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ㅣ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황시운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평점 :
![](http://image.yes24.com/blogimage/blog/h/j/hjh8s/IMG_20221228_01.jpg)
어쩌면 이건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지만,
차라리 몰랐으면 하고 외면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알아야만 하는 이야기일지도!
‘나도 모르는 사이 흘러나온 똥을 뭉개고 앉아서 엄마를 기다린다.’
황시운의 산문집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대변이, 그러니까 똥이, 내 인생을 뒤흔드는 이유가 될 거라고는, 살아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고백으로 시작된다. 기억은 어느 날 느닷없이 세상으로부터 뚝, 하고 부러지고 만 그때로 돌아간다. 두 번째 장편소설을 쓰기 위해 강원도 원주의 토지문화관에 들어갔던 십 년 전 봄, 그녀는 문학상 수상과 기다리던 첫 책의 출간이라는 기쁨에 빠져있다 숲길에서 추락하고 말았다. 물이 사납게 흐르는 계곡 위에 놓인 난간 없는 작은 다리였는데, 추락하면서 바위에 허리가 찍혀 척추가 부러져버린 것이다. 그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었고 그녀는 남은 평생 척수 손상으로 인한 신경병증성 통증을 앓게 되었다. 짧은 순간에 벌어진 사소한 실수였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악취가 진동하는 인생을 뭉개고 앉은 것 같은 수치심과 좌절감, 엄마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십여 분의 시간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그녀는 스스로에게 얼마나 절망했을까.
장애를 안고 살아간다는 건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과도 같다. / 74p
소설가 황시운은 자신의 산문집을 통해 장애로 인해 한 순간에 부러져버린 세상과 그로 인해 시시때때로 마주해야 했던 아픔, 그 속에서 안간힘을 써야했던 순간들을 가감 없이 이야기한다. 방광과 소변주머니를 연결하는 관이 꼬인 채 막혀버리는 바람에 소변이 배출되어 옷이 젖어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폴짝 뛰어넘으면 그만인 고작 십여 센티미터의 틈을 휠체어로는 넘을 수가 없어 번번이 세상으로 나가는 일에 주저하게 되는 서러움을 토로한다. 이삼일에 한 번꼴로 계단참에서 관장을 해야 했던 수치스러운 기억이 고작 두 단짜리 파티션으로는 가려질 리가 없는 것처럼, 그녀의 현실은 일상의 곳곳에서 자신의 미약한 처지를 너무나도 쉽게 대면하는 일들의 연속이다.
흉수 손상의 후유증으로 신경병증성 통증을 앓게 되었다. 이 고약한 통증은 손상된 신경계의 교란으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통증을 뇌에서 잘못 인지하면서 일어나는 통증이다. 그러니까, 나는 실체 없는 통증을 밤낮없이 겪어내고 있는 셈이었다. 실존하지도 않는 통증이 어떻게 이렇게나 생생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 통증과 함께 십일 년을 살아왔고 앞으로 얼마나 될지 모를 세월 동안 겪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 37p
![](http://image.yes24.com/blogimage/blog/h/j/hjh8s/IMG_20221228_02.jpg)
![](http://image.yes24.com/blogimage/blog/h/j/hjh8s/IMG_20221228_03.jpg)
‘인간으로서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존엄이 너무 자주, 생각지도 못한 대목에서 무너져내린다. 사람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듯한 기분이 얼마나 참담한지, 세상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장애에서 오는 고통과 곤란함, 안정망과 시스템의 부재만큼이나 힘겨운 건 사회가 장애인들의 존재 자체를 지우려 드는 데서 오는 참담함이라고 고백한다. 이는 우리 사회가 장애를 병이라 진단하는 일에만 몰두할 뿐, 그들의 정체성과 고유의 자질을 대면하는 일에는 여전히 소홀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준다.
그녀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록을 남기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나에게 이런 일이 끝도 없이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가능하면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일. 그것은 ‘나’라는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녀처럼 마지막 존엄마저 무너지는 경험을 반복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을 누군가에게 당신 혼자만 겪는 일이 아니라고 말해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덕분에 자신의 글을 통해 당신과 같은 내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려주고 손을 흔들어주어 긍정의 신호를 전하려는 그녀를 나 또한 응원하게 된다.
통증은 양상을 달리하며 파도를 타듯 끝도 없이 밀려왔다. 이제 내 일상에 통증이 끼어들지 않는 시간은 없다. 아프지 않길 기다려서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고 말 터였다. 그러지 않으려면 아프건 말건 약이라도 털어먹고 뭐라도 해야 했다. 잠시 숨을 고르며 내가 오늘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생각해봤다. 소설, 그리고 소설, 오로지 소설. 늘 그렇듯 떠오르는 건 소설뿐이었다. / 17p
이제는 사고 전처럼 있는 힘껏 달려 골목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하지만 오늘의 통증은 어제의 통증과는 달랐다. 어제의 통증은 침대에서 맞았지만, 오늘은 휠체어에 앉은 채로 견뎌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도 달랐다. 어제의 나는 집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오늘의 나는 집밖으로 나와 이제 막 잎이 돋기 시작한 철쭉나무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니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랐다. 달라진 나는 달라진 통증을 점점 더 익숙하게 조절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 수만 있다면, 오래전 편한 운동화를 신고 골목을 누비던 때의 나처럼 내가 잘해내고 싶은 오직 한 가지 일인 소설을 쓰면서 내 앞에 펼쳐진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 23p
예전처럼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걸을 수는 없겠지만, 내게는 튼튼한 휠체어가 무려 석 대나 있으니까. 휠체어로 가기 벅찬 거리라면 지하철이나 저상버스를 타면 된다. 물론 아직 불편한 점이 너무 많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족한 부분을 채워갈 수 있도록 세상과 싸우는 일에도 더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이다. 스스로 넘지 못할 턱을 만나면 망설이지 않고 당당하게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청하며, 세상은 지금껏 내가 생각해온 것보다 훨씬 더 합리적인 곳일 거라는 기대를 품은 채, 삼십 년 넘게 살아온 이 도시를 천천히 다시 걸을 것이다. / 293p
![](http://image.yes24.com/blogimage/blog/h/j/hjh8s/IMG_20221228_04.jpg)
![](http://image.yes24.com/blogimage/blog/h/j/hjh8s/IMG_20221228_05.jpg)
어쩌면 이건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지만, 차라리 몰랐으면 하고 외면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알아야만 하는 이야기일지도. 무덤덤하게 읽고 넘기기가 힘겨워 자주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너무 무지했고 무관심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이러한 경험들이 더 많이 쓰이고, 더 많이 읽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부러진 세상과 높은 턱을 넘어서기 위해 힘겹게 사투를 벌이고 있을 모든 존재들에게 감히 응원을 보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