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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1 - 개정판 ㅣ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7월
평점 :

이토록 강렬한 흡인력을 가진 작품이라니!
역사 속에서 그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했던 개개인의 삶을, 하나하나의 목소리를 매우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구현해낸 소설!
때는 막 20세기로 접어든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항구도시 부산의 끄트머리에 영도라 불리는 작은 섬 하나가 있었다. 이야기는 딸 넷인 집안의 막내딸인 양진이 한쪽 발이 뒤틀리고 윗입술이 세로로 갈라진 채로 태어난 훈에게로 시집을 가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남녀 가릴 것 없이 다 굶주리고 있는 마당이니 처녀들이 식량을 구걸하는 것보다는 아무하고나 혼인을 하는 것이 나은 시절이었다. 장애를 지니고 태어났을지언정 다행히도 훈은 온화하고 사려 깊은 남자였고, 양진 역시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왔으나 집안 살림과 하숙집을 착실하게 꾸려나갔다. 비록 아버지인 훈은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견실하고 단단한 어머니 아래서 자라난 선자는 제 몫이 무엇인지 아는 아이였다. 세상은 점점 팍팍하고 흉흉해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지금처럼 서로 의지하고 성실하다면 어떻게 해서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선자의 임신은 이제껏 바라본 적이 없었던, 경험한 적이 없었던 세상 밖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아무리 고개를 넘고 내를 건너도
조선 땅이고 조선 사람밖에 없는 줄 알았다. - 박완서
선자가 한수를 만난 건 시장에 장을 보러 갔다가 마주친 일본인 학생들로 인해 곤욕을 치르고 있을 때였다. 비누 향과 머릿기름의 노루발품 냄새가 나는, 깔끔한 양복차림에 잘생긴 데다 일본을 오가며 생선 중개상을 하는 부유한 남자에게 선자가 마음을 빼앗긴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인 훈은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쳤지만, 선자의 눈에 한수는 늘 바닷가에 나가 있느라 비린내가 빠지지 않는 하숙집 남자들과 달리 별세계에 존재하는 이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미 한수는 일본인 학생들로부터 선자를 구해주기 전부터 그녀를 쭉 지켜보고 있었기에, 때로는 오빠처럼 때로는 연인처럼 다정하게 그녀의 마음을 살폈고 이내 미래를 약속하기도 했다. 그렇게 선자는 한수를 만나 처음으로 조선 밖의 넓은 세상으로 나서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한수의 아이를 가진 뒤에야 선자는 그가 오사카에 아내와 아이를 둔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상심에 빠진 선자는 다신 그를 만나지 않겠노라 밀쳐냈다.
“그럼, 바쁘고말고! 선자야, 아낙네 삶이라는 게 끝없이 일하고 고생하는 기다. 고생 끝에 더 큰 고생이 온다꼬. 각오하고 있는 게 낫다. 이제 니도 여자가 된다 아이가. 그러니까 이 말을 해야겠다. 여인네가 잘 살고 못 살고는 혼례 올리는 사내한테 달려 있다. 좋은 사내 만나면 괜찮게 살고 나쁜 사내 만나면 욕보고 살고 그라는 기라. 어쨌거나 고생을 각오하고 그냥 열심히 일하면 된데이. 세상천지에 딱한 여인네를 돌봐줄 사람은 없다. 믿을 거는 자신뿐인 기라.” / 52p
“총독부 말이야. 일본 군인들을 위해 중국에 데려가려고 한다고. 아무도 따라가지 마. 여자든 남자든 가릴 거 없이, 조선인일 거야. 중국이나 일본에 좋은 일자리가 있다고 말할 거고. 네가 아는 사람일지도 몰라. 조심해. 저런 멍청한 남자애들을 말하는 게 아니야. 쟤들은 그냥 불량배들이고. 그래도 조심하지 않으면 저런 애들이 너를 해칠 수 있어. 알아듣겠어?” / 60p


때마침 병을 얻어 선자네 하숙집에 손님으로 오랫동안 묵고 있었던 목사 백이삭은 병이 다 나은 듯하자 선자에게 청혼을 하기로 결심했다. 평생 손가락질을 당할 난잡한 계집으로, 아이는 성도 없는 사생아가 되어 놀림 받을 것을 걱정했던 선자는 이삭의 선한 마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비록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한수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선자는 이삭을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열심히 이삭을 보살피기로 마음먹고 그를 따라 오사카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했다. 하지만 운명은 선자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일본은 전쟁 중이었고, 그 속에서 조선인이자 여성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늘 가혹한 현실에 내몰려야만 했다. 훗날 사람들은 조선을 버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하여 ‘자이니치(재일동포)’를 ‘조국을 버린 이’라 욕하기도 했지만, 선자와 그녀의 가족사를 따라가다 보면 차별과 멸시, 혐오와 배재로 단 한순간도 온전하게 살기 어려웠을 그들의 고단한 삶이 눈에 밟힌다.
일본어를 아무리 유창하게 구사해도 억양은 어쩔 수 없어서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겉모습으로만 본다면야 어느 일본인에게 다가가도 공손한 미소가 돌아오겠지만, 말문을 여는 순간 환영받지 못했다. 결국 요셉은 조선인이었고, 아무리 호감이 가는 성격이라도 그는 소위 교활하고 약삭빠른 족속의 일원이었다. 편견이 없고 생각이 바른 일본인들도 많았지만, 그들도 외국인을 경계하는 경향이 있었다. ‘똑똑한 인간들, 특히 그런 인간들을 조심해야 해. 조선인은 타고난 말썽꾼이야.’ 요셉은 일본에서 10년 넘게 살면서 그런 말을 숱하게 들었다. / 155p
“우리 자리에 냄새 풍기지 마라.”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 여자가 말했다. “다른 데로 가.” 여자가 생선을 파는 구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선자가 마른멸치와 미역을 파는 여자들에게 다가가자 나이 많은 조선 여자들은 이전 여자들보다 더 탐탁지 않아 했다. “그 꼴불견 수레를 안 옮기면 우리 아들들한테 니 항아리에다가 오줌을 싸라고 할 거다. 알아들었어, 이 촌뜨기야?” 머리에 하얀 수건을 두른 키 큰 여자가 말했다. / 254p
“김치! 맛있는 김치 있어예! 김치! 맛있는 김치 있어예! 오이시데스! 오이시 김치!”
이 소리가, 자신이 내는 소리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자기 목소리라서가 아니라 어렸을 적에 장에 다니던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아버지와 함께, 아가씨가 돼서는 혼자, 그다음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길을 간절히 바라는 여인으로 갔다. 그 시절 큰 소리로 물건을 팔던 여자들의 소리가 항상 선자의 주위에서 들렸고, 이제는 선자도 그 여자들처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 257p
이처럼 소설 『파친코』 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과 세계대전이라는 굵직한 근현대사 속에서 살아남아야했던 조선인들의 애환을 생생하게 담은 작품이다.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던 소설의 첫 문장처럼, 당시 조선인들의 현실은 그야말로 살아내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에 가까웠다. 일본 경찰들은 조선인들을 잡아다가 구타하고 굶기다 거의 죽기 직전에야 집으로 돌려보냈고, 여자아이들은 국수 한 그릇에 순결을 팔아야 했다. 일본인 학생들이 조선의 여인들을 함부로 겁탈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으며, 일본의 기업들은 험한 노동현장에 조선인들을 끌어다놓고 전쟁으로 폭격을 당하자 그 어떤 피해 보상이나 임금 지불조차 하지 않았다. 같은 조선인조차 가진 것을 지키기에 급급해서 자신들의 자리를 조금도 내어주지 않거나 훔치고 서로에게 욕을 했다.
그런 가운데 누군가는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죽을힘을 다했고, 살아내는 것이 중요했기에 그 어떤 모욕에도 침묵했으며,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을 꿈꾸며 꾸역꾸역 삶을 연명했다. 미래를 감히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희망은 마음 속 어딘가에서 늘 숨 쉬고 있었기에 살았고, 또 살아가려 했다. 이렇듯 소설은 역사 속에서 그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했던 개개인의 삶을, 하나하나의 목소리를 매우 입체적이고 사실적인 캐릭터들을 통해 생동감 있게 구현한다. 4대에 걸친 재일조선인들의 삶을 다룬 매우 방대한 스펙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굉장한 흡인력을 지닐 수 있었던 이유 역시 바로 여기에 있다.
요셉은 희망에 차 있는 듯했다. 오사카에서 살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다 나아지기 마련이었다. 가진 것이 돌멩이와 쓰디쓴 고난뿐이라도 얼마든지 맛있는 국을 끓여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그들에 대해 제멋대로 생각하겠지만, 살아남아서 성공하면 그런 것은 아무 상관 없었다. 경희는 이제 그들 넷이 여기에 있고 곧 다섯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함께 있으니 더 강해질 것이다. “맞지?” / 171p
조선인들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까? 결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각자 살 방도를 궁리해야 한다는 것이 조선인들이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었다. 가족을 지켜라. 자기 배를 채워라. 정신 바짝 차리고, 지도자들을 믿지 마라.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이 나라를 되찾지 못한다면, 아이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출세하게 해라. 적응해라. 지극히 간단하지 않은가? 조선 독립을 위해 싸우는 애국자들이나 일본 편에 선 재수 없는 조선 놈들이 있는가 하면, 이곳에서나 또 다른 곳에서 그저 먹고살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수많은 동포가 있었다. 결국 배고픈 앞에 장사 없는 법이었다. / 276p



“우리 같은 사람한테 고향은 없어.”
1권의 말미에서 한수가 창호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냉정하지만 조선의 처한 현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나라를 위해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창호의 질문에 한수는 싱긋 웃는다. 진실은 자애로운 지도자 따위는 없다는 것, 그들이 조선을 신경 쓴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라는 것, 애국심은 그저 이념일 뿐이고 이념에 빠진 사람은 자신을 잃게 되는 것이라고. 이어서 한수는 “너 같은 사람들이나 나 같은 사람이 백 명이 있어도 조선을 바로잡을 수 없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그저 살아남아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나 하라는 그의 말은 서글프지만 직시해야만 하는 그들의 현실이었을 테니까.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태어난 조선의 아이들은 또 어떤 삶을 살아야했을까, 소설은 이제 선자의 아들인 노아와 모자수를 중심으로 새롭게 펼쳐질 이야기를 향해 나아간다. 2권에서는 어떠한 운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2022년 애플TV가 제작한 동명의 드라마가 공개되면서 진즉에 화제가 된 소설이지만, 이제야 나는 1권을 읽었다. ‘파친코’라는 제목이 과연 이 소설과 어떠한 관련이 있을지, 역사는 선자와 그녀의 가족들을 어디로 데려다줄 것인지, 한수와 선자는 또 어떠한 운명을 맞이할 것인지 2권이 더 기대가 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