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후쿠
김숨 지음 / 민음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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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있는 한 우리는 기억할 수 있다!

담담하고 절제된 언어지만 지독히도 생생한 전쟁과 폭력의 역사!






  이건 아주 거대한 한 편의 시다. 일제강점기 시절, 만주 위안소에 붙들린 15세 소녀의 상처에 관한 절망의 돌림노래다. 낡고 추레한 전쟁의 옷을 입고, 얇은 널빤지 방 안에서, 영문도 모른 채 거친 힘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해야 했던 수많은 소녀들의 아픔을 담은 슬픈 역사다.

 



삿쿠의 개수는 지난밤 내 몸에 다녀간 군인의 개수와 같다. 일곱, 여덟.

삿쿠 한 개는 군인 한 개.

삿쿠 두 개는 군인 두 개.

삿쿠 열 개는 군인 열 개.

삿쿠 스무 개는 군인 스무 개. / 24p

 



  간단후쿠는 귀리죽 한 사발보다 가볍다는, 아랫구멍은 고향 집에서 2리쯤 떨어진 우물보다 깊고 크다는, 일본군 위안소에서 위안부들이 주로 입었다던 간단한 원피스식의 옷이다. ‘간단후쿠를 입고, 나는 간단후쿠가 된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널빤지 방에서 유령 같은 몸을 하고 누워 있는 소녀의 모습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열 개의 널빤지 방. 열 개의 널빤지 문. 그 안의 다른 소녀들까지. 하지만 그 이름이 무엇이건 간단후쿠는 누가 입든 똑같은 간단후쿠가 된다는 서글픈 독백에, 여러 얼굴을 했던 소녀들이 하나같이 잔뜩 스크레치된 화면처럼 흐려지고 만다.

 












  이처럼 김숨 작가는 간단후쿠라는 기억의 언어를 통해 전쟁과 그에 희생된 이름 모를 수많은 위안부 소녀들의 삶 속으로 독자들을 데려온다. 쑥밭이 된 언덕에 목화밭에, 우물가에, 집마당에 있던 소녀들이 어쩌다 천황이 군인들에게 내린 하사품이 되어 낯선 만주강변에 와 있는 것인지. 대체 이 많은 소녀들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아버지는, 늙은 남편은 대체 얼마를 주고 자신을 이곳에 판 것인지. 간호사 양성소나 신발 공장에 취직한 줄 아는 부모는 딸이 낯선 전쟁터에서 군인들의 위안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지.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은 있기나 한 것인지. 구할 길 없는 물음만을 씹어 삼키는 소녀들의 비애가 애처롭게 다가온다.

 



나나코가 강물에 씻는 건 밭에서 막 딴 오이가 아니라 군인 콧물 묻은 삿쿠다. 그녀는 오이로 김치도 잘 담그는 아가씨가 아니라, 삿쿠로 풍선도 잘 부는 조센삐다. 부지런히 일하는 살림꾼이 아니라, 부지런히 군인을 데리고 자는 조센삐다.

간단후쿠를 입고 간단후쿠가 된 조센삐들은 만주 들판에 산다. 귀리죽 한 사발을 먹고 강을 찾아와 운다. 조센삐 조센삐 운다. 귀리죽 먹은 게 꺼질 때까지 조센삐 조센삐 울다가 강물에 얼굴을 씻고 조센삐 조센삐 날아간다. / 17p

 



나는 속으로 묻는다. ‘전쟁이 언제 끝난대?’

간호사가 대답한다. ‘군인들이 전부 죽으면.’

군인이 하나라도 살아 있으면 어떻게 돼?’

전부 죽어야 전쟁이 끝나. 살아 있는 군인이 하나라도 있으면, 죽은 군인들을 살려 내서라도 전쟁을 계속하려고 할 테니까.’ / 77p

 



나는 없애고 싶은 몸을 씻긴다.

나는 없애고 싶은 몸을 먹인다.

나는 없애고 싶은 몸에 간단후쿠를 입힌다.

나는 없애고 싶은 몸에 햇볕을 쬐어 주고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쐬어 준다.

내 몸은 어떻게 생겼을까. 비루하고 구질구질할까. 흉측하고 역겨울까. 나는 내 몸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 124p

 












  자신을 비루하고 구질구질한 몸으로 여기며 살아간다는 건 어떤 마음일까. 성병과 설사, 헛구역질과 고열은 당연하고, 매순간 나를 잊어버리는 병을 앓다 낯선 땅에서 스러져간 영혼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하루하루가 폭력의 연속이고, 사는 것이 고통인데 대체 무슨 수로 그 긴긴 시간을 견딜 수 있었을지소설은 담담하고 절제된 언어로 이들의 고통을 증언하지만, 정작 내 안에선 수많은 감정들로 요동치게 한다. 그리고는 결국엔, 그들의 야윈 등을 꼭 끌어 안아주고 싶어지게 한다.

 



  언어가 있는 한 우리는 기억할 수 있다. 반복되는 전쟁과 폭력과 학살. 간단후쿠를 입고 간단후쿠가 된 소녀들은 현재와 미래의 또 다른 언어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책을 꼭 읽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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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전들
저스틴 토레스 지음, 송섬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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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진 텍스트, 은폐된 목소리 그 위로 다시 쌓아올리는 서사!

시적이고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문장이 내내 마음을 훔친다!





  그건 어쩌면 셰에라자드가 이야기로 하여금 자신의 목숨을 구했던 천 일의 밤과도 같은 것. 네네는 흙먼지가 흩날리는 황폐한 사막 지역의 팰리스에 도착했을 때만 하더라도, 고작 열일곱이었을 때 잠깐 정신 병원에서 알고 지낸 노인 후안 게이가 팰리스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을 돌보아야겠다고 결심했을 때만 하더라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조각난 이야기를 깁듯, 낮과 밤을 뛰어넘어 그들이 나누었던 그 숱한 이야기가 과거의 누군가를, 혹은 자기 자신을 구하는 일이었음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지워진 텍스트 그 틈에서 시작된 이야기



  저스틴 토레스의 소설 『암전들』은 죽음을 앞둔 노인 후안이 네네에게 『성적 변종들: 동성애 패턴 연구』란 제목의 책을 건네는 것으로 시작된다. 잰 게이라는 퀴어 연구가이자 레즈비언이었던 사회학자가 3백 명이 넘는 동성애자들을 상대로 그들의 삶과 욕망들에 대해 증언한 것들을 수집한 책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어찌된 일인지 일부 텍스트를 제외하고는 검은색 마커로 시커멓게 칠해져 있었는데, 네네는 집요할 정도로 텍스트를 지우려한 흔적에, 그 안에서 편집당하고 삭제되어버린 퀴어들의 이야기에 강한 호기심을 느낀다.





대부분 검은색 마커로 뒤덮여 있었다. 언뜻 보았을 땐 실성한 상태로 아무렇게나 줄을 죽죽 그어 놓은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아마도 주(州) 공무원이 삭제한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곧 이 공들인 정확성과 노력, 집착에 가까운 정성은 검열을 뛰어넘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삭제된 텍스트. 기분이 좋다기보다는 심연의 놀라움, 강렬한 흥미가 일었다. 나는 후안에게 그 삭제를 도발이었다고, 하지만 남은 단어들은 어긋난 음조로 울려 퍼지고 있다고 말했다. / 68p



후안은 죽어 가고 있었지만, 오직 빛 속에서만, 오직 몸속에서만 그랬다. 어둠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나보다 더 예리하며 생기로 충만하게 방 안을 채웠다. / 76p



잰은 베를린, 런던, 옥스퍼드의 도서관에서 레즈비어니즘, 동성애, 성의 역전, 반음양증, 성적 변종-서로 교차해서 쓰일 수 있지만, 조금은 되는 대로인-을 다룬 활자 형태로 된 자료는 가리지 않고 다 읽었다. 그리고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줄곧, 이 도시들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레즈비언을 인터뷰했고, 그렇게 원고를 꾸렸다. 3백 개의 사례, 즉 레즈비언 3백 명의 삶이 세세하게 담긴 이 원고를.

「안타깝지만, 아가씨,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이 원고는 쓸모가 없을 것 같습니다.」 디킨슨은 이렇게 말한 뒤 입을 다물지만, 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덧붙인다. 「민간 지식이잖습니까.」 / 262p












  이때부터 소설은 검게 덧칠된 『성적 변종들』의 빈틈을 메워나가기 위한 두 남자의 긴긴 대화와 의식의 흐름으로 진행된다. 후안은 권위 있는 남성 의사의 이름으로만 출판할 수 있었던 제도적 한계로 인해 자신의 연구를 타인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던 잰 게이의 생애와 비애를, 비정상적 섹슈얼리티로 치부되어 자신들의 삶과 욕망을 질병이자 장애로 진단받을 수밖에 없었던 퀴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렇게 암전되고 만 사실들, 침묵을 강요당한 이들의 증언들은 후안의 이야기 속에서 마침내 존재의 흔적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 그러는 사이에, 오랫동안 성 노동자로 살았던 네네 역시 퀴어로서의 정체성을 마주하고 자신의 삶을 반추할 용기를, 진실된 목소리를 얻게 된다.




「난 육체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음, 저는 그…… 무관심을 따라하고 싶었어요. 또, 다른 사람에 대한 당신의 점잖고 교양 있는 관심도.」

「상대의 에고를 훔치기 위해 포주들에게 자신을 내준 젊은 망나니. 장 주네를 묘사한 사르트르 말이지.」

「맞아요. 정확히 그 말처럼, 당신의 에고를 훔치고 싶었어요. 아, 그 시절 전 참담했어요. 제 몸이 수치스러웠어요. 살갗을 찢고 나가고 싶었어요. 세상을 알고 싶었어요.」 / 60p



「혼란에 빠져 있었어요. 정신 병원에서 막 나왔을 때니까.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계속 다닐 수가 없었어요. 딱 한 달 만에 그만뒀죠.」

「네네, 아마 넌 그 모든 걸 낭만으로 포장했겠지?」

「모든 거라뇨?」

「실패 말이다. 네가 되려고 했던 영리하고 번지르르한 청년. 망나니 동성애자라는 관념 그 자체.」 / 62p



우리가 가진 이 책, 내가 찾아낸 모습 그대로 새까맣게 지워진 이 책이 더 좋아. 깨달음의 짧은 시들로 가득한 이 책 말이야. 헨리 박사의 지침이 무엇이었든 이에 대항하는 서사인 셈이지. 책을 순서대로 읽는다고 해서 무슨 이득이 있겠어? 아무 페이지나 열어젖히면 그 속에 과거로부터 솟아오른 어떤 삶의 스케치가 끝없이 펼쳐지고, 그 하나하나가 등장한 인물이 극복했거나 극복하지 못했음을 토로하는 단 하나의 증언인 것을.」 / 117p













  이처럼 『암전들』은 차별과 은폐 그리고 침묵에 의해 가려진 퀴어 서사를 두 남자의 대화를 통해 다시 잇는 작업을 시도하는 독특한 형태의 소설이다. 깜빡깜빡 암전되었다 불이 켜지기를 반복하는 전등 불빛처럼 이야기는 종종 조각난 상태로 모습을 드러내거나, 진실인지 허구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몽환적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폭력과 개인의 정체성을 지우려는 작업들은 뚜렷하게 감지된다. 하지만 소설은 그간에 가려진 역사를 전복하려 시도하거나 애써 추동하지 않는다. 어떤 상처는 벌어진 상태로 흘려보내기도 해야 한다는 것. 다만 중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의 삶에 목격자가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 그저 서로의 이야기를 진실 되게 들려주고 들어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한 이 두 남자의 대화가 긴 여운을 남긴다.





「네가 이 이야기 좋아할 줄 알았다! 상상해 보렴! 오로지 너를 위해, 그 이야기를 여기까지 짊어지고 왔다.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정말 까다롭게 굴지 않니?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지.」

「전 당신이 돌아오길 바라요. 영원히.」

「그런 생각은 버려, 네네. 그저 흘려보내.」 / 3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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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티컬 비즈니스 패러다임 - 사회 운동과 비즈니스가 교차하는 지점
야마구치 슈 지음, 최윤영 옮김 / 미래지향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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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에게도 철학과 교양이 필요하다!

비판과 반항의 정신이 비즈니스에 왜 필요한지 보여주는 책!





  한참 인문학 광풍이 불었을 무렵, 전에 없는 매우 실용적인 철학서로 주목받으며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등극한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를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저자인 야마구치 슈는 이 책을 통해 지금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문제와 해결책을 철학으로 돌파하는 법을 모색함으로써, 철학은 고리타분하다는 통념을 뒤엎고 혁신을 이끄는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크리티벌 비즈니스 패러다임』이란 이름으로, 기업의 사회적 혁신과 책임을 강조하는 새로운 개념의 경영철학서로 돌아왔다. 이 책은 ‘기존의 시장이 추구하는 경쟁우위의 어퍼머티브 비즈니스(소비자의 욕구를 전적으로 긍정하는 비즈니스)는 이제 역사를 다했다, 이제는 철학적·비판적 고찰을 통해 새로운 어젠다를 생성하고 사회 운동과 변혁을 추구하는 크리티컬 비즈니스가 필요한 때’라고 주장한다.





왜 크리티컬 비즈니스 패러다임이 요구되는가?




  테슬라, 이케아, 파타고니아, 더바디샵, 페어폰… 이들 기업이 지닌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크리티컬함’이다. 여기서 말하는 크리티컬함이란, 기존의 제도와 가치관에 도전하는 혁명적인 비즈니스, 소수와 피억압자의 소리를 대변하는 비즈니스, 혹은 환경이나 지속 가능성을 중심적인 과제로 두는 등 사회 운동으로서의 측면을 강하게 가진 비즈니스와 연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화석 연료에 의존하는 문명 방식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비전 선언과 함께 초기 전기차 시장을 주도한 테슬라, 신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도 사용할 수 있는 가구를 판매함으로써 ‘글로벌×틈새시장’의 어젠다로 확장시킨 이케아, 환경 보호 노력을 비즈니스와 연결시킨 파타고니아, 자연 유래 성분 활용과 환경보호 그리고 동물 권리 등 사회적 이슈에 적극적인 더바디샵, ‘수리할 권리를 되찾자’는 운동을 통해 스마트폰에서 발생하는 환경과 자원에 대한 부담을 줄이려한 페어폰 등. 이들 기업은 지금껏 많은 사람들이 ‘그런 거지’, ‘어쩔 수 없다’로 여기며 받아들였던 것들을 뒤로 하고, 현재와는 다른 이상적인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새로운 문제’를 생성해 비즈니스를 창출했다.




테슬라는 고전적인 경영학의 정석처럼 시장에 존재하는 잠재적 혹은 표면적인 고객의 불만·불안·불편을 해소함으로써 성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구나가 마지못해 받아들이던 시스템에 대해 전혀 다른 대안의 모습을 내보이며 새로운 문제를 생성함으로써 성장해 왔다. / 19p




결론적으로 정리하면, 어퍼머티브 비즈니스 패러다임으로 고객의 느슨한 니즈나 욕구에 계속해서 순응한다면 결국 사회 전체의 풍경이 느슨한 방향으로 끌려가고, 이는 또한 그 시장의 글로벌 경쟁력 상실로도 이어진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는 고객의 미적, 윤리적 감성을 끌어올릴 수 있는 크리티컬 비즈니스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 50p




이케아의 ThisAbles 프로젝트는 그동안 시장 원리에 따라 해결하기 어려웠던 ‘보편성 낮은 문제’도 공간축을 폭넓게 다시 설정해 ‘보편성은 낮지만 세계적으로 두루 존재하는 문제’로 재설정하면 매우 큰 경제적 효과를 가져오는 매력적인 사업 기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시사는 특히, 인구의 증가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고 많은 영역에서 시장의 성장을 기대할 수 없는 일본이라는 사회를 중심으로 사업을 펼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밝은 전망을 안겨준다. 세계로 눈을 돌리면 아지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얼마든지 있다. / 144p











  결국 이들 기업이 추구한 크리티컬 비즈니스는, 기존의 권위와 시스템에 대한 비판과 반항이 얼마나 사회의 개발과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요건인지를 시사한다. 역사는 전진하는 것만으로는 전개되지 않는다던 벤야민의 주장처럼, 야마구치 슈는 종종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대한 강한 위화감 속에서 훌륭한 비전이 탄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크리티컬한 역량을 갖추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사고와 행동양식은 무엇일까? 저자는 가장 먼저 몸(물리적)과 마음(정신적)의 다동성을 강조하며 새로운 문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기 세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또 보편적인 어젠다가 아닌, 나만의 어젠다에 따라 움직이고, 현실적인 목표 너머의 도전적인 과제를 추구할 것을 독려한다. 무엇보다 좋은 리더가 되고자 한다면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중요한데, 적을 레버리지한다는 사고방식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만들어내는 데 집중하라고 조언한다.




비판적이고 반항적이기를 멈춘 사회는 정체돼 버린다. 만일 그런 사회라면, 우리는 다시 ‘반항은 사회자원이다’라는 명제를 명심하면서 자신의 태도와 가치관을 새롭게 고쳐나갈 필요가 있다. / 84p




  고객 중심의, 품질이나 기능 중심의 비즈니스와 다른, 사회 운동과 사회 변혁을 이끄는 비즈니스를 제안하며 새로운 경영 방향을 제시해주는 점이 인상적인 책이었다. 특히 경영자의 철학과 교양을 강조하며, 효율주의와 단기 이익주의에서 벗어나 인간의 기본적 가치와 사회적 공감을 중시하려는 태도는 사회 곳곳의 리더들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마지막에는 크리티컬한 마인드를 기르기 위해 읽으면 좋은 책까지 소개되어 있으니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사실 경영책은 나의 일상과는 밀접한 관련은 없지만, 어떤 대상을 바라보고 경험하는 데 크리티컬한 마인드를 장착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울 수 있어 유용한 책이었다. 중간관리자, 큰 조직을 이끄는 대표, 사업을 운영 중인 창업가 등 곳곳의 모든 리더들에게 이 책을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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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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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천선란 작가의 손길에 닿으면 좀비마저도 애틋해지는 것인지!

종말의 장력을 뛰어넘어 서로가 서로를 구하는 아주 눈부신 이야기!







최악의 순간에서도 인간의 사랑과 품위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이 견고한 확신은 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내가 상상했던 좀비 아포칼립스는 사랑하는 사람을 잊고,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고, 시체가 되어 버린 처참한 몰골을 봐야만 하는 끔찍한 종말인데, 어째서 천선란 작가의 손길이 닿으면 좀비가 멸망시킨 세상마저도 눈부시게 애틋한 것인지 모르겠다. 랑과 나의 사막이 그러했고 이끼숲이 그러했듯, 이번에도 그녀는 종말의 장력을 뛰어넘어 서로를 구하고, 서로를 살리는 이야기로 우리에게 찾아왔다.

 




이토록 따스하고, 애틋한 종말의 세계에서

 



  때는 21091228. 동면 캡슐에서 깨어나 12년 만에 우주선 땅을 밟은 옥주는 뜻밖의 풍경에 정신이 아연해진다. 비릿한 피와 내장 같은 살덩어리들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데다, 함께 탑승했던 스무 명의 선원들 중 15명의 생체 신호가 모니터에 잡히지 않는 까닭이다. 심지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우주선의 시스템까지 망가뜨린 흔적이 있다. 사실, 이 우주선은 지구로부터 320광년 떨어진 행성 에르사로 향하고 있던 중이었다. 지구에 돌고 있는 위험한 감염병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낼 이주 행성을 찾기 위해 조사단으로 파견되었던 옥주였다. 오랜 친구이자 진균학자인 묵호와 함께. 사람들은 어디로 간 걸까? 옥주가 동면 상태에 있던 사이, 대체 우주선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좀비 아포칼립스의 서막을 여는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는 이 책에 수록된 세 연작 소설 중 첫 번째 소설이다. 무서운 감염병으로부터 벗어나 지구인들을 이주시킬 행성의 조사단원으로 있던 옥주는 12년 만에 동면 상태에서 깨어난 후, 자신의 우주선에도 이미 참혹한 좀비 바이러스가 찾아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두운 유년 시절을 지탱해준 오랜 친구 묵호에게도.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묵호에게는 인간일 때의 기억과 감각이 일부 남아 있는 데다, 우주선 내의 발병 원인이었던 최초의 좀비로부터 옥주의 동면 장치를 지키려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죽음으로써 좀비로 다시 태어나버린 묵호는 더 이상 자신과 같은 인간이 아닌 걸까. 이렇게 여전히 옥주를 지키고, 옥주마저 좀비로 만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어떻게 묵호가, 묵호가 아닐 수 있는 걸까. 그제야 옥주는 깨닫는다. 실은 꽤 오래전부터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삶에 이유가 되어준 사이였다는 것을. 내내 묵호는 옥주를 살리고 있었다는 것을.





묵호야, 살 수 있지. 이번에도.

묵호는 억지로 눈을 뜨려다 실패해 완전히 감아버렸다. 그 상태로 입술을 움직였다.

.’

그리고 뒤이어 천천히.

이건아무것도 아니야.’

느리게, 더 느리게.

그때가아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안도했다. 묵호는 살겠구나. 맞아, 그 순간을 살아낸 이상 그 어떤 것에도 죽을 리가 없다. /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중에서 39p

 



하지만 묵호는 좀비가 아닐 것이다. 메이린의 말처럼 인간이 만들어 낸 좀비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면, 묵호에게는 기억이나 본능이랄 게 없어야 했다. 눈을 맞추는 것도, 내게 손을 뻗는 것도 있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묵호는 하고 있고, 그러니 묵호는 좀비가 아닐 것이다. 우리가 함께 보았던 영화 속 좀비의 모습을 그대로 하고는 있지만 그 좀비는 가족도 알아보지 못해 잔인하게 뜯어 먹지 않았던가. 이렇게 뺨을 만지는 좀비는 없지 않았던가. /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중에서 42p

 




  좀비가 장악한 세상에서 식물인간 상태가 되어버린 엄마를 끝까지 돌보는 소녀의 이야기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좀비가 되어버린 아내의 손을 놓지 않는 화자의 이야기 우리를 아십니까가 그러하듯, 천선란의 소설에서 좀비는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종말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보다 뚜렷하게 느끼는 생의 감각이며, 멸망 후에도 사랑하는 이를 지키고 기억하려는 인간성에 대한 의지다. 서로의 목소리와 숨소리만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폐허가 된 마음과 지구로부터 서로를 구할 수 있음을 좀비라는 존재로 하여금 보다 선연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제비야, 어떤 것이 새고, 어떤 것이 인간인지 구분하려 하지 말자. 그저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것에만 집중하자. 우리가 눈을 맞추고, 서로를 부르고, 서로를 안을 수 있다는 것에만. 그거 하나면 충분하지 않겠니? / 제 숨소리를 기억하십니까중에서 151p

 



어렴풋이 짐작 가기는 해. 염증은 몸을 붓게 만들고, 몸이 부으면 숨 쉬는 것도 힘들고 시야도 탁해지거든. 그런 몸으로는 세상을 제대로 마주하기 힘들어. 사람은 몸이 힘들면 똑같은 것도 더 비관적으로 받아들이기 마련이거든. 고마운 것들에 집중하자. 아빠는 세상이 이렇게 변해도 우리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에 매일 감사해.

() 망가진 세상에서도 열심히, 쉬지 않고, 느리지만 확실한 숨을 쉬자. 사랑한다. / 제 숨소리를 기억하십니까중에서 158p

 



가녀리지만 단단함이 느껴져. 뼈로 이루어진 몸. 당장 죽을 것 같고, 가끔은 이미 죽은 것 같은데, 당장 무너질 것 같은 몸에도 이토록 단단한 뼈가 있구나. 무너지지 않겠구나. 나약하지 않구나. 살아 있구나. 살아 있는 걸 마음에서 죽이지 말아야지. 살아 있는데 미리 죽이지 말아야지. 살아 있다는 것만 생각해야지.” / 제 숨소리를 기억하십니까중에서 195p

 





  익숙한 좀비 장르의 틀을 깨뜨린, 가장 애틋하고 아름다운 좀비 이야기로 기억될 책이다. 이 책을 적극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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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탱고 - 2025 노벨문학상 수상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조원규 옮김 / 알마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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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데뷔작!

몰락의 파도에 부유하며 휩쓸리는 주인공들처럼 마지막 장까지 속절없이 읽을 수밖에 없는 작품!






  202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헝가리 작가인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가 호명되었다. 무슨 운명이었을까. 노벨문학상 발표 당일, 나는 우연히 『사탄탱고』를 소개하는 글을 읽고 습관처럼 온라인 서점의 구매 목록에 담아두었는데, 마침 그가 지목된 것이었다. 한국 독자들에게는 다소 낯선 작가일 뿐만 아니라 예의 ‘실험적 산문, 예언적 언어, 종말론적’이란 수식들이 일종의 벽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일단 저 제목과 붉은 표지의 강렬함에 압도된 뒤라서 주저 없이 이 작품을 선택했다. 그렇게 책을 다 읽고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일단 도입부를 읽는 데만 약간의 정성을 기울이고 나면 몰락의 파도에 부유하며 휩쓸리는 주인공들처럼 마지막 장까지 속절없이 읽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란 것이었다. 나는 이제 겨우 그의 데뷔작을 읽었을 뿐인데, 라슬로라는 이름은 이토록 강렬하게 각인되고 말았다.





“좀 전에 이상한 광경을 봤다고 그럴 필요는 없어. 천국? 지옥? 피안? 다 헛소리야. 난 그런 지어낸 얘기는 다 정신을 홀려놓기 위한 거라고 믿네. 그렇게 환상에 마음을 빼앗기면 진실은 영영 알 수 없는 법이야.” / 321p




  어쩌면 이들은 연속된 불행에 일상의 감각이 마비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불행이 계속되다보니 몰락해가는 현실을 저지할 힘도, 변화에 대한 갈망도,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날 희망도 사라져버린 게 틀림없다. 공산주의가 붕괴되어가던 1980년대 헝가리의 어느 해체된 집단농장 마을을 배경으로 한 소설 『사탄탱고』 속에는 지속된 가난과 몰락으로 무력감에 길들여진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기필코 내일은 떠나리라 다짐하면서도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 후터키, 의자에서 거의 몸을 일으키지 않고 최소한의 생활과 움직임만을 추구하는 의사, 마치 펑크 난 타이어처럼 그저 술집에서 술이나 마실 수 있으면 족한 헐리치 등 이들은 모두 ‘탈출의 전망이 부재하는 고통’에 영원히 갇혀버린 것만 같다.





그의 눈은 빛 속에서 맴도는 수많은 먼지들을 보았고, 코는 눅눅한 부엌 냄새를 맡고 있었다. 갑자기 혀 끝에 신맛이 느껴졌다. 그는 그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농장이 해체되고,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처럼 또 미련 없이 떠나가버린 뒤에 의사와 학교 교장을 포함해 오직 그와 몇몇 집들만이 남았는데, 누구도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랐다. 그때부터 그는 음식 맛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죽음은 무엇보다 수프와 고기 접시에, 그리고 담벼락에서부터 스며들어올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22p




여위고 남루한 몰골로 그는 도시를 향해 나아가고 마을은 점점 등 뒤로 멀어져서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그는 자신이 돈을 손에 쥐기도 전에 잃어버렸음을 깨달았고, 오래전부터 예감한 일이 사실이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바로,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실은 그는 떠나려고 해본 적도 없었다. 적어도 이곳에선 익숙한 풍경의 그늘 속으로 숨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저 바깥, 마을 외부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몹시 낯설고 불확실한 무엇일 따름이었다. / 32p













  그러던 어느 날,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이리미아시가 마을로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때부터 마을 사람들 사이에 이상한 활기가 돌기 시작한다. 이리미아시라면 분명 죽어 있던 마을을 되살리고 자신들을 구원해줄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 길로 술집에 모여 밤새 술에 절어 기쁨의 탱고를 추며 그간 불안과 절망으로 억눌려 있던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소녀가 꿈꾸었던 ‘돈 나무’에 대한 환상만큼이나 헛되고 또 다른 형태의 몰락만 있을 뿐이다. 아무리 없애고, 또 없애도 소리 없이 생겨나 모든 것을 뒤덮는 거미줄처럼 헤어나올 길이 없는 쇠락의 운명에 탈출구는 없다.






‘우리는 이 세계라는 돼지우리 속에서 태어나 갇혀 있지.’ 그는 여전히 지끈거리는 머리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오물 속에 뒹구는 돼지들처럼 뭐가 어찌된 건지도 모르고 눈앞에 어른거리는 젖꼭지를 향해 아우성치지. 사료 통으로 빨리 가려고, 밤이 되면 침대로 돌아가려고 허둥대는 거야.’ 그는 바지의 단추를 잠그고 채찍질하듯 퍼붓는 빗줄기 속으로 들어갔다. “내 낡은 뼈다귀를 씻어다오!” / 210p





“난 예전엔 잘못 생각했어. 얼마 전에야 깨달았다네. 나와 벌레, 벌레와 강물, 강물과 강을 넘어가는 고함 소리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것을. 모든 건 공허하고 의미가 없는 거야. 뿌리칠 수 없는 구속과 시간을 뛰어넘은 대담한 도약 사이에서, 영원히 실패하는 감각이 아닌 오로지 환상만이 우리로 하여금 비참한 구덩이에서 헤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끔 유혹하지. 하지만 도망칠 길은 없어, 귀 늘어진 양반!” / 321p














  이처럼 작가는 묵시록 문학의 거장답게, 체제에 철저히 유린당하다 끝내는 고통의 원 안에 갇히고 마는 인간 군상을 거침없이 그려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마냥 절망적으로 읽히지 않는 것은, 지독한 몰락의 끝에 이르렀을 때에야 인간은 비로소 부조리한 현실에 눈을 뜨고 마침내 세계의 진실에 다다를 수 있다는 메시지를 품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 안에서 여전히 희망하는 인간을 꿈꾸는 라슬로의 문학은 그래서 음울하나 어둡지 않고, 고통스러우나 절망적이지 않다.





“잘 알아둬라. 인생의 비밀은 농담에 있다는 걸.” / 363p





  평소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에 높은 벽을 느꼈던 분들이라면 『사탄탱고』 만큼은 도전해봄직 하지 않을까 싶다. 복잡한 상징성이나 독특한 서술 구조를 애써 의식하지 않아도 이야기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작품이다. 이 책을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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