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싱 - 백인 행세하기
넬라 라슨 지음, 서숙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흰색을 향한 강렬한 욕망, 여전히 한 데로 섞일 수 없는 인종이라는 정체성, 그들 세계 사이에서 흐르는 불안한 연대를 엮어낸 수작!

 

 

  이 이야기는 아이린 레드필드에게 날아온 한 통의 편지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이 편지를 읽고 나면 틀림없이 마주하게 될 어떤 위험을 감지하며 꺼림칙한 기분을 느낀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들로 미루어 볼 때 누가 보냈는지, 뜯어보지 않아도 분명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위험의 모서리에 올라서 있는 것. 언제나 위험을 알고 있으면서도 뒤로 물러서거나 피하지 않는 것. 주변 사람들이 분통을 터뜨리며 아무리 주의를 준들 꿈쩍도 않는 것.’ 한 사람을 둘러싼 단어들이 이처럼 온통 위험과 불안을 안고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이건 네 탓이야, 아이린. 적어도 어느 정도는. 왜냐하면 내가 그때 시카고에서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난 지금 이 끔찍하고 황당한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을 테니까.” 아이린은 이미 클레어 켄드리가 뉴욕에 왔다는 걸 알리는 우편 소인을 보는 순간부터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 년 전에 시카고에 있었던 어떤 날카로운 기억이 바로 어제처럼 떠올라 불쾌함을 감추지 못한다.

 

 

 

  시간은 이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카고를 여행 중이던 아이린은 뜨거운 열기를 피하기 위해 백인 전용 호텔의 루프탑에서 잠시 쉬어간다. 그런데 그곳에서 한 여자의 굉장히 노골적이고도 집요한 시선을 느낀다. 혹시 저 여자는 자신이 흑인인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때때로 사람들은 그녀를 이탈리아 사람, 스페인 사람 또는 집시로 보기는 하지만 그녀가 혼자 있으면 흑인이라고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여자가 절대로 눈치 챘을 리 없다고 단정하면서도 내심 두려움을 감추지 못한다. 자신이 흑인인 것이, 또는 흑인이라고 밝혀지는 것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이곳에서 쫓겨나는 민망스러운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바로 그 때 옆 테이블의 여자가 다가와 말을 건다. “우리 아는 사이 같은데요.”

 

 

 

  아이린은 그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특징, 파악하기 힘든 어떤 것, 정의 내리기에는 너무도 모호한 것, 손으로 잡기에는 너무 먼 것, 그러나 아주 익숙한 무언가를 느낀다. 클레어 켄드리. 십이 년 전, 클레어의 아버지가 죽은 뒤 서쪽 지역에 있는 친척들에게 보내진 뒤로 아주 잠깐씩 모습을 드러내다가 사라진 아이. 어느 날 한 여자와 두 남자와 함께 화려한 호텔에서 저녁 시간에 있는 것을 보았다는 요란한 소문이 돌긴 했지만 이렇게 그녀를 가까이 만나기는 그때 이후 처음이다. 아이린의 눈에 클레어는 아름다운 외모와 태도로 보건대 확실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오랜만에 나눈 대화를 통해서 클레어가 가난하고 절망적인 신분에서 탈출하기 위해 패싱을 선택했고 백인 사업가와 결혼해 상류층에 편입해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사실인즉 그녀는 호기심을 느꼈다. 클레어 켄드리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그녀는 패싱이라는 이 복잡하고 골치 아픈 일에 대해, 익숙하고 정다운 것들과 모두 단절한 채 아주 낯설지는 않을지라도 분명 아주 우호적이지는 않은 다른 환경에서 승부를 거는 이 위태로운 문제에 대해 알고 싶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출신 배경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신하는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는지, 또 다른 흑인들과 접촉할 때 그녀는 어떻게 느끼는지, 또 다른 흑인들과 접촉할 때 그녀는 어떻게 느끼는지. / 46p

 

 

아이린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이성적으로는 어느 정도 동의했지만 그녀의 본능은 전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왜 그런지는 말할 수 없었다. 서둘러 떠나지 않으면 저녁 약속에 늦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머뭇거렸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자, 그녀가 알았던 소녀, 그리고 상당히 위험하고 끔찍한 짓을 성공적으로 해 냈으며 스스로 대단히 만족한다고 말하는 그 여자가 아이린 레드필드에게는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하게 매력적이었다. / 54p

 

 

 

passing 백인 행세하기

 

 

  클레어의 초대로 옛 동창이었던 아이린과 거트루드가 만나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이 소설에서 단연 인상적인 장면 중에 하나다. 세 사람 모두 이제는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기에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아이의 이야기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때 클레어는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속이고 결혼을 한 까닭에 마저리가 태어나기 전 아홉 달 내내 딸애의 피부가 검을까 봐 두려웠노라고 고백한다. 백인 남편을 둔 거트루드 역시 남편인 프레드가 아기의 피부색이 어떻든 상관없다고 했지만 내심 가족 모두 검은 아기가 태어나기를 원치 않았을 거라고 동조한다. 반면, 아이린은 흑인 남편과 결혼한 뒤 평소 흑인들의 권리 향상에 앞장서 왔기에 그들의 이야기에 동조하지도 경멸하지도 않는다는 듯 침착한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이어 합류한 클레어의 남편이 흑인을 극도로 혐오하는 인종차별주의자에, 자신의 아내가 흑인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뿐더러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믿고 있는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신의 인종을 모욕하는 데에 따른 노여움과 굴욕감을, 그럼에도 클레어를 보호해야 한다는 데에 따른 인종에 대한 본능적인 충성심을, 한편으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한 감정이 일렁이는 것을 느낀다. 사실 필요에 따라서는 그녀 역시 패싱을 선택해왔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감탄하고, 묘한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그걸 보호하기도 하는 모순을 겪곤 했던 것이다. 어쩌면 과감하게 패싱을 선택하고 위험천만한 결혼생활을 감수하고 있는 클레어를 이해할 수 없어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녀의 외모와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느라 움츠러들지 않는 태도에 매력을 느꼈던 것은 이 때문이리라. 그렇게 잔잔했던 아이린의 일상은 시카고에서 우연히 마주친 클레어로 인해 흰색을 향한 강렬한 욕망, 여전히 한 데로 섞일 수 없는 인종이라는 정체성, 그들 세계 사이에서 흐르는 불안한 연대를 확인하게 됨으로써 흔들리게 되고 클레어를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것으로 잊으려 하지만 이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 또 다시 나타난 클레어는 아이린의 마음을 더욱 거세게 휘저어 놓기 시작한다.

 

 

 

세상에, !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설령 내게 흑인 피가 한두 방울 섞인 것을 당신이 알아낸들 말예요.”

벨루는 손을 앞으로 휘저으며 단호하고 확실하게 거부했다. “아니, 천만에, 검둥이.” 그가 단언했다. “나한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난 당신이 검둥이가 아닌 걸 알아. 그러니까 괜찮아. 당신이 원한다면 검은 고양이처럼 까매져도 돼. 왜냐하면 난 당신이 검둥이가 아닌 걸 아니까. 거기까지는 괜찮아. 하지만 내 가족에 진짜 검둥이는 안 돼.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절대 없을 거야.” / 78p

 

 

인종에 대한 본능적인 충성심, 어째서 그녀는 거기서 벗어나지 못할까? 왜 거기에 클레어가 포함되어야 하는가? 클레어는 그녀나 그녀가 속한 인종을 배려하지 않는데 말이다. 아이린은 억울하다기보다 막막한 절망을 느꼈다. 그녀는 이 점에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람들을 인종으로부터 분리해 생각할 수 없었고, 그녀 자신을 클레어 켄드리에서 떼어낼 수 없었다. / 200p

 

 

 




 

 

 

 

  이제 이야기는 패싱을 통해 과감히 백인 상류층의 삶을 누리던 클레어가 아이린을 통해 할렘 사회를 엿보고 그들의 삶을 그리워하게 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자신이 적극적으로 탈출하려 했던 흑인의 삶으로 다시 가진 모든 것을 내던지고 돌아오겠다는 클레어, 자신의 삶에 끊임없이 침범하며 남편인 브라이언과의 결혼생활마저 흔드는 클레어를 다시 돌려보내고 싶어 하는 아이린. 이 두 여성 사이에 흐르는 불길한 긴장감은 결국 비극적인 사건으로 막을 내린다.

 

 

 

조용한 거실에 혼자 앉아 편안하게 난롯불을 쬐던 아이린 레드필드는 난생 처음 흑인으로 태어나지 않았기를 바랐다. 처음으로 그녀는 흑인이라는 점이 너무 무거워 고통스러웠고 반항심이 들었다. 인종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녀는 여자로서, 그리고 다른 개인적인 일들로 고통받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소리 없이 부르짖었다. 잔인하고 부당한 일이었다. 정말이지 검은 피부를 지니고 태어난 흑인들만큼 저주받은 존재는 없었다. / 196p

 

 

그만둡시다! 아이린, 당신도 나만큼 잘 알고 있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검둥이라는 단어와 그 의미를 아이들이 모르도록 애써 봤자 무슨 소용이 있소? 그들이 알아냈지 않소. 어떻게 알았겠소? 누군가가 주니어를 더러운 검둥이라고 불렀기 때문이오.”

그렇다 해도 당신이 인종 문제를 애들 앞에서 꺼내는 것은 달라요. 난 그것 못 봐요.”

그들은 마주 노려보았다.

아이린, 똑똑히 들어요. 아이들도 이런 문제를 알아야 하오. 지금이나 나중이나 마찬가지라고.”

애들은 몰라야 해요!” 그녀는 분노에 차 눈물이 떨어지려는 것을 참으면서 말했다. / 208p

 

 

 



 

 

 

 

  이처럼 패싱은 백인 피부를 지닌 두 흑인 여성 클레어와 아이린을 통해 흰색이 주는 사회적 보호와 이익을 욕망하고 인종의 정체성과 경계 사이에서 흔들리는 당대 여성들의 삶에 주목한 작품이다. 흑인이라는 정체성을 숨길 수 있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경계에 섰다면 넘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이들. 배제되지 않기 위해, 편입할 수 있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편입을 선택한 세상의 모든 클레어들을 마냥 비난할 수 없는 이유도 그것이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라는 것을 우리도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 클레어와 같은 상황에 마주했을 때 패싱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자문하게 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뭉우리돌의 바다 - 국외독립운동 이야기 :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 편 뭉우리돌 1
김동우 지음 / 수오서재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읽는 내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진다!

멀고 먼 타향에서 지켜낸 대한민국이라는 역사의 의미를 들여다보다!

 

 

 

 

  뭉우리돌. 낯선 이 이름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뭉우리돌이란, 둥글둥글하게 생긴 큰 돌을 뜻하는 우리말로,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지만 김구의 백범일지에 의해 독립운동 정신의 상징으로 전해져온다.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된 김구에게 일본 순사가 말하기를, “지주가 전답의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 하니 오히려 김구는 이 말을 영광으로 여기며,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에 저자는 책의 제목을 전 세계 곳곳에서 뭉우리돌처럼 박혀 대한독립을 위해 생을 바친 이들을 기리며 지었다고 밝힌다.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에 이르기까지, 가난과 핍박의 역사 위에 쌓아올린 한인들의 독립운동사를 추적한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또 다른 형태의 뭉우리돌로 기억되어야 마땅하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뭉우리돌의 이야기

 

 

  이 책의 첫 여정은 우연히 인도의 델리 레드 포트에서 우리 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마주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놀랍게도 레드 포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주인도 영국군 총사령부 주둔지이자, 우리에겐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의 활동지였다. 인면은 인도와 버마를, 전구는 전투 지역을 뜻하는 말로 이를 이어 붙이면 인도 버마 전투 지역에 파견된 공작대가 된다. 인도에 간 광복군이라니, 참으로 뜻밖이다 싶을 만큼 생소한 광경이다. 왜 임시정부는 그 먼 인도까지 광복군을 보냈던 걸까.

 

 

 

  그것은 바로 2차 세계대전 참전국이라는 지위 때문이었다. 연합국 편에서 전쟁에 참여하고 이를 인정받는다는 것은 전후 강대국들에게 자주독립을 강력하게 요구할 수 있는 카드였고, 인면전국공작대는 참전국 지위를 얻기 위한 강력한 명분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임시정부는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 속에서 독립에 필요한 일이면 무엇이든 하려고 했고, 인면전구공작대는 이런 노력의 산물인 셈이었다. 저자는 뜻밖의 낯선 곳에서 우리의 역사를 마주하고 나니 레드 포트의 고목 하나, 허물어져 가는 건물 하나, 현지인들의 표정 하나까지 모든 게 다르게 다가왔다고 고백한다. 대원들은 이 빈 성터 어디쯤에 머물렀을까, 거기서 그들은 매일 밤 어떤 별을 보며 고향을 그려보았을까. 지식이 더해지고 관점이 바뀌자 델리의 유명 관광지는 이렇듯 전혀 다른 이야길 하고 있었다. 덕분에 세계일주를 하겠다던 그의 계획은 이때부터 전 세계에 산재해 있는 국외 독립운동사적지를 찾아다니는 예상치 못한 여정으로 돌연 바뀌어버린다. 그렇게 표지판 하나 없는 사적지, 이력 하나 쓰여 있지 않은 비석, 무덤조차 쓰지 못한 수많은 무명 투사들 그리고 그곳에서 뿌리를 이어가는 후손들, 우리에게 점점 잊혀져가고 있었던 찬란한 투쟁의 이야기가 막이 열린 것이다.

 

 

 

국화가 화병에 다 꽂히자 적막 속에 빛이 들고 안온함이 퍼져나갔다. 한 송이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게 쌓이면 풍경을 바꿀 수 있다. 명이 생인 까닭이고, 생이 명인 이유다. 관심은 살풍경을 변화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꽃이 시들기 전 누군가 이 묘지를 방문한다면 분명 그들도 나와 같은 자족감을 느낄 수 있을 거다. 발걸음이 이어진다는 건 기억되고 있다는 의미이자 기억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니 말이다. / 58p

 

 

해변에 바투 서 멍하니 수평선을 응시했다. 철썩이는 파도는 이 해변에서도 어김없이 하얀 포말을 쉼 없이 만들어내고 있었다. 저 너머에 대한민국이 있었다. 고국의 바다도 분명 이 순간 같은 일을 하고 있을 거다. 하지만 고향과 멕시코의 바다는 너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살리나크루스 해변은 멕시코 디아스포라의 시작이자 돌아갈 수 없던 사람들의 비통한 삶의 첫 마디이지 않나. / 79p

 

 

 




 

 

 

 

  애니깽. 멕시코에 도착한 한인들을 반긴 건 날카로운 가시가 박힌 이 식물을 자르고 날라야 하는 고된 노동의 현장이었다. 부강한 나라에 가 돈도 벌고 잘 살게 해준다는 이민 브로커의 말에 속은 이들은 돼지보다 싼 몸값으로 노예와 비슷한 대우를 받으며 찌는 듯한 살인 더위까지 견뎌내야 했다. 그나마 4년이라는 계약 노동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에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을사늑약과 경술극치로 일제에 의해 꿈은 무참히 짓밟혔다. 꿈이 꿈으로 남을 수밖에 없던 암담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저앉을 수만도 없었기에 이들은 서로를 다독이며 놀랍게도 멕시코 땅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해나갔다. 나라를 떠날 때도, 척박한 멕시코에서 생사를 넘나들 때도 대한제국은 아무것도 해준 게 없었고 버려졌단 절망감 앞에 조국을 원망하며 등을 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건만 그들은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숭무학교를 설립하며 뿌리를 잊지 않으려 했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랍고 위대한 투쟁의 역사가 멕시코라는 땅 위에 새겨져 있었다.

 

 

 

  그렇게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도 잠시, 스산하고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듯한 풍경으로만 남은 과거 애니깽 농장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그들이 겪었을 고단함과 절절함이 더 처절하게 느껴져서, 나는 더 이상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먹먹한 마음으로 한동안 사진만 바라보았다. 쿠바의 아바나로 건너가 대한인국민회 지방회관 건물 사진을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낡은 철 계단이 옥탑방으로 이어져 있는 옥상, 널브러져 있는 집기와 한참 쓰지 않은 듯한 개수대, 마치 잡동사니를 모아둔 영화의 미장센 같아 보였다던 저자의 말은 과언이 아닌 듯했다. ‘기억은 망각 앞에 희미해지고 역사는 무관심 속에 사라진다.’ 이제는 망각과 무관심만 남은 한인들의 옛 사랑방이 그렇게 스러져가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아는 것이 너무나도 없다.

 

 

 

쿠바의 한인 중에 친일파도 있었다. 그들은 외국인 증명서에 국적을 일본으로 등록하고 이를 도리어 영광으로 여겼다. 친일 언행도 서슴지 않았는데 걸핏하면 쿠바 내 독립운동을 헐뜯고 다녔다. 심지어 일본인회에 등록하고 회비를 꼬박꼬박 납부하며 일본을 찬양하기까지 했다.

전 세계 곳곳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조상들, 그들 곁을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친일. 그 망령의 역사는 쿠바에서도 이어지고 있었다. / 181p

 

 

한인 후손을 찾는 건 아델라이다 회장의 도움이 있으면 얼마든 가능한 일이었다. 또 김기헌 선교사도 기꺼이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 후손을 찾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누가 누구의 자손인지 몰라 전달하지 못하는 서훈이 쿠바에만 15개쯤 된다. 또 서훈이 가능한 독립운동가 후손이 100명 가까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시간에 파묻힌 독립운동가 후손을 한 사람, 한 사람 찾아내고 싶지만 이건 내 능력 밖 일이었다. / 232p

 

 

한인비행사양성소교육장을 촬영한 옛 사진 등 귀중한 자료가 미국에서 발굴되고 있다는 낭보가 전해진다. 관심을 갖고 노력을 기울이자 베일에 싸여 있던 역사가 속속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거였다. 그런 노력 덕분에 비행장 활주로 터 위치가 정확하게 확인이 되는 성과가 만들어진다. 물론 기존에 알려졌던, 내가 찍은 길은 아니었다. 난 잘못된 자료를 좇아 생뚱맞은 곳을 촬영했고 그걸 활주로라고 전시를 한 셈이었다. 게다가 그 사진이 국회까지 가 국정감사 자료로 사용되기까지 했다.

아무것도 아닌 사진 한 장이 단초가 돼 진실을 낚아냈다. 부끄럽고 민망한 현실이었지만 이 작업을 계속해야 할 이유와 보람이기도 했다. / 345p

 

 

 




 

 

 

 

  미국, 멕시코 이민 배에 올랐던 디아스포라 1세대 대부분은 고향 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 때문에 고향을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은 곧 이 땅을 잊지 않기 위한 몸부림으로 살아남아 독립운동의 역사가 되었다. 독립을 염원하는 민족의 평화적 부르짖음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서로 메아리를 주고받았고, 때로는 나라 밖에서 시작된 투쟁의 함성이 고향의 민중을 깨우고 그들이 화답한 환희의 울림이 전 세계 방방곡곡에 있는 동포들을 다시 웅비시켰다. 그렇게 국외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은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민족의 옹골찬 기상과 굳은 절개가 아직 살아 있음을 멀리 있는 동포들에게 각인시켜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뭉우리돌의 바다는 그 멀고 먼 타향에서 지켜낸 대한민국이라는 역사의 의미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기념비 같은 책이란 생각이 든다. 815일 광복절인 오늘, 이 책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좋을 대로 하라 : 단 하나의 일의 원칙 1 단 하나의 일의 원칙 1
구스노키 켄 지음, 노경아 옮김 / 미래지향 / 2020년 12월
평점 :
절판



 

 

 

진로, 취업, 이직 등 일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자기 원칙 세우기!

그 어떤 조건이나 타인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찾고, 내가 좋아질 수있는 선택을 할 것!

 

 

 

  진로와 직업, 취업과 이직 등에 관한 상담 내용들을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이 대체로 비슷한 고민들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내 대학에 진학하는 게 좋을까 해외로 유학을 가는 게 좋을까, 안정적인 직장에 계속 다니는 게 더 나을까 조금이라도 젊을 때 창업에 뛰어드는 게 더 나을까, 미래가 없는 회사에 남아 있는 게 옳을까 이직을 하는 게 옳을까, 육아와 커리어 중에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르자니 금세 후회할 것 같고, 이런저런 조건을 따지자니 단점은 꼭 하나씩 있기 마련이라 고민하는 시간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내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 시종일관 부디 좋을 대로 하세요라고 조언을 해주는 상담가가 있다. ‘좋을 대로 하라니, 말이야 쉽지 그게 마음처럼 안 되니까 상담을 한 게 아닌가요?’ 하고 되묻고 싶어지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도 나이고, 어떤 선택에 마음이 좀 더 이끌리는지 알고 있는 것도 나이며, 결국엔 답을 내야 하는 것도 나이기 때문에 당신 마음 가는 대로 그 믿음을 직시하라는 충고야말로 본질에 가까운 해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어떤 고민이라 할지라도 이 말 하나면 충분하다는 그의 경쾌하고 일관된 메시지가 내내 갈팡질팡하던 마음을 꽉 붙든다. 그래, 이제 고민 그만 하고 너 좋을 대로 하세요!”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라

 

 

  『좋을 대로 하라! 단 하나의 일의 원칙 1은 경영학자인 구스노키 교수가 일본의 유명 경제 미디어 사이트인 뉴스픽스에서 연재했던 커리어 상담 코너의 질문과 답변을 엮은 책이다. 놀랍게도 연재 초기에는 비판과 조롱이 담긴 댓글이 많이 달렸다고 한다. 키보드 파이터를 자처하는 저자답게 에두르는 법 없이 솔직한 조언을 아끼지 않은 덕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와의 불협화음이 주는 재미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는지 연재는 계속 되었고, 촌철살인 같은 직언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진 명쾌한 직업관과 삶의 철학이 독자들에게 와 닿아 점차 큰 호응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책 속에는 학생, 주부, 사회 초년생, 직장인, 상사 할 것 없이 다양한 연령과 직업군을 가진 사람들의 고민이 담겨 있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의 입장이어서 그런지 이 중 자녀의 진로에 대한 상담을 신청한 한 남성의 질문이 기억에 남는다. 고등학교 1학년인 아들을 국내 대학에 진학시킬 것인가, 영어 실력을 키우기 위해 해외 대학에 보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내용이었다. 반드시 해외를 염두하고 있지 않더라도 많은 부모들이 영어유치원에 보낼까, 일반 유치원에 보낼까, 일반 국공립학교를 보낼까, 사립학교를 보낼까와 같이 자녀 교육에 관한 다양한 고민을 하기 마련이라서 저자의 대답이 사뭇 궁금해졌다.

 

 

 

  이에 대해 저자는 좋은 대학을 나와야 좋은 직업을 얻고, 좋은 직업을 얻어야 돈을 많이 벌고, 돈을 많이 벌어서 풍족하고 선망받는 삶을 살아야 행복해진다라는 생각은 일단 순서부터 틀렸다고 딱 잘라 말한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의 교육 문제에 맞닥뜨리면 다른 모든 기준을 무시하고 난이도라는 하나의 기준에만 유독 매달리는데 이를 경계하라는 것이다. 그보다 가장 중요한 건 아이의 행복은 무엇인가를 제일 먼저 생각해주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답은 당연히, 아이마다 다르다. 때문에 부모는 행복해지려면 이런 일을 하고 이렇게 생활해야 하는데, 그 일을 하려면 이런 대학이 좋을 것이다라는 순서로 생각할 수 있도록 아이를 도와주라고 말한다. 틈날 때마다 아이에게 나의 행복은 무엇인가를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부모가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당부한다. 또 부모는 자신의 경험은 잠시 제쳐 두고 자문자답해보기를 권한다. ‘아들의 등을 떠밀어서라도 해외 대학에 보내는 게 나을까?’라는 생각을 왜 하게 되었을까? 대답을 찾았다면 한 번 더 그것은 또 왜인가?’라고 최소 다섯 번은 자문해보기를 바란다. 그렇게 질문하면서 스스로도 느슨한 근거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고민은 차차 사라질 것이라고. 덕분에 나는 나조차도 뚜렷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그저 좋아 보이는 것들에 현혹되어 내 아이를 위한 것이라고 착각하지는 않았는지 되새겨보게 되었다.

 

 

 

내용과 환경을 헛갈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입시의 결과는 환경이 아니라 개인의 공부 방식과 노력,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도 환경이 좋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어느 정도는 자동적으로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환경이 나쁜 고등학교에 가면 어느 정도 대입을 망치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약해집니다. 그래서 이러면 안 되는데, 궤도를 벗어나 버렸구나또는 인생이 이렇게 안 풀리는 건 내 환경이 열악해서야라며 환경을 탓하기 쉽습니다. 이들은 상황이 좋든 나쁘든 그 이유를 환경에서 찾게 되고 그러다 보니 인생이 더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 24p

 

 

화가 난다고 곧바로 그만두지 말로 일단은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요구에 응하는 자세를 보고 상사나 회사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서 변경과 강등은 상사(혹은 그 위의 상사)의 권한에 따른 의사결정입니다. 게다가 그것은 놀이가 아니라 일에 대한 진지한 결정입니다. 그러므로 상사는 자신의 결정에 대해 설명할 책임이 있습니다. 지금은 당신이 아니라 오히려 상사가 시험당하는 입장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면담을 신청하세요. / 32p

 

 

 



 

 

 

 

  저자는 취업 준비를 시작하려는 학생에게 어떤 일을 하고 싶어?”라고 물으면 하나같이 근무지, 급여, 수입 등 구체적인 조건을 비교하여 회사를 고르더라고 말한다. 분명 자연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저자는 이에 대한 한계를 지적한다. 수많은 조건에 대한 평가 결과를 더하여 평균을 낸 점수로는 어떤 회사가 자신에게 얼마나 적합한지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기호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구체적인 조건이 자신의 인생에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고, 일에 대한 가치관과 자세가 확립되지 않은 채 객관적인 조건에 치우쳐 급여가 많은 쪽을 선택하면 가장 중요한 적성을 외면하기 쉽기 때문이다. 저자는 취업과 이직 같은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의사결정은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기준에 따라 내려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 기준이란 바로 각자의 커리어 콘셉트.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커리어 콘셉트를 의식하고, 끊임없이 자기 영역의 윤곽을 그려나가는 연습을 한다면 취업, 이직 등 비교적 큰 변화를 앞에 두었을 때뿐만 아니라 일상의 업무에서도 일의 우선순위를 빨리 정할 수 있어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한다.

 

 

 

  이 외에도 저자는 첫 직장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에게는 젊음의 본질은 앞으로 장래가 길다혹은 유연하다가 아니라 아직 아무것도 없다이기에 편하게 정할 것을 독려하고, 창업을 꿈꾸는 이에게는 자신에게 이걸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라는 강렬한 동기가 있는지를 되물어볼 것을 권유하기도 한다. 또 일을 할 때는 당장 도움이 되는 것일수록 유효 기간이 짧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손익을 따져가며 즉시 돌아오는 보상에 기대지 않을 것을 조언한다.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하고 싶은 일이나 이루고 싶은 목표가 없어 고민이라는 이에게는 아직 기회가 무르익지 않았을 뿐 당장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지 말 것을 권한다. 다만 이때 사소한 단서를 일상에서 의식하는 것은 중요하는 것은 필요하다. 약간 신경 쓰이는 일, ‘내가 이런 일을 좋아하나?’라는 생각이 드는 일을 그때그때 의식하다보면 언젠가 그렇구나. 내가 하고 싶은 건 이 일이구나라고 깨달을 때가 올 것이라고 말이다. 집에서 육아에 전념하고 있으면서도 지금 내가 이렇게 있어도 되는 건가?’ ‘뭐라도 해야 되는 건 아닌가?’ 하고 조바심만 내고 있던 내게도 의미 있는 조언이었다.

 

 

 

제 기본적인 신조는 사람이여, 99%는 하고 싶은 대로 하라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것은 자유 의지, 즉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할 수밖에 없다라는 생각이 제일 나쁩니다. 저는 그런 사람을 만날 때마다 누가 그러라고 했나요?”라고 정곡을 찔러 버립니다. 여러분도 한번 해 보세요. / 163p

 

 

당신도 이제 세상에 나가서 다양한 판단을 내리고 의사결정을 해야 할 텐데, 모든 선택이 트레이드오프로 이루어짐을 잊지 마세요. 모든 일을 두루두루 잘할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 덕분에 다양한 사람이 모여 사회를 구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직업과 직업 생활의 중요한 원칙인 트레이드오프를 몸소 터득할 좋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당신이 최초로 내리는 트레이드오프의 결단은 향후 인생에 큰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최소 1년간 휴학하고 모처럼 인연을 맺은 벤처 기업에서 좋아하는 일을 실컷 즐기기 바랍니다. / 241p

 

 

 




 

 

 

 

  상담가로서 좋을 대로하라는 말이 자칫 무성의한 말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 어떤 조건이나 타인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찾고, 내가 좋아질 수있는 선택을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게 또 있을까. 어떤 선택이든 를 중심에 둘 것을 제안하는 그의 조언을 잊지 말아야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유 국가에서
V. S. 나이폴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의식과 세계 속에서 끊임없는 떠도는 유랑자들이다!

식민 시대가 개인과 사회에 미친 현실을 냉철하고 가감 없이 보여준 작품!

 

 

 

 

  2020년 도쿄올림픽 개막식에서 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오륜기를 들고 입장하는 선수들이 있어 이목을 집중시켰다. 201510, UN 총회에서 IOC의 토마스 바흐 위원장에 의해 설립된 난민 선수단이었다. 앞서 리우 올림픽에서는 10명이었던 선수단이 이제는 29명으로 늘어나 이번 도쿄올림픽에 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에게 있어 올림픽은 국위 선양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꿈에 도전하고 전 세계 8000만 명의 난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하기 위한 무대였다. 메달의 색을 떠나 스포츠로 하여금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이들의 도전에 감동하게 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내 올림픽에 출전한 난민 선수가 코로나19 백신 접종 과정에서 차별 받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어 문제점으로 떠올랐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람들 사이에 섞이지 못하고, 남자와 여자가 아닌 다른 존재로 느껴진다고 고백하며, IOC마저 우리를 다른 '정상적인' 운동선수들처럼 대하지 않는다고 하여 씁쓸함을 남겼다. 그렇게 스포츠를 통해 전 세계의 화합을 도모하고자 하는 올림픽 정신 속에서도 배제는 존재했다.

 

 

 

  인종, 종교, 사상, 정치, 자연재해 등의 이유로부터 고국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 그러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심지어 정상에서 벗어난 사람들로 분류되고 마는 현실들. ‘나는 누구이고,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란 질문 앞에서 끊임없이 무기력함을 느껴야 하는 이들의 삶에 언제쯤이면 진정한 자유가 깃들 수 있을까. 문득 자유 국가에서말미에 수록된 에필로그 룩소르의 서커스단속 한 문단이 마음을 붙든다. ‘유일하게 순수했던 시대는 태초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자기가 사는 땅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고대 예술가들이 자신이 머문 땅이야말로 완벽하다고 여기던 때가 그 시대일 것이다. () 어쩌면 나일강은 단순히 물에 지나지 않는데도 청록색 물결무늬로 일렁인다니, 그것은 그저 지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이 나라의 경관도 아득히 먼 태곳적에 만들어진 데 대한 동경과, 무덤을 장식하기 위한 하나의 허상 같은 것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순수했던 시대, 이른바 우리가 꿈꾸는 진정한 자유란 과연 허상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의식과 세계 속에서 끊임없는 떠도는 유랑자들이다. 인도, 영국, 아프리카, 미국, 이집트…… 모든 곳에 있지만 어디에서 속하지 못하는 방랑자들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자유 국가에서속의 인물들이 제3세계 혹은 어느 낯선 타인으로 읽히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나는 누구이고 또 어디에 속하는가

 

 

 

  다수의 문학상을 비롯하여 부커 상 그리고 노벨 문학상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이력을 보면 일단 어마어마한 수상 내역에 놀라게 되지만 그에 비해 이름은 상당히 낯설다. ‘출신지인 트리니다드 토바고를 비롯한 제3세계 문제를 밀도 있게 다뤄 서구문단에서는 1급 작가로 인정받는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크게 주목 받은 적이 없는 듯하다. 처음 표지를 접했을 때 일종의 정치적 성격을 띤 르포르타주인줄로 짐작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부커 상을 수상한 중편작 자유 국가에서를 비롯해 네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책 속에는 자유를 찾아 떠난 이민자와 어디에서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도는 유랑자들이 등장한다. 피레우스의 방랑자는 이집트에서 추방당한 난민들, 끊임없이 주위를 경계하는 덩치 큰 미국 학생들, 영국인 방랑자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가 아테네 피레우스에서 카이로의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소형 증기선에 몸을 싣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처음부터 영국인 방랑자는 나의 시선을 끈다. 그는 노련한 여행자 같기도 하고, 어깨에 둘러멘 배낭에는 시집이나 일기장 혹은 막 쓰기 시작한 소설 원고가 들어 있을 것 같은 낭만적인 구석도 있으며, 자기와 마음이 맞을 것 같은 청년에게 다가가 다양한 여행 경험을 늘어놓을 만큼 허세도 부릴 줄 안다. 하지만 이내 영국인 방랑자는 유색인들의 적대적인 시선과 폭행에 떠밀려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고 선실 안을 외로이 떠돈다. 이윽고 도착지를 바라보는 그의 불안한 눈빛에서 이곳에서도 쉽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마는 그의 미래를 언뜻 본 것 같아 씁쓸함을 남긴다.

 

 

 

이집트계 그리스인인 그들은 이집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이집트는 더 이상 그들의 모국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추방당한 난민들이었다. 침략자들이 물러나고 수차례 굴욕을 겪은 끝에 이집트는 마침내 자유를 되찾았는데, 단순한 기술 덕에 이집트 사람들보다 형편이 조금 나았던 이 그리스인들은 그 자유의 피해자가 되어 이 배처럼 허름한 선박에 태워져서 강제 추방을 당했다. 그러다 지금 이렇게 관광객 틈에 섞여 귀국길에 오른 것이다. 그 가운데에는 레바논의 사업가, 스페인의 나이트클럽 댄서, 독일에서 귀국하는 뚱뚱한 이집트 학생도 있었다. / ‘피레우스의 방랑자중에서 9p

 

 

피레우스와 레오나르도 다빈치호가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방랑자와 청년은 다시금 모르는 사이가 되었다. 결국 방랑자는 동행이 필요했던 게 아니었다. 그저 다른 사람에게 동행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스스로 보호받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괴팍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아는 눈치였다. / ‘피레우스의 방랑자중에서 12p

 

 

 



 

 

 

 

  「무리에서 벗어나 한 개인으로에서는 자신이 모시는 주인을 따라 인도 뭄바이에서 워싱턴으로 건너 온 산토시가 등장한다. 그는 이제껏 자신을 주인의 일부로 생각해왔기에 좁은 붙박이장에서 지내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점점 개인으로서의 나로 자유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파트, 붙박이장, 텔레비전, 주인, 슈퍼마켓으로 한정되어 있는 이 죄수 같은 삶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뭄바이로 돌아간다고 해서 예전처럼 살 수 있을까? 더군다나 지금의 주인이 아닌 또 다른 사람의 일부로 살아갈 자신도 없다. 그렇게 뭄바이로 돌아갈 수도 없고 주인으로부터 도망쳐 불법체류자의 신세로 워싱턴에 뿌리내리고 살 수도 없는 현실 앞에서 고민하던 그는 마침내 흑인 여자와 결혼함으로써 합법적으로 신분을 보장받고 워싱턴에서 살게 된다. 하지만 우연히 알게 된 인도인 프리야를 새 주인으로 섬기게 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또 다시 이어지고 마는 피지배자로서의 역사와 한계를 들여다보게 해 안타까움을 남긴다.

 

 

 

나는 전에 자유인이었지만 지금은 그 자유도 잃고 말았다. / ‘무리에서 벗어나 한 개인으로중에서 80p

 

 

형제라니, 대체 누가 누구의 형제라는 말인지 알쏭달쏭했다. 나도 한때는 큰 무리의 일부였다. 그때는 나를 독립된 개인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다 거울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는 자유로워지기로 마음먹었다. 자유는 내게 이런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내가 가진 건 오로지 몸뚱이 하나뿐이라는 사실, 어떻게 해서든 그 몸뚱이를 입히고 먹여 살려야 한다는 사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모든 게 끝난다는 사실을. / ‘무리에서 벗어나 한 개인으로중에서 95p

 

 

 

  ‘'누군가 아는 사람이 있으면 말하라, 대체 나는 누구를 죽여야 하는지'라고 묻는 이름 없는 사내의 이야기 누구를 죽여야 하는지 말하라는 자신의 인생을 망친 자들에 대한 적의를 강하게 드러낸다. 고향을 떠나와 죽기 살기로 일하며 번 돈을 아무렇지 않게 강탈해가는 저 불량배들인가, 하고 싶다던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주었건만 비싼 담배나 축내며 무기력하게 시간만 보내고 있는 동생 데이요인가, 아내를 때리고 돈을 함부로 낭비하면서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형인가 혹은 너무나 뒤처진 나머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아버지인가. 그도 아니면 동생 데이요를 집요하게 괴롭혔던 숙부와 사촌들인가, ‘내가 그토록 열심히 일한 사실도 모르는 이 유령 같은 도시인가. 대체 어디에다 이 원망과 분노를 쏟아내야 엉망이 된 나의 삶을 보상받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어 괴로워하는 사내의 처절한 고통이 날카롭게 파고든다.

 

 

 

영락없는 노동자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슬퍼 보여 마음이 아팠다. 답답할 정도로 좁은 방도, 창밖의 콘크리트 벽도, 햇볕이 들지 않는 뒷마당도 마음이 아팠다. 앞으로 어ㄸ?ㅎ게 될가? 동생과 내게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동생은 결국 고향으로 가는 배에 올라 햇빛 밝은 아침에 내려서 택시로 교차로까지 가서는 낯익은 길을 달리게 될까? / ‘누구를 죽여야 하는지 말하라중에서 153p

 

 

양복을 입고 책을 든 채 넓은 계단을 오르는 데이요도 관광객처럼 보였다. 관광객들은 그저 관광을 위해 이곳에 들렀을 터였다. 다들 행복해 보였다. 광장 한쪽에는 호텔로 데려다줄 버스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관광객들에게는 저마다 돌아갈 고향도, 편안한 집도 있을 터였다. 가슴 가득 슬픔이 차올랐다. / ‘누구를 죽여야 하는지 말하라중에서 159p

 

 

 

  표제작인 자유 국가에서는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땅에서 여전히 중앙 정부 산하 기관의 행정관으로 근무 중인 영국인 남성 바비와 유럽인 거주 구역 정부 공관의 행정관 아내인 영국 여성 린다가 함께 남부 관할 지구로 가는 길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들이 스쳐지나가는 아프리카의 풍경 속에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원시 형태의 마을이란 없다. 기껏해야 관광객 전용 상점에 진열된 목각이나 가죽 제품, 기념품 북이나 뾰족한 창 정도다. 새로 들어선 관광호텔 입구에는 어색한 제복 차림의 소년들이 서 있고, 멀지 않은 곳에서 백인이나 유대인 관리자들이 소년들을 감독하고 있다. 또 몇몇 흑인 소년들이 자신의 몸을 팔아 돈을 버는 모습도 눈에 띤다. 심지어 린다는 아프리카인들이 피와 똥오줌, 쓰레기 같은 것을 주말마다 먹으며 증오의 의식을 치른다는 등의 소문까지 아무렇지 않게 떠벌린다. 이렇게 소설은 바비와 린다의 시선과 대화를 통해 식민 시대 이후의 아프리카를 냉철하고 가감 없이 보여준다.

 

 

 

  소설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아프리카인들에게 호의적이었던 바비가 간간이 보여주는 모순된 행동들이다. 그는 줄루족 청년에게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당신 같은 피부색을 갖고 태어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바람에 그것이 진심이었든 아니었든 상대방으로 하여금 분노를 사고, 주유소에서 일하던 아프리카인이 자신의 차에 흠집을 내자 물어내지 않으면 여기서 쫓겨나게 만들 거라고 윽박지르거나 자신이 말하는 중에 건방지게 등을 돌렸다고 화를 낸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식민 시대의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피지배자들을 저급한 족속으로 몰고 가는 린다에게 날을 세우는 그의 태도는 기묘한 아이러니를 낳는다.

 

 

 

나는 이곳 사람들이 유럽인들에 대해 편견 같은 걸 갖고 있다면 그건 순전히 유럽인들 탓이라고 생각해요. 대통령은 매일 이 나라 곳곳을 다니며 우리 유럽인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국민을 설득하고 있어요. 대통령이 뭘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그 또한 식민지 시절 유럽인들이 챙길 것 다 챙겨서 남쪽으로 도주한 사실을 훤히 꿰고 있어요. 생각하면 웃기는 일이에요. 우리는 아프리카인들에게 부패하면 안 된다고 역설해요. 그런데 그들이 우리의 사소한 부정이나 부패를 지적하면 화를 벌컥 내며 그건 잘못된 편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핏대를 세우죠.” / ‘자유 국가에서중에서 216p

 

 

저 사람들은 오랫동안 농도로 지냈어요.” 바비가 말했다. 그는 다시 화가 났다. “수백 년 동안 압박과 착취에 시달렸던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아무튼 어처구니없는 사람들이에요.”

린다가 말했다.

바비는 눈앞의 길에 신경을 집중했다.

어처구니없는 건 저 사람들이 아니라 이런 곳에 온 나예요.” / ‘자유 국가에서중에서 290p

 

 

 



 

 

 

 

  이처럼 자유 국가에서에 수록된 작품 대부분에는 자신의 뿌리와 자유를 갈망하며 떠도는 자들의 슬픔과 좌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3세계 출신으로 자칫 감상주의에 빠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이폴은 포스트 식민 시대의 현실을 냉정하게 소설 속에 투영하고자 했고, 그러한 이유로 그의 언어는 높은 설득력을 지닌다. 덕분에 그의 작품에는 하나같이 억압된 역사의 굴곡을 뚜렷하게 직시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또 그 역사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한 나폴리의 문학은 몇 번이고 회자될 것 같다. 아직 나폴리의 작품을 읽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 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얼굴에 혹할까 - 심리학과 뇌 과학이 포착한 얼굴의 강력한 힘
최훈 지음 / 블랙피쉬 / 202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말보다 강한, 얼굴이 가진 힘!

얼굴이 내게 말해오는 것들에 관심을 두다 보면 저절로 소통의 기술도 늘어나지 않을까!

 

 

 

 

  “? 뭐라고? 다시 한 번 더 말해줘.”

  요즘 들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면 꼭 한 두 번은 되묻곤 한다. 마스크를 쓰는 게 일상이 된 뒤로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아듣지 못할 때가 많아서다. 평소 상대방의 눈이 아닌 입모양을 곧잘 바라보곤 하는 나로서는, 마스크로 입을 가린 채로 의사소통을 하는 게 이렇게 불편한 일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게다가 이사를 하면서 아이의 새 어린이집 선생님과 같은 반 어머니들의 얼굴을 익히는 일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누구 어머니였더라? 분명 인사를 나누긴 했는데 누구의 어머니인지 금방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스크를 쓰게 되면서 나름 이로운 점도 있다. 마스크를 벗을 일이 없을 것 같으면 굳이 화장을 하지 않아도 되고, 대화를 나눌 때 얼굴에서 드러나는 미세한 표정을 애써 감출 필요도 없다. 특히 상대방에게 내 외모가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건 보다 자연스럽고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렇게 되고 보니 얼굴이란 것이 타인과 어울려 살아가는 데 있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새삼 깨닫게 되는 요즘이다.

 

 

 

얼굴은 단순히 얼굴이 아니다

 

 

  『내면이 중요하다면서 왜 얼굴에 혹할까의 저자이자 심리학자인 최훈 교수는 실제로 얼굴은 소통에 능하도록 진화되어 왔다고 말한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 신체적 능력이 떨어졌던 인류는 생존에 유리하기 위해 공동생활을 선택했는데, 이 때 꼭 필요한 능력은 동료들과 원활하게 소통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사냥을 할 때도 동료들과 의사소통을 해야 협업이 가능했기에 몸과 제스처, 그리고 얼굴을 통한 비언어적 소통이 중요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인류는 다양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형태로 얼굴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흰자위다. 인간의 흰자위가 유독 크고 뚜렷한 이유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흰자위를 넓혀갔던, 더 정확하게는 흰자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원활한 의사소통이 생존 확률을 높여주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흰자위가 검은자위와 대비를 이루어 검은자위가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시선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상대방이 단번에 파악할 수 있다는 이점을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인류는 얼굴을 통해 보다 유리한 방법을 취득해나갔고, 그 결과 많은 정보를 얼굴에 담아 정보를 주고받으며 직관적으로 매우 빠른 시간에 정보를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얼굴을 통해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얻는다. 신원, 성별, 연령대는 물론 표정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알 수 있다.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한순간의 얼굴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시선을 통해 상대방의 의도를 알고, 그 사람의 얼굴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도 파악할 수 있다. 더러는 성격과 지적 수준, 살아온 역사를 알 수 있을 뿐더러 관상학에 따르면 사람의 미래까지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얼굴의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것일까?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얼굴을 통해 정보를 전달하고 있으며 또 어떠한 방식으로 얼굴을 활용하면 보다 효과적으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까? 내면이 중요하다면서 왜 얼굴에 혹할까는 바로 이러한 궁금증에서 출발하는 얼굴 안내서같은 책이다. 우리가 매력적인 얼굴에 끌리는 이유는 무엇인지, 첫인상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인지, 어떻게 하면 타인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는지, 얼굴에 관한 다양한 궁금증을 심리학과 뇌 과학을 중심으로 풀어나간다.

 

 

 

유사한 많은 연구에서 음성 없는 짧은 동영상을 보여주었을 때 참가자들은 등장인물의 외향성, 신경성, 성실성 등 성격 특성을 비교적 정황하게 판단했다. 게다가 정확한 판단에 필요한 시간은 대개 30초에서 1분 정도였다. 1분보다 더 오래 보여준다고 정확도가 높아지지는 않았다. 찰나의 판단은 정말 빠른 시간에 완성되고는 끝이라는 이야기다. / 38p

 

 

반면 몇몇 사람들에게는 사진을 시간제한 없이 보여주고 평가하라고 했다. 그 결과 사진을 0.1초 보여주었을 때와 무제한으로 보여주었을 때 별 차이가 없었다. 첫인상을 형성하는 데는 0.1초면 충분했던 것이다.

이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첫인상이 형성되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이해할 만하다. 우리는 생존 확률을 높이는 쪽으로 행동하고 판단하는데, 첫인상을 빨리 형성하는 것이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다. 낯선 사람이 나에게 우호적인지 아니면 적대적인지 빠르게 판단해야 할 때 첫인상은 판단에 기본적인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 118p

 

 

 




 

 

 

 

  간혹 사진을 보다 보면 흠칫 놀랄 때가 있다. 내가 이렇게 생겼었나? 내가 생각하는 얼굴과 사진 속의 얼굴이 꽤나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내 얼굴의 모습을 심리학 용어로 내 얼굴의 표상이라고 하는데, 내 얼굴의 표상과 실제 얼굴을 비교한 연구를 살펴보면 내 얼굴의 표상은 실제 얼굴과 꽤 차이가 난다고 한다. 우리는 눈, , 입을 실제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며, 얼굴을 위쪽과 아래쪽으로 구분했을 때 위쪽 얼굴은 더 작게, 아래쪽 얼굴은 더 크게 지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이다. 이에 대해 뇌 과학자들은 눈, , 입이 상세한 처리가 필요한 중요 부위이기 때문에 뇌의 더 많은 영역이 눈, , 입을 담당해 더 크게 지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 중에서 왼쪽이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감정을 느끼고 매력을 평가하는 역할을 뇌의 우반구가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타인이 내 얼굴을 보고 매력을 평가할 때는 정작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 얼굴이라는 사실이다. 매력을 평가할 때는 우반구가 작용하니, 왼쪽 눈으로 들어오는 얼굴이 더 중요하고, 타인과 내가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으면, 상대방 왼쪽 눈에 비치는 내 얼굴은 오른쪽 얼굴이기 때문이다. 억울하게도 더 매력적인 내 왼쪽 얼굴이 아닌, 오른쪽 얼굴이 내 얼굴 매력에 대한 판단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화장이나 얼굴을 매만질 때는 오른쪽 얼굴에 더 신경 쓸 필요가 있다. 이를 이용해 저자는 특정 이미지를 어필하고 싶을 때는 왼쪽보다 오른쪽을 중심으로 강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이를 테면 갓난아이가 여자아이라는 것을 강하게 어필하고 싶어 머리에 리본을 단다고 하면, 왼쪽 머리보다는 오른쪽 머리에 다는 게 유리하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옆에 있는 사람의 매력이 높건 낮건 상관없이, 일단 여러 명이 함께 사진을 찍으면 내 매력이 높아져 보인다는 점도 재미있다. 이를 치어리더 효과라고 하는데, 여러 명이 함께 제시되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사람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고, 그 집단의 표상을 구축한다고 한다. 이때 집단의 표상은 집단 구성원의 평균 얼굴과 유사하게 형성된다. 그러면 우리가 평균적인 얼굴을 보고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것처럼, 집단 구성원은 그 집단의 표상과 유사하므로 (그 집단의 표상이 그 구성원의 평균 얼굴이니까) 집단에 속한 사람이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또 얼굴에 있어서 눈썹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눈썹이 진하면 기본적으로 얼굴의 대비 정도가 높아지는데, 대비가 높은 얼굴은 더 매력적으로 지각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아이섀도를 진하고 넓게 칠하는 스모키 화장 역시 눈과 눈썹의 동화 효과를 강화하고, 그 결과 눈 크기가 눈썹 위치까지 확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종의 델뵈프 착시를 불러와 눈이 커진 듯한 착시를 발생시킨다고 한다. 여기에 하얀 얼굴, 빨간 입술, 안경 활용법 등 얼굴을 어떻게 보이게 하느냐에 따라 타인에게 나의 인상을 달리 보이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볼 수 있겠다.

 

 

 




 

 

 

 

  이처럼 내면이 중요하다면서 왜 얼굴에 혹할까를 읽다보면 얼굴은 생각보다 나에 대한 많은 정보를 담고 있으며 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소통의 내용 또한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이 글을 읽고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태도를 옹호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얼굴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을뿐더러, 겉모습으로 상대방을 확신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를 무사히 극복하고 온전히 누군가의 얼굴을 가까이 마주할 수 있는 날, 이 책으로 하여금 저 사람이 나에게 보내는 눈짓과 표정이 무엇을 말하는지 보다 가까이 이해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보시길 추천 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