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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솔로지 - 호모사피엔스가 지구의 지배종이 될 때까지의 거의 모든 역사
송준호 지음 / 흐름출판 / 2023년 6월
평점 :

우리 종의 기원에 관한 아주 명쾌한 해석!
깊이 있으면서 명쾌하다. 덕분에 우리는 꽤 훌륭한 저작을 가지게 되었다!
‘사피엔솔로지’는 현생인류를 지칭하는 ‘사피엔스(Sapiens)’와 ‘학문’을 뜻하는 접미사 ‘-ology’를 결합한 것으로, 현생인류에 대한 학문을 의미한다. 『사피엔솔로지』의 저자인 송준호 의과교수가 직접 창안한 용어로, 호모사피엔스라는 우리 종을 통섭적인 관점에서 탐구한 “인류 연대기”라 할 수 있다. 유발 하라리와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각자의 저서 『사피엔스』와 『총 균 쇠』를 통해 역사학과 지리학의 관점에서 인류와 문명의 기원을 서술했다면, 송준호 의과교수는 의학자로서 생물학적 정체성에 보다 주목한 점이 인상적이다. 여기에 진화학, 고고학, 사회심리학, 세계사, 과학사에 이르기까지, 매우 입체적인 관점에서 호모사피엔스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톺아보는 이 방대한 여정은 앞선 두 고전 못지않게 깊이 있으면서도 명쾌하다.
인간의 생물학적 과거와 본성에 관한 아주 흥미로운 고찰
아프리카의 호모 속 중 한 종족에서 지능과 언어에 유리한 돌연변이를 가진 개체들이 나타났다. 소수에 불과했던 이들은 우연한 재해로 많은 동료들이 절멸한 가운데, 유전자 ‘병목현상’(오랜 진화 기간을 거쳐 겨우 자리잡거나 도태될 특성이 다른 개체가 절멸하는 뜻하지 않는 행운으로 인해 단기간에 전체 집단을 차지하는 현상)과 ‘창시자 효과’(소수인 유전자가 이주하는 작은 집단에 많은 비율로 섞이면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대표 유전자가 되는 현상)와 같은 우연하지만 결정적인 사건 덕분에 다수가 되었고, 그중 일부가 아프리카를 빠져나왔다. 이들은 혹독한 환경을 뚫고 어떤 생명체도 보여주지 못했던 변화와 혁신을 선보였다. 그 결과, 선행 집단들이 생존에 실패해 점차 사라지는 동안 이들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세계의 주인으로 우뚝 섰다. 바로 우리 종 호모사피엔스다.
호모사피엔스가 지구를 지배하는 종으로 약진한 비결은 무엇일까? 저자는 첫 번째 비결로 ‘지능’을 꼽는다. 인류는 수백만 년 동안 비싼 비용을 치르며 대뇌 신피질을 키워왔다. 고등 포유류들도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은 양과 무게 측면에서 단연 압도적이고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말하고 상상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으로 이어지며 호모사피엔스의 강력한 무기가 되어주었다. 두 번째 비결은 ‘혁신 본능’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를 빠져나와 서서히 조여 오는 인구압을 재배와 사육과 개간의 농업혁명으로 돌파했고, 인구 폭증과 식량 불균형, 그리고 종국에는 파국에 이를 거라는 맬서스의 견해를 철과 석탄으로 이룬 산업혁명의 획기적인 생산성으로 빠져나왔다. 세 번째 성공 비결은 ‘통제 욕구’다. 자연과 동식물을 길들일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고 통제하려는 사고는 곧 농경을 통해 잉여물을 만들고 또 잉여물 축적을 통해 서로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했다. 덕분에 인류는 자연은 물론, 세상의 모든 사물에 대한 통합을 이루어내며 지구상에 전무후무한 문명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이 세 가지 비결에 대해 인간이 의식적인 노력으로 발현된 것이 아니라, 호모사피엔스의 뇌 구조에서 비롯된 생물학적 표현형이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호모사피엔스의 진화에 기여한 여러 생물학적 근거를 여러 가설을 통해 제시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가설 중 하나는, ‘요리 가설’이다. 현생인류가 소화 효율이 높은 익힌 음식을 먹게 됨에 따라 소화관이 작아지면서 여기에 쓰였던 에너지가 뇌를 키우는 데 추가로 기여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음식을 먹음으로써 뇌 진화에 필요한 대량의 에너지를 확보했으며 음식을 준비하고 나눠 먹는 과정은 사회화와 조직화를 촉진했다는 것이 다른 호모 종과 현생인류의 다른 점이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가십 가설’이다. 그루밍이 영장류 집단을 유지하는 접착제 역할을 했다면, 호모사피엔스는 인구 대비 그루밍에 필요한 시간이 한계선을 넘어서자 그 대안으로 ‘언어’라는 소리 그루밍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육체적 그루밍은 일대일로만 가능하지만, 언어를 통한 그루밍은 동시에 4명까지도 가능하며(카페의 테이블이 대부분 4인석이 이유) 다른 일을 하면서도 함께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렇게 호모사피엔스는 육체적 그루밍을 소리 그루밍으로 바꾸면서 한 집단의 크기를 150명까지 확장했다. 이는 언어 진화의 목적이 단순히 정보 전달에만 있었던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대부분의 인간이 정보 전달보다는, 신변 잡담과 가십 같은 수다로 결속을 다진다는 점을 미루어보면 이 가설은 상당히 설득력 있다.
두 발 보행을 하면서 선행인류는 상체의 힘을 써야 할 일이 줄어들게 된다. 자연스레 상체가 이전보다 가벼워지고 달릴 때 숨 쉬기 쉽도록 후두막이 얇아졌다. 후두가 아래쪽으로 내려와 공기가 울릴 공간이 생기고 후두막이 색소폰의 리드처럼 얇아지면서 선행인류는 훗날 말을 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게 된다.
사바나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강력한 냉각 시스템과 효율적인 달리기를 위해 호흡기 구조가 변하면서 선행인류는 인간이 지닌 가장 특징적이고 강력한 무기인 지능과 언어를 진화시킬 토대를 구축했다. / 41p
네안데르탈인은 완전히 멸종된 것이 아니라 현생인류에 일부 흡수됐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우발적이거나 강제적인 일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종 사이에 어떤 형태로든 짝짓기가 있었음을 뜻한다. 그런데 왜 네안데르탈인만 사라졌을까? 스탠퍼드대학교 연구팀은 네안데르탈인의 Y-염색체가 현생인류의 모체에서 면역반응을 피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냈따. 이 연구 결과에 따르면 네안데르탈인 남성은 호모사피엔스 여성을 통해 남자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 이런 생물학적 불균형으로 두 종이 평등하게 통합됐다 해도 끝까지 갈 수 없었으리라. / 60p
초저녁 화톳불 주위에서의 모임은 소규모 혈연사회로 확장됐다. 화톳불을 중심으로 하는 본거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 본거지를 지키기 위한 일들이 시작된다. 본거지의 중심은 화덕이다. 화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매일 상당량의 땔감을 구해와야 한다.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지피고 감시하는 사람도 필요하다. 불의 관리는 사냥, 채집, 육아에 이은 새로운 중요 과업으로 자리를 잡는다. 불을 지키는 것에서 시작된 일이 가사로 확대됐다. / 69p


저자는 선행인류가 숲을 떠나 사바나에 정착한 후부터 오늘까지의 시간을 1년으로 치환해 살펴보면, 우리는 12월 31일 아침 6시경부터에서야 농사를 짓고 도시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은 밤 11시 40분경인 셈이다. 이는 우리가 한 해 내내 벌거숭이로 주먹도끼를 들고 뛰어다니다가 1년의 마지막 날 아침에야 곡괭이를 들어 땅을 일궜고, 해가 바뀌기 20분 전에야 양복을 입고 책상에 앉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20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사회경제적으로 어마어마한 변화를 이루었으며, 또 그만큼 방대한 지구의 자원을 이용했고 그에 따라 지구 환경의 위기를 초래했다. 그렇다면 이 한 세기도 안 되는 짧은 시간동안 이룬 성과들을 우리는 마땅히 진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면 호모사피엔스의 멸종이라 불러야 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우리 종의 멸종이 새로운 인류의 시작점이 되는 건 아닐까.
확장일로를 걸어오던 세계경제 규모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더욱 폭등하기 시작한다. 2000년이 되자 세계경제 규모는 이전보다 6배, 총 생산량은 7배, 비료 사용량은 10배, 에너지 사용량은 4배, 원유 생산량은 6배 증가했다. 20세기 전체를 놓고 보면 경제 규모는 14배, 에너지 소비는 16배 증가했다. / 223p
3장에서 생명체가 어떻게 유성생식을 기반으로 우연과 선택의 과정 속에서 진화해왔는지 살펴봤었다. 이 과정은 인간의 수명을 기준으로 했을 때 영겁에 가까운 진화의 세월이 소요됐다. 하지만 인류는 유전자의 화학구조를 알아낸 지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서 체외수정과 체세포 복제 기술까지 터득했다. 인류는 이제 자연으로부터 선택의 주도권을 가져왔다. 우연은 실험 계획서로 바뀌었고, 영겁의 세월은 몇 주의 일정표로 대치됐다. 여기서 유전자를 워드 프로세서처럼 자유자재로 편집할 수 있는 완벽한 가위까지 등장한다. / 287p



테런스 윌리엄 디컨은 “사물의 이치를 이해하는 최상의 방법은 그 기원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예측 불가능한 미래가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만, 다가올 미래가 과거와 다르다 해도 미래는 과거가 만들어낸 세상 위에 세워진다. 인류의 연대기를 아는 것은 곧 미래를 아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훌륭한 저작이 오늘을 진단하고 미래를 대응하기 위한 우리의 걸음걸음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덧붙여 『사피엔스』와 『총 균 쇠』에 심리적 장벽을 느끼는 분들이라면 이 책을 먼저 읽어보시길 추천 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