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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ㅣ 윌북 클래식 첫사랑 컬렉션
제인 오스틴 지음, 송은주 옮김 / 윌북 / 2022년 7월
평점 :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의 남성과 여성, 세태를 향한 깊어진 시선!
‘세상을 읽어내고 편견 없이 대상을 직시할 수 있는 힘’을 길러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사랑. 듣기만 하여도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여린 꽃 같은 이름. 세상의 수많은 단어들 중 이토록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게 또 있을까. 첫사랑에 대한 기억의 색채감은 저마다 다르지만, 내가 알고 있는 가장 맑고 밝은 색으로 채색하고 싶은 마음과 인생에서 가장 짜릿하고 설렜던 기억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은 모두 같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설득』, 『순수의 시대』, 『위대한 개츠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다른 네 작품이 ‘첫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한 데 엮여 근사한 컬렉션으로 완성된 구성을 보는 순간, 마음이 두근거렸다. ‘첫사랑 컬렉션’ 속에 담겨 있는 ‘첫사랑’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인생에 단 한 번, 가장 첫 번째로 기억되는 사랑이 한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란 과연 어느 정도일까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우리는 각자로부터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준남작 신분의 월터 엘리엇 경에게는 세 명의 딸이 있다. 아버지의 잘생긴 외모는 물론 높은 허영심까지 쏙 빼닮은 첫째 엘리자베스, 차분하고 다정한 성품을 지녔지만 가족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인 둘째 앤, 돈 많은 시골 가문으로 시집을 간 메리까지. 여기서 주인공은 바로 둘째 앤이다. 그녀는 8년 전,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재산도 지위도 없는 해군 장교 엔트워스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이 약혼은 지각없고, 부적절하며, 잘될 가망은 물론 그럴 가치조차 없는 일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설득당해 파혼하고 말았다. 시간이 흘러 어느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가세가 기울어져 가고 있는 집안을 돌보며 쓸쓸히 생활하던 그녀는 웬트워스가 전장에서 공을 세우고 큰 재산을 모아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앤은 여전히 그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시선이 머무를 만큼 신경이 쓰였지만, 웬트워스는 과거에 받은 상처로부터 여전히 회복되지 못한 듯 앤이 아니면 누구라도 좋다는 가시 돋친 말까지 하며 그녀와 거리를 둔다.
그는 앤 앨리엇을 아직 용서하지 못했다. 앤은 그에게 잘못을 저질렀다. 그를 버렸고 실망시켰다. 그 과정에서 앤은 나약한 면을 보여주었고, 그의 단호하고 자존심 센 기질로는 이를 견뎌낼 수 없었다. 앤은 다른 사람들의 뜻에 따라 그를 포기했다. 설득에 쉽게 넘어간 탓이었다. 나약함과 비겁함의 결과였다. / 91p
이 모든 것들로 자신에 대한 그의 마음이 명백해졌고, 앤은 이에 크게 감동했다. 이 사소한 사건이 이전에 지나간 모든 일을 완결지어주는 듯했다. 앤은 그를 이해했다. 그는 앤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무심할 수도 없었다. 과거 일로 그를 원망하고 부당한 분노를 품으면서도, 그에게 전혀 관심 없는 척 굴면서도, 또 다른 이에게 마음을 붙여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누르지 못했다. 예전의 감정이 아직 다 사라지지는 않은 것이다. / 136p
한편, 시집을 갔지만 여전히 누군가가 자신을 돌봐주기를 바라는 철없는 동생 메리를 위해 동생네에서 한동안 머물게 된 앤은 오랫동안 자신을 무시해왔던 아버지와 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되자 새로운 정신적 변화에 눈을 뜨게 된다. 시끌벅적하지만 곁을 다정하게 내어주는 사람들, 가진 것을 모두 잃었지만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지 않고 작은 일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친구와의 만남, 불의의 사고 앞에서 차분하게 일을 순리대로 진행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주변 사람들을 다독였던 일련의 경험들이 그녀를 성장하게 한다. 이러한 변화는 그녀에게 벽을 세워두고 있었던 웬트워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앤에게 호감을 품은 사촌 엘리엇 씨의 등장으로 이들의 관계 역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그녀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구분을 하셨어야지요. 이제 저를 의심하지 마세요.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저도 나이를 먹었고요. 예전에 설득에 넘어간 것이 저의 실수였다 해도, 그분의 설득은 위험이 아니라 안전을 위한 것이었음을 기억해주세요. 제가 설득에 넘어갔을 때는 그것이 응당 따라야 할 의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어떤 의무도 저에게 도움이 될 수 없어요. 오히려 저에게 무심한 남자와 결혼한다면 온갖 위험이 초래될 것이고, 결국 모든 의무에도 어긋나는 일이 될 거예요.” / 367p



이처럼 『설득』은 타인에 의해 사랑을 포기한 여성이 자신의 진솔한 감정에 눈을 뜨고 성숙해져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전작 『오만과 편견』이 그러했듯, 이 작품 역시 ‘로맨스 소설’ 과 ‘가정 소설’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1800년대 영국 사회를 배경으로 ‘세태 소설’의 특징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로맨스 소설의 측면에서 보자면, 준남작의 딸이라는 허울 좋은 배경을 갖고 있지만 최근 가세가 기울어진 집안을 돌보며 27살이 되어버린 주인공 앤과 과거에는 보잘 것 없었지만 부와 명예를 갖춘 훌륭한 신랑감이 되어 돌아온 첫사랑 웬트워스가 재회하면서 빚어지는 미묘한 감정이 눈에 띤다. 이를 테면 의식하고 싶지 않아도 서로의 시선과 목소리에 저절로 반응하고야 마는 본능 같은 것, 이 거리를 걷다보면 행여 마주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같은 것, 무심하게 내뱉은 듯한 저 한 마디에서 나와 관련된 어떤 감정의 실마리를 길어 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 같은 것에서 우리는 ‘사랑’이 발화하는 순간에 마주할 수 있는 애틋한 장면들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 엘리엇 가의 상속자인 사촌 엘리엇 씨까지 가세하였으니, 삼각관계라는 꽤나 흥미진진한 스토리도 기대해볼 수 있다.
반면 세태 소설의 측면에서 바라보자면, 1800년대 영국 사회를 배경으로 남성과 여성을 둘러싼 오래된 관념을 비롯해 사랑과 결혼을 둘러싼 당대의 현실이 매우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는 점이 큰 특징이다.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상당히 정밀하다. 아름다운 외모와 지위 그리고 출신이 한 개인의 절대적 평가 기준이자 그 어떤 부조리함도 납득시킬 수 있는 현실, 변덕스러운 성격에 자신과 가족 전체의 신분 상승을 결혼을 통해서 실현하려는 여성들, 딸들은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권리가 없는 비정상적인 사회 구조 등을 때로는 위트 있게, 때로는 진중한 목소리로 드러내고 있다. 덕분에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 가지 합리적인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만약 웬트워스가 출세해서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과연 월터 엘리엇 경이 과거의 반대를 무릅쓰고 딸의 남편 자격으로 재고해보기나 했을까, 하고.
자신이 스물아홉이 되었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약간의 후회와 우려를 느끼기도 했다. 전과 다름없는 미모를 유지하고 있다는 데 대단히 만족하면서도, 위험한 나이에 다가가고 있음을 느꼈다. 앞으로 일이 년 내에 남작 가문에서 적절한 구애를 받을 거라는 확신만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 13p
월터 경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엘리자베스에게 실상을 솔직히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에게도 더 뾰족한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일이 부당하고 불행하다고 느꼈으며, 그것은 아버지 또한 마찬가지였다. 둘 다 자신의 품위와 타협하거나, 견딜 수 없을 만큼 안락을 포기하면서까지 비용을 줄이겠다는 방법은 생각할 수 없었다. / 17p
“평생 여자의 변덕스러움에 대한 내용이 없는 책은 펼쳐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노래와 속담도 전부 다 여자의 변덕에 대한 이야기뿐입니다. 하지만 아마 당신은 그런 것은 다 남자들이 이야기뿐입니다. 하지만 아마 당신은 그런 것은 다 남자들이 쓴 내용이라고 하시겠지요.”
“아마 그럴 거예요. 예, 맞아요, 원하신다면 책에 나온 사례는 언급하지 않을게요. 남자들은 자기들 이야기를 할 때 우리보다 훨씬 유리했지요. 여자들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고, 펜도 그들 손에 있었으니까요. 책으로는 아무 것도 입증하려 하지 않겠어요.” / 350p


『오만과 편견』과 상당히 유사한 결을 지니고 있지만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의 남성과 여성, 세태를 사유하는 작가의 시선이 보다 깊어진 느낌이 든다. 차분하게 흘러가는 글의 구조가 자칫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겠으나, 생의 마지막에 이른 제인 오스틴이 담담하게 이 소설을 써내려갔을 것을 상상해보면 표지 속 이미지가 그리 낯설지 않은 게 된다. 특히 앤이 파혼을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레이디 러셀이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대목에서는, ‘세상을 읽어내고 편견 없이 대상을 직시할 수 있는 힘’을 길러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계속 질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설득』은 전체적으로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 ‘선택과 결정 그리고 책임’의 무게를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에 있어 결코 가볍지 않은 소설인 듯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