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하는 소설 - 미디어로 만나는 우리 창비교육 테마 소설 시리즈
김애란 외 지음, 배우리.김보경.윤제영 엮음 / 창비교육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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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속의 우리 그리고 진정한 소통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하는 여덟 편의 단편들!

 

 

 

  창비교육의 테마 소설 시리즈 연결하는 소설은 김애란, 구소현, 오선영, 서이제, 김혜지, 임현석, 김보영, 전혜진까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이 쓴 소설 중 미디어 즉 연결을 주제로 한 단편 소설 한 편씩을 수록해 엮은 책이다. 미디어란 인류가 원시 시대부터 자신의 의사나 감정 또는 객관적 정보를 서로 주고받을 수 있도록 마련한 수단으로, 기본적인 의사소통 수단인 언어에서부터 인쇄, 디지털, 소셜 등 다양한 형태로 변화해왔다. 이제 미디어는 그것이 없는 삶을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우리 삶의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과연 서로를 얼마나, 온전히 연결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남긴다. 특히 책 속의 여덟 편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실은 우리가 사이의 진실된 연결을 얼마나 갈망하는지를 느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던지는 미디어 속의 우리 그리고 진정한 소통의 가치를 되새겨 보시길 바란다.

 

 

 

거기, 당신 있나요?

 

 

나는 이 세계에서 하나의 언어가 사라진 순간, 그 말에서 빠져 나온 숨결과 기운들로 이뤄진 영이다. 나는 커다란 눈이자 입, 하루치 목숨으로 태어나 잠시 동안 전생을 굽어보는 말이다. 나는 단수이자 복수, 안개처럼 하나의 덩어리인 동시에 각각의 입자로 존재한다. 나는 내가 나이도록 도운 모든 것의 합, 그러나 그 합들이 스스로를 지워 가며 만든 침묵의 무게다. / 침묵의 미래, 김애란중에서 16p

 

 

 

  첫 수록작인 김애란의 침묵의 미래속의 는 하나의 언어가 사라지는 순간 그 말에서 빠져나온 일종의 영혼이다. ‘는 소수 민족으로 더 이상 자신과 같은 언어로 소통할 수 있는 이가 없어 평생 고독 속에서 자신의 을 그리워했던 마지막 화자의 죽음을 반추한다. ‘의 마지막 화자는 소수 언어 박물관이라는, 이른바 사라져 가는 언어를 보존하고 가치를 알리기 위해 설립된 박물관의 전시실에서 홀로 고향의 언어를 지켜내었던 살아있는 테이프였다. 검은 피부에 우아한 속눈썹을 가진 그는 눈감기 전, 자기 말을 알아듣는 누군가가 한 명쯤 곁에 있길 바랐다. 하물며 이나 그래같은 아주 간단한 말이라도, 누군가 건네주길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그건 노인뿐만이 아니었다. 소수 언어 박물관의 사람들은 혼자라는 단어를 닳아 없어질 때까지 만지고 또 만졌다. 김애란 작가는 그들의 고독을 이렇게 묘사한다. ‘몸에 좋은 독이라도 먹듯 날마다 조금씩 비관을 맛봤다. 고통과 인내 속에서, 고독과 두려움 속에서, 희망과 의심 속에서 소금처럼 하얗게, 하얗게 결정화된 고독…… 너무 쓰고 짠 고독.’ 그렇게 노인의 죽음으로 이 땅에 오래된 언어 하나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소설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언어가 사라진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거냐고.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그 언어를 사용했던 모두의 이야기가, 세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침묵에, 미래가 있느냐고.

 

 

 

그에게 모어란 호흡이고, 생각이고, 문신이라 갑자기 그걸 안 하고 싶어졌다해서 쉽게 지우거나 그만둘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말과 헤어지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고 말과 잘 사귄 것도 아니었다. 말을 안 해도 외롭고, 말을 하면 더 외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그는 자기 삶의 대부분을 온통 말을 그리워하는 데 썼다. 혼자 하는 말이 아닌 둘이 하는 말, 셋이 하면 더 좋고, 다섯이 나누면 훨씬 신날 말. / 침묵의 미래, 김애란중에서 34p

 

 

 


 

 

 

 

  비슷한 맥락에서 사라져가는 언어,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고요한 시대라는 미래를 형상화한 김보영의 고요한 시대역시 이런 질문을 던진다. 언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인데 만약 다음 세대가 언어를 생각의 도구로 쓰지 않는다면, 더 이상 그릇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마음은 앞으로 어디에 담기겠느냐고. 그러면서도 작가 김보영은 인지 언어학자인 신영희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지적한다. “마음은 물이고 언어는 그릇이야. 물은 그릇에 따라 모양이 변하지.” 때로는 언어가 마음의 형태를 좌지우지하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왜곡시킬 수도 있는 법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언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담긴 본질임을, 나와 타인이 진실된 소통을 나누는 데 있어야 한다는 작품의 메시지가 큰 울림을 준다.

 

 

 

언어는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리 좋은 소통 도구가 아니다. 대화를 할 때 실상 의미 전달의 80퍼센트는 표정이나 몸짓 따위의 비언어적 대화가 차지한다. 언어가 전해질 때는 주의를 기울일 때 뿐이고 대개의 사람들은 대개의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맥락은 전해지지 않는다. 서술어는 들리지 않고 명사만 들린다. 더 거칠게 말하면 그 명사에 숨은 심상만 들린다. / 고요한 시대, 김보영중에서 170p

 

 

나라에서는 단어를 골랐다. ‘괴담’, ‘허위 선동’, ‘근거 없는’. 그 날 그 자리에 있었던 무수한 것들을 광우병이 진실인가 거짓인가의 문제로 후려치고 축소시켰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렇게 간단히 한두 단어로 후려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신영희는 언어학자가 되었다. 언어가 그날을 모독하고 현상을 바꾸었기에.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언어고 사람의 마음은 언어에 담기며, 경험은 사라지고 언어만이 남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에. / 고요한 시대, 김보영중에서 185p

 

 

 

  TV라는 매체에 의해 한 가정이 소비되는 과정을 여실하게 보여준 오선영의 후원명세서, 어린이 유튜버의 삶과 허상을 날 것 그대로 묘사한 김혜지의 지아튜브, 중고거래 앱을 통해서 타인과 소통을 시도하고 편견을 해소해가는 과정을 그린 임현석의 무료나눔 대화법도 인상적이다. 또 알고리즘의 굴레에 갇혀 끊임없이 위시리스트를 갈구하는 화자가 주인공인 서이제의 위시리스트♥」는 우리 세대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내용이라 특히 흥미롭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매체가 등장했다 사라지는 가운데서도 이라는 매체만이 줄 수 있는 가치를 전하는 구소현의 시트론 호러와 전혜진의 바이센테니얼 비블리오필,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읽는 즐거움을 환기시킴으로써 독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과소비를 막으려면 온라인 스토어에 들어가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겠지만, 그걸 알면서도 자꾸만 온라인 스토어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장바구니에 담았다. 담고 또 담았다. 내가 이 옷을 사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담았다. 일단은 담고 또 담았다. 담고 또 담아도 장바구니는 무거워지지 않았다. 무거워지지 않아서 담고 또 담았다. 담고 또 담아도 되었다. / 위시리스트, 서이제중에서 105p

 

 

바닥엔 식탁 다리에 눌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내 만이 공들이고 신경 쓰던 것. 그것을 들어낸 자리였다.

() 나는 어두운 바닥으로 하나씩 떨어지는 수신 대기음을 들으면서, 지금 대화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음은 냉장고야? 그건 아내만이 알고 있다. 아내만이 아이에게 해 줄 말이 있다. 내게도 판단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고, 나는 아내를 붙잡고 한참 이야기하고 싶었다. 무슨 원목이라고 했지? 이젠 그때 흘려들었던 아내 이야기도 듣고 싶어졌다. / 무료나눔 대화법, 임현석중에서 159p

 

 

더 많이 알고 싶고 읽고 싶고 느끼고 싶은 그 마음과, 책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에 대해서. 이제는 지난 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린, 그 집념이라는 것에 대해서. 오직 그 집념을 이루기 위하여, 숨만 붙은 채 2백 년을 살아온 한 몸뚱이에 대해서. 대체 어디서부터 설명할 수 있을까.

가슴이 뛰었다. / 바이센테니얼 비블리오필중에서 235p

 

 

 

 

 

 

 

  『함께 걷는 소설, 끌어안는 소설에 이어 연결하는 소설에 이르기까지, ‘소설이라는 이야기가 주는 남다른 무게감이 참 좋다. 이 시리즈를 차곡차곡 수집함으로써 얻는 즐거움을 다른 많은 분들도 누려보시길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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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솔로지 - 호모사피엔스가 지구의 지배종이 될 때까지의 거의 모든 역사
송준호 지음 / 흐름출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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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종의 기원에 관한 아주 명쾌한 해석!

깊이 있으면서 명쾌하다덕분에 우리는 꽤 훌륭한 저작을 가지게 되었다!

 

 

 

  ‘사피엔솔로지는 현생인류를 지칭하는 사피엔스(Sapiens)’와 학문을 뜻하는 접미사 ‘-ology’를 결합한 것으로현생인류에 대한 학문을 의미한다사피엔솔로지의 저자인 송준호 의과교수가 직접 창안한 용어로호모사피엔스라는 우리 종을 통섭적인 관점에서 탐구한 인류 연대기라 할 수 있다유발 하라리와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각자의 저서 사피엔스와 총 균 쇠를 통해 역사학과 지리학의 관점에서 인류와 문명의 기원을 서술했다면송준호 의과교수는 의학자로서 생물학적 정체성에 보다 주목한 점이 인상적이다여기에 진화학고고학사회심리학세계사과학사에 이르기까지매우 입체적인 관점에서 호모사피엔스의 과거와 현재미래를 톺아보는 이 방대한 여정은 앞선 두 고전 못지않게 깊이 있으면서도 명쾌하다.

 

 

 

인간의 생물학적 과거와 본성에 관한 아주 흥미로운 고찰

 

 

  아프리카의 호모 속 중 한 종족에서 지능과 언어에 유리한 돌연변이를 가진 개체들이 나타났다소수에 불과했던 이들은 우연한 재해로 많은 동료들이 절멸한 가운데유전자 병목현상’(오랜 진화 기간을 거쳐 겨우 자리잡거나 도태될 특성이 다른 개체가 절멸하는 뜻하지 않는 행운으로 인해 단기간에 전체 집단을 차지하는 현상)과 창시자 효과’(소수인 유전자가 이주하는 작은 집단에 많은 비율로 섞이면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대표 유전자가 되는 현상)와 같은 우연하지만 결정적인 사건 덕분에 다수가 되었고그중 일부가 아프리카를 빠져나왔다이들은 혹독한 환경을 뚫고 어떤 생명체도 보여주지 못했던 변화와 혁신을 선보였다그 결과선행 집단들이 생존에 실패해 점차 사라지는 동안 이들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세계의 주인으로 우뚝 섰다바로 우리 종 호모사피엔스다.

 

 

 

  호모사피엔스가 지구를 지배하는 종으로 약진한 비결은 무엇일까저자는 첫 번째 비결로 지능을 꼽는다인류는 수백만 년 동안 비싼 비용을 치르며 대뇌 신피질을 키워왔다고등 포유류들도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은 양과 무게 측면에서 단연 압도적이고 비약적으로 발전했고말하고 상상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으로 이어지며 호모사피엔스의 강력한 무기가 되어주었다두 번째 비결은 혁신 본능이다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를 빠져나와 서서히 조여 오는 인구압을 재배와 사육과 개간의 농업혁명으로 돌파했고인구 폭증과 식량 불균형그리고 종국에는 파국에 이를 거라는 맬서스의 견해를 철과 석탄으로 이룬 산업혁명의 획기적인 생산성으로 빠져나왔다세 번째 성공 비결은 통제 욕구자연과 동식물을 길들일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고 통제하려는 사고는 곧 농경을 통해 잉여물을 만들고 또 잉여물 축적을 통해 서로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했다덕분에 인류는 자연은 물론세상의 모든 사물에 대한 통합을 이루어내며 지구상에 전무후무한 문명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이 세 가지 비결에 대해 인간이 의식적인 노력으로 발현된 것이 아니라호모사피엔스의 뇌 구조에서 비롯된 생물학적 표현형이라고 강조한다따라서 이 책에서는 호모사피엔스의 진화에 기여한 여러 생물학적 근거를 여러 가설을 통해 제시한다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가설 중 하나는, ‘요리 가설이다현생인류가 소화 효율이 높은 익힌 음식을 먹게 됨에 따라 소화관이 작아지면서 여기에 쓰였던 에너지가 뇌를 키우는 데 추가로 기여했다는 점이다다시 말해음식을 먹음으로써 뇌 진화에 필요한 대량의 에너지를 확보했으며 음식을 준비하고 나눠 먹는 과정은 사회화와 조직화를 촉진했다는 것이 다른 호모 종과 현생인류의 다른 점이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가십 가설이다그루밍이 영장류 집단을 유지하는 접착제 역할을 했다면호모사피엔스는 인구 대비 그루밍에 필요한 시간이 한계선을 넘어서자 그 대안으로 언어라는 소리 그루밍을 찾아냈다는 것이다육체적 그루밍은 일대일로만 가능하지만언어를 통한 그루밍은 동시에 4명까지도 가능하며(카페의 테이블이 대부분 4인석이 이유다른 일을 하면서도 함께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이렇게 호모사피엔스는 육체적 그루밍을 소리 그루밍으로 바꾸면서 한 집단의 크기를 150명까지 확장했다이는 언어 진화의 목적이 단순히 정보 전달에만 있었던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대부분의 인간이 정보 전달보다는신변 잡담과 가십 같은 수다로 결속을 다진다는 점을 미루어보면 이 가설은 상당히 설득력 있다.

 

 

 

두 발 보행을 하면서 선행인류는 상체의 힘을 써야 할 일이 줄어들게 된다자연스레 상체가 이전보다 가벼워지고 달릴 때 숨 쉬기 쉽도록 후두막이 얇아졌다후두가 아래쪽으로 내려와 공기가 울릴 공간이 생기고 후두막이 색소폰의 리드처럼 얇아지면서 선행인류는 훗날 말을 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게 된다.

사바나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강력한 냉각 시스템과 효율적인 달리기를 위해 호흡기 구조가 변하면서 선행인류는 인간이 지닌 가장 특징적이고 강력한 무기인 지능과 언어를 진화시킬 토대를 구축했다. / 41p

 

 

네안데르탈인은 완전히 멸종된 것이 아니라 현생인류에 일부 흡수됐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우발적이거나 강제적인 일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두 종 사이에 어떤 형태로든 짝짓기가 있었음을 뜻한다그런데 왜 네안데르탈인만 사라졌을까스탠퍼드대학교 연구팀은 네안데르탈인의 Y-염색체가 현생인류의 모체에서 면역반응을 피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냈따이 연구 결과에 따르면 네안데르탈인 남성은 호모사피엔스 여성을 통해 남자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이런 생물학적 불균형으로 두 종이 평등하게 통합됐다 해도 끝까지 갈 수 없었으리라. / 60p

 

 

초저녁 화톳불 주위에서의 모임은 소규모 혈연사회로 확장됐다화톳불을 중심으로 하는 본거지가 만들어진 것이다이제 본거지를 지키기 위한 일들이 시작된다본거지의 중심은 화덕이다화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매일 상당량의 땔감을 구해와야 한다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지피고 감시하는 사람도 필요하다불의 관리는 사냥채집육아에 이은 새로운 중요 과업으로 자리를 잡는다불을 지키는 것에서 시작된 일이 가사로 확대됐다. / 69p

 

 

 



 

 

 

 

  저자는 선행인류가 숲을 떠나 사바나에 정착한 후부터 오늘까지의 시간을 1년으로 치환해 살펴보면우리는 12월 31일 아침 6시경부터에서야 농사를 짓고 도시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말한다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은 밤 11시 40분경인 셈이다이는 우리가 한 해 내내 벌거숭이로 주먹도끼를 들고 뛰어다니다가 1년의 마지막 날 아침에야 곡괭이를 들어 땅을 일궜고해가 바뀌기 20분 전에야 양복을 입고 책상에 앉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런데 우리는 이 20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사회경제적으로 어마어마한 변화를 이루었으며또 그만큼 방대한 지구의 자원을 이용했고 그에 따라 지구 환경의 위기를 초래했다그렇다면 이 한 세기도 안 되는 짧은 시간동안 이룬 성과들을 우리는 마땅히 진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아니면 호모사피엔스의 멸종이라 불러야 하는 것은 아닐까혹은 우리 종의 멸종이 새로운 인류의 시작점이 되는 건 아닐까.

 

 

 

확장일로를 걸어오던 세계경제 규모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더욱 폭등하기 시작한다. 2000년이 되자 세계경제 규모는 이전보다 6총 생산량은 7비료 사용량은 10에너지 사용량은 4원유 생산량은 6배 증가했다. 20세기 전체를 놓고 보면 경제 규모는 14에너지 소비는 16배 증가했다. / 223p

 

 

3장에서 생명체가 어떻게 유성생식을 기반으로 우연과 선택의 과정 속에서 진화해왔는지 살펴봤었다이 과정은 인간의 수명을 기준으로 했을 때 영겁에 가까운 진화의 세월이 소요됐다하지만 인류는 유전자의 화학구조를 알아낸 지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서 체외수정과 체세포 복제 기술까지 터득했다인류는 이제 자연으로부터 선택의 주도권을 가져왔다우연은 실험 계획서로 바뀌었고영겁의 세월은 몇 주의 일정표로 대치됐다여기서 유전자를 워드 프로세서처럼 자유자재로 편집할 수 있는 완벽한 가위까지 등장한다. / 287p

 

 

 




 

 

 

 

  테런스 윌리엄 디컨은 사물의 이치를 이해하는 최상의 방법은 그 기원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예측 불가능한 미래가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만다가올 미래가 과거와 다르다 해도 미래는 과거가 만들어낸 세상 위에 세워진다인류의 연대기를 아는 것은 곧 미래를 아는 일이다그런 의미에서 이 훌륭한 저작이 오늘을 진단하고 미래를 대응하기 위한 우리의 걸음걸음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덧붙여 사피엔스와 총 균 쇠에 심리적 장벽을 느끼는 분들이라면 이 책을 먼저 읽어보시길 추천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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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적 친화력 을유세계문학전집 127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장희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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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라는 문학 세계를 아우르는 거대한 상징계 같은 작품!

남녀의 불륜을 다룬 작품이지만인간의 욕망과 도덕적 금기에 관한 한 다의적이고 철학적인 소설!

 

 

 

 

  『선택적 친화력은 괴테의 후반기 작품 세계를 대표하는 소설 중에 하나다친화력이란 제목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나 본래의 뜻은 내용이 주지하듯 선택적 친화력에 더 가깝다. ‘친화력이란 원자들 간에 서로 결합하여 어떤 화합물로 되려는 경향을 뜻하는 화학 용어다하지만 자연의 친화력과 달리 인간은 일종의 의지와 어떤 계기선택 작용에 따라 지금까지의 결합을 버리고 새롭게 결합될 수도 있다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어떤 관계가 다른 관계보다 선호될 수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인간에게 있어서는 자연의 것보다 선택적 친화력에 더 가깝다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괴테는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라는 이름의 중년 부부와 샤를로테의 양녀인 오틸리에에두아르트의 친구인 대위이 네 명의 주인공이 시골 장원이라는 한 공간에서 모여 들면서 서로에게 이끌리는 감정을 선택적 친화력이라는 개념을 빌려 묘사한다네 남녀의 이중불륜이라는 불안정한 관계 속에서 작용하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을 여기에 비유한 것이다하지만 사회적인 인간은 필연적으로 제도와 관습을 따르기 마련이어서네 남녀는 자신들의 욕망을 제어하려는 결혼이라는 제도와 도덕적 관습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결국 누군가는 그에 따라 본능을 억제하고누군가는 이를 거부하고 필사적으로 열정을 탐하면서 엇갈린 이들의 운명은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게 된다.

 

 

 

우리는 이처럼 죽어 있는 듯이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언제나 작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들을 관심을 가지고 눈앞에 떠올려 보아야 합니다그것들이 어떻게 서로를 찾고서로를 끌어당기고붙잡고파괴하고삼키고먹어 치우며그러고 나서는 가장 내밀한 결합으로부터 어떻게 다시 예상치 못한 새롭고 갱신된 형태로 등장하는지를 말입니다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것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더 나아가 감각과 오성이 있음을 비로소 인정할 수 있지요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의 감각이 그것들을 올바로 관찰할 만큼 충분치 못하고우리의 이성은 그 존재들을 파악하기에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 61p

 

 

뜨거운 열정과 진심 어린 확신으로 에두아르트는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어떤 한 사람만을 철저하게 사랑해야만 하오그러면 다른 모든 사람도 저절로 사랑스럽게 보이는 거요!” 오틸리에는 시선을 떨구었고샤를로테는 멍하니 앞만 바라보았다.

대위가 말을 받았다. “존경하는 마음과 숭배하는 마음은 서로 비슷해요어떤 하나의 대상에 대해 그런 생각을 가질 기회가 생길 때우리는 비로소 이 세상에서 소중한 게 무엇인지를 깨닫는 겁니다.” / 140p

 

 

 




 

 

 

 

  “의식이라는 건 믿을 만한 무기가 못 돼요.”라던 샤를로테의 경고처럼결혼이라는 제도에 의해 결합된 남녀라 할지라도 낭만적 사랑과 욕망에 대한 갈망 앞에서 얼마든지 불안정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하지만 결혼이란 모든 문화의 출발이고 정점이라고 말하는 미틀러처럼 엄격한 이성 안에서 질서와 제도의 신성한 가치를 더 높은 미덕으로 삼음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려는 이들도 있는 법이다낭만적 사랑을 추구할 것인가이성적 사랑을 추구할 것인가이처럼 양립할 수 없는 낭만적 사랑에 대한 욕망과 이를 통제하는 제도로서의 결혼의 의미를 깊이 사유한 괴테의 선택적 친화력은 표면적으로는 남녀의 불륜을 다룬 작품이지만인간의 욕망과 도덕적 금기에 관한 한 다의적이고 철학적인 소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샤를로테가 대답했다. “어쨌든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이제 우리 둘은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지도 않고가서도 안 되는 길을 맹목적으로 가도 될 만큼 젊지는 않아요우리를 보살펴 줄 사람은 더 이상 없어요우리가 우리 자신의 친구가 되고 주인이 될 수밖에 없어요우리가 극단의 길로 빠져드는 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비난받을 짓을 하거나 웃음거리가 되기를 기대하는 사람도 없어요.” / 169p

 

 

이모님고독이 은신처가 될 수는 없어요.” 오틸리에가 대답했다. “가장 가치 있는 피난처는 우리가 활동할 수 있는 바로 그곳에 있어요불길한 운명이 우리를 뒤쫓는 게 정해져 있는 경우라면아무리 속죄하고 헐벗은 채 지내더라도 우리는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제가 이 무심한 세상에서 구경거리나 된다면 저는 그런 세상이 싫고 두려울 뿐이에요하지만 사람들이 제가 지치지 않고 제 의무를 다하며 즐겁게 일하는 모습을 본다면저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참아 낼 수 있어요.” / 365p

 

 

 




 

 

 

 

  괴테는 이 소설에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은 단 한 줄도 들어 있지 않다고 전한다그러고 보면 네 남녀와 그들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은 괴테가 평생 품어온 삶과 죽음에 대한 불안편협한 도덕주의에 대한 비판예술관종교관교육관 등을 담은 거대한 상징계 같다그래서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전체는 심오하다아무래도 거듭 읽어볼 필요가 있는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고이 모셔만 두고 있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파우스트까지 이제는 정말 꺼내 읽어볼 때가 된 듯하다.

 

 

 

증오는 편파적이지만 사랑은 더욱더 편파적이다. / 14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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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지 마 과학! 1 - 정신이 달에 정신 놓다 놓지 마 과학! 1
신태훈.나승훈 지음, 류진숙 감수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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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보다 재미있어지는 책!

재미있게 만화를 읽다 보면 어느 새 깨닫게 되는 일상과 교과서 속 과학 원리!

 

 

 

 

  이미 놓지 마’ 시리즈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믿고 읽는 학습 만화책으로 유명하다그 중에서도 놓지 마 과학!』 시리즈는 어느 덧 18편에 이르는 책이 출간될 만큼 대중적인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우리 아이도 이 시리즈를 도서관에서 자주 빌려오곤 하는데 같은 책을 서너 번이나 읽을 정도로 애정도가 높다. “읽었던 건데 또 빌렸어?” 하고 물으면 아이는 당연하다는 듯 재미있으니까.” 하고 대답하게 되는 놓지 마 과학!그렇다면 엄마도 읽어보지 않을 수 없지!

 

 

 

때로는 엉뚱하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는 정신이와 가족들의 좌충우돌

 

 

  『놓지 마 과학!은 정신이와 가족들의 유쾌발랄한 만화 속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일상생활 속 과학 상식을 비롯해 초등학교 과학 교과서 속 질문까지 해결되는 어린이 과학 학습 만화책이다. 1권에서는 눈썹은 왜 있는 건지오줌을 참으면 어떻게 되는지개구리가 겨울잠을 자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각종 호기심은 물론번개가 지그재그로 치는 이유와 기름이 물에 뜨는 이유 등 교과서 속에 등장하는 과학 원리를 함께 만나볼 수 있다.

 

 

 

정신이가 알려주는 과학 상식때는 우리 몸의 피부 세포가 죽은 것

 

오랜만에 목욕탕에서 때를 밀면 때가 많이 나올 거야그러고 나면 시원하고 깨끗하게 된 느낌이 들지이 때는 무엇일까때는 더러운 것이 우리 몸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피부가 벗겨진 거야피부 세포는 매일 약 100억 개 정도가 죽어서 떨어져 나가고 새로 100억 개 정도가 생겨난다고 해죽은 피부 세포 중에서 몸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몸에 붙어 있는 것이 바로 때야때가 생기는 것은 마치 손톱이나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과 같은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할 수 있지그러니까 몸에 때가 있다고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어깨끗이 씻으면 되는 거야! (과학 6학년 2학기 4. 우리 몸의 구조와 기능) / 43p

 

 

 




 

 

 

 

  소설이나 각종 범죄 관련 콘텐츠를 보다 보면 범인이 현장에 남긴 지문을 채취해 범인을 잡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책을 읽으며 아이는 처음으로 지문이 무엇인지지문이 어떻게 생기는 건지또 사람마다 지문 모양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엄마의 손과 자신의 손을 번갈아 보며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기도 했다또 보이지 않는 비밀 편지’ 편을 보고레몬즙을 면봉에 묻혀 종이 위에 글씨를 쓴 뒤 불을 붙이는 실험을 직접 해보았다두 번의 시행착오가 있기는 했지만 서서히 드러나는 글씨를 보면서 실험하는 즐거움은 물론실험에는 오류가 있다는 것 그리고 직접 해봄으로써 얻은 결과가 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했다.

 

 

 

정신이가 알려 주는 과학 상식촛불이 비춰 보면 나타나는 비밀 편지

 

아무도 모르게 내 마음을 전하는 비밀 편지를 쓰고 싶니평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편지지를 촛불에 가까이 대면 서서히 글자가 나타나는 비밀 편지는 어떻게 만들까먼저 식초나 레몬즙을 붓이나 면봉에 묻혀 종이 위에 글씨를 쓰고 말려그런 다음 촛불 가까이 가져가면 서서히 글자가 나타나이건 식초나 레몬즙에 들어 있는 구연산(시트르산때문이야구연산은 종이에 있는 수분을 탈수시켜 건조하게 만들어그래서 촛불로 가열하면 식초나 레몬즙이 묻은 곳이 상대적으로 수분이 적어 먼저 그을리게 되어서 글씨가 나타나게 되는 거야어때 쉽지너도 비밀 편지를 보낼 사람이 있으면 만들어 봐. (과학 5학년 2학기 5. 산과 염기) / 85p

 

 

 




 

 

 

 

  이 외에도 과학 교과 단원을 정리한 교과 연계표’,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 박사를 만날 수 있는 인물 탐구’, 책에서 다룬 과학 지식을 정리해볼 수 있는 퀴즈’, 부록으로 1권에서 다룬 과학 상식을 한 데로 모은 파워 카드까지 알차게 구성되어 있다.

 

 

 


 

 

 

  『놓지 마 과학!은 초등 2학년인 아이가 본격적으로 과학 교과서를 접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과학과 친해질 수 있을지 고민하던 나 같은 부모들에겐 참 반가운 책이다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니이왕이면 부모가 함께 이 책을 읽고 아이와 새롭게 알게 된 과학 지식을 대화로 나눠 볼 것을 추천 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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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에 대해 쓰려 했지만
이향규 지음 / 창비교육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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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로 하여금 기억의 문을 열어젖혔더니 사람이 보이더라!

다정한 연결돌봄의 의미를 어루만져보게 되는 참 따뜻한 시선!

 

 

 

  사물에 담긴 따뜻한 물성을 매만지고 있는 듯한 감각이향규 작가는 사물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 안에서 가장 친밀한 감정을 먼저 발견한다덕분에 나 역시 사물 너머의 것을 바라볼 줄 아는 넉넉한 시선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만든다오늘 내가 사용하고매만지고그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해내고 있는 것들이 건네 오는 말에 귀를 자주 기울여봐야겠다그 잠깐의 귀 기울임에 잊고 있었던 추억의 한 페이지를 펼쳐볼 수 있다면그리운 얼굴을 떠올려볼 수 있다면나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저 그런 듯했던 나의 일상이 좀 더 풍요로워질 테니까.

 

 

 

사물에게서 사람을 읽는 이야기

 

 

 

  고사리나물미역국김치로 채운 작은 밥상이 엄마의 밥상을 떠올리게 하는 위로 음식일 때가 있다가을 산에 널린 것이 도토리요시장에서 헐값에 팔리는 게 도토리묵이라 어릴 적에 엄마가 도토리라 부를 때면 괜히 흔하고 하찮은 존재처럼 여겨졌는데 자라고 보니 동그랗고 야무지고 단단한 것이 제법 귀엽게 느껴진다이렇듯 아주 일상적인 사물은 때때로 기억으로 가는 통로가 된다그리고 그 끝에는 나를 지탱하는 사람들이 서 있었음을 깨닫곤 한다이향규 작가는 자신의 책 사물에 대해 쓰려 했지만을 통해 사물이 기억의 문을 열어젖히니잊고 있던 순간과 묻어 두었던 마음이 하나둘씩 드러나더라고 고백한다.

 

 

 

  그러고 보니 라면이 먹고 싶어 물을 올렸더니 냉장고에 김치가 없는 게 아쉬운 오늘 아침이었다김치통에 배추 밑동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게 은근 서글펐다어릴 적김장철이 되면 외가댁 식구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다 달라붙어 빨간 대야에 배추를 절이고씻고양념장을 만들고양념을 버무렸는데도 그날 하루를 꼬박 다 써버려야 할 때가 있었다다들 허리 아프다몸살 나겠다 투덜대면서도 온 가족이 나눠 먹을 김치를 야무지게 담갔다한 통두 통 차곡차곡 그날 만든 김치를 살뜰하게 챙겨 넣어 각자의 집으로 가져가는 모습이 세상 뿌듯해 보일 수 없었다김치가 뭐라고 다들 이 야단인지나는 결혼을 하고 지금까지도 이해를 할 수 없었지만오늘은 김치 한 쪽 없는 냉장고가 유독 텅 비어 보였다어찌 김치 한 쪽이 없어서 아쉬웠겠나그 시절발 디딜 틈 없이 시끌벅적했던 부엌 풍경이 그리웠던 것은 아닐까.

 

 

 

어릴 적 살던 집 마당 한구석에 개나리 나무가 있었다마당이래야 손바닥만 했으니 한편에 있던 나무가 얼마나 컸으랴마는기억 속에 있는 그 나무는 뒤에 숨으면 아무도 찾지 못할 만큼 크고 빽빽했다꽃이 피면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달달하고 따뜻한 냄새가 났다지금도 개나리 향을 맡으면 머릿속에 아지랑이가 핀다내 가장 오래된 기억은 엄마가 작은 트랜지스터라디오를 개나리 나뭇가지에 걸고 그 아래에서 음악을 듣는 모습이다그런 여유는 일하면서 아이 넷을 (거의혼자 키웠던 엄마가 자주 누리던 호사가 아니었을 텐데한복을 입고 노란 꽃 아래 앉아 있던 그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참 고우셨다그래서 나에게 개나리는 엄마의 나무가 되었다. / 79p

 

 

빨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만든다존재한다는 것은 알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는예컨대 햇볕과 바람도 빨래를 통해 그 형체를 드러낸다그건 물 잔이 물의 형태를 잡아 주는 것과 비슷하다.

빨래는 이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곁에 불러오기도 한다그것도 바람이 매개하는 일이다노랫말이 그 사실을 알려줬다천 개의 바람이 되어라는 노래(한국에서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곡으로 널리 알려졌다덕분에 나는 엄마도 아버지도 할머니도 내 곁에 부는 바람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안다. / 98p

 

 

 

 

 

 

  이향규 작가는 영국에서 이주민으로두 딸의 엄마로돌봄 노동자로 살아가며 겪은 소소한 일상과 그 안에서 다정한 연대 그리고 돌봄의 의미를 되새김하기도 한다특히 팬데믹을 겪으면서 이웃들이 함께 서로를 돌보며 마음을 나눈 일화들은 우리에게 작지만 소중한 연결의 의미를 돌이켜보게 한다안 쓰는 물건을 서로 나누고필요한 정보를 나누며 가끔은 기부 활동도 하는 등 이 아름다운 연결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작가는 말한다누군가를 보듬는 일은 그저 자신이 가진 게 넉넉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처음 이 일을 시작한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이웃과의 관계가 점점 소원해지고 있는 오늘날문밖을 걸어 나가 주변을 살펴볼 수 있는 섬세함이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을는지.

 

 

 

노숙자를 돕는 자선 단체 셸터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신발이 50켤레나 필요한 사람은 없다그러나 누구든 머무를 집 한 칸은 필요하다.”

애린과 시내에 있는 가게들을 순례하듯 돌아다니면서그 옛날 유모차를 밀며 가게를 기웃거렸던 젊은 엄마가 떠올랐다이 가게들이 그 시절 나를 지탱했다나는 이제 중고 냄비를 사면서 하나도 슬프지 않고어른이 된 애린은 힙한 빨간 바지를 고르고 기뻐한다채리티 숍내가 영국에서 가장 사랑하는 곳이다. / 128p

 

 

한편무례한 사람들에게도 배우는 것이 있다오히려 그들이야말로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해 주는 사람이다나는 무엇에 가슴이 답답해지는지무엇에 화가 나는지무엇을 피하고 싶은지무엇이 불편한지어떻게 갈등을 다루는지나는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그들이 탄 기차에서 내린 뒤에 찾아온 안도와 자유를 경험하며 비로소 알게 된다. / 239p

 

 

 



 

 

 

 

  이향규 작가는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기쁘거나 슬프거나 안타까웠던 삶의 어떤 순간들내 감정과 시간이 농축되어 있던 그 순간들을 기억해내는 것은 지금의 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그리고 그 끝에 남는 것은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어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이라고 전한다어쩌면 그러한 고마움을 계속해서 생각할 수 있을 때나아가 우리 사회의 연약한 자리를 보듬어보는 시선도 넓어지리라 생각한다서로가 거기에 있음을 확인하게 하는 이 따듯한 기록이 모두에게 좀 더 다정해지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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