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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욱 교수의 소소한 세계사 - 겹겹의 인물을 통해 본 역사의 이면
조한욱 지음 / 교유서가 / 2021년 6월
평점 :

우리 삶에 적용해볼 가치가 있는 숨겨진 역사와
흥미로운 뒷이야기를 엮은 담백한 역사서!
『조한욱 교수의 소소한 세계사』는 tvN <벌거벗은 세계사>와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 출연해 익히 알려진 서양사학자 조한욱 교수의 책이다. 이 책은 10년에 걸쳐 써오던 칼럼을 마치며 그간 발표해왔던 내용들을 선별해 엮은 것이다. 신문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시대와 발행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서 정형화된 관점을 깨부수는 통찰이 요구되는데, 무려 10년 간 그 기나긴 작업을 지속해왔다는 건 그의 혜안이 얼마나 깊이 있는 것인지를 가늠해볼 수 있을 듯하다. 이 책을 읽고 싶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다.
책은 우리 사회에 어떤 사건이 생기면 거기에 일말의 빛을 던져줄 가능성이 보이는 이들을 역사 속 인물이나 사건에서 찾았던 저자의 집념이 담긴 결과물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스페인의 여왕 이사벨 1세, 자유로운 영혼의 프리다 칼로,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작가 미치 앨봄, 『장미의 이름』의 작가 움베르트 에코 등을 비롯해 색소폰을 만든 아돌프 삭스, 에베레스트산의 어원이 된 조지 이브리스트, 미국 철도 노조의 확립에 기여한 유진 데브스 등 생소하지만 알아두면 좋을 인물들의 결코 소소하지 않은 서사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 외에도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개구쟁이 데니스>, <꼬마 돼지 베이브> 같은 예술 혹은 영상 작품이나 증오 범죄, 포인세티아, 징글벨의 유래처럼 알아두면 좋을 상식도 수록되어 있다.
그 중 우리가 트럭의 이름으로 알고 있는 ‘포터’와 관련한 어느 역사 속 한 장면이 눈길을 끈다. 사실 ‘포터’는 물건을 나르는 사람, 즉 ‘짐꾼’을 뜻하는 말로서 어느 정도 비하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특히 풀먼 열차 제작회사에서 고용한 객차 내 승무원을 가리키는 ‘풀먼 포터’는 암울한 역사의 그림자를 품고 있다. 대륙횡단철도 부설의 초창기였던 1860년대 말에 풀먼은 호화로운 침대차를 제작했고, 남북전쟁 이후 쏟아져 나온 흑인 해방 노예들은 그 기차에서 시중을 드는 인력으로 고용되었다. 그들을 풀먼 포터라 불렀다. 하지만 호황의 시기가 지나고 1893년부터 시작된 불황은 노동자들의 임금 삭감으로 이어졌고, 이는 풀먼 파업을 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이때 정부와 언론, 사법계가 한뜻으로 풀먼 파업을 주도한 유진 데브스와 노동자들을 진압하고 그들을 뜻을 짓눌렀다. 유진 데브스는 풀먼 파업의 실패를 통해 자본가의 힘이 도처에 존재하며 정부는 자본가의 편임을 뼈저리게 경험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꽃은 피어났다. 침대차의 포터였던 윌리엄 마셜과 아내 노마의 이야기다. 그들은 두 아들의 교육에 각별히 힘을 쏟으며 법치에 대한 존경심을 불어넣었고, 법리 다툼이 진행되는 법정에 참관시킨 뒤 함께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저녁식사 후에는 시사 문제를 놓고 가족 모두가 격론을 벌였다고. 그렇게 자라난 맏아들이 흑인 최초의 대법원 판사 서굿 마셜이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성공을 아버지의 공을 돌렸다. “아버지가 나를 법률가로 바꿔놓았다. 그는 논쟁하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내가 어떤 진술을 하든 그것을 입증하게 만들었다.” 서굿 마셜의 말은 환경에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삶을 살게 하는 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덕분에 두 아이의 부모로서 내가 어떤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고민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서굿 마셜의 이야기는 <블랙 팬서>의 주인공 채드윅 보스만이 열연한 <마셜>이란 영화로 개봉되었으며, 마침 넷플릭스에 이 작품이 있으니 꼭 시청해봐야겠다.
무솔리니는 신체가 허약한 안토니오 그람시를 감옥에 보냈지만, 그것은 『옥중수고』를 통해 헤게모니 이론을 더욱 확고하게 다듬을 기회가 되었을 뿐이다. 카스트로 치하에서 체포되어 수감된 쿠바의 저항 시인 에베르토 파디야에게 “최고의 시는 언제가 간수의 등불 밑에서” 태어났다.
이들은 감옥에서의 고초를 변절을 위한 구실로 삼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에게 가해진 부당한 폭력을 타인에 대한 무분별한 증오심으로 대체시키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 의로운 사람들의 육체에 가해진 구속은 영혼이 더욱 단련되어 한결 자유롭게 비상하고, 그리하여 다른 이들에게 배움이 되고 도움이 될 계기로 작용했을 뿐이다.
신영복 선생이 그런 분이셨다.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_ 신영복 편 중에서 50p
헤세는 작가가 되려는 꿈을 키웠고, 그와 함께 세계시민이 되려는 의미를 굳건히 다졌다. 그것은 단순히 그의 성장 배경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외할아버지로서, 헤르만이라는 이름조차 그에게서 연유한다.
방법은 간단했다. 세계 문학으로 가득찬 자신의 서재를 손자에게 개방한 것이다. 헤세가 회상하듯, 그 독서가 “어떤 종류의 민족주의에도 저항하려는 생각”을 심어준 것이다. 나치를 피한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토마스 만의 망명을 도운 이유가 바로 그 세계시민 정신이었다. / 세계 시민 헤세_ 헤르만 헤세 편 중에서 55p



이어 ‘염병하는 애국’ 편에서는 국가 기관, 군수 산업, 다국적 기업의 이익이 ‘국익’임을 앞세워 한 미국 청년을 희생케 한 사건을 통해 정의의 의미를 고찰해본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편에서는 종전 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측이 패배를 한 측에 대해 범죄를 저질렀다고 규정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최근 가수 이승기 씨에게 일어난 안타까운 사건 때문일까, 마침 책 속에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어 마음이 짠해진다. 바로 ‘미소 수녀’라 불리는 자닌 데커스의 이야기로, 그녀는 수녀지만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에 고참 수녀들이 음반을 내도록 권유했고 실제로 레코드사에서 녹음한 노래가 국제적인 대성공을 거뒀다. 미국에서 인기 순위 1위에 오른 유일한 벨기에 노래로 남을 정도였다. 하지만 ‘미소 수녀’라는 이름과 달리 그녀의 삶은 불우해졌다. 레코드 판매로 거둔 수입 대부분은 레코드사와 제작자가 가져갔고, 나머지의 이익금조차 수녀원의 몫이 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미소 수녀’라 알려진 이미지 때문에 원장 수녀로 하여금 항상 미소 짓기를 강요받았고 자신이 만든 곡에서조차 슬픈 가사는 삭제당하는 검열을 받아야만 했다. 한 사람의 재능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이용하려드는 행태가 어디 이뿐일까. 더 이상 우리 사회가 땀의 가치가 부당하게 쓰지 않기를 바라본다.
2007년 캐나다 노바스코샤주의 작은 마을에 있는 학교에서 중학교 3학년 남학생 제이드리언 코타가 분홍색 셔츠를 입고 등교했다는 이유로 다른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이른바 ‘왕따’를 당한 것이다. 이에 분개한 동급생 데이비드 셰퍼드와 트래비스 프라이스가 나섰다. 그렇다고 동급생을 괴롭힌 학생들에게 직접적으로 맞선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분홍색 셔츠 50장을 사서 친구들에게 나눠줬다.
(…) 2009년 2월 25일에는 남녀 학생들이 분홍색 셔츠를 입고 “학교 폭력은 여기서 끝내자”고 외쳤다. 그래서 이날을 ‘분홍색 셔츠의 날’이라 부르기로 한다. / 분홍색 셔츠의 날_ 제이드리언 코타 편 중에서 128p
증오 범죄는 보통 ‘증오 연설’과 맥을 같이한다. 증오 연설의 특징 중 하나는 어떤 개인을 명시하는 것이 아니라 통칭으로 언급하며 집단 전체를 매도하는 것이다. 십자군전쟁을 주도한 교황 우르바누스는 유럽 내부의 문제점을 해결할 방안으로 이슬람이라는 공동의 적에게 눈을 돌렸다. 그 “사악한 인종”으로부터 땅을 탈취하면 토지 부족의 문제가 해소될 뿐 아니라 천국에도 도달하게 되리라는 선동이었다. 이것이 멀리 동떨어진 역사 속의 일일까? 개인의 잘못을 그가 속한 지역이나 단체의 이름으로 매도하는 일은 이곳에서도 얼마나 흔한가? / 증오 범죄_ 아머드 아버리 편 중에서 189p



이 외에도 미국의 대표 가곡이라 불리는 <오 수재너>가 과거에는 “전기 같은 분비액이 급증하여 검둥이 500명을 죽여버렸다”는 내용의 인종주의 가사를 담고 있었다는 사실, <징글벨>의 ‘징글’이라는 영어 단어는 성스러움과는 꽤 거리가 먼 뜻이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술잔에 든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도 바로 이 의성어로 표현하기에 사람들은 권주가로 이 노래를 불렀었다고. 특히 지금의 가사로 개사되기 이전에는 말이 끄는 썰매가 한 쌍의 젊은 남녀가 함께 자리할 기회를 주면서 인적 없는 숲으로 데려가는 내용이었다니, 뭐 그 뒤에는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알겠지…….
이처럼 『조한욱 교수의 소소한 세계사』는 세계사의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우리 삶에 적용해볼 가치가 있는 숨겨진 역사와 흥미로운 뒷이야기를 엮은 담백한 역사서다. 페이지에 구애받지 않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고, 가볍게 역사상식을 채울 수 있는 책이다. 평소 역사에 흥미가 있어도 긴 호흡으로 따라가기 부담스러웠던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