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할 땐, 책 - 떠나기 전, 언제나처럼 그곳의 책을 읽는다
김남희 지음 / 수오서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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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보니 떠나고 싶고, 떠나고 싶어 읽었던 여행 작가 김남희의

책으로 기억되는 여행 혹은 여행으로 기억되는 책!

 

  돌이켜보면 나는 떠나는 일에는 한없이 게으른 사람이었다. 사람에서든, 집에서든. 가보지 못한 곳들에 대한 동경과 해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미련이 없는 것도 아닌데, 떠돌고 헤매고 낯선 세계에 발을 내딛는 일에 자주 주저하곤 했다. 익숙한 것들에 너무나 익숙해져서, 이곳이 아닌 저곳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나는 떠나는 일에도 반드시 이유가 필요했다. 떠나야 할 이유를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게 이유라면, 책에라도 핑계를 대어볼 걸. 난생 처음으로 영화 <밀양>을 보고, 이청준의 소설 「벌레이야기」를 읽고 느닷없이 밀양행 기차를 탔던 그날처럼. 지금이야 휴대폰으로 ‘밀양 가볼 만한 곳’, ‘밀양 맛집’을 검색해가며 그때그때 갈 만한 곳을 찾아볼 수라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정말 어떤 정보도 없이 그저 영화의 흔적을, 소설의 느낌만을 좇아 그렇게 기찻길에 올랐었는데.

 

 

 

   딱히 지켜야 할 것이 없었던 보다 더 젊은 시절에 혼자서 여행이라도 많이 다녀볼 걸, 하는 후회가 많이 드는 요즘이다. 그래서 줄곧 소설만 읽을 정도로 독서 편식이 심했던 내가 언제부턴가 여행에세이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이런 세계가 있었구나, 이런 여행도 가능한 거였구나, 이 정도 이유만으로도 떠날 수 있는 이유는 충분하구나. ‘소설 한 구절에 마음이 빼앗겨 충동적으로 여행 가방을 꾸리는 나는 그 누구보다 사치스러운 사람이 된다’던 김남희 여행 작가의 <여행할 땐, 책>을 읽으며 더더욱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어떤 소설의 중요한 공간이었던 거리를 내 발로 걸어보기 위해, 소설의 주인공이 팔던 음료를 마시겠다고 쇠락한 도시의 오래된 카페를 찾아가며, 매혹적인 남자 주인공이 32년간 갇혀 있던 호텔에 하룻밤을 머물며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던 그 고백이 내게는 그 어떤 여행보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당신의 여행 가방에는 어떤 책이 들어있나요?

 

 

   「여행할 땐, 책」은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외로움이 외로움에게」, 「라틴아메리카 춤추듯 걷다」 등 길 위에서의 순간을 기록한 다수의 여행에세이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남희 작가의 신작이다. 전작인 「길 위에서 읽는 시」가 여행길에서 읽은 스물여덟 편의 시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번 신작의 주제는 바로 ‘책’이다. 그녀는 ‘내 여행은 배낭에 넣어갈 책을 고르는 일로 시작된다’고 말한다. 느릿느릿 흘러가는 치앙마이에서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천천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볼까. 고요한 언덕의 리스본에서는 리스본을 사랑한 작가의 소설로 골라볼까. 불과 얼음의 땅, 통제할 수 없는 강력한 자연이 살아 있는 레이캬비크에서는 범죄 소설이 어떨까, 고민해보며 평소에는 잘 읽지 않을 장르의 책에도 과감히 손을 뻗어보는 것이다. 마음의 그물이 느슨해지는 여행지에서는 독서의 취향조차 넉넉해지기 때문이다.

 

 

 

   저물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모습에 문득 혼자임이 새삼스러워질 때,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기에는 애매한 오후의 시간에, 빗소리에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밤에, 간이역에서 열차를 기다릴 때 습관처럼 펼쳐든 시간이 이 책 속에도 추억처럼 새겨져있다. 한낮의 시에스타처럼 느른한 그리스의 이드라 섬에서부터 그녀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고양이 섬’이라 할 만큼 골목마다 각양각색의 고양이들이 넘쳐나는 곳,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금지된 섬이니 골목 한복판에서 기나긴 낮잠을 청하고, 포구의 카페마다 제일 좋은 자리를 지정석으로 삼는 그들. 끼니때마다 사료를 챙겨주고 물을 갈아주는 집사들이 골목마다 상주하니 이만하면 사람보다 나은 인생이지 않은가.

 

 

 

   게다가 2시부터 4시 사이에는 시에스타가 있어서 매일 두 시간씩 낮잠을 자는 삶이 가능한 섬이라 그 시간이 되면 고양이도 사람도 최선을 다해 잔단다. ‘난 낮잠 자는 것도 아까워’를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나에겐 이런 의무적인 낮잠이 새삼 부럽다. 그렇게 작가는 매일 고양이와 함께하는 날들을 두 달 가까이 보내며 후지와라 신야의 에세이집 「인생의 낮잠」 속의 한 글귀를 떠올린다. ‘고양이는 본디 넘쳐나는 인간의 생활 냄새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동네 바보 같은 동물이며, 고양이가 많다는 것은 동네 바보를 거둘 만큼 마을에 활기가 넘쳐난다는 얘기이자 주민들의 마음에 여유가 있다는 뜻’이라고. 넉넉한 인심과 묘심이 어우러진 풍경을 즐기기 위해 아침마다 포구로 나가 날마다 찬연하게 쏟아지는 빛을 맞으며, 그늘에서는 고양이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섬에서 보낸 한철은 마치 ‘인생의 낮잠’ 같았다는 그녀의 말이 나를 저절로 그리스 이드라 섬으로 이끈다.

 

 

신분도 국적도 직업도 다른 이들이 제각각의 사연으로 이곳을 찾아오지만 이곳에서는 단 하나의 이름으로 불릴 뿐이었다.

순례자.

그 평등과 관용의 정신이 어느새 전통이 되었고, 그 전통이 다시 세계의 순례자를 끌어들이며 더 강화되어 오지 않았을까. 산티아고의 신성은 결국 변화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다른 나를 찾고 싶다는 갈망, 더 많이 감사하고, 좀 더 겸손하고, 더 자주 웃는 나를 보고 싶다는 바람으로 우리는 이 길을 찾아오는 게 아닐까. / 33p

 

 

우리는 겨울 오후에 비껴드는 햇살의 따사로움, 시내에서 일을 보고 걸어 돌아오는 초여름 밤에 밀려오는 라일락 향기, 동네의 계곡에서 겨울을 이기고 산란한 도롱뇽 알을 본 봄날의 작은 작은 흥분 같은 것들. 이런 기쁨을 놓치지 않으며 살고 싶다. 생활의 작은 풍요를 날마다 누리며 살고 싶다. 모든 것이 소멸해가는 세월 속에서 삶의 의미가 되어주는 건 이토록 구체적이면서도 사소한 것들이다. / 43p

 

 

인간이 장소에 기대어 삶을 이어가는 한 세상 어디에도 슬픔이 베이지 않은 도시는 없을 것이다. 삶이 있는 한 어떤 공간에서나 고통스러운 일들은 생겨난다. 다만 시간이라는 열차의 바퀴 자국이 그 상처를 희미하게 만들 뿐. 냉정한 시간이 이제는 치유자가 되는 아이러니가 우리의 삶이다. 길고 고통스러운 치유의 과정이 고스란히 쌓여온 공간에서 우리는 다시 살아간다. 지나가버린 시간을 그리워하면서도 공간을 바꾸어 삶 또한 변화시키고 싶다는 모순되는 욕망을 안은 채로. 리스본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길 원했던 도시였던 동시에 과거를 향한 진한 향수병을 앓는 도시였다. 소설 속 남자 아마데우 안에 길을 떠나길 원하는 여행자와 과거를 향한 그리움을 앓는 두 사람이 있었듯이. / 70p

 

 

 

 

 

 

   “Be not inhospitable to strangers, lest they be angels in disguise(낯선 사람들을 냉대하지 말라, 그들은 변장한 천사일지 모르니.”

파리에 가면 오갈 데 없는 창작자들의 몸 뉠 곳을 마련해주는 예술가들의 안식처가 있다고 한다. 바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이다. 창작자들에게 무한한 영감을 주는 도시답게 나는 줄곧 혼자서 여행을 한다면 파리에서도 꼭 이곳에 가보고 싶었다. 예술가들의 발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쉴 수 있는 자리까지 마련해주는 곳이라니 어쩐지 낭만적이다. 「여행할 땐, 책」 속에도 이 서점이 등장한다. 지난 백 년 동안 책 도둑과 흥망성쇠를 같이 했다고 과언이 아닐 만큼 번번이 사라지는 책들, ‘고객’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은 뜨내기 관광객들의 예의 없는 행동들이 어쩌면 이 오래된 서점의 낭만을 깎아먹는 듯하지만, 넓은 지구에서 내가 누군가와 이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이 아름다운 통로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기록된 이 작지만 커다란 세계가 내내 그 자리에 머물러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두 같지 않을까.

 

 

 

《행복의 지도》에서도 지적한다. “민주주의가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곳이 민주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다”고. 시스템이나 체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한 의지를 잃지 않은 채 자신의 주변 풍경을 사소한 것에서부터 바꿔가는 개인일지도 모른다. / 58p

 

 

아마데우가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라고 했듯이, 시공간을 축으로 진행되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시간은 죽음이라는 일방통행로를 따라 모두에게 같은 속도로 흘러간다. 시간이 우리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데 비해 공간은 유동적이며 탄력적이다. 선택의 가능성이 있기에, 우연적으로 일어난 일, 찰나의 스치는 만남, 이런 것들이 어떤 공간에서는 필연적이고 운명적인 결과로 변할 수도 있다. 삶에서 예외성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상상을 열어주는 공간’이다. 어떤 장소는 우리의 상상을 현실화시키고, 더 나아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새 삶을 열어주기도 한다. 공간을 바꾼다는 것은 결국 삶의 예외성과 우연성 속으로 뛰어들어 삶 자체를 바꾸어내려는 의지가 아닐까. / 68p

 

 

  조르바를 동경해 조르바처럼 살고 싶었던 20대의 나와, 이제는 빛의 세례를 누리며 살아가되 광기에 휩싸이지 않고 열정을 잃지 않되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 삶을 꿈꾸는 지금의 나를 마주하게 한 그리스, 만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흔적을 좇아 찾아간 가마쿠라에서 건져낸 일상의 힘, 경이로운 아마존의 신비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것 같았을 때 ‘숲에서 우주를 보’게 해준 조지 해스컬의「나무의 노래」, 네팔의 희말라야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야생으로 들어간 청년의 「인투 더 와일드」까지. 이 무수한 길 위의 시간 속에서 그녀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치열하게 마주함으로써 단독자로 서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이기도, 유목민의 삶과 정주민의 삶에서 어디에 속하기를 원하는지 고민하며 자신을 읽는 법을 배우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여행이 내게 순간을 열어주는 한, 나는 마지막까지 떠돌며 살아갈 것이고, 다시 힘을 내어 이 세계의 온갖 미혹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어 잠들지 못하는 ‘몽유병 여인’이 될 것이라 다짐해보기도 한다. 이렇듯 여행 그리고 책은 끊임없이 내 안의 나와 또 다른 나를 바라보게 하는 것, 그 속에서 늘어나는 깨달음이 그녀를 계속해서 길 위로 이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라를 막론하고 가난한 이들일수록 그들에게는 강력한 배후가 있었다.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일수록 지상이 아닌 천상에서의 보상을 믿고 있었다. 현실의 벽이 견고할수록 지금 여기의 삶이 아닌 다른 세계의 더 나은 삶을 기대하는 것일까. 내세, 천국, 윤회, 구원, 업보. 이런 단어들이 내게는 현실에 눈을 감게 만드는 거짓과 기만으로 다가왔다. 고결하고 신성한 세계로 귀의하고자 하는 갈망이 비루한 일상의 견디는 힘이 되어주는 현실이 우스웠다. 지금 이곳의 삶을 개선하지 않는 종교라면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 178p

 

 

결국 품위 있는 삶은 공간을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과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들에 대한 다정하고 성실한 태도.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한다 해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다 해도 자신의 세계를 아끼며 가꾸는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면? 삶의 품격이란 결국 그런 마음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 214p

 

 

 

 

 

  그녀는 ‘인간은 희미한 타인의 마음으로도 꽤 멀리 나아가고, 놀랄 만큼 오래 꿈꿀 수 있는 존재’라는 말을 되새긴다. 그녀가 지치지도 않고 여행을 떠나는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도 세상 어딘가에서 내 손을 잡아줄 낯선 얼굴을 상상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보이지 않는 손의 온기를 믿기에 늘 떠날 수 있다는 믿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 믿음까지 동경하게 되었다. 그 믿음의 부재가 나의 발목을 계속 붙잡고 있었기에. 덕분에 나는 이제 그녀처럼 오롯이 나를 위해서 책과 함께 할 여행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때는 무슨 책을 읽고, 또 무슨 책을 들고 가 볼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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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업 - 하 - 반룡, 용이 될 남자
메이위저 지음, 정주은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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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를 제패하기 위한 처절한 사투, 그 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사랑!

음모와 배신, 권력의 비정함과 무상함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철의 여인!

 

 

 

   선황이 갑작스레 붕어하고 황후는 중풍으로 쓰러진 가운데, 지난 2년 동안 경사의 정국이 불안하여 제왕의 난 이후로 남방 왕족은 경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오랜 세월 경사의 황실과 대등한 세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왕공귀인들은 각자 군대를 두고 힘을 키웠으며 권문세가의 세력이 서로 얽히고설키는 것도 모자라, 근래에 들어서는 관리들이 갈수록 부패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졌다. 그야말로 난세 중에 난세다. 이에 난세를 평정하고, 3황자였던 자담으로 하여금 황제에 오르게 하고 스스로 실권자가 되어 경사의 정세를 안정시킨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소기다.

 

 

 

   한편 ‘남자의 천직이 개척과 정벌이라면, 여자의 천직은 보호하고 돕는 것이다.’는 말을 고모인 황후로부터 오랫동안 들어왔던 왕현 역시 음모와 배신, 역모를 꿈꾸는 잔당들로 얼기설기 얽힌 구중궁궐의 음험한 비밀 앞에서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간다. 한때는 정인으로 권력의 꼭두각시 노릇과는 거리가 멀었던 자담을 황제의 자리에 내세운 것도 모자라, 훗날 소기를 제왕의 자리에 올리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앞서 『제왕업』 상권이 왕현과 소기의 운명적인 만남과 더불어 음모와 배신이 도사리고 있는 구중궁궐의 중심에 들어서기 시작한 과정이 그려졌다면, 하권에서는 허울뿐인 황제를 대신해 왕현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권력을 지키고자 피비린내를 무릅쓰고 온갖 위기 속에서 철의 여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나는 당신이 패업을 이루고 천하를

통치하는 것을 지켜볼 거예요!” / 196p

 

 

 

   때마침 유산을 한 몸에다 여린 몸으로 여러 위기와 고초를 겪어 몸이 약해진 왕현의 뱃속에 아이가 들어선다. 두 사람에게는 경사요, 나라에도 경사이며 드디어 소기와 왕현의 사이에 자식이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까지 딛고 일어설 수 있게 되었지만, 당경이 모반을 일으키고 돌궐이 국경을 침범하여 나라에 큰 변고가 일어난다. 이에 소기는 부대를 이끌고 친히 정벌에 나선다. 이제 이렇게 떠나면 출산은 물론, 꼬물꼬물 아이가 기어 다닐 때까지 얼굴을 보지 못할 수도 있기에 왕현으로서는 원망과 외로움,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마음이 괴롭지만 그녀는 소기의 아내이자 예장왕의 왕비였고, 수많은 사람이 전쟁 중에 가족과 목숨을 잃고 피붙이와 헤어지는 고통을 겪을 것을 생각하며 이를 담담하고 의연하게 받아들이기로 한다. 과연 소기는 나라의 위기를 평정하고 난관을 뛰어넘어 왕현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소기가 궁에서 사라진 지금, 왕현에게는 또 어떤 위기가 닥칠 것인가.

 

 

 

내 뱃속에는 나와 소기의 아이가 있다.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전쟁통에 부모와 모든 것을 잃은 이 아이도 이제 내가 사랑하는 보물이 될 것이다. 나는 이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지켜줄 것이며, 아이에게 사랑과 온기를 보상해줄 것이다.

이 아이뿐만 아니라 그 많은 의지가지없는 아이들 모두 전쟁의 희생양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심아의 손을 잡고 회랑을 지나면서 내 마음속은 점점 더 밝아지고 분명해졌다. ‘사내들의 세상인 전쟁에서, 여인은 그저 집에서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밖에도 매우 많았다. / 289p

 

 

난세에는 강자가 살아남고 약자는 죽는 법, 왕씨 가문과 사씨 가문처럼 대단한 명문세족이라도 언제 어느 때고 무너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자와, 그 정점에서 겨우 한 걸음 떨어져 있는 자의 차이다. / 355p

 

 

 

한때 나와 소기는 각자의 간교한 심보 탓에 수많은 오해와 의심을 품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지난 세월 동안 끊임없는 풍파를 겪으면서 마침내 마음속의 응어리를 내려놓고 서로를 온전히 믿게 되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위태로는 순간을 모두 버텨냈다. 만약 심중의 부담을 내려놓지 않았다면 어찌 마지막 난관을 뛰어넘을 수 있겠는가! / 404p

 

 

 

 

 

 

   소설은 왕현과 소기가 음모와 배신,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난관을 헤쳐 가는 과정을 긴장감 넘치는 전개로 마지막까지 휘몰아친다. 소기가 출정을 떠나고 예상치 못했던 반전으로 위험에 처하는 왕현과 여인의 몸으로 이에 단호하게 맞서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다. 이렇게 장대한 스케일과 서사, 긴장감 넘치는 액션을 겸비하면서도 섬세하고사실적인 묘사, 아름다운 로맨스까지 두루 갖춘 소설은 근래에 참 오랜만인 듯하다. 복잡한 중국의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것에 함몰되지 않고 이토록 거대한 상상력을 유려하게 조직해낸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이 작품이 작가의 데뷔작이라니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이렇듯 원작에 대한 인상이 좋았던 데다 소설 속 후기의 여운이 아직도 가시질 않는 만큼 드라마도 어떻게 만들어졌을지 무척 기대가 된다. 장쯔이 주연의 2020년 중국 최대의 기대작이라 하니 꼭 찾아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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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업 - 상 - 아름답고 사나운 칼
메이위저 지음, 정주은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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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제왕의 업을 이룰 것인가!

대륙을 아우르는 장엄한 스케일과 궁중의 치열한 암투를 섬세하게 그린 대작의 서막!

 

 

 

   한때 <측천무후>, <황제의 딸>과 같이 중국 황실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들을 비롯해 『삼국지』와 같은 중국의 고전 문학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 특유의 호방하고 장엄한 스케일에 궁중 내의 치열한 암투까지 섬세하게 다룬 『제왕업』을 접하는 순간 단 몇 페이지만에 마음을 사로잡히고 말았다. 권력의 비정함과 안팎으로 끊임없이 생사의 위협에 시달리는 왕현과 패업의 꿈을 이루기 위한 소기의 위험천만한 사랑이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해서 나는 내내 초조한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달음질치느라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읽었다. 상권과 하권으로 나눈 두꺼운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드라마 한 편을 정주행하는 마음으로 시간가는 줄도 모르게 읽었던지라 2020년에 개봉될 드라마가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것 또한 나뿐만이 아닐 듯하다.

 

 

 

 

 

 

가문의 영예와 책임, 그 풍랑 속의 중심에 선 여인

 

 

   어머니가 황제의 누이요, 고모가 황후이며, 아버지가 조정 최고의 권력자이자 낭야왕씨 가문의 수장인 진국공의 딸로 자라 그야말로 금지옥엽, 구중궁궐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자라난 왕현이 열다섯 번째 생일을 맞았다. 최고 권력층이 드나드는 궁에서 살다시피 하며 권력의 비정함과 무심함을 어렴풋이 겪긴 했으나 이제까지는 그저 밝고 귀하게 자라온 그녀였다. 오랫동안 황제가 총애하는 사씨 가문 출신의 사 귀비 소생이자 3황자인 자담을 연모하여 당연히 그와 정인이 되리라 믿었고, 자담 또한 그녀를 그 누구보다도 아끼고 귀하게 여겼으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남방 변경의 오랑캐와 반군의 결탁을 몰아내고 나라의 위대한 공을 세운 예장왕의 혼처로 왕현이 정해지고 만다. 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은 황후인 고모와 아버지인 진국공이 이 혼사에 누구보다 적극적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도 무척 사랑한 사람이 있었단다. 한때 그는 내 삶의 가장 큰 기쁨이자 또 슬픔이었지. 그 기쁨과 슬픔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 그것을 얻든 잃든 오롯이 나 혼자 감당해야 했단다. 그러나 또 다른 얻음과 잃음은 나 혼자만의 기쁨과 슬픔보다 훨씬 깊고 중하며, 살아 있는 한 거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었지. 그것은 바로 가문의 영예와 책임이었어.”

가문의 영예와 책임. / 57p

 

 

 

 

 

 

 

   가문의 영예와 책임을 등에 업고 예장왕과 혼례를 치른 첫날, 뜻밖의 변고가 일어나 첫날밤은 산산조각이 나버린다. 북방 변경의 상황이 매우 급박하여 새신랑이 첫날밤을 치르기는커녕 신부의 얼굴조차 보지 않고 떠난 것이다. 왕현은 대국과 가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대가가 이런 치욕이었다니 울분을 참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아직도 얼굴을 내비추지 않는 남편에게 마음에도 없는 감정을 애써 꾸며낼 필요 없이 이렇게 저렇게 한평생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체념하려는 찰나에 느닷없이 괴한들이 들이닥쳐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렇게 예장왕 소기의 부대에 의해 일족이 몰살당한 것을 복수하려는 하란잠에 의해 납치를 당했건만, 열흘이 지나도록 자신을 구하러 와줄 이렇다 할 움직임이 보이지 않자 왕현은 이내 실망한다. 심지어 탈출 시도도 번번이 가로막힌다. 나는 이 같은 수모를 당하고 있는데, 지금 그는 어디 있단 말인가? 그에 대한 원망이 더더욱 강하게 피어오르는 가운데, 한 회색 옷을 입은 사내로부터 소기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하지만 진즉에 자신을 구해낼 수 있었음에도 잠자코 기다린 데다 자신의 안위는 전혀 개의치 않고 적의 수중에서 이토록 곤경을 겪도록 내버려두고 있는 그에게 더욱 몸서리쳐질 뿐이었다.

 

 

 

어디 하란잠뿐이겠는가……. 전쟁으로 고통을 받은 백성들 가운데 부모 형제 없는 이가 어디 있을까! 처량하게 홀로 남아 분노를 터뜨리던 그 소년에게 어머니와 여동생은 아마 유일한 행복이자 근심이었을 것이다.

상처투성이인 그가 가엾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원한을 품은 대상은 내 낭군, 내 나라였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의 복수를 위한 장기짝이 되어 있었다. / 153p

 

 

 

   이윽고 운명의 날이 닥치고, 소기를 노리는 하란잠과 그런 하란잠을 노리는 소기의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지며 왕현의 목숨이 위태로운 가운데, 극적으로 소기가 왕현을 구출해낸다. 그렇게 생사의 위험을 건너 3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야 드디어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게 되고, 그간에 서로의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었던 상처와 오해들을 마침내 풀 수 있게 된다. 비록 시작은 어긋났지만, 갖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결코 하나로 이어질 수 없을 것 같았던 그들의 마음도 서로에게 가 닿기 시작한다.

 

 

 

“당신과 나 사이에 다른 사람은 없소.”

 

 

 

   하지만 여전히 이들의 사랑 역시 바람 앞의 등불인 가운데, 왕현은 소기와 자신의 혼인 뒤에 숨겨진 충격적인 비밀과 마주하게 되고, 또 자신이 이들의 운명을 쥐고 흔들 거대한 피바람의 중심에 서게 되었음을 직감한다. 특히 자신의 두 손으로 소기에게 보내기 전까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든 것을 주었던 아버지와 고모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들이 가문과 스스로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왕현을 이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지난날의 보호막이 사라진 뒤에야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얼마나 더 강해져야 하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덕분에 그녀는 소기의 여인이자, 이 나라를 이끌 제왕의 여인으로 점차 변모하기 시작한다.

 

 

 

그 아름다운 모든 것은 이미 풍진세상에 떨어져 내려 잿더미로 화해버렸다. 그때 나는 기꺼이,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아버지가 가리키는 길로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원망도, 후회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순간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버려졌다는 절망감이 마음속에 뿌리내렸을 뿐이다.

숱한 고난을 겪고 생가의 기로에 서보기도 하면서 마침내 인생이 얼마나 고달픈 것인지 깨달았다. 누구의 곁에 서야 비바람을 피하고 맑은 하늘을 가질 수 있을까? 지난날의 보호막이 사라진 지금, 어디에 몸을 의탁해야 할까?

아버지, 내가 충성을 바치는 것은 단 한 번뿐입니다.

3년 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충성을 바쳤으니, 이번에는 내 낭군의 곁에 서렵니다. / 390p

 

 

시든 꽃은 미인처럼 박명했다.

팔자를 잘못 타고났고, 길을 잘못 택했고, 사람을 잘못 만났다.

팔자를 잘못 타고나도 운명에 순응하고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며 일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다. 가장 가엾은 것은 두 가지 경우다. 하나는 품은 뜻은 높지만 타고난 팔자가 더없이 기구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걸음마다 가시밭길이 펼쳐져 뚫고 나가지 못하면 그 자리에 갇혀 죽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 238p

 

 

 

 

 

 

   난세 속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권력 다툼과 궁중 암투, 누가 누구를 믿어야 할지 가족조차 믿을 수 없고 자칫 잘못 내딛으면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순간이 계속되는 가운데, 과연 왕현과 소기는 자신들의 사랑을 지켜내며 제왕의 위업까지 달성할 수 있을까. 한겨울 서릿발처럼 매서운 칼바람 속에서 덩달아 이리저리 나부끼는 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채로 하권으로 달려가기 위해 여기서 일단락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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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생 새움 세계문학
기 드 모파상 지음, 백선희 옮김 / 새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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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의 삶에서 우리 모두의 인생을 마주하다!

쓸쓸하고도 고독한 인생의 가장 보편적인 그늘을 섬세하게 표현해낸 아름다운 고전!

 

 

 

   프랑스 고전 작가들의 판매 부수를 집계한 《르 피가로 리테리르》지에 따르면 8년이라는 자료 조사 기간 동안 장르에 상관없이 가장 많이 팔린 작가로 모파상을 꼽았다고 한다. 몰리에르, 에밀 졸라, 알베르 카뮈, 빅토르 위고 등을 제치고 말이다. 모파상이라는 이름의 유명세에 비하면 아직 그의 작품을 접해보지 못한 것이 다소 부끄러워지는 결과다.

 

 

 

   특히 모파상은 10년이라는 짧은 문단 생활에서 단편소설을 무려 300여 편이나 쓰며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했는데, 이 가운데 세계인들로부터 가장 사랑 받은 작품이 ‘Une vie’, 즉 ‘어느 인생’ 혹은 ‘일생’을 의미하는 바로 이 작품이라고 한다. 역자의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수많은 번역본이『여자의 일생』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처음 출간된 판본의 번역이 영어 번역본 제목 ‘A woman's life’를 그대로 옮긴 일본어판을 번역한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하니, 이 작품을 단순히 여성의 일대기로 단정 짓지 않으려는 역자의 시도가 남달리 다가온다. 사실 단편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이 작품은 충분히 ‘한 여성의 불운과 불행으로 점철된 기구한 삶’으로 읽힐 수 있을 법하지만, 그것을 한 개인에게 닥친 어떤 특정된 서사로만 바라볼 수도 없는 것은 일종의 연대 의식과 세대적 공감에 따라 보다 입체적으로 작품을 읽을 수 있는 까닭이다. 덕분에 우리는 ‘그녀’가 아니라, ‘여성’을,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보시다시피 인생은 우리가 믿는 것처럼

결코 그리 좋지도 그리 나쁘지도 않답니다.” / 380p     

 

 

 

   『어느 인생』은 주인공인 잔느의 시점에서 시기에 따라 크게 세 가지 전개로 나눌 수 있다. 수녀원 생활을 마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잔느가 푀플에 있는 자신의 성에서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몽상하며 사랑에 대한 달콤한 꿈을 꾸는 시기가 바로 첫 번째다. 딸을 행복하고, 착하고, 바르고 다정한 여자로 만들고 싶었던 남작은 딸을 사크레쾨르 수녀원으로 보냈고, 엄격히 유폐되어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던 잔느는 열일곱 살이 되자 마침내 오로지 자신을 위해 마련된 아름다운 성에서 자유와 무한한 희망에 흠뻑 도취된다. 그녀는 긴긴 밤 동안 자신의 마음이 속삭임으로 가득 차 넓어지고, 욕망이 별안간 마음에 우글거리는 것을 느낀다. 밤의 말랑한 흰 빛 가운데 초인적인 전율이 질주하고, 붙들 수 없는 희망이, 행복의 숨결 같은 무엇이 펄떡이기까지 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감정이었다. 그녀는 손을 맞잡고, 몸을 기댄 채, 서로의 심장이 펄떡이는 소리를 듣고, 어깨의 체온을 느끼며, 달콤한 여름밤의 소박함에 둘의 사랑을 섞으며 걸을 테고, 그렇게 오직 사랑의 힘으로 서로의 비밀스러운 생각까지 쉽게 꿰뚫어 볼 정도로 하나가 될 수 있는 사랑을 상상하고, 꿈꾼다. 누구나 꿈꾸는 운명 같은 사랑을.

 

 

 

 

 

 

   그러던 어느 날, 사제를 통해 작년에 죽은 장 드 라마르 자작의 자제가 에투방 마을에서 작은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아버지의 빚을 청산하고 소박한 거처에서 성실히 돈을 모은 데다 사교계에서도 좋은 평판을 쌓아 꽤 괜찮은 조건의 남편감이었다. 마침 미사를 갔던 남작 부인과 잔느는 그곳에서 쥘리앵을 만나고, 그들이 멀게는 친분이 있는 사이임을 알게 되면서 자주 교류를 하기 시작한다. 자작은 잔느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그의 검은 벨벳 같은 눈이 잔느의 파란 눈과 마주치곤 했는데, 그와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정이 무엇인지 채 분별하기도 전에, 사랑에 빠지고 싶었던 잔느의 소망과 점차 적극적으로 변하는 쥘리앵의 구애, 사랑하는 딸을 곁에 두면서 데릴사위까지 들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남작 부부의 뜻이 모두 더해져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식을 치르게 된다. 이렇게 소설은 열일곱 살 무렵의 잔느를 통해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고 결혼으로 하여금 사랑을 완성하려는 여성의 통속적인 애정관과 사랑관을 섬세한 배경묘사와 심리묘사로 표현함과 동시에 귀족들의 관습과 세태를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암시를 예고하기도 한다.

 

 

 

그들은 검소하게 생활했기에 그 정도 수입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집안에 항상 뚫려 있는 밑 빠진 독인 선량함만 없었다면 말이다. 그 선량함은 태양이 늪의 물을 말리듯이 그들 수중의 돈을 말렸다. 돈은 흐르고, 새고, 사라졌다. 어떻게? 누구도 알지 못했다. / 23p

 

 

가끔은 잔느가 로잘리를 대신해 어머니를 산책시켰는데, 그럴 때면 어머니는 딸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을 얘기했다. 잔느는 그 오래전의 이야기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두 사람의 생각과 욕구가 유사함에 놀라곤 했다. 사람은 누구나 수많은 감동을 느끼며 자신이 다른 누구보다 먼저 전율했다고 상상하는데, 사실 똑같은 감동이 이미 최초 피조물들의 심장을 고동치게 했으며, 최후의 남녀들의 심장을 뛰게 할 것이다. / 47p

 

 

어느 날 저녁, 스무 살이었던 리즈가 물에 뛰어들었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삶에서, 그녀의 태도에서 그 무엇도 그런 광기를 예감하게 하는 건 없었다. 그녀는 반쯤 죽은 상태로 건져졌다. 그녀의 부모는 그 행동의 불가사의한 원인을 찾는 게 아니라 성이 나서 두 팔을 치켜들고 얼마 전에 말 ‘코코’가 구덩이에 빠지면서 발이 부러져 도살할 수밖에 없었던 사건에 대해 말하듯이 그저 “경솔한 짓”이라고만 말했다. / 80p

 

 

 

 

 

 

   잔느와 쥘리앵, 그들은 이제 서로에게 어떤 존재가 될까? 그들이 함께 시작한 삶은 어떠할까? 결혼이라는, 파기할 수 없는 이 긴 대면에서 서로에게 어떤 기쁨, 어떤 행복, 혹은 어떤 환멸을 마련해 두고 있을까? 이러한 의문에 서로 진지한 물음과 답변이 없이 돌입한 그들의 결혼은 첫날부터 삐걱거리고 만다. 잔느로서는 자신의 욕망을 앞세우고 마치 그녀를 소유하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듯 난폭하게 구는 쥘리앵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고, 아내라면 마땅히 남편에게 기꺼이 자신의 몸을 맡겨야 한다고 믿는 쥘리앵으로서는 그녀를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신혼여행지인 코르시카에서는 낯선 이국의 매력이 혐오감과 모욕감을 잠시 덜어주었지만, 돌아와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린 그로인해 그녀는 깊은 우울감에 빠지고 만다. 심지어 쥘리앵이 잔느와 자매나 다름없는 하녀 로잘리와 간통을 했다는 사실이 들통이 나고, 그의 사생아까지 낳은 사건은 그녀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린다. 뿐만 아니라, 평소 마음을 나누며 가까이 지냈던 백작 부인과 쥘리앵이 내연의 관계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녀는 마음의 문을 완전히 걸어 닫게 되고, 그러면 그럴수록 오로지 자신의 아들인 폴을 향한 집착만 커져갈 뿐이었다. 이렇게 불안한 결혼 생활의 서막과 함께 불행으로 점철된 결혼 생활의 연속으로 고통을 겪는 시기가 바로 두 번째에 해당한다.

 

 

 

 “인생의 감미로운 비밀에 씌워진 베일을 걷는 건 그 남자의 몫이란다. 그런데 여자아이들이 어떤 의문도 품어 본 적이 없다면 꿈 뒤에 감춰진, 조금은 난폭한 현실 앞에서 종종 반항하곤 한단다. 영혼에 상처 입고, 몸까지 상처 입고서 법이, 인간의 법과 자연의 법이 절대적 권리로 허용하는 일을 남편에게 거부하곤 하지. 더 이상은 말해 줄 수가 없구나. 하지만 이것만은 잊지 말거라. 너는 온전히 네 남편의 소유라는 점 말이다.” / 94p

 

 

그녀는 다른 세상에 들어선 것만 같았다. 자신이 알던 모든 것, 자신이 사랑한 모든 것과 헤어져, 다른 땅으로 떠나온 것만 같았다. 자신의 삶과 생각 속 모든 것이 전복된 것 같았다. 심지어 이런 이상한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걸까?’ 문득 남편이 낯선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석 달 전만 해도 그녀는 그가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의 아내가 되었다. 어떻게 된 걸까? 어째서 발밑에 팬 구멍 속에 떨어지듯 결혼 속으로 이렇게 빨리 떨어졌을까? / 96p

 

 

하녀가 바로 같은 침대 발치에서 다리 사이로 아이를, 이토록 잔인하게 자신의 내장을 찢고 있는 어린 존재의 형제가 되는 아이를 떨어뜨렸던 날을 떠올리자 다른 통증이, 영혼의 고통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녀는 쓰러진 하녀 앞에서 남편이 보인 행동을, 던진 눈길을, 했던 말을 그림자 한 점 없이 생생하게 떠올렸다. 이제 그녀는 마치 그의 생각이 그의 몸짓에 기록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행동에서 하녀에게 보였던 것과 똑같은 권태를, 똑같은 무심함을 읽었다.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이 성가신 이기적인 남자의 똑같은 무심함이었다. / 200p

 

 

 

 

 

 

   끝으로 소설은 매우 가파르게 잔느의 삶이 내리막으로 치닫는 과정을 그려나간다. 자신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아들을 향한 맹목적인 사랑으로 치유했던 잔느가 번번이 폴의 사업 실패와 늘어난 빚을 갚아주느라 급격하게 가계가 기울고 마침내 그녀의 성까지 팔아 작은 오두막집으로 가게 되는 장면은 서글프다 못해 애처롭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낭만적인 연애와 결혼을 꿈꾸었던 그녀의 결말이 이토록 초라한 삶이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폴이 자신에게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그렇게 자신을 모든 것을 잃어가면서도 갓난아이를 부탁한다는 폴의 편지에 또 한 번 기꺼이 손을 내미는 그녀의 맹목적이고 무모한 사랑은 읽는 사람의 억장까지 무너지게 만든다. 하지만 여린 생명체의 온기가 전하는 그 무한한 감동에 기뻐하는 로잘리와 잔느를 보며 “보시다시피 인생은 우리가 믿는 것처럼 결코 그리 좋지도 그리 나쁘지도 않답니다.” 라는 마지막 대사는 그 어떤 말보다 우리의 가슴을 명징하게 꿰뚫는다.

 

 

 

   『어느 인생』을 읽으며 모파상이 여자였던가, 하는 생각을 자주 했던 것 같다. 그만큼 섬세한 감정 묘사와 유려한 문체가 유독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인공을 넘어 당대 여성의 삶을 사실적으로 표현해내고자 한 작가의 통찰력이야말로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다양한 관습과 결혼, 종교, 가치관의 문제들까지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삶은 그렇고, 그런 것. 별 거 없는 듯하지만 또 어찌 보면 별 거 있는 듯한 이 복잡한 인생살이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지키고 또 무엇을 꿈꾸어야 하는지, 다른 분들도 이 책을 통해 해답을 찾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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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천 반의 아이들
솽쉐타오 지음, 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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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회의 내밀한 현실을 개성 있고 생명력 넘치는 이야기로 조직해낸 중단편의 힘!

묵은 기억의 더께 속에서 발견된 불완전한 청춘의 초상과 생의 저변을 관통하는 쌉쌀한 정서의 이미지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물리적인 시간을 거슬러 끊임없이 과거를 향해 내달리는 존재들인 것 같다. 평온했던 내면을 거세게 뒤흔드는 과거의 어느 순간들, 어느 누가 툭 내뱉고 달아나버려 더 이상 진의를 알 수 없게 된 말들, 때때로 비겁했고 모른척하는 게 더 쉬웠던 낯부끄러운 일면들, 그 모든 것들에 기어코 다가가려하는 시도들을 멈추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게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는 일이 결코 기쁘지도, 그렇다고 바뀌지도 않을 거란 걸 잘 알지만, 우리는 그 시간으로 하여금 오늘이 안녕하고 또 내일이 더욱 안녕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를 비롯하여 지금은 어딘가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지 모르나 어쩌다 내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모든 그대들이. 소설은 그리 말한다. ‘언젠가는 다시 나타날 거라고 생각한다’고. 어떤 식으로든.

 

 

 

 

 

 

지나간 시대 속에서 살아냈고, 또 살아나갈 사람들의 이야기

 

 

   『9천 반의 아이들』은 2017년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 모옌과 함께 ‘왕쩡치 문학상’을 수상하며 중국 문단에서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신예 작가의 중·단편 대표작을 실은 소설집이다. 소설집에는 표제작 『9천 반의 아이들』과 백화 문학상 수상작인 『평원의 모세』를 포함해 열 편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중국 근현대사와 오늘까지 이어지는 내밀한 현실을 섬세하게 포착하여 개성 있고 생명력 넘치는 이야기로 완성시킨 작품들이 두드러진다. 이야기의 구성은 대부분의 작품이 이삼십 대의 화자가 과거 십 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부모 세대가 겪었던 문화 혁명 시절의 잔상과 국영 기업의 몰락, 기나긴 경기 침체로 인해 회복하기 어려운 가난, 과열된 입시 경쟁과 욕망, 충동과 분노로 비틀린 청년들의 자화상 등의 주제를 다루어 일종의 성장 소설이자 세태 소설에 가까운 느낌이다. 덕분에 시대적 배경과 중국이라는 사회의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낯설지 않은 기시감과 동질감 같은 것을 느끼게 해 쌉싸름한 뒷맛을 남긴다.

 

 

 

   표제작 「9천 반의 아이들」은 고등학교나 대학교 입학시험과 달리 시험에서 1등을 한다 해도 별도로 9000위안을 내야 입학이 가능했기 때문에 ‘9000반’이라 불리는 학교가 배경으로 등장한다. 당시 9000위안이란 돈이 결코 적지 않은 돈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초등학교 졸업생들이 이런 학교에 등록을 하고 싶어 했다.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학한 아이들은 성적에 따라 갑, 을, 병, 정 네 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주인공인 ‘나’는 정 반에서 소위 문제아라 찍힌 안더례와 함께 교실 맨 뒷자리를 함께하게 된다. 안더례는 천재라 여겨질 정도로 이과 영역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여 종종 아이들의 놀라움을 사지만, 선생님 앞에서 부득부득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전교생이 돌아가며 하는 연설에서 모두의 예상을 벗어난 연설로 교장으로부터 공분을 사 학교 입장에서는 골칫거리 같은 아이였다. 하지만 유독 주인공인 ‘나’에게 만큼은 호의를 감추지 않아서, 성적이 떨어지고 있는 ‘나’를 부추겨 다시 한번 공부를 해보자고 한 것도, 정말로 1등을 하자 정작 본인보다 더 좋아해준 것도 그였다. 그러던 어느 날, 1등에게만 주어진다는 해외 연수 특전을 ‘나’가 아니라, 쑨 선생이 쑤이페이페이로 바꿔치기 하기 위해 점수까지 고친 것을 고발하기 위해 안더례가 스스로 교장실 앞에 대자보를 붙였고, 이 일로 안더례와 ‘나’의 부모님까지 총출동하는 일이 발생하고 만다.

 

 

 

중학교 자격 시험에서는 역사와 정치를 안 봐. 역사와 정치 수업은 들러리야. 반 학기 수업만 듣고 나면 책은 팔아 버려도 돼. / 「9천 반의 아이들」 중에서 22p

 

우리 학년은 갑, 을, 병, 정 네 반으로 학생 수가 모두 합쳐 250명이 채 되지 않았다. 빼어나게 예쁜 여학생은 중학교 1학년 때 모두 돌아가며 게양대에 올랐고, 그중 몇 명은 이미 여러 차례 행사에 동원됐다. 교장은 예쁜 애들은 볼 만큼 봤다고 생각했는지 2학년이 되자 자신이 직접 국기를 게양했다. 매주 월요일 우리는 그가 특별 제작한 흰색 제복을 입고 흰 장갑을 끼고 국기를 게양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그가 수고한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으며 건강하기를 희망한다는 표시로 박수를 쳤다. / 「9천 반의 아이들」 중에서 36p

 

 

 

   분명 안더례는 여러 면에서 괴짜 같은 구석이 많지만, 시작부터 불공정한 경쟁의 시작을 부추기는 어른들과 사회의 관행을 꼬집으며 ‘진실의 목소리’를 대변할 줄 아는 유일한 아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혹한 경쟁과 부정으로 얼룩진 현실 속에서 오롯이 자신의 눈과 목소리로 이야기할 줄 아는 이 특별한 아이는 사회에서 용인될 수 없는 불순분자였고, 섞일 수 없으니 마땅히 배척되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것이 안더례가 교실 끝으로 내몰리고, 학교로부터 외면당함으로써 결국 사회 속에서도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었던 이유가 되었다. 「9천 반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공정한 경쟁이 아닌 이름 없이 자행되는 반칙에 기습을 날리는 단편 「기습」도 이와 유사한 결을 지닌 작품으로 등장한다. 온라인 게임에서 반칙 소프트웨어를 사용한 유저를 실제로 찾아가 응징하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불공정한 경쟁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타협이 없는 충동적이고 비틀린 청년들의 자화상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몇 년 동안 계속 집에서 낮에는 자고, 부모님이 잠이 든 후에 일어나 책을 읽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기하와 전자석을 연구, 분석하고 또 몇 년은 우주 속 ‘반물질’이란 존재를 증명하면서 이러한 연구와 발견이 모두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하는 일을 알리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더더욱 사회에 나가 밥은 먹고살 수 있도록 야간 학교에 들어가거나 기술을 익힐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자기 부모가 돼지고기, 돼지갈비, 돼지 선지를 판매해 번 돈으로 먹고살았다. / 「9천 반의 아이들」 중에서 56p

 

 

지식인을 박해하고 무산만근 같은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어. 다만 더 이상 적나라하게 떠벌리지 않고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내 생활도 변변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말에 동의할 순 없었다. 나는 그가 말한 내용은 지금과 완전히 다른 시대의 것으로, 여전히 사람들은 나름의 문제를 안고 있지만 우리 아버지 세대가 겪은 그런 종류의 고난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너무 작은 존재잖아. 시대의 흐름에 맞설 순 없어. 우리는 기대와 같은 방향을 봐야 해.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부터 반듯하게 서야 한다는 거지. / 「9천 반의 아이들」 중에서 58p

 

 

“반칙?”

“난 그 앨 볼 수 없었고, 그 앤 날 볼 수 있었어. 가림막 두 겹 사이로 걔는 날 볼 수 있었다고. 걔가 먼저 내 다리를 때리고 나도 내 머리를 때렸어. 처음에는 내가 운이 안 좋은 줄 알았어. 걔가 날 맞혔고, 게임에서도 난 운이 안 좋구나, 싶었어. 그러다 인터넷에서 봤는데, 그런 소프트웨어가 있더라고. 몇 위안이면 살 수 있었어. 그래서 나도 샀어. 다른 사람 IP를 찾을 수 있는 프로그램. 그가 몇 호에 있는지 찾아냈어. 2039호였어.” / 「기습」 중에서 280p

 

 

 

 

 

 

   시대적으로 타고난 불운한 가족의 역사와 절뚝발이처럼 기울어진 삶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들도 다수 등장한다. 이 중 「평원의 모세」는 택시 기사 다섯 명이 잇따라 죽은 사건을 파헤치던 경찰관이 의문의 사고를 당하게 된 경위를 쫓는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관련이 없어 보였던 여러 인물의 삶이 퍼즐처럼 흩어졌다가 하나의 이야기로 모아지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마오 주석상의 주석 동상을 철거한 뒤 태양조가 설치되고, 또 그것이 철거되어 마오 주석 동상이 다시 세워지기까지 중국 인민의 삶은 어떻게 흘러갔고, 또 과거의 과오들이 어떤 식으로 현재의 삶으로 대체되는지를 매우 입체적으로 보여주어 소설집 중 단연 최고의 작품이라 손꼽을 만하다.

 

 

 

   특히 푸둥신이 이사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리페이에게 「출애굽기」를 가르치며 “진심을 담아 열심히 생각하면 높은 산, 넓은 바다도 널 위해 길을 내줄 거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어”라며 책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씀으로써 소녀에게 생각하는 방식대로 읽고 쓰기를 독려하는 장면은 비록 현실은 비루하나 낙오하지 않고 스스로 골몰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드넓은 세상이 길을 내 줄 거라는 희망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인상에 남는다. 소설 속에서 푸둥신은 일머리나 일손이 없어 책을 좋아하고 끝내 가정이 아니라 세상 밖에서 살기를 선택한 현실감 없는 인물처럼 그려지기는 하지만, 그것만이 이 고단한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삶의 방식이었던 그녀에게서 우리는 더 큰 세상으로 시선을 돌리는 법을 배우기도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대학교수였다. 해방 전에는 우리 시에 있는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나는 철학에 문외한이다. 그녀의 아버지와 주변 인물들은 ‘반우파 투쟁’ 당시 유심론자로 몰려 타도 대상이 되었다. 학생들이 그녀 아버지의 책들을 모두 집으로 가져다 아궁이에 태워버리거나 창문을 바르는 데 썼다고 한다. 게다가 문화 혁명 때는 신체적으로 가학 행위를 당해 한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 혁명이 끝나도 복권 되었지만 더 이상 강단에 설 수 없었다. / 「평원의 모세」 중에서 65p

 

 

“옛일을 회상하는 거겠죠.” 그가 말했다. “아뇨, 현실이 자기들 생각 같지 않아서일 겁니다.” “어,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이 일을 핑계로 개인적인 분풀이를 하고 있을 수도요.” 그가 말했다. “네?” 그가 말했다.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바닷물이 오염되니 돌고래가 해안으로 떠밀려 와 자살을 한다고 합디다. 뻣뻣하게 그렇게 널브러져 죽어 버렸다고.”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나약한 사람들도 모두 그래요. 사실 돌고래도 이가 있잖아요. 나이가 일흔이 넘었지만 칼 한 자루 들 힘은 있어요.” / 「평원의 모세」 중에서 102p

 

 

 

 

 

 

   이 외에도 거리를 걸어가다 운이 없으면 유탄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던 시절, 헤어 나올 수 없는 궁핍한 삶 속에서 세상을 등지고 오로지 장기판에서 삶의 희로애락을 찾았던 아버지와 시절의 그림자를 동시에 어루만지는 「대사」, 말끝마다 “흥미롭지 않아?” “재미있지 않아?” 하며 기우는 삶 속에서 끊임없이 어떤 의미를 찾고 싶어하는 듯한 사내가 등장하는 「절뚝발이」, 이사를 갈 때마다 엄마가 지고 다닌 나무 상자 속에 실은 한 푼 값어치도 없는 흙이 들어 있는 것을 보며 머물 데 없이 떠도는 불안정한 가족의 기구한 삶을 들여다본 「건달」이라는 작품도 인상에 남는다.

 

 

 

나는 내가 태어난 도시로 돌아와 생계를 위해 수없이 많은 일을 했다. 생계를 위한 일은 결코 고달프지 않다. 어떤 식의 사고를 습관화하고 그 습관에 따라 생활해 가는 것, 그것뿐이다. 힘든 건 이런 생활 속에 형성되는 좌표다. 위든 아래든, 좌측이든 우축이든, 사방팔방을 둘러봐도 생활이 모두 똑같다. 그래서 조금 괴로웠지만 그렇다고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계속 이렇게 생활하다가 어느 날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면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긴 잠」 중에서 217p

 

 

탄가루는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진흙 같았다. 하지만 나이가 어리고 아직 건장한 뼈가 아니라 힘껏 구르지 않는 한 그 위를 걸어갈 수 있었다. 석탄 산 하나를 넘자 탄을 캐는 지게차가 서 있었다. 발자국이 그중 하나를 타고 이어져 있었다. 라오라는 분명히 이 위에 잠시 앉아 있었을 거야. 나도 그 위로 올라갔다. 모든 것이 녹슬어 있었다. 바퀴는 이미 찌그러지고 지게차 안에는 빗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곳은 레닌그라드가 아니라 잊힌 세계였다. / 「그라드를 나오다」 중에서 318p

 

 

 

   대체로 중·단편 소설집의 경우 표제작에 무게감이 실리다보니 여타 수록작에서는 힘이 쭉 유지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9천 반의 아이들』은 끝까지 집중력 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 많아서 기억에 오래 남을 듯하다. 특히 중국 소설에 가지게 되는 일련의 기우들을 과감히 잊을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현재 중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예 작가인 만큼 앞으로 중국의 목소리를 담은 밀도 높은 소설을 계속해서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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