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싱 - 백인 행세하기
넬라 라슨 지음, 서숙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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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을 향한 강렬한 욕망, 여전히 한 데로 섞일 수 없는 인종이라는 정체성, 그들 세계 사이에서 흐르는 불안한 연대를 엮어낸 수작!

 

 

  이 이야기는 아이린 레드필드에게 날아온 한 통의 편지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이 편지를 읽고 나면 틀림없이 마주하게 될 어떤 위험을 감지하며 꺼림칙한 기분을 느낀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들로 미루어 볼 때 누가 보냈는지, 뜯어보지 않아도 분명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위험의 모서리에 올라서 있는 것. 언제나 위험을 알고 있으면서도 뒤로 물러서거나 피하지 않는 것. 주변 사람들이 분통을 터뜨리며 아무리 주의를 준들 꿈쩍도 않는 것.’ 한 사람을 둘러싼 단어들이 이처럼 온통 위험과 불안을 안고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이건 네 탓이야, 아이린. 적어도 어느 정도는. 왜냐하면 내가 그때 시카고에서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난 지금 이 끔찍하고 황당한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을 테니까.” 아이린은 이미 클레어 켄드리가 뉴욕에 왔다는 걸 알리는 우편 소인을 보는 순간부터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 년 전에 시카고에 있었던 어떤 날카로운 기억이 바로 어제처럼 떠올라 불쾌함을 감추지 못한다.

 

 

 

  시간은 이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카고를 여행 중이던 아이린은 뜨거운 열기를 피하기 위해 백인 전용 호텔의 루프탑에서 잠시 쉬어간다. 그런데 그곳에서 한 여자의 굉장히 노골적이고도 집요한 시선을 느낀다. 혹시 저 여자는 자신이 흑인인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때때로 사람들은 그녀를 이탈리아 사람, 스페인 사람 또는 집시로 보기는 하지만 그녀가 혼자 있으면 흑인이라고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여자가 절대로 눈치 챘을 리 없다고 단정하면서도 내심 두려움을 감추지 못한다. 자신이 흑인인 것이, 또는 흑인이라고 밝혀지는 것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이곳에서 쫓겨나는 민망스러운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바로 그 때 옆 테이블의 여자가 다가와 말을 건다. “우리 아는 사이 같은데요.”

 

 

 

  아이린은 그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특징, 파악하기 힘든 어떤 것, 정의 내리기에는 너무도 모호한 것, 손으로 잡기에는 너무 먼 것, 그러나 아주 익숙한 무언가를 느낀다. 클레어 켄드리. 십이 년 전, 클레어의 아버지가 죽은 뒤 서쪽 지역에 있는 친척들에게 보내진 뒤로 아주 잠깐씩 모습을 드러내다가 사라진 아이. 어느 날 한 여자와 두 남자와 함께 화려한 호텔에서 저녁 시간에 있는 것을 보았다는 요란한 소문이 돌긴 했지만 이렇게 그녀를 가까이 만나기는 그때 이후 처음이다. 아이린의 눈에 클레어는 아름다운 외모와 태도로 보건대 확실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오랜만에 나눈 대화를 통해서 클레어가 가난하고 절망적인 신분에서 탈출하기 위해 패싱을 선택했고 백인 사업가와 결혼해 상류층에 편입해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사실인즉 그녀는 호기심을 느꼈다. 클레어 켄드리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그녀는 패싱이라는 이 복잡하고 골치 아픈 일에 대해, 익숙하고 정다운 것들과 모두 단절한 채 아주 낯설지는 않을지라도 분명 아주 우호적이지는 않은 다른 환경에서 승부를 거는 이 위태로운 문제에 대해 알고 싶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출신 배경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신하는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는지, 또 다른 흑인들과 접촉할 때 그녀는 어떻게 느끼는지, 또 다른 흑인들과 접촉할 때 그녀는 어떻게 느끼는지. / 46p

 

 

아이린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이성적으로는 어느 정도 동의했지만 그녀의 본능은 전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왜 그런지는 말할 수 없었다. 서둘러 떠나지 않으면 저녁 약속에 늦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머뭇거렸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자, 그녀가 알았던 소녀, 그리고 상당히 위험하고 끔찍한 짓을 성공적으로 해 냈으며 스스로 대단히 만족한다고 말하는 그 여자가 아이린 레드필드에게는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하게 매력적이었다. / 54p

 

 

 

passing 백인 행세하기

 

 

  클레어의 초대로 옛 동창이었던 아이린과 거트루드가 만나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이 소설에서 단연 인상적인 장면 중에 하나다. 세 사람 모두 이제는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기에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아이의 이야기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때 클레어는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속이고 결혼을 한 까닭에 마저리가 태어나기 전 아홉 달 내내 딸애의 피부가 검을까 봐 두려웠노라고 고백한다. 백인 남편을 둔 거트루드 역시 남편인 프레드가 아기의 피부색이 어떻든 상관없다고 했지만 내심 가족 모두 검은 아기가 태어나기를 원치 않았을 거라고 동조한다. 반면, 아이린은 흑인 남편과 결혼한 뒤 평소 흑인들의 권리 향상에 앞장서 왔기에 그들의 이야기에 동조하지도 경멸하지도 않는다는 듯 침착한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이어 합류한 클레어의 남편이 흑인을 극도로 혐오하는 인종차별주의자에, 자신의 아내가 흑인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뿐더러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믿고 있는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신의 인종을 모욕하는 데에 따른 노여움과 굴욕감을, 그럼에도 클레어를 보호해야 한다는 데에 따른 인종에 대한 본능적인 충성심을, 한편으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한 감정이 일렁이는 것을 느낀다. 사실 필요에 따라서는 그녀 역시 패싱을 선택해왔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감탄하고, 묘한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그걸 보호하기도 하는 모순을 겪곤 했던 것이다. 어쩌면 과감하게 패싱을 선택하고 위험천만한 결혼생활을 감수하고 있는 클레어를 이해할 수 없어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녀의 외모와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느라 움츠러들지 않는 태도에 매력을 느꼈던 것은 이 때문이리라. 그렇게 잔잔했던 아이린의 일상은 시카고에서 우연히 마주친 클레어로 인해 흰색을 향한 강렬한 욕망, 여전히 한 데로 섞일 수 없는 인종이라는 정체성, 그들 세계 사이에서 흐르는 불안한 연대를 확인하게 됨으로써 흔들리게 되고 클레어를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것으로 잊으려 하지만 이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 또 다시 나타난 클레어는 아이린의 마음을 더욱 거세게 휘저어 놓기 시작한다.

 

 

 

세상에, !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설령 내게 흑인 피가 한두 방울 섞인 것을 당신이 알아낸들 말예요.”

벨루는 손을 앞으로 휘저으며 단호하고 확실하게 거부했다. “아니, 천만에, 검둥이.” 그가 단언했다. “나한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난 당신이 검둥이가 아닌 걸 알아. 그러니까 괜찮아. 당신이 원한다면 검은 고양이처럼 까매져도 돼. 왜냐하면 난 당신이 검둥이가 아닌 걸 아니까. 거기까지는 괜찮아. 하지만 내 가족에 진짜 검둥이는 안 돼.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절대 없을 거야.” / 78p

 

 

인종에 대한 본능적인 충성심, 어째서 그녀는 거기서 벗어나지 못할까? 왜 거기에 클레어가 포함되어야 하는가? 클레어는 그녀나 그녀가 속한 인종을 배려하지 않는데 말이다. 아이린은 억울하다기보다 막막한 절망을 느꼈다. 그녀는 이 점에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람들을 인종으로부터 분리해 생각할 수 없었고, 그녀 자신을 클레어 켄드리에서 떼어낼 수 없었다. / 200p

 

 

 




 

 

 

 

  이제 이야기는 패싱을 통해 과감히 백인 상류층의 삶을 누리던 클레어가 아이린을 통해 할렘 사회를 엿보고 그들의 삶을 그리워하게 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자신이 적극적으로 탈출하려 했던 흑인의 삶으로 다시 가진 모든 것을 내던지고 돌아오겠다는 클레어, 자신의 삶에 끊임없이 침범하며 남편인 브라이언과의 결혼생활마저 흔드는 클레어를 다시 돌려보내고 싶어 하는 아이린. 이 두 여성 사이에 흐르는 불길한 긴장감은 결국 비극적인 사건으로 막을 내린다.

 

 

 

조용한 거실에 혼자 앉아 편안하게 난롯불을 쬐던 아이린 레드필드는 난생 처음 흑인으로 태어나지 않았기를 바랐다. 처음으로 그녀는 흑인이라는 점이 너무 무거워 고통스러웠고 반항심이 들었다. 인종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녀는 여자로서, 그리고 다른 개인적인 일들로 고통받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소리 없이 부르짖었다. 잔인하고 부당한 일이었다. 정말이지 검은 피부를 지니고 태어난 흑인들만큼 저주받은 존재는 없었다. / 196p

 

 

그만둡시다! 아이린, 당신도 나만큼 잘 알고 있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검둥이라는 단어와 그 의미를 아이들이 모르도록 애써 봤자 무슨 소용이 있소? 그들이 알아냈지 않소. 어떻게 알았겠소? 누군가가 주니어를 더러운 검둥이라고 불렀기 때문이오.”

그렇다 해도 당신이 인종 문제를 애들 앞에서 꺼내는 것은 달라요. 난 그것 못 봐요.”

그들은 마주 노려보았다.

아이린, 똑똑히 들어요. 아이들도 이런 문제를 알아야 하오. 지금이나 나중이나 마찬가지라고.”

애들은 몰라야 해요!” 그녀는 분노에 차 눈물이 떨어지려는 것을 참으면서 말했다. / 208p

 

 

 



 

 

 

 

  이처럼 패싱은 백인 피부를 지닌 두 흑인 여성 클레어와 아이린을 통해 흰색이 주는 사회적 보호와 이익을 욕망하고 인종의 정체성과 경계 사이에서 흔들리는 당대 여성들의 삶에 주목한 작품이다. 흑인이라는 정체성을 숨길 수 있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경계에 섰다면 넘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이들. 배제되지 않기 위해, 편입할 수 있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편입을 선택한 세상의 모든 클레어들을 마냥 비난할 수 없는 이유도 그것이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라는 것을 우리도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 클레어와 같은 상황에 마주했을 때 패싱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자문하게 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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