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안장의 유령
아야사카 미츠키 지음, 김은모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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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하고, 아름답고, 애틋하다!

수십 년 동안 불가사의하게 사람이 죽어 나간 피안장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미스터리 소설!





  얼핏 보기에는 낡은 호텔을 연상시키는 기묘한 존재감을 풍기는 저택이었다. 나가노현에 위치한 이 저택은 칙칙한 적갈색 지붕에 벽돌색 굴뚝이 툭 튀어나와있고 외벽에 넝쿨이 사방팔방 뻗어 있어 다소 황폐해보였지만, 공들인 창틀 장식과 화려한 처마 장식 등으로 보아 한때는 매우 호사스러운 분위기를 풍겼으리라 추측되었다. 피안장. 저택 앞의 광대한 들판을 가득 매운 피안화가 마치 붉은 바다처럼 흔들린다 하여 사람들은 이곳을 피안장이라 불렀다. 만주사화, 송장꽃, 지옥화, 여우꽃, 면도날꽃으로도 불리는 그것은 특유의 붉은 생김새와 이름이 주는 위화감 탓인지 흡사 피바다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피안장에서는 피안화가 피는 계절에만 기이한 일이 발생해. 그리고 곧 그 시기가 와.” / 62p




  어느 날, 피안장으로 전국 각지에서 여섯 명의 초능력자들이 초대된다. 이들은 초대한 이는 국내 시장 점유율 1, 2위를 다투는 대형 가전제품 회사인 기지마 전기 회장의 손자, 기지마 렌이다. 사실 피안장에는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있었는데, 쇼와 시대에 렌의 증조할아버지가 첩실의 집으로 지었다는 이곳은 어찌된 영문인지 피안화가 피는 계절이 오면 기지마 그룹의 친인척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불의의 죽음을 맞거나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죽음이 초자연적인 현상에 가까울 만큼 이해 불가능한 것투성이어서 렌은 초능력자들을 불러 이를 조사하도록 한 것이다.





“피안화를 꺾으면 불이 난다는 말을 어릴 적에 들었지.” 유토가 옛날 생각이 난다는 듯 덧붙였다.

(…) “가을 무렵에 핀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도 불길한 이미지에 한몫하는지 모르지. 피안…, 즉 죽음을 의미하는 말이니까. 독이 있는 이 식물을 먹으면 저세상에 가는 수밖에 없다는 뜻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어.” / 116p












  그렇게 여섯 명의 초능력자를 포함한 열 명의 남녀가 피안장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골몰하는 사이, 저택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 살아 움직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사람들을 위협하기 시작한다. 그 사이 예기치 못한 첫 번째 희생자가 발생하고, 저택은 마치 단 한 명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듯 이들을 가두고 초능력까지 통제하며 또 다른 누군가를 노린다. 피안장이 노리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통제 불가능의 영역처럼 보이는 피안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소설은 혼돈에 혼돈을 거듭하며 마지막까지 질주하듯 내달린다.





“그렇지. …어쩌면 이 집에는 인간의 광기를 자극하는 뭔가가 있는지도 몰라.” / 314p




“여기 갇힌 인간의 증오와 슬픔이 불러들인 흉한 것은 사라지거나 어딘가로 가버린 게 아니야. 숨죽인 채 여기서 쭉 기다렸지. 다음 먹잇감이 나타나기를.” / 407p












  이처럼 『피안장의 유령』은 수십 년 동안 불가사의하게 사람이 죽어 나간 저택 피안장으로 중심으로 펼쳐지는 미스터리 소설이다. 마치 건물 전체가 살아 움직이는 듯 통제불가능의 영역이라는 특수한 설정, 밀실추리물의 극적 재미, 그리고 염동력자, 자동서기 능력자, 예지 능력자, 사이코메트러, 정신감응 능력자, 일렉트로키네시스 등 초능력이라는 소재를 미스터리에 적극적으로 활용한 점이 인상적이다. 여기에 자신의 능력을 통제할 수 없는 공간 속에서 이들이 느끼는 극도의 공포와 혼란을 긴장감 넘치게 묘사하는 한편, 이대로 통제당할 수만은 없다는 심리와 유령 저택 간의 팽팽한 대결 구도도 매우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초능력과 유령 저택이라는 거대한 힘에 압도되다보면 어느 새 밀려오는 아련함과 애틋함이야말로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다. 초자연적인 현상 뒤에 깃든 인간의 고독과 사념 그리고 상처를 끝끝내 누군가를 지키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보듬는 결말이 긴 여운을 남긴다.




  작가인 아야사카 미쓰키에 대해 검색하다 보니 일본에서는 스무 편에 가까운 작품을 발표한 중견 작가이나 국내 출간은 이 책 『피안장의 유령』이 두 번째인 듯하다. 앞으로 한국 독자들과도 자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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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공범이 되는가
맥스 베이저먼 지음, 연아람 옮김 / 민음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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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는 현 시점에서 우리 사회가 논의해야 할 아주 중요한 과제다!

공모에 관한 예리하고 비범한 사유들로 가득한 책!





  “난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고위급 나치 당원들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자신을 변호하며 이렇게 말했다. 많은 나치 당원은 그저 상관의 지시를 실행에 옮겼을 뿐 죄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그 모든 일을 실현할 수 있었던 데에는 독일 안팎에서 수많은 이들의 공모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에 공모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소 평범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선해 보이는 사람들이라는 점이었다. 대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공모라는 나쁜 함정에 빠져들게 한 것일까? 과연 나의 조직은, 나는, 비윤리적인 행위와 공모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행동경제학자인 맥스 베이저먼은 누구나 공모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고 단언한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행동이 윤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착각일 뿐이라고 지적하며, 나도 모르게 공모자가 되고 싶지 않다면 공모의 작동 원리와 구조를 이해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이 책은 조직과 사회를 병들게 하는 공모의 다양한 사례를 조명하며, 대체로 선한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비윤리적인 행동에 가담하게 되는지를 분석한다. 이때 사회에 위해를 가하는 자들에 협력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무엇인지, 도처에 흐르는 공모의 정황과 신호를 어떻게 감지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런 일에 공모하지 않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함께 논의한다.




‘역겨운’ 와인스틴의 범죄를 방조한 ‘선한 사람들’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녀는(배우 로즈 맥가윈) 이렇게 말했다. “내게 풀리지 않는 궁금증은 언제나 나름대로 멀쩡해 보이는 나머지 사람들이었어요. 대체 그 사람들은 뭐가 잘못된 거죠?” / 122p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잘못된 행동에 가담하는가




  오피오이드 사태로 알려진 마약성 진통제를 유통한 사람들과 이를 처방한 의사와 약사들, 위워크의 불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을 무시한 벤처 투자자들, 자동차 배기가스 시험에서 속임수를 쓰도록 컴퓨터 코드를 개발하도록 한 폭스바겐의 경영진과 이에 공모하는 대가로 직원들의 고용 안정을 보장받은 노동조합원들 그리고 관련법을 고의로 허술하게 만든 주 정부, 테라노스의 사기 기술을 매장에 입점시키고 판매한 월그린, 희대의 성범죄자 하비 와인스틴의 악행을 덮어준 영화 관계자들, 미국 여자체조 국가대표 팀 주치의인 래리 나사르의 성 착취를 고의로 은폐한 미국 올림픽위원회와 체조협회 등에 이르기까지. 책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모의 현장과 그것이 개인과 사회에 끼친 위악들을 날카롭게 보여준다.




지금까지 언급한 의사, 약국, 유통회사들에 범법 혐의(지방 정부, 주 정부, 연방 정부 공무원들의 부도덕하고 무능한 행위는 말할 것도 없고)가 있다고 해서 퍼듀 파마가 오피오이드 사태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공모자들의 행위는 사회적 문제나 사건이 발생했을 때 주범만 비난하는 것이 잘못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모든 사건에는 비윤리적인 행위를 수행하는 데 가장 명백하게 책임이 있는 개인 또는 기업이 있다. 그리고 주범의 목표 실현을 도와 이익을 챙기는 또 다른 행위자들이 있다. 오피오이드 사태에서 그 목표는 중독 확산을 조장하여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 40p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인종차별주의로 혜택을 입고 있고 우리 행동이 인종차별주의에 공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백인에게 유리한 세제 혜택, 주택 가격 상승, 교육과 직업에서 얻는 이점 등을 통해 여러 세대에 걸쳐 부를 후세에 물려주는 일은 무심코 인종차별적 불평등을 강화하는 데에 일조한다. / 84p












  저자는 공모자가 비윤리적인 행위에 가담하는 이유에는 복잡한 심리가 작용한다고 설명한다. 주범의 목표 실현을 도와 이익을 챙기려는 이기적인 동기에 의해서, 권위나 기존의 관행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조직의 분위기 때문에, 벤처 투자자나 은행이 투자 여부를 판단할 때 경영학적 접근법을 통해 복잡한 재무 분석과 철저한 실사를 수행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 때문에, 자기는 고의로 환자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윤리적인 사람이기에 개인적으로 이해관계 충돌의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는 그릇된 믿음이 일상 속에서 얼마나 손쉽게 공모를 이끌어내는지, 책을 통해 투명하게 느낄 수 있다.






미국에는 ‘침묵의 파란 벽’이라는 용어가 있다. 동료의 실수, 부정행위, 폭행을 비롯한 범죄에 조치를 취하지도 보고하지도 않을 만큼 동료 경찰관에게 의리를 지키는, 비공식적이지만 경찰 조직 문화에 깊숙이 자리한 침묵 규범을 말한다. 불법이고 비공식적인 문화인데도 침묵의 파란 벽은 조직적이고 제도화되어 있다. / 138p




마찬가지로 다소 어려운 목표에 전념하는 일은 직원들을 비윤리적으로 행동하게 만들 수 있다. 모리스 슈바이처, 리사 오르도녜스, 밤비 두마는 연구를 통해 성과를 스스로 보고해야 하는 사람들이 구체적이고 힘든 목표에 직면했을 때, 특히 실제 성과가 목표에 미치지 못할 때 성과를 과장하는 경향이 더 크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목표 달성에 전념하면 해당 과업의 윤리적 측면을 간과하게 되는데, 노트르담 대학교 교수 앤 텐브룬셀은 이 과정을 “윤리적 퇴색”이라고 부른다. / 174p




마거릿 미드의 말을 빌려 말하면 “소수의 사려 깊고 헌신적인 시민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절대 의심치 마라. 실제 세상을 바꿔 온 것은 바로 그들이다.” 이 감동적인 인용문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모든 인간이 지닌 책임과 기회를 강조한다. 리더의 자리에 앉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예방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여기에는 조직 구성원들이 위법행위에 가담하지 않도록 돕는 일도 포함된다. 올바른 인식과 용기가 있다면 리더는 부도덕한 행위에 공모하지 않는 능률적인 조직을 만들 수 있다. / 256p








  




  저자는 인간은 미래의 행동을 계획할 때는 도덕적인 선택을 더 많이 하지만, 실제로 행동을 해야 하는 순간에는 자신에게 이로운 선택을 하는 경향이 더 크다고 말한다. 따라서 결단의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반드시 윤리적인 행동을 취할 거라고 믿었던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알아야만 한다고 경고한다. 특히,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은 무언가를 하기로 결정하는 것만큼 분명한 행위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행동하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에게 그 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라던 에이머스 기오라의 말처럼, 침묵도 일종의 행위라는 것을, 이 역시 공모에 가담하는 일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하겠다.




  어쩌면 ‘공모’야말로 현 시점에서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주요 과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직 스스로 공모의 문제를 자주 공론화할 수 있는 건강한 사회 문화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과 동시에, 개인 역시 일상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공모에 좀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저항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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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감정의 힘 - 공부 잘하는 상위 1% 아이들의 숨겨진 무기
김은주 지음 / 북하우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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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라면 당장에 읽어봐야 할 책!

부모의 불안과 속도 강박이 어떻게 아이의 긍정적인 공부 감정을 해치는지 예리하게 분석한 책!





  김은주 교수의 책 『공부 감정의 힘』 속에는 「2023년 가족실태조사 분석 연구」라는 이름의 아주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있다. ‘자식의 성공은 곧 나의 성공과 같다’고 생각하는 부모의 비율이 2020년에는 46.9퍼센트였던 것이 2023년에는 58.9퍼센트로 증가했다는 것이었다. 자유롭고 부모와 아이의 인생을 분리 개별화할 수 있는 능력이 가장 높다고 판단되는 우리 세대가 갈수록 더 높은 비율로 자녀의 성취를 자신의 성취와 동일시한다니, 이는 매우 놀라운 일이다. 특히, 집단 가치관이 강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만 소외되고 뒤처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성향이 높아서(포모 증후군), 아이들을 향한 과도한 기대와 통제도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부모 역시 이를 모를 리 없다. 아이의 시간을 학원 스케줄로 빽빽하게 채워 넣고 선행학습에 몰아넣으면서도 아이가 혹여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까, 건강이 상하지 않을까 걱정이 크다. 하지만 선행이 만연한 학원 시스템과 입시 경쟁이라는 교육 제도의 압박 속에서 우리 아이만 안 할 수 없다는 게 부모들이 가진 공통된 딜레마이자 현실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바에야 내가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지원을 해주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쪽이 오히려 낫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나도 모르게 키워온 불안과 속도 강박이 내 아이의 공부 감정을 헤치고 있었다면? 좋은 대학에 못가면 인생이 망한 것 같고, 실패와 실수를 두려워하고, 등수와 시험 문제 한두 개에 스트레스 받는 아이로 키워지고 있었다면? 대한민국 사교육의 중심지인 대치동에서 아이들의 무너진 마음을 돌보며, 공부와 감정의 깊은 관계를 탐색해온 정신건강 전문의 김은주 교수는 지금은 사교육 로드맵이 아닌, 긍정적인 ‘공부 감정’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공부 감정이란, 학습 과정에서 느끼는 즐거움, 성취감, 자신감뿐만 아니라 불안, 좌절, 부담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포함한다. 즉, 공부 감정은 사고가 잘 작동하도록 도와주는 뿌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 책은 공부 감정이 어떤 방향으로 작용하느냐에 따라 학습 효율과 동기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공부의 성패를 가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공부 감정에 대해 알고 싶은 분들이라면, 기질과 발달 그리고 내재 동기에 이르기까지 내 아이에게 꼭 맞은 학습 전략을 찾고 싶은 분들이라면 이 책에 주목해보시길 바란다.




‘유쾌’와 ‘불쾌’라는 감정 경험은 의식적으로 기억될 때도 있지만, 대개 무의식 속에 차곡차곡 축적된다. 그 결과, 아이들은 문제를 풀다 답이 헷갈릴 때, 머리로만 생각하지 않고 ‘감정적 신호’를 더해 직감으로 답을 고르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히 “찍었다”라고 표현하지만, 실제로는 무의식에 축적된 감정적·경험적 기억이 빠르게 작동해 가장 적합한 답을 선택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사람이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명확한 이성적 이유를 들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무의식적 경험과 감정의 축적에서 비롯된 ‘직감’이 크게 작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 43p



우리 뇌에는 감정과 생각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부위가 있다. 이 부위는 ‘배내측 전전두피질’이라고 불리며, 감정을 느낄 때 몸의 반응뿐 아니라 어떻게 판단할지까지 함께 조절하고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감정과 사고는 서로 연결되어야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감정이 판단의 ‘방향타’ 역할을 해주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지식이 있어도 실제 상황에서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결국 아이가 학습을 잘 하려면, 지금 하고 있는 학습과 연결되는 유용하고 적절한 감정 상태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필요하다. / 47p












  아직 형식적 조작기에 이르지 않은 초등학생에게 추상적인 사고를 요하는 학습을 무리하게 선행시키면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 이를 테면 선행학습 트렌드를 좇아 아이의 수준에 맞지 않는 수학 개념이나 영어 문법을 강제로 가르치면 표면적으로는 따라가는 듯 보여도 실제로는 깊이 있는 이해 없이 기계적인 암기에만 그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겠다. ‘어느 학원, 무슨 반’에 속해 있는지만 들어도 그 아이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서열 구조의 학원 시스템은 동기 부여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이들의 심리적 안정을 위협하기도 하는 양면성을 지니기에 내 아이의 기질을 잘 고려한 학원을 찾아야 한다는 것도 유념해야겠다.



  또, 최근에 아이가 갑자기 학교 오케스트라부에 지원해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엄마 입장에서는 고학년을 앞두고 학원 하나 더 보내기에도 아쉬운 마음이었던지라 내심 고민이 컸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마음을 바꿨다. 저자는 운동이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한 가지 정도는 아이가 성취감을 느끼고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는 활동을 취미로라도 남겨두는 편이 좋다고 조언한다. 나중에 공부가 기대만큼 잘 안 되어서 좌절할 때 ‘그래도 난 이건 할 수 있잖아’라고 자존감을 느낄 수 있는 영역이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제 난도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서 굉장히 다르다. 실력은 낮은데 과제 난도가 너무 높으면 아이는 불안이 올라가서 의욕을 잃고 포기하게 되고, 한편 실력이 높은 아이한테 과제 난도가 너무 낮으면 지루해하고 권태에 빠진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들이 내 아이를 잘 관찰하고 선생님과도 상의하면서 우리 아이가 어느 정도 수준에서 도전 의식을 갖는지, 또는 의욕을 잃는지를 파악한 다음 학습에서 작은 성공 경험을 하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의 자존감을 높이려고 선행학습을 시키고, 레벨이 높은 반에 넣으려고 또 다른 과외를 붙이는 것보다, 작은 성공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학업 효능감’을 높일 때 입시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것이다. / 184p



과제의 난도가 아이의 현재 실력보다 살짝 높을 때 뇌는 ‘이건 해볼 만하다’라는 기대감을 갖게 되고, 이때 도파민이 분비되면서 자연스럽게 도전하게 된다. 도파민은 실제로 성공했을 때뿐 아니라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와 예측의 순간에도 분비되기 때문에, 이 과정이 학습 동기를 강화한다. 따라서 아이에게 도전 의식을 자극할 수 있을 정도로 난도를 약간씩 조정해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학습 설계 방식이다. / 186p











  얼마 전, 아이가 수학 문제를 풀다 막막함을 느꼈는지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혼자 책상 앞에서 몰래 눈물을 흘렸던 나의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잘 안 되니 마음이 답답해서 나는 종종 그렇게 혼자 울곤 했다. 그 생각이 떠올라 문제집을 덮고 아이와 대화를 나눴다. “엄마는 혼자서 진짜 많이 울었어. 누구한테 도움을 요청해야 할지 모르겠고, 계속 답답하기만 하고 힘들었거든. 그런데 있잖아. 너한테는 엄마가 있잖아. 모르는 건 당연한 거니까 시간이 걸리더라도 엄마랑 같이 해보면 안 될까? 정 안 되면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볼 수도 있어. 그러니까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힘들면 힘들다고, 왜 안 되는지 답답하면 계속 얘기하고 또 얘기해도 돼. 엄마는 얼마든지 기다려줄 수 있고 들어줄 수 있어.”




  그날의 대화가 약간은 도움이 되었는지 아이가 다음날부터는 좀 더 끈기 있게 문제에 접근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관련 문제에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차곡차곡 쌓아나간 공부 감정이 부디, 아이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조금이나마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나 역시 부모의 역할은 아이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는 이 책의 메시지를 두고두고 기억하며 실천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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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양육의 재발견 - 미디어를 중독이 아닌 몰입의 경험으로 만드는
에얄 도론 지음, 이은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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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변하는 AI 시대, 그러나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교육 방식에 과감히 의문을 던지는 책!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부모교육서!






  양육 환경과 그에 따른 과제는 시대에 따라 늘 변화해왔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우리 세대야말로 가장 큰 도전에 직면해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시험과 과제 중심의 획일적이고 집단적인 방식의 교육 제도 속에서, 치열한 입시 경쟁을 치르며 서열 중심의 양육 환경에 길들여진 우리 세대가 이제는 ‘AI 시대’라는 거대한 변화 앞에서 새로운 양육법과 그에 따른 과제를 요구받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은 매순간 빠르게 진화하고 있고 AI의 발전이 교육 시스템은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직업 환경을 바꿔놓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아이의 시간을 학습과 학원으로 빽빽하게 채워 넣고, ‘가르치는 부모’이자 ‘합리적이고 책임감 있는 양육자’로서의 역할을 관성처럼 수행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AI 시대, 양육의 재발견』의 저자인 에얄 도론 박사는 그간 당연하게 여겨왔던 양육 방식으로는 더 이상 아이 스스로 탐색하고 창의적으로 생각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워주지 못한다고 경고한다. 그러면서 알 수 없는 미래에 대비하고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통제 중심의 자녀 교육에서 벗어나 각자가 자신만의 창의적인 양육 비전을 세워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이 책은 그간의 낡고 경직된 양육 경험들을 새롭게 조명하며, 부모와 아이가 함께 만들어갈 새로운 육아 환경을 제시한다. 제한이나 비난이 아닌 ‘몰입’, 경쟁이 아닌 ‘창의’로 키우는 AI 시대의 새로운 자녀 양육법을 배우고 싶다면 이 책에 주목해보시길 바란다.




오직 자신만의 방식으로 부모가 되는 것, 그리고 우리 가족만의 개성과 습관, 루틴을 만들어가는 것이 오늘날 부모에게 주어진 진짜 도전이다. 가족만이 공유할 수 있는 직관과 내면의 언어, 특별한 취향을 나누며 하나의 팀처럼 함께 몰입하는 가족이 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원천이며,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삶의 유형이다. 무엇보다 부모는 자녀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스스로를 재창조해야만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있다. 이 점이 바로 이 책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핵심 주제다. / 16p



오늘날 양육과 교육은 내가 아들과의 대화를 통해 알아낸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배우기’에 기초해야 한다. 아이들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관습에 따라 자동으로 반응하는 태도를 내려놓고, 아이들과 더불어 생각하며 그때그때 답을 찾아가야 한다. / 54p












  이 책이 보다 특별한 이유는 수많은 육아서와 교육자들이 지향하는 ‘균형 잡힌 교육’이 아닌, ‘균형 잡히지 않은’ 열정과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주고, 제한이 아닌 몰입의 기회의 중요성을 제공하는 교육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밤새 컴퓨터만 해요, 계속 악기 연습만 해요, 계속 읽던 책만 읽어요.’ 하며 어딘가 왜곡되고 주위 사람들에게 불안한 모습으로 비춰지는 아이의 행동을 억누르고 제한하기보다는, 자신만의 몰입을 경험함으로써 우리 아이가 지금 무엇과 사랑에 빠져 있는지, 그 안에서 어떤 독특한 관점과 깨달음을 얻었는지에 집중할 것을 독려한다.




  또, TV와 게임은 무조건 차단하거나 해롭다고 단정 지을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볼지 시청의 질을 고려하면서 좀 더 복합적이고 비판적인 시청 습관을 갖추는 문화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특히 매 단계 목표를 수립하고 실패와 몰입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 게임 역시 긍정적인 영향이 더 큰 만큼, 아이가 선택한 활동을 시간 낭비로 치부하지 않고 부모도 함께 관심을 가져볼 것을 제안한다. 아이가 화면 속 폭력적인 행동을 따라 할까 봐 염려하기보다는, 아이를 신뢰하고 좀 더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미디어를 다룬다면 오히려 긍정적인 교육의 기회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다.




이번 주에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아이들이 실제로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자. “오늘 어땠어?” 같은 질문 대신, 이전에는 몰랐는데 지금은 이해하게 된 건 무엇인지, 이제는 할 수 있게 된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게 좋다. 그 내용이 아이 자신의 삶에, 또는 아이들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의 삶에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도 나눠보자. / 146p



모든 아이들이 집에서 비디오 게임과 텔레비전을 접할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었지만 차이는 부모의 태도에서 비롯됐다. 연구에 참여한 비영재 아동의 부모들은 텔레비전 시청 시간에 대해 아이와 끊임없이 협상하거나 제한을 뒀다. 반면, 영재 아동의 부모들은 아이의 텔레비전 시청을 거의 제한하지 않았고 오히려 다른 부분에 집중했다. 그들은 아이와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하고 아이 스스로 프로그램을 해석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비영재 아동의 부모들은 아이가 화면 속 폭력적인 행동을 따라 할까 봐 염려했지만, 영재 아동의 부모들은 아이를 신뢰했다. 전반적으로 영재 아동의 부모들은 ‘화면’이라는 주제 자체를 훨씬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다뤘다. / 159p












  책에서 강조하듯, 중요한 것은 아이에게 내재적 동기를 제공할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내재적 동기는 즉각적인 보상 없이도 행동할 수 있는 능력, 만족을 지연시키는 힘, 남들이 포기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버티는 힘을 키워준다고 한다. 보상이나 외부 목표가 아니라 도전 자체에 자발적으로 뛰어들기 때문에 이런 힘이 쌓인 아이는 결국 삶에 대해 느끼는 만족감 및 행복감도 더 높다고 한다. 따라서 부모는 암기와 반복 학습에 초점을 두거나 성과의 양에 집착하지 않고, ‘원래 그런 것’이라는 고정된 규칙이나 관습을 전달하려는 자세를 버려야 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아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발견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일을 가장 우선으로 삼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얼마나 오랫동안 보수적이고 통제 위주의 양육 방식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나 자신을 돌이켜보게 되었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과제, 규칙, 지시만 들먹이며 정작 아이 스스로 탐색하고 창의적으로 생각하는 힘은 길러주지 못했구나 하고 반성했다. 늘 내 아이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부모라면, 개인의 고유성이나 자유를 지지하기보다는 통제와 지시가 익숙한 부모라면, 급변하는 AI 시대에 걸맞은 교육 환경의 변화를 고민하는 부모라면 이 책의 도움을 받아보시길 추천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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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전 대 호랑전 - 명절맞이 부침개 대결
정현진 지음 / 창비 / 2025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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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맛있는 그림책이라니!

흥미진진한 요리 대결과 그 속에서 함께 정을 나누는 즐거움을 배우게 되는 아주 특별한 그림책!






  “얘들아~ 명절맞이 전 부치기 대결이 펼쳐진대! 우리 구경 가볼까?”

  전 부치기 대결이라는 말에 두 아이들이 귀를 쫑긋 세웁니다. 전이라는 말만 들어도 코끝에 지글지글 고소한 기름 냄새가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요? 아이들도 마치 냄새를 맡은 듯 책 앞으로 모여듭니다. 아니, 그런데 토끼와 호랑이가 전을 부친다고요? 아이들은 뭔가 재미있고, 맛있는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아 얼굴에 기대감이 가득합니다. 대체 어쩌다 토끼와 호랑이가 전 부치기 대결을 벌이게 되었는지 책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달큼한 냄새가 솔솔 퍼지는 것을 보니

인간들의 명절이로구나.

토 선생: 마을로 총총 내려가 파전을 날름 집어 먹으니 

이 맛이 으뜸이로다!

호 선생: 마을로 슬그머니 내려가 육전을 덥석 삼키니 

그 맛이 최고로다! 

/ 책 중에서





  명절날, 인간들이 사는 마을에서 맛본 고소한 부침개 맛이 자꾸만 생각이 난 토 선생과 호 선생. 서로 이 산에서 전으로는 자신을 따라올 자 없다 하며 마침내 요리 대결을 펼치기로 한다. 마을에서 소문난 전의 달인, 전 대감 댁 업둥이가 심사를 맡기로 하고 ‘육감’이라는 주제에 따라 해가 저물기 전까지 둘은 맛있는 전을 부쳐오기로 하는데…. 몸집은 작아도 손놀림이 시원한 토 선생이 이길 것인가, 덩치는 커도 손재주가 섬세한 호 선생이 이길 것인가. 과연 이 대결의 승자는 누구?!













“살살 무친 어린잎 채소 곁들이고

팔 색 고명으로 천지 만물 그려 내

눈에서도 입에서도 살살 녹는 육전 나왔소.

이름하여 살살 육전. 오감에 개성 한 아름 추가요.” 

/ 책 중에서





  이처럼 『토끼전 대 호랑전』은 토끼와 호랑이의 신나는 전 부치기 대결을 통해 어린이 독자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맛있는 그림책입니다. 전통의 미가 살아 있는 아름다운 그림체와 요리 대결에 흠뻑 빠지게 만드는 생생한 묘사가 아주 매력적이에요. 여기에 판소리처럼 문장 하나하나에 리듬감이 살아 있어 읽는 맛 또한 즐겁지요. 무엇보다 옹기종기 모여앉아 전을 부치는 과정 속에서 명절 본연의 의미인, 함께 모여 정을 나누는 즐거움을 배우게 됩니다. 문득, 책을 읽다보니 전 한 입 베어물고 기름 묻은 손가락까지 쪽쪽 빨아먹던 명절 풍경이 떠오르네요. 다가올 추석을 맞아 우리 아이들과 부침개보다 더 맛있는 이야기에 흠뻑 빠져보는 건 어떨까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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