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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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천선란 작가의 손길에 닿으면 좀비마저도 애틋해지는 것인지!

종말의 장력을 뛰어넘어 서로가 서로를 구하는 아주 눈부신 이야기!







최악의 순간에서도 인간의 사랑과 품위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이 견고한 확신은 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내가 상상했던 좀비 아포칼립스는 사랑하는 사람을 잊고,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고, 시체가 되어 버린 처참한 몰골을 봐야만 하는 끔찍한 종말인데, 어째서 천선란 작가의 손길이 닿으면 좀비가 멸망시킨 세상마저도 눈부시게 애틋한 것인지 모르겠다. 랑과 나의 사막이 그러했고 이끼숲이 그러했듯, 이번에도 그녀는 종말의 장력을 뛰어넘어 서로를 구하고, 서로를 살리는 이야기로 우리에게 찾아왔다.

 




이토록 따스하고, 애틋한 종말의 세계에서

 



  때는 21091228. 동면 캡슐에서 깨어나 12년 만에 우주선 땅을 밟은 옥주는 뜻밖의 풍경에 정신이 아연해진다. 비릿한 피와 내장 같은 살덩어리들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데다, 함께 탑승했던 스무 명의 선원들 중 15명의 생체 신호가 모니터에 잡히지 않는 까닭이다. 심지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우주선의 시스템까지 망가뜨린 흔적이 있다. 사실, 이 우주선은 지구로부터 320광년 떨어진 행성 에르사로 향하고 있던 중이었다. 지구에 돌고 있는 위험한 감염병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낼 이주 행성을 찾기 위해 조사단으로 파견되었던 옥주였다. 오랜 친구이자 진균학자인 묵호와 함께. 사람들은 어디로 간 걸까? 옥주가 동면 상태에 있던 사이, 대체 우주선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좀비 아포칼립스의 서막을 여는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는 이 책에 수록된 세 연작 소설 중 첫 번째 소설이다. 무서운 감염병으로부터 벗어나 지구인들을 이주시킬 행성의 조사단원으로 있던 옥주는 12년 만에 동면 상태에서 깨어난 후, 자신의 우주선에도 이미 참혹한 좀비 바이러스가 찾아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두운 유년 시절을 지탱해준 오랜 친구 묵호에게도.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묵호에게는 인간일 때의 기억과 감각이 일부 남아 있는 데다, 우주선 내의 발병 원인이었던 최초의 좀비로부터 옥주의 동면 장치를 지키려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죽음으로써 좀비로 다시 태어나버린 묵호는 더 이상 자신과 같은 인간이 아닌 걸까. 이렇게 여전히 옥주를 지키고, 옥주마저 좀비로 만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어떻게 묵호가, 묵호가 아닐 수 있는 걸까. 그제야 옥주는 깨닫는다. 실은 꽤 오래전부터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삶에 이유가 되어준 사이였다는 것을. 내내 묵호는 옥주를 살리고 있었다는 것을.





묵호야, 살 수 있지. 이번에도.

묵호는 억지로 눈을 뜨려다 실패해 완전히 감아버렸다. 그 상태로 입술을 움직였다.

.’

그리고 뒤이어 천천히.

이건아무것도 아니야.’

느리게, 더 느리게.

그때가아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안도했다. 묵호는 살겠구나. 맞아, 그 순간을 살아낸 이상 그 어떤 것에도 죽을 리가 없다. /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중에서 39p

 



하지만 묵호는 좀비가 아닐 것이다. 메이린의 말처럼 인간이 만들어 낸 좀비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면, 묵호에게는 기억이나 본능이랄 게 없어야 했다. 눈을 맞추는 것도, 내게 손을 뻗는 것도 있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묵호는 하고 있고, 그러니 묵호는 좀비가 아닐 것이다. 우리가 함께 보았던 영화 속 좀비의 모습을 그대로 하고는 있지만 그 좀비는 가족도 알아보지 못해 잔인하게 뜯어 먹지 않았던가. 이렇게 뺨을 만지는 좀비는 없지 않았던가. /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중에서 42p

 




  좀비가 장악한 세상에서 식물인간 상태가 되어버린 엄마를 끝까지 돌보는 소녀의 이야기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좀비가 되어버린 아내의 손을 놓지 않는 화자의 이야기 우리를 아십니까가 그러하듯, 천선란의 소설에서 좀비는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종말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보다 뚜렷하게 느끼는 생의 감각이며, 멸망 후에도 사랑하는 이를 지키고 기억하려는 인간성에 대한 의지다. 서로의 목소리와 숨소리만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폐허가 된 마음과 지구로부터 서로를 구할 수 있음을 좀비라는 존재로 하여금 보다 선연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제비야, 어떤 것이 새고, 어떤 것이 인간인지 구분하려 하지 말자. 그저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것에만 집중하자. 우리가 눈을 맞추고, 서로를 부르고, 서로를 안을 수 있다는 것에만. 그거 하나면 충분하지 않겠니? / 제 숨소리를 기억하십니까중에서 151p

 



어렴풋이 짐작 가기는 해. 염증은 몸을 붓게 만들고, 몸이 부으면 숨 쉬는 것도 힘들고 시야도 탁해지거든. 그런 몸으로는 세상을 제대로 마주하기 힘들어. 사람은 몸이 힘들면 똑같은 것도 더 비관적으로 받아들이기 마련이거든. 고마운 것들에 집중하자. 아빠는 세상이 이렇게 변해도 우리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에 매일 감사해.

() 망가진 세상에서도 열심히, 쉬지 않고, 느리지만 확실한 숨을 쉬자. 사랑한다. / 제 숨소리를 기억하십니까중에서 158p

 



가녀리지만 단단함이 느껴져. 뼈로 이루어진 몸. 당장 죽을 것 같고, 가끔은 이미 죽은 것 같은데, 당장 무너질 것 같은 몸에도 이토록 단단한 뼈가 있구나. 무너지지 않겠구나. 나약하지 않구나. 살아 있구나. 살아 있는 걸 마음에서 죽이지 말아야지. 살아 있는데 미리 죽이지 말아야지. 살아 있다는 것만 생각해야지.” / 제 숨소리를 기억하십니까중에서 195p

 





  익숙한 좀비 장르의 틀을 깨뜨린, 가장 애틋하고 아름다운 좀비 이야기로 기억될 책이다. 이 책을 적극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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