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만찬 - 제9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서철원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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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믿음, 신념과 의지 그 사이에서 떠돌았던

이들의 고결한 무늬를 오롯이 남긴 격이 다른 역사소설! 

 

 

   어느 새 혼불문학상이 9회를 맞았다. 사회 구조적 모순 속에 숨겨진 음모와 진실을 들여다본 소설 『고요한 밤의 눈』과 요리라는 소재를 통해 한중일 세 나라간의 공존가능성을 타진한 『칼과 혀』,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린 욕망의 이중성과 권력의 역학 관계를 그린 『독재자 리아민의 다른 삶』을 거쳐 오는 동안 혼불문학상은 민족관과 시대성을 반영한 다양한 작품으로 스펙트럼을 넓혀왔다. 그 중에서도 앞선 8회 수상작인 『독재자 리아민의 다른 삶』이 욕망의 게임 속에 주인공들을 툭 내던져놓음으로써 다소 경쾌하게 읽혔다면, 이번 수상작인 『최후의 만찬』은 진중한 역사 소설로 오랜만에 무게감이 꽤 묵직한 작품을 만난 듯해 대비를 이루었다. 여기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조선의 수수께끼같은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이 놀라운 설정은 과거에서 현재를 읽고 현재에서 과거를 읽는 동시성의 위대한 자취를 실감케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역사의 흐름이라든지 스토리에 집중한 이야기가 아닌, 시대적 감수성과 인물의 심리묘사에 보다 집중한 소설이라는 점에서도 기존의 역사소설과는 결이 다른 특징을 보이는 것 또한 인상적이다.

 

 

 

이 시대가 원하는 삶이란 무엇인가

 

 

   때는 1791년 신해 1월.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의 신주를 불태웠다는 이유로 전라감영에 투옥되었다.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윤지충은 조상의 제사를 놓고 진정성 없는 조상추효의 법도라고 떠들어댔고, 권상연은 죽은 자를 위해 올리는 제사는 명분에 지나지 않는 허례일 뿐이며 가식에 지나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없애는 것이 옳은 처사라고 윤지충을 옹호했다.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은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사교를 신봉하고 유포시켜 강상을 그르치게 하였다는 죄명으로 풍남문 앞에서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되었다. 최무영은 스스로 그들의 죄상이 ‘죄’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으나 조정의 뜻에 따라 이렇게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임금의 뜻과 무관한 조정의 뜻이었다. 노론의 비선 실세들이 공서파를 내세워 서학을 지지하는 신서파를 몰아세우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임금의 아비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한 자들이기도 했다.

 

 

 

『천주실의』와 『칠극』의 교리에서 이단을 찾을 수 없으나 조정이 내린 결정은 단호했다. 조상을 부정하고 제사를 엎었으며 신주를 불사른 죄목만으로 서학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단의 본보기를 사람들 아에서 보여주어야 하며, 완산벌의 정서를 다독이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유생들의 결의는 단단하고 서늘했다. 조정은 유교의 단절을 염려했고, 서학의 융화를 두려워했다. 정교를 무릅쓰고 이단을 허무는 데는 그만한 이유와 까닭과 사연이 있으며, 사적 신앙보다 국가의 존엄이 우선한다는 사직의 결정은 날카롭고 집요했다. / 16p

 

최무영의 말 속에 자유는 흔한 보풀처럼 들렸다. 나라가 정한 자유는 작고 보잘것없었다. 그 안에서 누리고 만끽해야 할 자유는 좁고 가늘어 보였다. 닭장 안에 틀어박힌 자유는 있으나마다했다. 고작 한 줌에 지나지 않을 자유를 백성은 원한 적이 없었다. 그 자유조차 자유롭지 않은 세상에서 머리에 십자가를 심은들 소용없었다. 자유는 목마른 자에겐 한없는 기다림으로 왔으나 권세 아래 눌리고 뭉개지는 동안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 21p

 

 

 

   천주의 뒤를 캐고 불온한 서적을 추적하는 공서파의 탄압은 갈수록 심해졌다. 서학쟁이라고 불리는 무리와 섞여 다니던 대방의 어미는 관아에서 심한 매질을 당해 장독이 온몸에 퍼져 죽었고, 그 아들이 정여립의 후예를 자처하는 초라니패에 가담해 복수를 꿈꾸었다. 누이인 도향은 금기의 연주법으로 가야금을 뜯으며 자유를 갈망했다. 노론 실세들이 사도와 함께 사라져주길 바랐던 박해무는 사도가 죽자 초라니패의 우두머리가 되어 정여립의 대동세상을 열어가고자 하였다가 사헌부에서 가장 위험한 사학죄인으로 점찍혔고, 김혁서는 칼로 세상의 선을 일으키려했고 배손학은 붓 하나로 악을 몰아내고 싶어했다. 완산벌 풍남문에서 세상을 떠난 두 선비의 죽음은 이렇듯 종교라는 신념 너머로 자유와 평등의 시대를 갈망하는 자들의 마음속에 불을 지폈다.

 

 

 

아이의 눈 속에 두 갈래로 나뉜 서학의 색채가 보였다. 사학은 두려운 학문이자 만인의, 만인을 위한 보편의 학문이었다. 감출 만큼 감추고 드러낼 만큼 드러내야 함에도 서학은 민초의 골수에 사무친 궁핍과 정한을 걷어 내질 못했다. 대개는 서학을 남녀와 지위와 신분의 고하가 뒤엉킨 무질의 기운으로 보았으므로 불온했다. 임금에 의해 팔도에 흩어진 천주의 행봉은 묘연한 날이 많았고, 새벽 나절 기도문의 소진이 두려운 날도 많았다. 달빛 아래 광채를 내던 십자가의 전율이 가여울 때도 잦았다. 그 가여움은 결국 약용 자신의 것이므로, 아이의 머리맡에 떠오른 십자가의 광채가 오늘따라 더 안타깝게 보였다. / 94p

 

 

“누구도 죽지 않는 전쟁으로 끝나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전쟁은 그것뿐입니다.”

도몽의 말 속에 끝내야 할 검은 전쟁이 보였다. 하얀 나라에 박힌 검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을지 알 수 없으나 춤사위 속에 전쟁은 예감되어 있었다. 예감만의 전쟁이 쓸모 있을지 알 수 없었으나 이하임의 생각은 달랐다. 춤은 지나온 생의 기억과 다가올 미래 예감 속에 조율되는 것이며, 이것은 바람 부는 언덕에서 춤을 띄워 본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이하임은 생각했다. / 338p

 

 

 

 

 

 

   한편 임금은 죽은 아비의 바람이 관념의 영토에서 화해와 치유로 이해되길 바랐다. 하지만 아비인 사도를 죽인 자들은 여전히 조정을 점령하고 있었고, 유교와 서학의 충돌 앞에 조선의 앞날은 캄캄하기만 했다. 그 마음은 정약용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윤지충의 집에서 의문의 그림 한 점이 압수되었고, 최무영은 이를 임금께 아뢰었다. 예수와 그 열두 제자의 식사 모습이 그려져 있다는 그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모사본이었다. 도화서 화원들은 그림을 불살라 없애라고 했지만 별제 김홍도만이 그림에 간직된 비밀을 알아보는데, 오른쪽 두 번째 자리에 있는 자가 다름 아닌 장영실이라는 것이었다.

 

 

 

   어째서 장영실이 그 그림 속의 인물이라는 것인지, 대체 윤지충은 왜 그 그림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인지 알 길이 없지만, 임금은 예수의 열두 사제들에게서 서학인들의 모습이 자꾸만 오버랩되어 마치 조선의 운명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결국 그림 속의 미스터리를 해결하고, 서학과 유교가 맞서 피의 사태를 불러일으키는 이 땅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홍도는 밀라노로 떠난다. 과연 세월이 흘러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을 통해 다시 조선에 흘러들어온 장영실이란 존재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밀라노로 떠난 김홍도는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올 것인가.

 

 

 

“치정으로 얽힌 노론의 암투가 그림에서 보였다? 김홍도가 그렇게 말했단 말인가?”

“그 말을 전할 때 도화서 별제의 눈은 정직해 보였사옵니다.”

치정과 음모와 반역과 불충의 회오리를 몰아오는 노론 비선들이 그림 속에서 자리를 지키려 서로를 멸시하고 부정하며 저들끼리 속삭이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드러내지 않으면서 은밀히, 가볍지 않은 어조로 서로는 서로를 간절히 원하는 듯이 들렸다. 조용하면서도 원대한 야망을 품은 노론 비선들이 보이지 않는 선을 잇대며 그림 속에서 다급하고 소란한 밤을 준비하는 듯했다. 임금이 한숨을 쉬었다. / 72p

 

 

다빈치의 그림이 조정의 멸시와 박해를 견디며 조선에 건너온 까닭이 있지 싶었다. 어쩌면 13인의 인물들이 일으키는 불화와 단절과 음모와 시기와 질투에 이유가 있을지 몰랐다. 모두를 응시하듯 가운데 앉아 사색에 잠겨 있는 자로부터 자유는 신앙이 될지, 배반이 될지 알 수 없었다. / 233p

 

 

 

 

 

 

   이렇듯 『최후의 만찬』은 천주교 박해라는 실 역사를 배경으로 양심과 신념이 격돌한 시대를 온몸으로 마주했던 이들의 고뇌에 밀착한 소설이다. 여기에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속에 장영실의 흔적을 덧입힘으로써 믿음이 자유로운 곳에서 평등한 신분으로 살아가기를 희망했던 장영실의 과거로부터 미래의 오늘을 들여다보려 했다. 소설 속의 임금, 즉 정조가 허균에서 정여립으로, 정여립에서 장영실로 이어지는 연결 지점마다 떠돌던 세상의 향기를 생각했듯, 시대는 달라도 미래를 내다보며 꿈꾸었을 과거의 인물들을 통해 오늘을 들여다보자는 작가의 메시지가 오롯이 느껴졌다.

 

 

 

신앙은 깊고 넓은 세상을 작은 개인으로 하여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하고 살아갈 날들의 희망을 열어가는 데 있었다. 김홍도를 바다 멀리 이양선 태워 보낸 것도 장영실이 살아갔을 세상의 가치와 내용을 살피려 한 까닭이 먼저였다. 장영실이 열어갔을 희망과 희구의 날을 돌아보는 것은 조선의 과학을 후세에 전하기 위함이었다. 그 삶을 추적하는 것은 한 점 그림에서 시작되었으나 그림이 전부가 아님을 임금도 알았고, 최무영도 알았다. / 227p

 

 

“저마다의 죽음을 생각하고, 모두의 삶을 생각합니다. 삶과 죽음은 한 가지 향기로 채워질 수 없습니다. 세상의 향기는 별과 다르지 않습니다. 별처럼 생멸의 비중이 무한한 것이 향기라고 배웠습니다. ”

누오의 입 속에서 풍성한 삶이 밀려왔다. 떠밀려가는 죽음이 들려왔다. 완산벌 풍남문에서 십자가를 걸고 죽는 순간까지 윤지충이 지키려 한 것은 외줄기 기도보다 세상의 향기였을 것이다. 목숨을 걸고 권상연이 세상에 남기려 한 것도 구원의 약속보다 모두를 위한 향기였을 것이다. / 291p

 

 

 

   책을 읽으며 조선과 <최후의 만찬> 그리고 장영실이라는 인물을 엮어 시공간을 초월한 놀라운 상상력을 창조했음에도 이를 뒷받침해줄 서사가 부족했던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비록 허구일지라도 이것을 독자로 하여금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그럴 듯한 근거와 서사가 아닌 그저 김홍도가 보고 온 것을 ‘말하는’ 수순에서 그치기 때문에 완성도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시대가 지닌 상처와 고뇌의 목소리에 더 집중한 나머지 스토리가 부실해진 것인데, 이는 아마도 독자들의 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이제껏 역사를 다룬 여타의 소설들과 결이 다르다고 느껴지는 독보적인 탁월함이라 하면, 어느 하나 허투루 읽히는 것 없이 촘촘하면서 아름답고 또 묵직하기까지 한 ‘문장’을 꼽을 수 있을 듯하다. 쉽게 읽히지는 않지만 그래서 더 곱씹고, 또 곱씹어보면서 이 울림통이 큰 문장에 어느 새 몰입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승원 소설가가 ‘이 소설은 천천히 저작하듯 읽어야 한다’고 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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