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단후쿠
김숨 지음 / 민음사 / 2025년 9월
평점 :

언어가 있는 한 우리는 기억할 수 있다!
담담하고 절제된 언어지만 지독히도 생생한 전쟁과 폭력의 역사!
이건 아주 거대한 한 편의 시다. 일제강점기 시절, 만주 위안소에 붙들린 15세 소녀의 상처에 관한 절망의 돌림노래다. 낡고 추레한 전쟁의 옷을 입고, 얇은 널빤지 방 안에서, 영문도 모른 채 거친 힘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해야 했던 수많은 소녀들의 아픔을 담은 슬픈 역사다.
삿쿠의 개수는 지난밤 내 몸에 다녀간 군인의 개수와 같다. 일곱, 여덟.
삿쿠 한 개는 군인 한 개.
삿쿠 두 개는 군인 두 개.
삿쿠 열 개는 군인 열 개.
삿쿠 스무 개는 군인 스무 개. / 24p
간단후쿠는 귀리죽 한 사발보다 가볍다는, 아랫구멍은 고향 집에서 2리쯤 떨어진 우물보다 깊고 크다는, 일본군 위안소에서 ‘위안부’들이 주로 입었다던 간단한 원피스식의 옷이다. ‘간단후쿠를 입고, 나는 간단후쿠가 된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널빤지 방에서 유령 같은 몸을 하고 누워 있는 소녀의 모습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열 개의 널빤지 방. 열 개의 널빤지 문. 그 안의 다른 소녀들까지. 하지만 그 이름이 무엇이건 ‘간단후쿠는 누가 입든 똑같은 간단후쿠가 된다’는 서글픈 독백에, 여러 얼굴을 했던 소녀들이 하나같이 잔뜩 스크레치된 화면처럼 흐려지고 만다.



이처럼 김숨 작가는 ‘간단후쿠’라는 기억의 언어를 통해 전쟁과 그에 희생된 이름 모를 수많은 위안부 소녀들의 삶 속으로 독자들을 데려온다. 쑥밭이 된 언덕에 목화밭에, 우물가에, 집마당에 있던 소녀들이 어쩌다 천황이 군인들에게 내린 하사품이 되어 낯선 만주강변에 와 있는 것인지. 대체 이 많은 소녀들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아버지는, 늙은 남편은 대체 얼마를 주고 자신을 이곳에 판 것인지. 간호사 양성소나 신발 공장에 취직한 줄 아는 부모는 딸이 낯선 전쟁터에서 군인들의 위안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지.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은 있기나 한 것인지. 구할 길 없는 물음만을 씹어 삼키는 소녀들의 비애가 애처롭게 다가온다.
나나코가 강물에 씻는 건 밭에서 막 딴 오이가 아니라 군인 콧물 묻은 삿쿠다. 그녀는 오이로 김치도 잘 담그는 아가씨가 아니라, 삿쿠로 풍선도 잘 부는 조센삐다. 부지런히 일하는 살림꾼이 아니라, 부지런히 군인을 데리고 자는 조센삐다.
간단후쿠를 입고 간단후쿠가 된 조센삐들은 만주 들판에 산다. 귀리죽 한 사발을 먹고 강을 찾아와 운다. 조센삐 조센삐 운다. 귀리죽 먹은 게 꺼질 때까지 조센삐 조센삐 울다가 강물에 얼굴을 씻고 조센삐 조센삐 날아간다. / 17p
나는 속으로 묻는다. ‘전쟁이 언제 끝난대?’
간호사가 대답한다. ‘군인들이 전부 죽으면.’
‘군인이 하나라도 살아 있으면 어떻게 돼?’
‘전부 죽어야 전쟁이 끝나. 살아 있는 군인이 하나라도 있으면, 죽은 군인들을 살려 내서라도 전쟁을 계속하려고 할 테니까.’ / 77p
나는 없애고 싶은 몸을 씻긴다.
나는 없애고 싶은 몸을 먹인다.
나는 없애고 싶은 몸에 간단후쿠를 입힌다.
나는 없애고 싶은 몸에 햇볕을 쬐어 주고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쐬어 준다.
내 몸은 어떻게 생겼을까. 비루하고 구질구질할까. 흉측하고 역겨울까. 나는 내 몸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 124p


자신을 비루하고 구질구질한 몸으로 여기며 살아간다는 건 어떤 마음일까. 성병과 설사, 헛구역질과 고열은 당연하고, 매순간 ‘나를 잊어버리는 병’을 앓다 낯선 땅에서 스러져간 영혼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하루하루가 폭력의 연속이고, 사는 것이 고통인데 대체 무슨 수로 그 긴긴 시간을 견딜 수 있었을지… 소설은 담담하고 절제된 언어로 이들의 고통을 증언하지만, 정작 내 안에선 수많은 감정들로 요동치게 한다. 그리고는 결국엔, 그들의 야윈 등을 꼭 끌어 안아주고 싶어지게 한다.
언어가 있는 한 우리는 기억할 수 있다. 반복되는 전쟁과 폭력과 학살. 간단후쿠를 입고 간단후쿠가 된 소녀들은 현재와 미래의 또 다른 언어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책을 꼭 읽어야 하는 이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