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가 돌아왔다
김범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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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억이라는 유산을 들고 할머니가 돌아왔다!

유쾌한 풍자와 미스터리, 연민의 역사를 한 데 아우른 페이지터너!

 

 

 

   광복 직전 염병에 걸려 죽은 줄 알았던 할머니가 돌아왔다. 67년 만에, 금발 머리에 깃털 달린 기괴한 밤색 벙거지 모자를 쓰고 동전만 한 은빛 반짝이가 잔뜩 달린 요상한 원피스를 입고서. 이산가족이 상봉이라도 하듯 집안이 눈물바다가 되어야 하는 게 마땅한 일인데, 고매하고도 고결한 정신을 지닌 할아버지는 대뜸 ‘개잡년’이라고 욕을 하며 할머니에게 나가라고 소리를 치고, 아버지는 집에도 들어오지 않은 채 침묵했으며, 절을 받아야겠다는 할머니의 말에 어머니는 남편과 상의한 후에 절을 하겠다한다. 여기에 고모는 핏덩이 같은 쌍둥이를 두고 도망간 할머니에 대한 분노로 왜 왔느냐고 악다구니를 퍼붓는다. 소설 속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동석은 그저 죽은 줄 알았던 할머니의 이 떠들썩한 귀환에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하지만 이 곤란한 광경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할머니가 기다렸다는 듯 모두에게 회심의 한 방을 터뜨렸으니, 자그마치 60억. 60억이나 되는 유산을 물려주러 왔노라고 선언한 것이다.

 

 

 

할머니, 60억은 정말 있는 건가요?

 

 

   『할매가 돌아왔다』는 일본 순사와 바람이 나 집 나간 정끝순 할머니가 67년 만에 60억이라는 유산을 들고 가족 앞에 나타나 벌어지는 가족희비극이다. 마치 이 집에 오래전부터 살기라고 했었다는 듯 능청스럽게 나타나 가족 앞에 공개한 이 어마어마한 유산은 당장 나가라던 가족의 야유를 금세 숨죽이게 했고, 그들은 저마다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굴려대느라 바빠지기 시작한다. 60억 이후, 마침내 집안은 비로소 화해와 용서, 잃어버린 67년, 감동의 대 서사시가 엄숙하게 전개되면서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진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할머니를 용서 못하는 듯했지만, 전도양양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고모와 이혼 때 위자료로 청계천에 위치한 3층 건물을 받아냈으며 현재 촉망받은 대학교 전임강사인 여동생 동주, 정의와 양심보다 돈을 가장 중요시 여겼던 어머니는 이때부터 할머니를 극진히 대하게 된 것이다.

 

 

 

“오빠 결혼 문제는 일단 보류한다고 해도 우리 집 정말 더 이상은 이대로 안 돼. 우리 집은 고여 있는 물 같아. 할아버지 정정하신 거야 장수 시대가 되었으니 감사한 일이지만 환갑이 지난 엄마가 아직도 슈퍼에서 일하시면서 가계를 책임지고 있는 건 정상이 아니야. 미한한데 이건 순전히 아빠랑 오빠 때문이야. 아빠야 뭐 그렇다 치고 오빠는, 정말 미안하지만 오빤 10년 전부터 성장이 멈춘 거야.” / 53p

 

 

 

 

 

 

   그런데, 정말 할머니에게 60억이 있다는 게 사실일까? 무려 88회 낙방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친구가 사주는 술이나 얻어먹고 PC방을 전전하던 만년 백수 동석은 할머니를 모시고 서울 구경을 시켜드리던 가운데 이를 의심할 만한 정황을 포착해내고 만다. 일본에서 택시 사업을 해 60억을 벌었다던 할머니는 관광 안내원의 또렷한 일어 설명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 말로만 60억이지 그걸 확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언제 주겠다는 것인지 그걸 들은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확인이 필요한 일인데 그걸 누가 어떤 방식으로 확인해야 하는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의 60억을 두고 가족끼리 눈치싸움이 계속되던 어느 날, 할머니가 동석에게 PC방을 차려주기로 하며 약속했던 1억이 문제가 생기자 본격적으로 의심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할머니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고모와 동주, 어머니가 팀으로 연합해 치밀하고 집요하게 할머니의 뒤를 캐내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새로운 사실들이, 베일에 싸여 있던 할머니의 정체가, 그녀의 지난 67년이 하나둘씩 그 모습을 드러내고야 만다.

 

 

 

순간이란 참으로 강렬한 것이었다.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놓쳐버리게 되는 어느 한순간. 그러나 그 순간을 놓치면 어떤 경우엔 전체의 의미를 다 오해하게 될 수도 있다. 하긴 바로 그 때문에 세상엔 끝없는 오해와 불통이 일어나고 그 와중에 다툼과 증오가 태어나는 것이겠지만. / 132p

 

 

 

 

 

 

   60억의 행방을 찾기 위한 것으로 출발했던 추적은 뜻밖에도 한국 근현대사와 그 속에서 폭력과 억압, 상처로 얼룩진 여성의 서사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매일 뜀을 뛰고 금강에서 피라미를 잡고 야산에서 뱀, 들판에서 메뚜기, 논에서 개구리와 우렁이를 잡는 재미로 살던 활달한 계집아이가 하늘 같은 최씨 집안의 도련님인 할아버지와 만나 혼인 한번 하려고 지독하게 맞다가 죽을 뻔했고, 그 넓은 강경뿐 아니라 주변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소문난 기적 같은 혼인을 해 참 눈물 쏙 빼는 시집살이를 했더라’는 할머니의 담담한 이야기와 달리 거기에는 꽤나 복잡한 내력이 숨어 있었다. 그것은 폭력을 일삼았던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의 사회 속에서 억압당하고 무능력한 가장을 대신해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고단한 여성들의 삶이었다. 동석으로서는 참 믿기도 그렇고 안 믿기도 그런 꼭 60억 같은 이야기, 본인이 아니고서야 다 이해할 수 없을 이야기. 어쩌면 이 땅의 모든 엄마와 할머니들이 겪었을지도 모를 이야기. 덕분에 가족들도 할머니를 이해하고 그간 쌓아왔던 오해들을 조금씩 풀게 된다.

 

 

 

난 배 속의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배만 보호하느라 네 할아비 주먹을 피할 길이 없었다. 내 생활은 지옥이었다. 맞는 게 억울하고 분했지만 그것보다 더 괴로운 건 공포였다. 네 할아비 눈빛이 조금이라도 이상해지만 난 겁이 나서 견딜 수 없었지. 난 지금도 세상에서 맞는 게 제일 싫다. 조선 남자들은 참 이상해. 왜 겁이 나거나 불안해지면 자기 여자를, 아무 힘도 없는 여자를 두들겨 팰까? 조선 남자들은 다 비겁하고 못난 놈들이다. 그래서 지금도 난 짝불이가 싫다. / 256p

 

 

‘사랑은 수락이다. 그리하여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 존재 자체를 수락하는 것이다. 그 존재의 모든 허약함까지도. 그렇다. 수락하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인간에 실망하지 않게 된다. 다만 서로 연민할 뿐이다.’ / 304p

 

 

 

   소설은 60억을 둘러싼 미스터리 같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중심축으로 하고 있지만, 등장인물 각각의 내밀한 속사정을 통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짊어져야 했던 삶의 무게들, 사회적으로 기대하게 되는 저마다의 역할들, 얄팍한 허상과 이중성으로 포장된 사회의 단면들도 함께 드러낸다. 한편의 풍자극처럼 찌질하면서도 유쾌하게, 그렇다고 마냥 웃기에는 어딘지 많이 서글프게. 이것이 우리가 이 소설을 ‘좌충우돌 60억 유산 쟁탈극’으로 단순하게 말할 수 없는 이유일 테다.

 

 

 

난 화가 났지만 내가 맞은 것보다 더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대들 수는 없었다. 동주는 집에 없었고 할아버지는 끝내 방문을 열지 않았다.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가자 어머니가 부서진 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내가 도우려고 다가섰지만 어머니는 매섭게 내 손을 뿌리쳤다. 어머니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눈물이 핏빛, 빨간 김칫국물에 떨어졌다. 그 후로 난 절대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다. 엄마라고 부르며 이물 없이 굴다가 나도 어느 순간 어머니에게 화를 내며 달려들 것 같아 의도적으로 호칭을 바꾸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 258p

 

 

 

 

 

 

   결국 60억 유산을 둘러싼 소동은 할머니가 잃어버린 67년의 세월을 되찾고, 드러나지 않았던 가족의 폭력과 상처들을 치유하는 과정으로 귀결된다. 할머니는 정말 60억을 갖고 있는 걸까, 소설 시작부터 내내 품게 되는 이 궁금증은 끝내 풀릴 길이 없지만, 그래서 이야기는 마지막까지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프레드릭 배크만의 『브릿마리 여기 있다』 라는 작품을 떠올리곤 했는데, 남편의 그늘 속에서 자식의 어머니로서의 삶만을 살아온 이 땅의 엄마와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긍정해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을 이해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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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 - 제9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서철원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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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믿음, 신념과 의지 그 사이에서 떠돌았던

이들의 고결한 무늬를 오롯이 남긴 격이 다른 역사소설! 

 

 

   어느 새 혼불문학상이 9회를 맞았다. 사회 구조적 모순 속에 숨겨진 음모와 진실을 들여다본 소설 『고요한 밤의 눈』과 요리라는 소재를 통해 한중일 세 나라간의 공존가능성을 타진한 『칼과 혀』,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린 욕망의 이중성과 권력의 역학 관계를 그린 『독재자 리아민의 다른 삶』을 거쳐 오는 동안 혼불문학상은 민족관과 시대성을 반영한 다양한 작품으로 스펙트럼을 넓혀왔다. 그 중에서도 앞선 8회 수상작인 『독재자 리아민의 다른 삶』이 욕망의 게임 속에 주인공들을 툭 내던져놓음으로써 다소 경쾌하게 읽혔다면, 이번 수상작인 『최후의 만찬』은 진중한 역사 소설로 오랜만에 무게감이 꽤 묵직한 작품을 만난 듯해 대비를 이루었다. 여기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조선의 수수께끼같은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이 놀라운 설정은 과거에서 현재를 읽고 현재에서 과거를 읽는 동시성의 위대한 자취를 실감케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역사의 흐름이라든지 스토리에 집중한 이야기가 아닌, 시대적 감수성과 인물의 심리묘사에 보다 집중한 소설이라는 점에서도 기존의 역사소설과는 결이 다른 특징을 보이는 것 또한 인상적이다.

 

 

 

이 시대가 원하는 삶이란 무엇인가

 

 

   때는 1791년 신해 1월.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의 신주를 불태웠다는 이유로 전라감영에 투옥되었다.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윤지충은 조상의 제사를 놓고 진정성 없는 조상추효의 법도라고 떠들어댔고, 권상연은 죽은 자를 위해 올리는 제사는 명분에 지나지 않는 허례일 뿐이며 가식에 지나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없애는 것이 옳은 처사라고 윤지충을 옹호했다.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은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사교를 신봉하고 유포시켜 강상을 그르치게 하였다는 죄명으로 풍남문 앞에서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되었다. 최무영은 스스로 그들의 죄상이 ‘죄’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으나 조정의 뜻에 따라 이렇게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임금의 뜻과 무관한 조정의 뜻이었다. 노론의 비선 실세들이 공서파를 내세워 서학을 지지하는 신서파를 몰아세우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임금의 아비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한 자들이기도 했다.

 

 

 

『천주실의』와 『칠극』의 교리에서 이단을 찾을 수 없으나 조정이 내린 결정은 단호했다. 조상을 부정하고 제사를 엎었으며 신주를 불사른 죄목만으로 서학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단의 본보기를 사람들 아에서 보여주어야 하며, 완산벌의 정서를 다독이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유생들의 결의는 단단하고 서늘했다. 조정은 유교의 단절을 염려했고, 서학의 융화를 두려워했다. 정교를 무릅쓰고 이단을 허무는 데는 그만한 이유와 까닭과 사연이 있으며, 사적 신앙보다 국가의 존엄이 우선한다는 사직의 결정은 날카롭고 집요했다. / 16p

 

최무영의 말 속에 자유는 흔한 보풀처럼 들렸다. 나라가 정한 자유는 작고 보잘것없었다. 그 안에서 누리고 만끽해야 할 자유는 좁고 가늘어 보였다. 닭장 안에 틀어박힌 자유는 있으나마다했다. 고작 한 줌에 지나지 않을 자유를 백성은 원한 적이 없었다. 그 자유조차 자유롭지 않은 세상에서 머리에 십자가를 심은들 소용없었다. 자유는 목마른 자에겐 한없는 기다림으로 왔으나 권세 아래 눌리고 뭉개지는 동안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 21p

 

 

 

   천주의 뒤를 캐고 불온한 서적을 추적하는 공서파의 탄압은 갈수록 심해졌다. 서학쟁이라고 불리는 무리와 섞여 다니던 대방의 어미는 관아에서 심한 매질을 당해 장독이 온몸에 퍼져 죽었고, 그 아들이 정여립의 후예를 자처하는 초라니패에 가담해 복수를 꿈꾸었다. 누이인 도향은 금기의 연주법으로 가야금을 뜯으며 자유를 갈망했다. 노론 실세들이 사도와 함께 사라져주길 바랐던 박해무는 사도가 죽자 초라니패의 우두머리가 되어 정여립의 대동세상을 열어가고자 하였다가 사헌부에서 가장 위험한 사학죄인으로 점찍혔고, 김혁서는 칼로 세상의 선을 일으키려했고 배손학은 붓 하나로 악을 몰아내고 싶어했다. 완산벌 풍남문에서 세상을 떠난 두 선비의 죽음은 이렇듯 종교라는 신념 너머로 자유와 평등의 시대를 갈망하는 자들의 마음속에 불을 지폈다.

 

 

 

아이의 눈 속에 두 갈래로 나뉜 서학의 색채가 보였다. 사학은 두려운 학문이자 만인의, 만인을 위한 보편의 학문이었다. 감출 만큼 감추고 드러낼 만큼 드러내야 함에도 서학은 민초의 골수에 사무친 궁핍과 정한을 걷어 내질 못했다. 대개는 서학을 남녀와 지위와 신분의 고하가 뒤엉킨 무질의 기운으로 보았으므로 불온했다. 임금에 의해 팔도에 흩어진 천주의 행봉은 묘연한 날이 많았고, 새벽 나절 기도문의 소진이 두려운 날도 많았다. 달빛 아래 광채를 내던 십자가의 전율이 가여울 때도 잦았다. 그 가여움은 결국 약용 자신의 것이므로, 아이의 머리맡에 떠오른 십자가의 광채가 오늘따라 더 안타깝게 보였다. / 94p

 

 

“누구도 죽지 않는 전쟁으로 끝나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전쟁은 그것뿐입니다.”

도몽의 말 속에 끝내야 할 검은 전쟁이 보였다. 하얀 나라에 박힌 검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을지 알 수 없으나 춤사위 속에 전쟁은 예감되어 있었다. 예감만의 전쟁이 쓸모 있을지 알 수 없었으나 이하임의 생각은 달랐다. 춤은 지나온 생의 기억과 다가올 미래 예감 속에 조율되는 것이며, 이것은 바람 부는 언덕에서 춤을 띄워 본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이하임은 생각했다. / 338p

 

 

 

 

 

 

   한편 임금은 죽은 아비의 바람이 관념의 영토에서 화해와 치유로 이해되길 바랐다. 하지만 아비인 사도를 죽인 자들은 여전히 조정을 점령하고 있었고, 유교와 서학의 충돌 앞에 조선의 앞날은 캄캄하기만 했다. 그 마음은 정약용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윤지충의 집에서 의문의 그림 한 점이 압수되었고, 최무영은 이를 임금께 아뢰었다. 예수와 그 열두 제자의 식사 모습이 그려져 있다는 그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모사본이었다. 도화서 화원들은 그림을 불살라 없애라고 했지만 별제 김홍도만이 그림에 간직된 비밀을 알아보는데, 오른쪽 두 번째 자리에 있는 자가 다름 아닌 장영실이라는 것이었다.

 

 

 

   어째서 장영실이 그 그림 속의 인물이라는 것인지, 대체 윤지충은 왜 그 그림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인지 알 길이 없지만, 임금은 예수의 열두 사제들에게서 서학인들의 모습이 자꾸만 오버랩되어 마치 조선의 운명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결국 그림 속의 미스터리를 해결하고, 서학과 유교가 맞서 피의 사태를 불러일으키는 이 땅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홍도는 밀라노로 떠난다. 과연 세월이 흘러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을 통해 다시 조선에 흘러들어온 장영실이란 존재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밀라노로 떠난 김홍도는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올 것인가.

 

 

 

“치정으로 얽힌 노론의 암투가 그림에서 보였다? 김홍도가 그렇게 말했단 말인가?”

“그 말을 전할 때 도화서 별제의 눈은 정직해 보였사옵니다.”

치정과 음모와 반역과 불충의 회오리를 몰아오는 노론 비선들이 그림 속에서 자리를 지키려 서로를 멸시하고 부정하며 저들끼리 속삭이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드러내지 않으면서 은밀히, 가볍지 않은 어조로 서로는 서로를 간절히 원하는 듯이 들렸다. 조용하면서도 원대한 야망을 품은 노론 비선들이 보이지 않는 선을 잇대며 그림 속에서 다급하고 소란한 밤을 준비하는 듯했다. 임금이 한숨을 쉬었다. / 72p

 

 

다빈치의 그림이 조정의 멸시와 박해를 견디며 조선에 건너온 까닭이 있지 싶었다. 어쩌면 13인의 인물들이 일으키는 불화와 단절과 음모와 시기와 질투에 이유가 있을지 몰랐다. 모두를 응시하듯 가운데 앉아 사색에 잠겨 있는 자로부터 자유는 신앙이 될지, 배반이 될지 알 수 없었다. / 233p

 

 

 

 

 

 

   이렇듯 『최후의 만찬』은 천주교 박해라는 실 역사를 배경으로 양심과 신념이 격돌한 시대를 온몸으로 마주했던 이들의 고뇌에 밀착한 소설이다. 여기에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속에 장영실의 흔적을 덧입힘으로써 믿음이 자유로운 곳에서 평등한 신분으로 살아가기를 희망했던 장영실의 과거로부터 미래의 오늘을 들여다보려 했다. 소설 속의 임금, 즉 정조가 허균에서 정여립으로, 정여립에서 장영실로 이어지는 연결 지점마다 떠돌던 세상의 향기를 생각했듯, 시대는 달라도 미래를 내다보며 꿈꾸었을 과거의 인물들을 통해 오늘을 들여다보자는 작가의 메시지가 오롯이 느껴졌다.

 

 

 

신앙은 깊고 넓은 세상을 작은 개인으로 하여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하고 살아갈 날들의 희망을 열어가는 데 있었다. 김홍도를 바다 멀리 이양선 태워 보낸 것도 장영실이 살아갔을 세상의 가치와 내용을 살피려 한 까닭이 먼저였다. 장영실이 열어갔을 희망과 희구의 날을 돌아보는 것은 조선의 과학을 후세에 전하기 위함이었다. 그 삶을 추적하는 것은 한 점 그림에서 시작되었으나 그림이 전부가 아님을 임금도 알았고, 최무영도 알았다. / 227p

 

 

“저마다의 죽음을 생각하고, 모두의 삶을 생각합니다. 삶과 죽음은 한 가지 향기로 채워질 수 없습니다. 세상의 향기는 별과 다르지 않습니다. 별처럼 생멸의 비중이 무한한 것이 향기라고 배웠습니다. ”

누오의 입 속에서 풍성한 삶이 밀려왔다. 떠밀려가는 죽음이 들려왔다. 완산벌 풍남문에서 십자가를 걸고 죽는 순간까지 윤지충이 지키려 한 것은 외줄기 기도보다 세상의 향기였을 것이다. 목숨을 걸고 권상연이 세상에 남기려 한 것도 구원의 약속보다 모두를 위한 향기였을 것이다. / 291p

 

 

 

   책을 읽으며 조선과 <최후의 만찬> 그리고 장영실이라는 인물을 엮어 시공간을 초월한 놀라운 상상력을 창조했음에도 이를 뒷받침해줄 서사가 부족했던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비록 허구일지라도 이것을 독자로 하여금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그럴 듯한 근거와 서사가 아닌 그저 김홍도가 보고 온 것을 ‘말하는’ 수순에서 그치기 때문에 완성도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시대가 지닌 상처와 고뇌의 목소리에 더 집중한 나머지 스토리가 부실해진 것인데, 이는 아마도 독자들의 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이제껏 역사를 다룬 여타의 소설들과 결이 다르다고 느껴지는 독보적인 탁월함이라 하면, 어느 하나 허투루 읽히는 것 없이 촘촘하면서 아름답고 또 묵직하기까지 한 ‘문장’을 꼽을 수 있을 듯하다. 쉽게 읽히지는 않지만 그래서 더 곱씹고, 또 곱씹어보면서 이 울림통이 큰 문장에 어느 새 몰입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승원 소설가가 ‘이 소설은 천천히 저작하듯 읽어야 한다’고 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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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겨우 자식이 되어간다 - 평범하지만 특별한, 작지만 위대한,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임희정 지음 / 수오서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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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희생으로 자식의 인생을 채워준 이 세상 모든 부모에게 바치는 이야기!

결국 나의 이야기이며 나의 부모 이야기기도 했던 가슴 벅찬 고백들! 

 

 

 

   누군가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어오면 나는 늘 한결같이 “아빠”라고 답했다. 유년시절부터 나는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크고 세상모르는 것 없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빠는 내가 궁금해 하는 것들을 마치 미리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정확한 해답을 내놓았고, 곤란한 일에 빠진 사람들에게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며 술이나 담배와 같은 것도 하지 않아 평생 흐트러진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러다 내가 대학교에 진학했을 무렵, 아빠가 하던 사업이 문을 닫고 가계가 기울면서 아빠의 삶도 급격하게 힘을 잃어갔다. 그러는 동안에 엄마는 두 번의 암과 싸워야했고, 나는 학자금 대출에 평일과 주말 할 것 없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어야했다. 마침내 취직을 하고 내 생활을 하기에 바빠서 우리 가족에게 닥친 그늘을 적당히 눈감아버리는 데 익숙해져있었다. 그렇게 내가 침묵하는 사이, 아빠와 엄마는 자식의 눈치만 살피느라 더 깊이 침묵했으리라는 것을 이제 나는 안다. 아빠와 엄마의 젊음과 희생을 배불리 먹고 내가 이만큼 컸음을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때문에 『나는 겨우 자식이 되어간다』 속의 이야기가, 고백이 어느 하나 낯선 것이 없었고 그래서 몇 번이나 나의 부모와 나를 들여다보느라 읽는 내내 주춤거려야 했다.

 

 

 

 

 

 

내가 이렇게 잘 자라난 것으로 당신들의 삶은 증명되었다

  “나는 막노동하는 아버지를 둔 아나운서 딸입니다.”

   검색 사이트에 ‘임희정 아나운서’의 이름을 검색해보면 이 같은 제목의 고백이 등장한다. 그녀의 책 『나는 겨우 자식이 되어간다』에도 등장하는 말이다. 아나운서라는 직업이 대단한 일도 아니고 막노동이 변변치 않은 직업인 것도 절대 아니지만, 그간 수많은 말들을 내뱉으면서도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차마 내뱉지 못했던 내밀한 고백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더러 노동이라는 단어에 ‘막’을 기어코 붙여가며 “할 일 없으면 공사장에 가서 막노동이라도 해!”라는 말을 습관처럼 들먹이고, 막노동을 일의 막장으로 치부한다. 무지하고 가난해서 몸으로 하는 노동 이외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온몸을 써가며 해온 막노동이 평생 직업이자 유일한 직업이 된 아버지를 둔 딸은, 그래서 한때는 부끄러웠고 때로는 이기적이었던 순간들을 고백한다. 자발적 배경세탁. 드러내는 용기보다 숨기는 비겁을 선택해왔던 그녀는 이제 아빠의 시간과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나이에 이르렀고, 창피했던 건 아빠의 직업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었음을 조금씩 깨닫는다. 아빠의 노동을 글로 꾹꾹 눌러쓰고, 엄마가 최선을 다했던 영역들을 더듬어봄으로써 그렇게 누구에게도 좀처럼 꺼낼 보일 수 없었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하자 마침내 보이지 않았던, 혹은 외면했던 것들이 차츰 보이기 시작한다.

 

 

 

기준을 정해놓고 질문을 하는 사람들의 물음표도 잘못됐지만, 그 기대치에 맞춰 정확한 대답을 하지 못한 나의 마침표도 잘못됐다. 겉모습을 보고 ‘이럴 것이다’ 틀을 씌우는 생각들은 어쩌면 서로가 서로에게 범하는 가장 큰 결례가 아닐까. 보통의 무례 속에 우리는 서로에게 잘못된 질문과 답을 하며 누군가에게 부끄러운 사람들이 되어간다. 나도 그 틀에 맞춰 아버지와 어머니를 숨기고 부끄러워하며 살아온 지난날들이 너무나 죄송스럽고 후회스러워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내 부모의 배경을 남들에게 다 말할 필요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말 못 할 이유도 없었는데 그 말이 참 쉽지 않았다. / 18p

 

 

아빠는 밥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다. 딸에게 전화를 걸어 가장 먼저 하는 말은 “밥 먹었냐”였고, 가끔 술 한잔을 하고 전화를 할 때면 “밥 많이 먹었냐”였다. 취한 정도만큼 밥 뒤에 ‘많이’가 붙었다. 어쩌면 밥을 잘 챙겨 먹는 것이 생의 목적이었을 아빠에게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렇게나 중요한 밥을 많이 챙겨 먹었음에도 가장 무거웠던 몸무게는 58kg. 아무리 많이 먹어도 노동의 양보다는 적었나 보다. / 35p

 

 

 

   일흔이 된 아버지, 평생 노동을 습관처럼 한 아빠. 이제 공사장에서는 더 이상 아빠를 부르지 않고, 몸에 밴 부지런한 습관만 남았다. 손에 종이와 펜을 쥔 날보다 못과 망치를 쥔 날이 훨씬 많았고, 수첩에는 오늘의 노동을 숫자로 적어놓은 삶의 숫자들로만 가득하며, 번듯한 옷 한 벌 없이 시장에서 3만원도 채 되지 않는 돈으로 여러 벌의 작업복을 사 입으셨던 아빠. 보청기를 세 번이나 바꿨지만 공사장의 소음 앞에선 거추장스러운 것이었기에 소음을 확장시키는 보청기는 아빠의 귀가 되어주지 못했다. ‘안 그래도 말수 적은 아빠는 그렇게 점점 더 조용히 살고 계셨다’는 그녀의 고백은 얼마 전, 보청기를 구입했다던 나의 아빠를 떠올리게 해서 괜스레 눈물이 밀려나왔다. 손자의 재롱 섞인 말을 절반도 채 알아듣지 못하고 그저 웃음만 지어보였던 나의 아빠. 고작 이 작은 보청기에 의지해야 할 나이가 되셨다니, 늘 건강하고 커다랬던 아빠의 몸이 이제 하나둘씩 기울어져가고 있음을 나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 것일까.

 

 

 

아빠가 장애가 있는 건 슬픈 일이 아니다. 다만 조금의 품이 드는 일이다. 아빠도 그리고 엄마와 나에게도. 이제 그 품을 잘 들여서 서로의 말을 조금 더 잘 들어주면 될 일이다. 조금 더 이해해주면 될 일이다. 원래 ‘이해’는 시간이 드는 일이라 하려면 먼저 기다려줘야 한다. 내가 아빠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아빠를 아빠의 말을 그리고 대답을 기다려주는 것이다. 아빠가 보청기를 세 번 맞추는 동안 나는, 이해는 기다림이라는 것을 배웠다. / 51p

 

 

아빠는 이제 나와 마주하고 내가 무언가를 이야기할 때면 대답보다 그저 웃고 있을 때가 많아졌다. 내가 아빠 걱정을 해도, 아빠에게 소리를 쳐도, 그저 대답은 웃음뿐이다. 그 웃음 속에는 딸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생기는 미안함과 흘러버린 세월에 대한 허망함, 늙어버린 채 맞아야 할 앞으로의 날들에 대한 걱정과 같은 수많은 할 말들이 묵인되어 있을 것이다. / 156p

 

 

 

 

 

 

   “어떻게 이렇게 뜨거운 걸 잘 견뎌?”

   뜨거운 그릇을 손으로 척척 옮기는 엄마를 보면 곧잘 하는 말이다. 나는 실리콘 냄비손잡이에 장갑을 껴도 뜨겁다 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맨손으로 드는 것을 볼 때면 그게 엄마의 삶이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 때가 있다. 견디고, 견디다보니 무뎌진 일상의 무게들. 어쩌면 이 땅의 모든 엄마들이 그렇게 엄마가 되었을 것이다. 본인의 이름 석 자 위에 덧대어진 엄마라는 이름은 여자 그리고 한 사람의 고유한 삶을 지우게 했을 것이고, 먹어야 자식이고 먹여야 부모라고 그 아깝고 긴 시간을 자식 먹이는 일에만 쏟아 부었을 것이다. 삶의 범위라고 해봐야 고작 가족일 뿐일 텐데 또 내내 그럴 것 같아서, 엄마를 엄마로 만든 원인인 나는 괜스레 미안해진다. 그렇게 우리는 어른이란, 엄마처럼 뜨거운 것도 차가운 것도 아픈 것도 잘 참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배운다.

 

 

엄마는 엄마라고 이름 짓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지어진 엄마라는 이름에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고 기꺼이 자신의 이름을 내주었다. 그 이름값으로 평생 밥을 짓고, 반찬을 하고, 집 안을 쓸고 닦고, 혼자 남편과 세 자식 총 네 명분의 삶을 지불했다. 나는 안다. 아빠가 벌어온 돈만큼이나 엄마가 아낀 돈이 있었기에 그 네 명분의 인생에 빚이 없었다. / 68p

 

 

엄마가 엄마로 애써온 대부분의 것들은 기억되지 않았다. 어김없이 반복되었고 티 나지 않았으니까. 계속한다고 줄어들거나 나아지는 게 아니라, 그 상태를 유지하거나 그대로였으니까. 집안의 모든 것들을 고스란히 있게 하기 위해 엄마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먼지는 쌓이지 않았고, 옷은 항상 깨끗해졌고, 냉장고는 언제나 채워져 있었다. 어떤 것이 보호되거나 지탱될 때, 어떤 이는 축이 나고 지쳐간다.

엄마가 평생 해낸 집안일과 엄마가 평생 만든 음식들은 한 끼의 식사가 끝나거나 하루가 끝나고 나면 다 잊혀졌다. 그것은 자식이 한 가장 큰 망각이자 잘못이었다. / 189p

 

 

 

   돌이켜보면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거나 모자란 줄 알았던 지난 내 삶은 알고 보니 부모의 사랑으로 차고 넘치는 날들이었다. 저자는 아빠의 노동이야말로 자신을 정직하게 키워냈음을 안다. 바르게 살라는 훈계 한마디 없이 저절로 그 가르침을 배웠다. 평생 첫차를 타고 출근했던 아빠의 시작을 따라 부지런함과 성실함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보고 체득된 것이었다. 또 엄마의 영역이라고만 생각했던 영역, 그것은 마땅한 것이 아니라 엄마가 최선을 다했던 영역이라는 것도. 덕분에 나 역시 왜 엄마와 나누는 대화는 항상 먹는 것과 아이를 키우는 것에만 머물러 있는 것일까, 답답해하기보다 엄마가 담당하는 대화의 영역, 삶의 영역 안에서 오래오래 대화하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서러운 것은 부모님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가 명랑 쾌활한 것도 부모님 덕분이었다. 충분히 사랑받으면 결핍이 없어진다 했던가. 나는 나의 결여가 부모의 사랑으로 채워졌음을 이제야 알겠다. 그래서 내가 완성됐음을 너무나 잘 알겠다. 나는 많이 사랑받았다. 아버지는 자기 목숨을 걸고 나를 위해 노동했고, 어머니는 자기를 희생해 나를 위해 밥을 지었다. 그 노동과 밥은 가난과 무지를 넘기 위한 부모의 피나는 노력이었다. 그런데 지나온 나는 ‘지금의 나를 만든 건 부모가 아니라 나’라고 이기적으로 생각하며 자랐다. 혼자 크고 혼자 이뤘다 느꼈다. 부모는 걸림돌이 아니다. 걸림돌은 내가 주워오는 것이다. / 132p

 

 

사실 부모의 마음은 통역이 필요 없다. 내가 어른이 되니 저절로 이해가 된다. 시간이 통역사다. 앞으로의 나의 시간들은 부모를 이해하는 날들만 남아 있다. 다행이다. 그 이해에는 통역이 필요 없어서.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건 그 처지가 되어보면 될 일이다. 그렇게 조금씩 뒤늦게 이해하며 자식은 부모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 160p

 

 

 

 

 

 

   문득, 결혼을 하고 신혼집에 들어오기 전에 엄마와 아빠가 친정에 두었던 몇 가지 짐을 챙겨 오셨던 날이 생각난다. 아빠는 딸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훑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그리고 집을 나서며 “네 책 속에 아빠가 편지를 끼워뒀는데, 무슨 책인지 모르겠다. 네가 찾아봐.” 하셨다. “이 많은 책 중에 어떻게 찾아?” 나는 그렇게 웃어넘긴 뒤 아직까지도 편지를 찾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찾고 싶은 마음을 미뤄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속에 무슨 글이 쓰여 있을 것인지 알고 있기에, 차마 펼쳐서 들여다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 『나는 겨우 자식이 되어간다』를 읽으며 나는 그 편지를 계속 생각했다. 이제 그 편지를 찾아 나도 아빠에게 답장을 써야 하지 않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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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셀프 트래블 - 2019-2020 최신판 셀프 트래블 가이드북 Self Travel Guidebook
이주영 지음 / 상상출판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가볍게 떠날 수 있는 최적의 여행지를 찾는다면 타이완으로!

우리가 몰랐던 타이완의 매력을 오롯이 담은 실속만점 타이완 여행가이드북! 

 

 

 

   한 때 타이완(대만) 드라마에 푹 빠져 지낸 적이 있었다. 타이완판 <꽃보다 남자>를 시작해 만화 ‘장난스런 키스’를 원작으로 한 <악작극지문>, <아름다운 그대에게>, 영화 <나의 소녀시대>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까지 그야말로 타이완앓이를 하느라 밤을 새고 또 새었다. 그렇게 드라마와 영화를 배경으로 등장하는 타이완의 모습은 의외로 한국과 꽤 닮은 모습이었다. 특히 서울과 비슷한 느낌에 도시 전체가 깔끔하고, 이국적인 풍경도 더러 볼 수 있는 곳이라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고나 할까. 그렇게 한참 빠져있던 타이완 드라마에서 벗어난 뒤로는 잠시 잊고 있었다가 최근 들어 다시 타이완을 주목하게 된 일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타이완슈가, 누가크래커, 홍루이젠 같은 먹거리 때문이었다.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에서 활발히 사진이 올라오는 데다 맛도 좋아서 나 역시 즐겨먹는 간식 중 하나다. 이렇게 타이완은 즐겨 찾는 해외여행지로 크게 부각되지 못했지만 우리와 문화적으로 밀접해있는 만큼 일본을 대신해서 가까운 여행지로 삼기에 좋은 듯하다(오늘자 신문에 의하면 일본을 대신해 타이완으로 떠나는 관광객이 가장 많이 늘었다고 한다). 특히 비행시간이 2시간 30분 남짓하니 이보다 더 가볍게 떠나기 좋은 곳이 또 어디 있을까.

 

 

 

 

 

 

오감만족, 다양한 문화와 낭만적인 자연을 간직한 타이완으로 떠나보자 

 

 

   『타이완 셀프트래블』은 네이버 인기 카페 ‘나여추(나홀로 여행가기 나만의 추억 만들기)’ 운영자인 저자가 타이완에서 직접 체험한 생생하고 유용한 정보들을 가득 담은 여행 가이드북이다. 우리가 흔히 대만이라 부르는 타이완의 정식 명칭은 ‘중화민국 타이완’으로, 우리나라 3분의 1크기인 섬나라이다. 작은 섬나라지만 총면적의 50% 이상이 산으로 이루어져 있고, 여러 계절을 담은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과거 네덜란드인, 스페인인, 일본인 등 다양한 출신들의 유입으로 풍부한 문화적 배경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비행시간이 2시간 30분가량으로 부담이 크지 않고 비교적 저렴한 물가에 다양한 먹거리까지 즐길 수 있어 많은 여행자들에게 사랑받는 여행지다. 우리나라처럼 비교적 대중교통도 편리하고 치안도 좋은 편이며 한글 표기가 잘 되어 있어 언어를 잘 몰라도 쉽게 떠날 수 있는 것 역시 큰 장점이다. 단, 육가공식품의 반입이 금지되어 있다는 점과 지하철에서 음식물 섭취를 할 경우 벌금을 무는 등 주의해야 할 점도 있으니 책에서 강조하는 사항들을 미리미리 참고하기를 바란다.

 

 

 

   타이완은 고구마 같이 생긴 지형으로 크게 북부, 중부, 남부로 나뉘는데, 수도인 타이베이를 중심으로 각 지역 마다 꼭 가봐야 할 장소와 근교까지 상세히 다루고 있다. 이때 주요 일정과 이동 경로에 따라 이용하기 편리한 대중교통과 이동 시간 혹은 체력을 절약할 수 있는 최적의 루트를 소개하고 있으니 부담 없이 따라가 보길 추천한다. 또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타이완 여행의 주요 포인트와 베스트 전망 스폿, 로맨틱한 일몰과 야경 스폿, 인스타그램 핫 스폿, 근교 도시와 산책 스폿, 소소해서 더 특별한 예술 스폿, 타이완에서 먹어봐야 할 음식과 맛집, 쇼핑 리스트, 여행자들의 로망인 대표 야시장까지 아낌없이 소개하고 있으니 꼭 참고하자.

 

 

 

 

 

 

Area 1. 타이베이_

타이완 북부에 있는 도시로 타이완의 수도이다. 타이완의 정체,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이다. 타이완 역시의 중요한 장소인 중정기념당, 세계 4대 박물관으로 꼽히는 국립 고궁박물원, 오감을 만족시키는 볼거리와 먹거리가 있는 여러 야시장과 아찔한 높이의 타이베이 101 등 대표적인 관광명소가 많다. 우리나라의 서울만큼 복잡하고 주변 도시가 많아서 일정이 짧다면 도심 위주의 여행을, 여유가 있다면 주변 지역을 함께 여행해보길 추천한다. / 85p

 

 

 

   타이완의 수도인 타이베이는 비행시간이 길지 않기 때문에 하루만 휴가를 내고 주말을 이용해 다녀오기 좋다. 저자는 MRT 노선을 기준으로 이동 동선을 계획하는 것을 추천하는데, 그중 MRT 빨간색 라인만 이용해도 주요 여행지는 돌아볼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타이베이에서는 타이완의 역사를 대표하는 장소인 중정기념당, 타이베이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인 용산사, 대형 쇼핑센터와 백화점을 비롯해 노점상만 해도 6,000여개에 달하는 시먼딩, 타이베이 전경을 조망해볼 수 있는 타이베이 101 등이 유명하다. 특히 타이베이 101의 전망대 입장료가 부담스러우면 35층에 위치한 스타벅스(예약 필수)에서 타이베이의 야경을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타이베이 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한 야시장의 맛을 즐길 수 있는 스린 야시장과 매력적인 상점들이 이어져있는 융캉제 역시 주목할 만하다. 책은 타이베이의 주요 관광지와 맛집, 숙소 외에도 타이완 사람들이 휴일에 소풍처럼 찾는다는 양명산, 데이트코스로 인기가 있는 딴쉐이, 3량짜리 기차를 타고 만나는 고양이 마을 허우통, 붉은 등이 넘실거리는 지우펀 등 저마다 개성 넘치는 근교도 함께 소개한다.

 

 

 

 

 

 

   타이베이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를 지나 중부로 넘어가면 이곳에서는 타이중을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항공편으로 바로 갈 수 있고 타이베이에서 기차나 버스, 고속열차 등을 이용해 가볍게 다녀가기에도 좋은 곳이다. 책에서는 1일 코스와 3일 코스를 추천하는데, 1일 코스는 알록달록한 그림이 너무 예쁜 무지개 마을을 시작으로 공원과 거리, 야시장까지 꽉 찬 일정을 추천한다. 반면 3일 코스는 타이중과 대표 근교인 르웨탄을 둘러보는 일정으로 ‘해와 달이 머무는 호수’라는 이름처럼 아름다운 르웨탄을 보며 힐링해보기를 추천한다. 개인적으로 궁원안과에서 가장 인기가 있다는 미야하라 아이스크림을 먹고, 무지개 마을의 벽화를 따라가며 본토에서 즐기는 타이거슈가와 홍루이젠 본점에서 샌드위치를 사먹는 일정이 최고가 아닐까 싶다.

 

 

 

 

 

 

  남부 타이완에는 옛 수도였던 타이난과 대표적인 항구 도시 까오숑을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까오숑 공항으로 바로 들어가면 되기 때문에 타이베이처럼 북적이는 분위기가 꺼려진다면 이곳을 추천한다. 보통 3박 4일 일정으로 까오숑과 근교를 함께 돌아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옛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타이난을, 휴양을 원하고 싶다면 컨딩을 추천한다. 특히 까오숑의 제2부두 인근에 방치되어 있던 물류창고들을 문화예술창작지구로 재탄생 시킨 보얼예술특구가 인상적인데, 하마싱 철도문화원구를 거쳐 아이허까지 한번에 돌아보는 동선으로 자전거를 이용해보는 것도 특별한 여행이 될 듯하다. 거기에 빈해일로라는 빙수거리에서 망고 빙수 한 그릇은 꼭 놓치지 않기!

 

 

 

 

 

 

   이렇듯 『타이완 셀프트래블』은 지역을 세 군데로 나눠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여행자가 바로바로 찾기 쉽게 정리되어 있는 것이 장점이다. 또 각 명소마다 주소와 위치, 전화번호 같은 알짜배기 정보와 여행 준비에 필요한 별도의 정보들을 마지막에 다시 정리해주고 있어 여행을 보다 쉽게 준비할 수 있다. 덕분에 타이완은 무리하지 않고 가볍게 관광을 할 수 있는 일정으로 해외 여행지를 찾고 싶을 때 최고의 장소이지 않을까 싶다. 특히 인생 첫 타이완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꼭, 셀프트래블의 도움을 받아보시기를 추천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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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만난 물고기
이찬혁 지음 / 수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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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동뮤지션 이찬혁의 예술관과 특유의 감성을 책으로 만나다! 

상상 너머의 세상을 유영하는 자유로운 아티스트의 감각을 오롯이 담은 소설!

 

어릴 적 내 꿈에 나온 Dinosaur

우리 집 창문을 부수고

내 가족에게 포효하던

널 다시 만나면

그때 너보다

더 크게 소리 지를래

더 크게 소리 지를래

 

 

   나의 플레이리스트에는 내내 삭제되지 않고 재생되는 음악 하나가 있다. 바로, 악동뮤지션의 다이노소어(Dinosaur)다. 어떤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공룡이라는 존재를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한데다, 이를 극복하고 떨쳐버리겠다는 다짐과 선포를 마치 한 편의 동화 속 주인공들처럼 경쾌하게 풀어낸 곡이다. SBS의 ‘K팝스타2’란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현했을 때부터 자유로운 상상력과 현실감 있는 가사를 재기발랄하게 녹아낸 그들만의 감각적인 음악은 아이돌로 점철된 음악 시장에서 유난히 돋보였는데, 이번에 발표한 앨범 ‘항해’는 기존의 감수성을 뛰어넘는 특별한 색채감이 돋보이는 음악이라 또 한 번 놀라움을 자아낸다. 아마도 악동뮤지션만의 음악적 감성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이찬혁이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와 오랜만에 선보이는 앨범여서 그런지 서정적이면서 좀 더 성숙해진 감성으로 한결 묵직해진 기분이다.

 

 

 

   그런 가운데 <항해>의 모티브이자 세계관을 공유한 작품 『물 만난 물고기』가 한 권의 소설책으로 출간되었다. 선율과 어우러져야 할 음악의 가사와 비교적 긴 호흡을 유지해야 하는 소설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기는 하지만, 왠지 그의 소설가로서의 데뷔가 어색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난 내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나의 음악이, 단순히 노래를 목적으로 하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었다’는 문장처럼, 음악 너머의 거대한 예술적 세계관을 아우르기 시작한 이 청년의 성장이 어디에까지 이르게 될지 너무도 궁금해진 까닭이다. 자칫 낯익은 듯 단조로운 시작에 기대감이 주춤할 법도 하지만, 어느새 상상을 뛰어넘는 스토리의 변주와 예술가적 통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특유의 맑은 감각들, 시적이며 환상적인 메타포를 문장에 녹여낼 줄 아는 섬세함에 저절로 응답하게 된다.

 

 

 

 

 

 

몇 고개의 파도를 넘어야 하나

 

 

   몇 달을 공들여 만들던 앨범이 막 완성되려던 찰나에 녹음 작업을 하던 선은 예술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회의가 들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진정한 예술가란 무엇인지, ‘진짜’가 되었을 때야 비로소 음악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길거리에서 수많은 예술가들을 만난다. 하지만 대부분은 허상에 가득 찬 가짜들이었고, 1년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갈증은 해소되지 않은 채로 마지막 여행을 맞이하게 된다. 섬으로 떠나는 배에 오른 날 밤,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갑판 한 가운데에서 선은 우연히 검은색 단발머리를 한 여자를 발견하게 된다. 거센 바람이 몰아치고 파도가 그녀를 잡아먹어치울 기세로 덤벼드는 와중에도 그녀는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그곳에 서 있다. 선은 때마침 마치 환영처럼 바다에서 불러오는 노랫소리에 두 귀를 의심하며 음색과 노래에 마음을 빼앗기고, 위험한 순간에 그녀의 목숨을 구한다.

 

 

 

“말도 안 되는 예술가가 많아진 것 같긴 해요…….”

나는 나도 모르게 슬픈 표정을 지었다. 듣고 보니 예술가라는 이름이 내가 찾고 있던 것에 가까움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정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라면 예술가는 노래로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예술가는 그림으로 시위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어쩌면 몽상가 혹은 혁명가. 자신이 선택한 종목보다 한 움큼 더 느끼고 한 발치 더 앞서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만약 내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찾고 그 길을 선택한다고 해도 그것은 특별하고 굉장한 일이 아닌, 이미 포화 직전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는 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62p

 

 

 

   그녀의 이름은 해야. 그녀는 동물원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사자처럼 주어진 모든 것을 자유로이 즐길 줄 아는 영혼이었다. 선이는 그녀를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자신의 음악에서 결핍된 자리를 정확히 채워주었고, 그녀가 곧 음악이 되었다. 얼룩말을 타고 횡단보도를 건너보고 싶다던 그녀에게서 자유와 통제의 울타리를 넘는 법을 배우고, 갈대밭에 뛰어들어 웃옷과 바지를 던져버리고 당장의 자유를 소중히 느끼며 세상에 정해놓은 법과 선에 구애받지 않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녀와 단둘이 있는 지금이 과연 행복의 절정임을 깨닫는다. 그러는 가운데 선이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해답들을 찬찬히 풀어나간다.

 

 

 

“왜 하필 얼룩말인데?”

“얼룩말만큼 예술적인 동물은 없어! 전에 책에서 봤는데 얼룩말은 다른 말들보다 야생성이 뛰어나서 길들이기가 어렵대. 이게 사람들이 보기에 야생성이지, 내 눈에는 자유를 갈망하는 고집으로 보이는 걸.” / 35p

 

 

“음악이 없으면 서랍 같은 걸 엄청 많이 사야 될 거야. 원래는 음악 속에 추억을 넣고 다니니까. 오늘 우리가 이곳에 온 추억도 새로 산 서랍 속에 넣고는 겉에 ‘작은 별’이라고 쓴 테이프를 붙여놓아야 할걸. 아마 번거롭겠지. 근데 그럴 필요까진 없어. 우리에겐 바다가 있으니까. 바다는 아주 큰 서랍이야. 우린 먼 훗날 바다 앞 모래사장에 걸터앉아서 오늘을 떠올릴 수도 있어.” / 52p

 

 

 

 

 

 

난 너를 만나고 모든 게 음악이야

 

 

   선이는 해야를 만나고서야 비로소 자신을 온전히 음악으로 채워나갈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눈을 뜨면 모든 게 꿈처럼 사라질까, 한겨울의 선물이 되어준 그녀가 사실은 산타처럼 실존하지 않는 인물일까 내심 불안에 휩싸인다. 애초에 그녀는 그가 붙잡을 수 있는 어떤 유형의 것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간 애타게 찾아 헤매고 붙잡고 싶었던 ‘음악’이 손에 붙잡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닌 것처럼.

 

 

 

“왜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한 거야?”

“뭐가?”

“파도가 몰아치는데 거기 위험하게 서 있었잖아.”

나는 아까의 긴박한 상황이 떠올라서 다시 흥분되었다. 반면 그녀는 여전히 차분했다.

“응. 가끔은 그렇게라도 봐야 하는 것들이 있어.” / 81p

 

 

“선아, 거창한 걸 생각하지 마. 뱉은 말은 지킬 수 없을 것 같으면 그냥 할 수 있는 만큼의 말을 하면 돼.” / 93p

 

 

“사람들은 긍정을 기다리고 원하면서 실상은 사소한 불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 부정적인 것만 쫓아다닌다고!” / 134p

 

 

 

   『물 만난 물고기』는 단편적으로는 선이와 해야가 나누는 사랑과 상처의 상흔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결국 한 인간으로서의 가치관과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그린 매우 은유적이고 철학적인 작품이다. 음악이란 무엇인가, 예술가란 무엇인가. 그가 소설 속에서 선이를 통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해답을 갈구하는 문제들은 어쩌면 그가 음악을 하는 내내 마주해야 할 질문들일지도 모르겠다. ‘특별한 꽃들은 매일 괴로움에 몸부림쳐요. 자신도 자신의 색깔이 틀렸다고 생각하니까요. 특별한 꽃들은 아무리 물을 주어도 그렇게 서서히 고통 속에 말라 죽어요.’라던 정원사의 말에서 느낄 수 있듯, 어쩌면 우리가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들엔 늘 의심과 회의가 깃들기 마련이니까.

 

 

 

“친구야, 나도 네 나이로 돌아가고 싶구나. 그럼 뭐든 시작했을 텐데. 너도 현실을 경험하면 알게 될 거야. 꿈은 서커스에서 쓰는 붉은색 커튼과 같다는 걸. 화려하고 잘 찢어지지도 않지. 하지만 현실이라는 창문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것을 옆으로 걷어야 하는 날이 오고 만난다. 밤이 되면 다시 그것으로 창문을 가리고, 지쳐 울든 꿈을 꾸든 맘대로 해도 돼. 하지만 아침이 오면 다시 걷어내는 거야. 우린 꿈보다 하루를 살아야 하니까.” / 105p

 

 

“난 이 동네 사람들이 매일 걸어다니는 길을 청소해요. 그들은 자신이 아침에 길바닥에 껌 포장지를 버렸다는 사실을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까먹고 말아요. 왜냐하면 내가 이미 치웠으니까요. 자신이 버린 포장지와 마주칠 일도 없었을 거고 그래서 다시 기억할 일도 없는 거지요. 마찬가지로 그들은 아침에 출근하면서 남편을 향한 분노 따위를 집 앞에 버리고 가요. 어떤 날은 학교에서 들고 온 시기와 질투 같은 것도 있지요. 나는 그들이 그렇게 표출해버리고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것을 주워 담습니다. 그럼 그들은 그 길을 지나면서 다시 같은 감정을 떠올리지 않게 되지요. 모든 걸 까먹은 채 집으로 들어가서 다시 예전같이 남편을 사랑해주는 거예요.” / 113p

 

 

 

 

 

 

   “우리가 노래하듯이, 우리가 말하듯이, 우리가 헤엄치듯이 살길”

   망망대해를 떠도는 뱃사공, 바다라는 심연 속에서 단 하나의 문장을 건져 올리는 마음으로 가사를 완성해내는 아티스트. <물 만난 물고기>라는 노래와 가사를 읽으며 나는 내내 소설 속의 선이와 해야를 상상했다. 소설 속의 그들처럼 악동뮤지션 이들 남매도 음악 안에서 늘 자유로울 수 있기를, 그들의 음악을 사랑하는 한 사람의 팬으로서 응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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