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억이라는 유산을
들고 할머니가 돌아왔다!
유쾌한 풍자와 미스터리, 연민의 역사를 한 데 아우른
페이지터너!
광복 직전 염병에 걸려 죽은 줄 알았던 할머니가 돌아왔다. 67년 만에, 금발 머리에 깃털 달린 기괴한 밤색 벙거지 모자를 쓰고
동전만 한 은빛 반짝이가 잔뜩 달린 요상한 원피스를 입고서. 이산가족이 상봉이라도 하듯 집안이 눈물바다가 되어야 하는 게 마땅한 일인데,
고매하고도 고결한 정신을 지닌 할아버지는 대뜸 ‘개잡년’이라고 욕을 하며 할머니에게 나가라고 소리를 치고, 아버지는 집에도 들어오지 않은 채
침묵했으며, 절을 받아야겠다는 할머니의 말에 어머니는 남편과 상의한 후에 절을 하겠다한다. 여기에 고모는 핏덩이 같은 쌍둥이를 두고 도망간
할머니에 대한 분노로 왜 왔느냐고 악다구니를 퍼붓는다. 소설 속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동석은 그저 죽은 줄 알았던 할머니의 이 떠들썩한 귀환에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하지만 이 곤란한 광경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할머니가 기다렸다는 듯 모두에게 회심의 한 방을 터뜨렸으니, 자그마치
60억. 60억이나 되는 유산을 물려주러 왔노라고 선언한 것이다.
할머니, 60억은 정말
있는 건가요?
『할매가 돌아왔다』는 일본 순사와 바람이 나 집 나간 정끝순 할머니가 67년 만에 60억이라는 유산을 들고 가족 앞에 나타나 벌어지는
가족희비극이다. 마치 이 집에 오래전부터 살기라고 했었다는 듯 능청스럽게 나타나 가족 앞에 공개한 이 어마어마한 유산은 당장 나가라던 가족의
야유를 금세 숨죽이게 했고, 그들은 저마다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굴려대느라 바빠지기 시작한다. 60억 이후, 마침내 집안은 비로소 화해와 용서,
잃어버린 67년, 감동의 대 서사시가 엄숙하게 전개되면서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진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할머니를 용서 못하는 듯했지만,
전도양양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고모와 이혼 때 위자료로 청계천에 위치한 3층 건물을 받아냈으며 현재 촉망받은 대학교 전임강사인 여동생 동주,
정의와 양심보다 돈을 가장 중요시 여겼던 어머니는 이때부터 할머니를 극진히 대하게 된 것이다.
“오빠 결혼 문제는 일단 보류한다고 해도 우리 집 정말 더 이상은 이대로 안 돼. 우리 집은 고여 있는
물 같아. 할아버지 정정하신 거야 장수 시대가 되었으니 감사한 일이지만 환갑이 지난 엄마가 아직도 슈퍼에서 일하시면서 가계를 책임지고 있는 건
정상이 아니야. 미한한데 이건 순전히 아빠랑 오빠 때문이야. 아빠야 뭐 그렇다 치고 오빠는, 정말 미안하지만 오빤 10년 전부터 성장이 멈춘
거야.” / 53p


그런데, 정말 할머니에게 60억이 있다는 게 사실일까? 무려 88회 낙방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친구가 사주는 술이나 얻어먹고 PC방을
전전하던 만년 백수 동석은 할머니를 모시고 서울 구경을 시켜드리던 가운데 이를 의심할 만한 정황을 포착해내고 만다. 일본에서 택시 사업을 해
60억을 벌었다던 할머니는 관광 안내원의 또렷한 일어 설명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 말로만 60억이지 그걸
확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언제 주겠다는 것인지 그걸 들은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확인이 필요한 일인데 그걸 누가 어떤 방식으로 확인해야
하는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의 60억을 두고 가족끼리 눈치싸움이 계속되던 어느 날, 할머니가 동석에게 PC방을 차려주기로
하며 약속했던 1억이 문제가 생기자 본격적으로 의심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할머니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고모와 동주, 어머니가
팀으로 연합해 치밀하고 집요하게 할머니의 뒤를 캐내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새로운 사실들이, 베일에 싸여 있던 할머니의 정체가, 그녀의 지난
67년이 하나둘씩 그 모습을 드러내고야 만다.
순간이란 참으로 강렬한 것이었다.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놓쳐버리게 되는 어느 한순간. 그러나 그 순간을
놓치면 어떤 경우엔 전체의 의미를 다 오해하게 될 수도 있다. 하긴 바로 그 때문에 세상엔 끝없는 오해와 불통이 일어나고 그 와중에 다툼과
증오가 태어나는 것이겠지만. / 132p


60억의 행방을 찾기 위한 것으로 출발했던 추적은 뜻밖에도 한국 근현대사와 그 속에서 폭력과 억압, 상처로 얼룩진 여성의 서사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매일 뜀을 뛰고 금강에서 피라미를 잡고 야산에서 뱀, 들판에서 메뚜기, 논에서 개구리와 우렁이를 잡는 재미로 살던 활달한
계집아이가 하늘 같은 최씨 집안의 도련님인 할아버지와 만나 혼인 한번 하려고 지독하게 맞다가 죽을 뻔했고, 그 넓은 강경뿐 아니라 주변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소문난 기적 같은 혼인을 해 참 눈물 쏙 빼는 시집살이를 했더라’는 할머니의 담담한 이야기와 달리 거기에는 꽤나
복잡한 내력이 숨어 있었다. 그것은 폭력을 일삼았던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의 사회 속에서 억압당하고 무능력한 가장을 대신해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고단한 여성들의 삶이었다. 동석으로서는 참 믿기도 그렇고 안 믿기도 그런 꼭 60억 같은 이야기, 본인이 아니고서야 다 이해할 수 없을 이야기.
어쩌면 이 땅의 모든 엄마와 할머니들이 겪었을지도 모를 이야기. 덕분에 가족들도 할머니를 이해하고 그간 쌓아왔던 오해들을 조금씩 풀게 된다.
난 배 속의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배만 보호하느라 네 할아비 주먹을 피할 길이 없었다. 내
생활은 지옥이었다. 맞는 게 억울하고 분했지만 그것보다 더 괴로운 건 공포였다. 네 할아비 눈빛이 조금이라도 이상해지만 난 겁이 나서 견딜 수
없었지. 난 지금도 세상에서 맞는 게 제일 싫다. 조선 남자들은 참 이상해. 왜 겁이 나거나 불안해지면 자기 여자를, 아무 힘도 없는 여자를
두들겨 팰까? 조선 남자들은 다 비겁하고 못난 놈들이다. 그래서 지금도 난 짝불이가 싫다. / 256p
‘사랑은 수락이다. 그리하여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 존재 자체를 수락하는 것이다. 그 존재의 모든
허약함까지도. 그렇다. 수락하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인간에 실망하지 않게 된다. 다만 서로 연민할 뿐이다.’ /
304p
소설은 60억을 둘러싼 미스터리 같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중심축으로 하고 있지만, 등장인물 각각의 내밀한 속사정을 통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짊어져야 했던 삶의 무게들, 사회적으로 기대하게 되는 저마다의 역할들, 얄팍한 허상과 이중성으로 포장된 사회의 단면들도 함께 드러낸다.
한편의 풍자극처럼 찌질하면서도 유쾌하게, 그렇다고 마냥 웃기에는 어딘지 많이 서글프게. 이것이 우리가 이 소설을 ‘좌충우돌 60억 유산
쟁탈극’으로 단순하게 말할 수 없는 이유일 테다.
난 화가 났지만 내가 맞은 것보다 더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대들 수는 없었다. 동주는 집에
없었고 할아버지는 끝내 방문을 열지 않았다.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가자 어머니가 부서진 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내가 도우려고 다가섰지만 어머니는
매섭게 내 손을 뿌리쳤다. 어머니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눈물이 핏빛, 빨간 김칫국물에 떨어졌다. 그 후로 난 절대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다. 엄마라고 부르며 이물 없이 굴다가 나도 어느 순간 어머니에게 화를 내며 달려들 것 같아 의도적으로 호칭을 바꾸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 258p


결국 60억 유산을 둘러싼 소동은 할머니가 잃어버린 67년의 세월을 되찾고, 드러나지 않았던 가족의 폭력과 상처들을 치유하는 과정으로
귀결된다. 할머니는 정말 60억을 갖고 있는 걸까, 소설 시작부터 내내 품게 되는 이 궁금증은 끝내 풀릴 길이 없지만, 그래서 이야기는
마지막까지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프레드릭 배크만의 『브릿마리 여기 있다』 라는 작품을 떠올리곤 했는데, 남편의 그늘 속에서
자식의 어머니로서의 삶만을 살아온 이 땅의 엄마와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긍정해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을 이해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