지 고양이가 버텨줄지도 의문입니다지금은 체온도 낮고 숨도 잘 못 쉬고 있어요수술할 만한 상태로 회복될 수 있게 돌봐야 해요검사와 입원비는 저와 상의를 해보시고요우선 애는 살려야죠.”

상의요길고양이한테는 돈 한 푼도 못 씁니다.” / 32p

 

 

슬픔은 자연스럽게 느꼈지만 안도감과 미안한 감정은 스스로 납득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순간 며칠 전 냥이 엄마가 병원에 찾아왔을 때가 떠올랐다냥이가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자꾸 말라간다고아직 살아 있는 게 맞냐고 울면서 물어보던 날조마조마했던 마음이 기억났다보호자가 고양이를 안락사해달라고 요구할까봐 불안했다그랬다나의 안도감은 이제 안락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서 왔다그리고 냥이의 부고에 안도감을 느낀 내가 미웠다그것이 안도감과 죄책감의 정체였다. / 49p

 

 

자녀가 동물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반려견의 입양을 좀 유보했다면입양 전에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것에 대해 가족들과 진지하게 상의했다면 어땠을까? 2개월에 입양된 포메라니안도 누군가의 전폭적인 애정과 돌봄이 필요한 아기인데어린아이 둘과 함께 돌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는 게 아쉬웠다어린 나이에 입양된 똘이가 그 집에서 많이 외롭지 않았을까내가 보아왔던 포메라니안들은 호기심이 많고 학습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준비된 가족들 곁에서는 잘 훈련되어 행복하게 지내는 아이들이 많았다섣부른 입양이 안타까웠다. / 87p

 

 

 



 

 

 

 

  그 중에서도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 동물들이 원치 않은 병을 얻게 된 사연은 마음을 씁쓸하게 한다귀가 시뻘겋게 퉁퉁 부어서 피고름이 귓바퀴를 타고 턱까지 흘러내리던 불도그는 얼마 전 단이 수술을 했다고 한다개의 단이 수술은 사람이 원하는 모습대로 귀 모양을 바꾸기 위해 하는 미용 목적이 대부분이라고저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도베르만의 쫑긋 서 있는 귀도 귓바퀴를 잘라 붙이는 단이 수술을 한 결과라고 말한다고작더 용맹스럽게 보이기 위해서.

 

 

 

  자연 선택만으로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고양이 스코티시폴드 종은 인간들이 평생 유전병으로 고통 받는 고양이를 만들어낸 결과다아주 오래전연골 형성에 유전적인 문제가 있어 귓바퀴가 접힌 돌연변이 고양이가 태어났는데 그 귀 모양이 귀엽고 희소해서 상품성이 있다고 생각한 누군가가 반복적으로 귀 접힌 고양이들끼리 교배시킨 것이다문제는 귀를 접히게 했던 돌연변이 유전자가 모든 관절에 적용되어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고 그 결과 평생 유전병으로 고통 받을 수밖에 없는 고양이를 탄생시켰다단지 보기에 아름답다는 이유로 이들은 평생을 진통제와 보조제의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더 큰 문제는 이를 알게 된 보호자가 다시 펫숍에 고양이를 반품시키면 이들은 또다시 새로운 보호자를 기다려야 한다악순환은 그렇게 계속된다인간의 이기심과 오만 때문에.

 

 

 

후투티는 인간이 아닌 자연에 속한 생명체였다인간이 만든 건물 속에서 살지 않고 하늘에서 바람을 가르며 살아간다나무 사이를 날아다니고 덤불 사이에서 긴 부리로 땅을 파서 먹이를 찾는다나무 구멍 안에 알을 낳고 뜨거운 여름 천적의 위험을 피해 새끼를 키워낸다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계절이 바뀌면 따뜻한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긴 비행을 할 것이다후투티를 내 자취방 안에서 길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오만이었다. / 105p

 

 

어린 동물들은 면역력이 약해 이후에도 질병에 쉽게 걸린다어린 시절 보살핌을 충분히 받지 못했기에 이후에 입양되어서도 행동학적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이런 모든 문제는 펫숍에서 동물을 구입한 사람이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몫이 된다약한 면역력으로 질병에 쉽게 걸리기 때문에 의료비 부담이 커진다또한 쉽게 샀기 때문에 동물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쉽게 유기하게 되는 악순환으로 반복된다평생을 함께할 반려동물을 만나고 싶다면 펫숍이 아닌 가까운 유기동물구조센터에서 인연을 만드는 것을 권하는 이유이다우리가 반려동물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함께 사는 동물을 세상에 하나뿐인 특별한 존재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니까. / 119p

 

 

 

  이 책을 읽으며 동물이 자해할 수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사랑이라는 이름의 앵무새는 파우더 깃을 부리로 만지다가 피부에 작은 상처를 내고한 번 생긴 상처를 부리로 계속 자극하여 상처를 크고 깊게 만들어 악화시켰다사랑이는 한 번 부리로 상처를 내면 스스로 멈추지 못했다피부가 움푹 파이고 피가 흘러내릴 때까지 정신없이 자기 몸을 다치게 했다저자는 여러 차례의 전신마취와 날개 절단 수술입원장 생활이 어린 앵무새의 마음속에 병을 키웠던 것으로 짐작한다너른 하늘을 날아다니도록 태어난 새가 고통스러운 상황에 던져졌을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이었나 보다인간이 그러한 것처럼동물도 정신적인 고통이 심하면 자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진정으로 인간과 동물이 건강한 관계를 이루려면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자세가 동반되어야만 가능해지는 게 아닐까.

 

 

 



 

 

 

 

  국내에서는 연간 800만 마리의 새들이 투명 벽에 부딪혀 죽어간다고 한다지난 50년간 북미에 서식하는 새의 30퍼센트가 사라졌다는 연구도 있다매년 같은 장소에서 보이던 새들의 개체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저자는 이렇게 경고한다새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우리를 실존에 가깝게 하는 다른 세상이 조금씩 없어지는 거라고그건 내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는 것과 다름없다고동물들이우리를 둘러싼 모든 생명들이 사라지면 결국 사람도 사라진다부디 인간이라는 이유로 다른 생명을 소홀히 대하거나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기를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보다 많은 이들에게 이 귀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설득 윌북 클래식 첫사랑 컬렉션
제인 오스틴 지음, 송은주 옮김 / 윌북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의 남성과 여성세태를 향한 깊어진 시선!

세상을 읽어내고 편견 없이 대상을 직시할 수 있는 힘을 길러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사랑듣기만 하여도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여린 꽃 같은 이름세상의 수많은 단어들 중 이토록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게 또 있을까첫사랑에 대한 기억의 색채감은 저마다 다르지만내가 알고 있는 가장 맑고 밝은 색으로 채색하고 싶은 마음과 인생에서 가장 짜릿하고 설렜던 기억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은 모두 같을 것이다그래서일까설득순수의 시대위대한 개츠비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다른 네 작품이 첫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한 데 엮여 근사한 컬렉션으로 완성된 구성을 보는 순간마음이 두근거렸다. ‘첫사랑 컬렉션’ 속에 담겨 있는 첫사랑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인생에 단 한 번가장 첫 번째로 기억되는 사랑이 한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란 과연 어느 정도일까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우리는 각자로부터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준남작 신분의 월터 엘리엇 경에게는 세 명의 딸이 있다아버지의 잘생긴 외모는 물론 높은 허영심까지 쏙 빼닮은 첫째 엘리자베스차분하고 다정한 성품을 지녔지만 가족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인 둘째 앤돈 많은 시골 가문으로 시집을 간 메리까지여기서 주인공은 바로 둘째 앤이다그녀는 8년 전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재산도 지위도 없는 해군 장교 엔트워스와 사랑에 빠졌다하지만 이 약혼은 지각없고부적절하며잘될 가망은 물론 그럴 가치조차 없는 일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설득당해 파혼하고 말았다시간이 흘러 어느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가세가 기울어져 가고 있는 집안을 돌보며 쓸쓸히 생활하던 그녀는 웬트워스가 전장에서 공을 세우고 큰 재산을 모아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앤은 여전히 그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시선이 머무를 만큼 신경이 쓰였지만웬트워스는 과거에 받은 상처로부터 여전히 회복되지 못한 듯 앤이 아니면 누구라도 좋다는 가시 돋친 말까지 하며 그녀와 거리를 둔다.

 

 

 

그는 앤 앨리엇을 아직 용서하지 못했다앤은 그에게 잘못을 저질렀다그를 버렸고 실망시켰다그 과정에서 앤은 나약한 면을 보여주었고그의 단호하고 자존심 센 기질로는 이를 견뎌낼 수 없었다앤은 다른 사람들의 뜻에 따라 그를 포기했다설득에 쉽게 넘어간 탓이었다나약함과 비겁함의 결과였다. / 91p

 

 

이 모든 것들로 자신에 대한 그의 마음이 명백해졌고앤은 이에 크게 감동했다이 사소한 사건이 이전에 지나간 모든 일을 완결지어주는 듯했다앤은 그를 이해했다그는 앤을 용서할 수 없었다그러나 무심할 수도 없었다과거 일로 그를 원망하고 부당한 분노를 품으면서도그에게 전혀 관심 없는 척 굴면서도또 다른 이에게 마음을 붙여가고 있으면서도여전히 그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누르지 못했다예전의 감정이 아직 다 사라지지는 않은 것이다. / 136p

 

 

 

  한편시집을 갔지만 여전히 누군가가 자신을 돌봐주기를 바라는 철없는 동생 메리를 위해 동생네에서 한동안 머물게 된 앤은 오랫동안 자신을 무시해왔던 아버지와 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되자 새로운 정신적 변화에 눈을 뜨게 된다시끌벅적하지만 곁을 다정하게 내어주는 사람들가진 것을 모두 잃었지만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지 않고 작은 일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친구와의 만남불의의 사고 앞에서 차분하게 일을 순리대로 진행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주변 사람들을 다독였던 일련의 경험들이 그녀를 성장하게 한다이러한 변화는 그녀에게 벽을 세워두고 있었던 웬트워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앤에게 호감을 품은 사촌 엘리엇 씨의 등장으로 이들의 관계 역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그녀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구분을 하셨어야지요이제 저를 의심하지 마세요사정이 완전히 달라졌어요저도 나이를 먹었고요예전에 설득에 넘어간 것이 저의 실수였다 해도그분의 설득은 위험이 아니라 안전을 위한 것이었음을 기억해주세요제가 설득에 넘어갔을 때는 그것이 응당 따라야 할 의무라고 생각했지만지금은 어떤 의무도 저에게 도움이 될 수 없어요오히려 저에게 무심한 남자와 결혼한다면 온갖 위험이 초래될 것이고결국 모든 의무에도 어긋나는 일이 될 거예요.” / 367p

 

 

 




 

 

 

 

  이처럼 설득은 타인에 의해 사랑을 포기한 여성이 자신의 진솔한 감정에 눈을 뜨고 성숙해져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전작 오만과 편견이 그러했듯이 작품 역시 로맨스 소설’ 과 가정 소설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1800년대 영국 사회를 배경으로 세태 소설의 특징을 뚜렷하게 드러낸다로맨스 소설의 측면에서 보자면준남작의 딸이라는 허울 좋은 배경을 갖고 있지만 최근 가세가 기울어진 집안을 돌보며 27살이 되어버린 주인공 앤과 과거에는 보잘 것 없었지만 부와 명예를 갖춘 훌륭한 신랑감이 되어 돌아온 첫사랑 웬트워스가 재회하면서 빚어지는 미묘한 감정이 눈에 띤다이를 테면 의식하고 싶지 않아도 서로의 시선과 목소리에 저절로 반응하고야 마는 본능 같은 것이 거리를 걷다보면 행여 마주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같은 것무심하게 내뱉은 듯한 저 한 마디에서 나와 관련된 어떤 감정의 실마리를 길어 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 같은 것에서 우리는 사랑이 발화하는 순간에 마주할 수 있는 애틋한 장면들을 엿볼 수 있다여기에 엘리엇 가의 상속자인 사촌 엘리엇 씨까지 가세하였으니삼각관계라는 꽤나 흥미진진한 스토리도 기대해볼 수 있다.

 

 

 

  반면 세태 소설의 측면에서 바라보자면, 1800년대 영국 사회를 배경으로 남성과 여성을 둘러싼 오래된 관념을 비롯해 사랑과 결혼을 둘러싼 당대의 현실이 매우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는 점이 큰 특징이다남녀 주인공의 로맨스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상당히 정밀하다아름다운 외모와 지위 그리고 출신이 한 개인의 절대적 평가 기준이자 그 어떤 부조리함도 납득시킬 수 있는 현실변덕스러운 성격에 자신과 가족 전체의 신분 상승을 결혼을 통해서 실현하려는 여성들딸들은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권리가 없는 비정상적인 사회 구조 등을 때로는 위트 있게때로는 진중한 목소리로 드러내고 있다덕분에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 가지 합리적인 의심을 지울 수 없다만약 웬트워스가 출세해서 돌아오지 않았더라면과연 월터 엘리엇 경이 과거의 반대를 무릅쓰고 딸의 남편 자격으로 재고해보기나 했을까하고.

 

 

 

자신이 스물아홉이 되었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약간의 후회와 우려를 느끼기도 했다전과 다름없는 미모를 유지하고 있다는 데 대단히 만족하면서도위험한 나이에 다가가고 있음을 느꼈다앞으로 일이 년 내에 남작 가문에서 적절한 구애를 받을 거라는 확신만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 13p

 

 

월터 경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엘리자베스에게 실상을 솔직히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엘리자베스에게도 더 뾰족한 수는 없었다그는 자신에게 닥친 일이 부당하고 불행하다고 느꼈으며그것은 아버지 또한 마찬가지였다둘 다 자신의 품위와 타협하거나견딜 수 없을 만큼 안락을 포기하면서까지 비용을 줄이겠다는 방법은 생각할 수 없었다. / 17p

 

 

평생 여자의 변덕스러움에 대한 내용이 없는 책은 펼쳐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노래와 속담도 전부 다 여자의 변덕에 대한 이야기뿐입니다하지만 아마 당신은 그런 것은 다 남자들이 이야기뿐입니다하지만 아마 당신은 그런 것은 다 남자들이 쓴 내용이라고 하시겠지요.”

아마 그럴 거예요맞아요원하신다면 책에 나온 사례는 언급하지 않을게요남자들은 자기들 이야기를 할 때 우리보다 훨씬 유리했지요여자들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고펜도 그들 손에 있었으니까요책으로는 아무 것도 입증하려 하지 않겠어요.” / 350p

 

 

 



 

 

 

 

  『오만과 편견과 상당히 유사한 결을 지니고 있지만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의 남성과 여성세태를 사유하는 작가의 시선이 보다 깊어진 느낌이 든다차분하게 흘러가는 글의 구조가 자칫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겠으나생의 마지막에 이른 제인 오스틴이 담담하게 이 소설을 써내려갔을 것을 상상해보면 표지 속 이미지가 그리 낯설지 않은 게 된다특히 앤이 파혼을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레이디 러셀이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대목에서는, ‘세상을 읽어내고 편견 없이 대상을 직시할 수 있는 힘을 길러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계속 질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그런 의미에서 보면 『설득』은 전체적으로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 ‘선택과 결정 그리고 책임’의 무게를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에 있어 결코 가볍지 않은 소설인 듯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평범한 인생 열린책들 세계문학 275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범의 이중성을 건드린 책!

좋은 작품은 이처럼 그저 책 속의 이야기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삶까지 함께 밀어 올릴 수 있어야 하는 것!

 

 

 

  고요하게평범한 삶을 살았다.”

  만약 나의 묘비명에 단 한 줄의 글을 새겨야 한다면 나는 이렇게 새기고 싶다. ‘라는 사람을 떠올리면 무난하고 무던하게고요하고 평범하게 살다 간 사람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해서다그럼에도 내심 당신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노라는묘비명과는 아주 다른 말로 기억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일 테다많지는 않지만 적지도 않은 인생을 살다보니 무난하고 평범하게 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고특별한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지만내 삶을 반추했을 때 좀 더 반짝이는 무언가가 만져졌으면 하는 바람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때문에 카렐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이란 제목을 본 그 순간에도,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마주하리라는 상상을 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 속에서 뭔가 특이하고,

중요하고아주 극적인 면을 보고 싶어 하는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자신이 경험한 사건에 주목해 주기를 바라고,

그로써 더 많은 관심과 경탄의 대상이 되기를 기대하는가 보다. / 19p

 

 

 

서로 다른 자아그러나 하나뿐인 우리의 인생

 

 

  오랫동안 철도 공무원으로 일했던 한 남자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세례 증명서와 거주 증명서결혼 증명서와 임명장학교 성적표를 비롯해 타계한 아내의 편지에 이르기까지단순하고 정돈된 삶을 살아온 그답게 서류는 더 이상 정돈할 게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었다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갑자기 허전한 생각이 들었고어떤 중요한 것을 잊은 듯한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자신의 삶을 짧고 간결하게 기록하기로 한다.

 

 

 

나의 삶에서는 비일상적이고 극적인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내게 기억나는 것이라곤 조용하고 당연해 보이는거의 기계적인 세월의 흐름이며내게 다가올 마지막 순간까지도 다른 시간들과 마찬가지로 별로 극적이지 못할 것이다돌이켜 볼 때내 뒤에 놓인 직선적이고 분명한 길을 걸어온 것이 기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그 길은 잘 닦인 대로처럼 아름다웠고그 길 위에서는 방황할 일이 없었다. / 19p

 

 

 

  참으로 평범하다면 평범한 삶이었다소목장이의 아들인 는 아무도 오르지 못하는 목재 더미 위에 올라가 종종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곤 했던 꼬마 아이였다아버지는 강인하고 단순하지만 통장에 든 노동의 결과를 셈하며 검소하게 사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분이었고어머니는 예민하고 감성적이며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넘쳐흐르던 분이었다마을 아이들 가운데 소목장이 아들은 별로 두드러지지 못했기 때문에 곧잘 무시를 당하는 편이었지만학교에서는 조용하고 부지런한 모범생으로 선생님께 인정받는 아이였다. 1등을 빼앗기지 않는 데서 인생의 의미를 찾은 그는 공부벌레가 되었고프라하의 김나지움으로 진학해 마을을 떠난다.

 

 

 

  하지만 젊음이란 자고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원하고 가질 수 없으면 화를 내는 존재였던가. 8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는 시를 쓰고 장황하기 그지없는 토론을 벌이거나 이성 경험을 남자의 가장 자랑스러운 트로피로 여기며 혼란과 방황으로 점철된 시간을 보낸다훗날 아버지로부터 끔찍한 모욕을 들은 그는 철도청 하급 공무원에 지원하고그곳에서 오래된 황실 시종 집안 출신의 아내를 만나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하며 이른 나이에 역장이 된다그 사이 전쟁을 치러야했지만 뒤로는 체코인 동포를 돕는 영웅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역장 일을 훌륭하게 해내며철도청 공무원으로서 말년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삶을 살았노라 담담하게 술회한다.

 

 

 

그러나 학교는 아이의 삶에서 또 다른 새롭고 커다란 경험을 의미했다그곳에서 아이는 처음으로 인생의 위계질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그 전에도 아이가 누구에게든 복종해야 했던 것은 다를 바 없었다어머니는 명령을 했지만 자기편이었다어머니는 요리를 해주었고입을 맞추며 머리도 쓰다듬어 주었다아버지는 때때로 화를 냈지만여느 때에는 아버지의 무릎에 올라앉거나 그의 두툼한 손가락을 붙잡을 수 있었다다른 어른들이 가끔 호통을 치거나 욕을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았고달아나면 그만이었다하지만 선생님은 달랐다그는 오로지 주의를 주고 명령하기 위해 존재했다달아나 어디론가 숨을 곳이 없었고그저 면박이나 창피를 당할까 두려울 뿐이었다. (이제 모든 세계는 두 개의 계층으로 구분되었다보다 높은 세계에는 선생님과 신부님그리고 그들과 교제하는 약제사의사행정관과 판사가 속했다그리고 아버지들과 그들의 아이들이 속하는 평범한 세계가 있었다. / 34p

 

 

인생은 아이의 상태에서 서서히그리고 눈에 띄지 않게 남자가 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갑자기 아이에게서 놀랍게도 완성되고 성숙한 인간의 면모가 나타난다그러한 면모는 서로 들어맞지도 조직적이지도 않으며아이의 내면에서 연관성이나 논리성없이 상충되어 거의 광기처럼 나타난다다행히도 우리 어른들은 이 상태를 사려 깊게 관조하는 데 익숙하며인생을 대단히 심각하게 여기기 시작하는 소년들에게 그 시기는 지나가는 것이라며 위안을 준다. / 57p

 

 

땅거미가 내려앉아 공부를 계속하기엔 너무 어두워졌고열린 창으로 병영의 소등 신호가 들릴 때면나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창가에 서서 너무나 아름다우면서도 절망적인 그리움에 숨 막혀 했다대체 무슨 까닭일까그것은 이름이 없고 매우 광활하고 깊은 느낌이어서사방에서 내성적인 나를 괴롭히던 모든 사소한 모욕감굴욕감패배감실망감의 예리한 바늘들이 그 안에 용해되었다그래이것은 고통과 사랑으로 넘치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억척스럽게 몰두하는 모습은 아버지였고한없이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모습은 어머니였다내 소년기의 좁은 가슴에 이 두 가지의 모습은 어떻게 합쳐지고 조화를 이루었을까? / 61p

 

 

남자에게는 자신의 일을 몰두할 수 있는 곳이 가정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 116p

 

 

 

  이렇듯 질서정연하게 정돈된 듯한 그의 평범한 인생이 다소 심심하게 읽힐 즈음갑작스러운 심장 발작과 함께 그에게 온전한 진실을 촉구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이때부터 아주 사소한 일화처럼 다뤘던 그의 기억들이가벼운 일탈처럼 치부하고 지나쳤던 사건들이내면에 깊숙이 감추어 놓고 힘껏 줄행랑 쳤던 진짜 이야기들이 하나씩 새로운 목소리를 내며 선명히 드러난다그러면서 평범하고 행복한 사람으로서의 나출세를 위해 몸부림치는 억척이우울증 환자로 대표되는 세 개의 자아가 서로 뒤섞이다 때로는 이 삶이때로는 다시 저 삶이 두각을 드러내며 생애의 대부분을 지배했음을 자각하게 된다뿐만 아니라 낭만적인 자아영웅적인 자아시인 등 평범하고 단일해 보였던 하나의 삶에 숨겨져 있던 또 다른 자아들이 이따금 출몰하기도 했으니 이 모든 자아들의 총합이 바로 그 자신이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처럼 그 시에는 많은 것들이신기하고 소위 인광을 발하면서 작열하는 것들이 들어 있었음에 틀림없다시가 훌륭한가 형편없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그 시 속에 들어 있는 사물들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한때 코코넛 야자나무와 이상하고 인광을 발하면서 작열하던 무언가가 들어 있던 삶이 있었다여기 그 삶이 있으니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라고넌 네 인생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 야자나무를 어디론가서랍 속 같은 곳에다 감춰 방해가 되지 않게눈에 띄지 않게 하려 했었지? / 170p

 

 

내 경우를 들어 보자나는 전혀 유별난 사람이 아니다나의 삶은 끊임없이 뒤엉킨 몇 개의 운명들로 이루어졌다한 번은 이 운명이한 번은 저 운명이 지배적이었다그 후로는 그리 지속적이지 못하고전체 삶을 비추어 볼 때 그저 바다에 드문드문 나타나는 섬이나 에피소드처럼 보이는 몇몇 운명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때의 내가 이 운명들 가운데 어떤 것이었거나이 인물들 가운데 누구였든 간에 나는 항상 나였고이 나는 늘 동일한 사람이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는 존재였다. / 214p

 

 

내 경우에는평범한 인간과 억척이와 우울증 환자가 서로 연합하여 나의 자아를 나누어 가졌다그들은 서로 조절해 가며 내 생애의 대부분을 지배했다그들은 서로 조절해 가며 내 생애의 대부분을 지배했다때로는 억척이가 실망을 하고때로는 평범한 인간이 자신의 선한 심성 때문에나 당황한 나머지 양보를 하고또 때로는 우울증 환자가 의지가 박약하여 낙심하는 때가 있었다그럴 때 나의 왕기는 잠시 다른 자의 손으로 넘어갔다평범한 인간이 가장 강하고 지속적이었고지독한 일벌레였으므로가장 빈번하고 오랜 기간 나의 자아였다. / 217p

 

 

 




 

 

 

 

  이제 그는 라는 객체 속에 또 다른 객체의 존재들까지 인식하기에 이른다아버지와 어머니아버지의 아버지 또는 어머니의 어머니 나아가 세대를 거쳐 끊임없이 이어져 오는 우리의 선조들까지어떤 모습으로든 그들이 내 안에 존재하고 있고내 자아들 중 누군가가 그들의 모습을 닮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그러다 마침내 그는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내가 관계 맺을 가능성을 갖고 있던 사람들내가 겪어보지 못한 또 다른 삶의 가능성에 이르기까지그 무수한 가능성의 집합이 곧 일지도 모른다는 거대한 인식의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내 안의 목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똑같은 사람들이다네가 누구든 너는 나의 무수히 많은 자아이다네가 악인이든 선인이든그건 내 속에도 있는 거야.’ 결국 인생이란온전히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기에 이토록 평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뒤지는 일을 하라는 게 아니야그건 아무 곳으로도 이끌지 못해다른 모든 사람들도그들이 누구이건 간에너와 같은 집합이라는 걸 모르겠나너는 그들과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보기만 해그들의 삶 또한 네 속에 있는 무수히 많은 가능한 삶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너도 다른 사람처럼 신사나 거지허리춤까지 옷을 벗어젖힌 날품팔이꾼이 될 수 있었다너도 냄비 장수빵집 주인또는 얼굴 전체에 잼을 묻히는 아홉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그 모든 것이 너이다네 속에 그런 다양성이 있으니까. / 238p

 

 

그것이 진정하고 평범한 인생이며가장 평범한 인생이다내 것이 아닌 우리의 삶우리 모두의 광대한 생명 말이다우리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면 우리 모두는 평범한 사람들이다평범하면서도 그것은 축복이다. / 240p

 

 

 



 

 

 

 

  이처럼 평범한 인생은 죽음을 앞두고 이미 알고 있거나 잊고 있었던혹은 편집되었던 여러 자아와 조우함으로써 진정으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인생은 여러 상이하고 가능한 삶들의 집합이라는 인식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은 온전히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니며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고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수록 자신의 삶도 완성될 거라는 깨달음을 전한다인생이란 어느 역에나 멈춰 서는 아주 평범한 완행열차 같은 것그 역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이 곧 나이며 마지막 종착역까지 그들과 함께 가는 것임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무엇보다 한 남자의 개별적인 기억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장면 하나하나마다 나의 기억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이 특별한 독서 경험이야말로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다아버지와 어머니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 머물러 있던 유년 시절을 지나 위계질서와 서열로 구분되는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젊음이라는 객기와 광기의 시대에서 명예와 성취욕안정으로 이어지는 삶의 여러 단계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내 삶의 한 장면 한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이었다이를 테면 내 인생 최초였으나 결코 아름답지 않았던 로맨스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수치스러운 경험들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내 안의 진솔한 목소리를 마주하게 된다그것은 곧 평범의 이중성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내 삶 속에서 뭔가 특이하고중요하고아주 극적인 면을 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으면서도 기억을 왜곡하고 때로는 인생을 편집하기도 함으로써 또한 여느 보통의그럭저럭 괜찮은 삶이기를 포장하곤 하는 나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건 정말 엄청난 경험이었지……

난 네가 그런 경험을 어떻게 너의 삶에서 지울 수 있는지 모르겠다. / 183p

 

 

 

  ‘토마스 만이 극찬하고 밀란 쿤데라에게 영향을 준 20세기 최고의 이야기꾼이라는 수식어가 전혀 놀랍지 않을 만큼 걸작 중에 걸작이다감히 내 인생책이라 말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인상 깊게 읽은 작품이다중반부까지는 다소 심심하게 읽히는 듯하지만 이 책의 진가는 중후반부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난다그러니 부디끝까지 다 읽어보시라 추천드린다덧붙여 이 책의 특별함은 인생 50회 차 정도쯤에는 이르러야 더 깊이 와 닿지 않을까 싶다그때가 되어서 다시 찾는다면 이 책은 또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줄까기대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