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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 - 방대하지만 단일하지 않은 성폭력의 역사
조애나 버크 지음, 송은주 옮김, 정희진 해제 / 디플롯 / 2023년 4월
평점 :

수치와 성폭력은 더 이상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끝없고 광범위한 성폭력의 역사를 우리가 직시해야 하는 이유!
수치란 무엇인가? 나는 얼마 전에 읽은 『셰임 머신』을 통해 인류가 수치라는 감정으로 하여금 공동체의 질서와 사회적 기준을 따르도록 유도해왔음을 알게 되었다. 책 『수치』에서는 이를 학습된 억압의 도구라 정의한다. 역사적 시기, 지리적 장소, 무수히 많은 권력의 제도적 체제에 뿌리박힌 사회적 감정이자 정치적인 감정으로, 자신과 공동체에 수치를 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집단 내에서 상당한 구속력을 발휘한다. 저자인 조애나 버크는 성폭력의 문제에 있어서 자신이 성폭력의 희생자-생존자임을 공개적으로 증언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대표적인 이유 역시 ‘수치’를 꼽는다. 가족의 명예를 실추시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강간을 당했다는 이미지가 낙인이 될 것을 두려워하는 성폭력 피해자들은 지금도 진실을 드러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성폭력이 젠더(성별, 성의 구별, 성차)라는 사회구조적 모순이 낳은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수치는 왜 매번 희생자-생존자의 몫이어야 하는가?
강간의 수치는 섹슈얼리티와 존엄성 정치학의 지표다.
정치적 계급은 수치로부터 희생자를 보호할 큰 책임이 있다. / 71p
이제 우리는 수치와 성폭력이 더 이상 개인적인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전 세계의 뿌리 깊은 성폭력 문제에 대항하기 위해 성폭력을 일으키고 계속되도록 만든 이념(성차별주의와 인종주의, 민족주의, 식민주의)과 법 제도, 권력 구조에 수치를 되돌려주어야 한다. 이 책은 그러한 시도를 위해 쓰인 강렬한 목소리다.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 민족, 계급, 카스트, 종교, 나이, 세대, 신체 유형, 장애 유무가 복합적으로 얽힌 전 세계의 성폭력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 과연 성폭력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지 ‘방대하지만 결코 단일하지 않은 성폭력의 역사’를 통해 해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여성의 문제가 아닌 모두의 문제로의 전환
1999년 이탈리아 로마 대법원은 “청바지를 입고 있는 사람이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으면 (…) 벗기기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여성이 더 적극적으로 공격자에게 저항하지 않았다며 상호 합의한 것으로 판결을 내렸다. 홀로코스트 이후, 강제수용소에서 성 학대를 당했던 유대 여성은 이를 공론화하려다 공동체를 재건하려는 시도를 방해했다며 비난을 받았다. 북아메리카에서는 교정적 강간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동성애들에게 성폭력의 합당성을 주장했고, 그리스에서는 부부간 강간이 2006년에 이르러서야 범죄로 성립되었다. 이 외에도 책은 가해를 일삼는 국가 기관과 희생자를 의심하는 법의학과 법 체계, 남성 간의 성 학대, 집단 강간 등 광범위한 성폭력의 사례들을 통해 범역사적인 관점에서 성폭력을 이해하려는 다각적인 시도를 구체화한다. 폭력의 피해 사례를 다양한 지역과 언어로부터 끌어와 지역성과 시대적 구체성을 동시에 탐구하는 일은, 성폭력을 여성의 문제로 제한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우리 모두의 문제’로의 전환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매우 유의미하다.
일반적으로 남성에 대한 성 학대를 보는 관점은 어떨까? 이 질문에 대한 충격적인 답 한 가지는, 남성에게 가해지는 성 학대는 여성과 달리 유독 변태적으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서, 남자들이 파키스탄군에게 강간당했다. 한 해방 전사가 인류학자 나야니카 무커지에게 말했듯이, 남성들의 강간은 야만적이라고 여겨졌다. “국경 지내”에서 온 남자들이나 그런 사악한 짓을 하는 법이다. 이 전사가 설명했듯이, 아시아 평원 지대에서는 남성 간의 강간은 “전적으로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평원에 사는 남자들에게는 “여자를 강간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 남성의 강간은 국경 지대의 문화다”. / 173p
저항하거나 불만을 드러내면 그들도 집단 강간을 당하거나 살해당할 수 있었다. 코헨은 자기네 집단 구성원들과 경쟁 집단에 대한 성폭력을 결속력이 낮은 무장 집단 내 결속을 다지는 핵심적 수단이었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어떤 여성 병사들은 협력하면 남자 동료들이 자기들에게는 비슷한 모욕을 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 다른 여성들에 대한 폭력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 244p


나는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정부가 모든 한국인을 고향으로
돌려보냈기 때문에 타야만 했다.
배에는 ‘위안부’들이 가득했다.
나는 돌아갈 가족도, 친척도, 집도 없었다.
남편을 찾는 것도 바랄 수 없는 일이었다.
고국에 돌아가느니 차라리 물에 빠져 죽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차마 뱃전에서 몸을 던질 용기가 없었다. - 이용숙
일본의 군대와 정치 지도자들은 ‘위안소’ 설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 노예가 군대의 사기를 진작하고, 점령지에서 강간을 억제하며, 군 사창가로 수입을 늘리고, 군인들 사이에서 성적으로 전염되는 감염병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공식 문서에서는 일본군 성 노예를 “군수품”으로 기록했다. 하지만 일본과 한국의 전후 정부는 살아남은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은 고사하고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기조차 꺼렸다.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서는 일본군 장교들을 공개적으로 재판하고 유죄판결을 내렸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 정부는 가난한 여성들의 문제로 취급하며 오히려 반일 정서와 친한 민족주의를 북돋우는 데 이용했다. 하지만 저자는 다분히 정치적으로 변모해버린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의 활동가들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항의와 기억하기뿐 아니라 초국가적 연대를 보여준 사례들에 주목한다. 소녀상이 불러일으킨 공감, ‘나비 기금’을 설립해 다른 분쟁 지역 희생자들을 돕는 연대를 보면서 저자는 성폭력을 근절시킬 방법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주지한다. 바로 ‘횡단의 정치’다.
문화연구 학자 린넬 세콤베는 이렇게 말한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은 불일치·저항·선동이 아니다. 공동체의 연대와 상호 관계를 파괴하는 것은 통합과 합의의 명목으로 차이와 불일치를 억누르는 것이다.” 각자가 자기 관점에서 세계를 인식하며, 그러므로 모든 지식은 부분적이고 불완전하다는 믿음을 갖는 것. 그 어떤 지식도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서로가 필요하다. 그렇게 서로의 시행착오를 배워가며 다양한 이론과 지식을 수용하고 계속해서 담론을 내부로 끌어들일 때 우리는 더 넓고 깊은 페미니즘적 유대를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횡단의 정치이며, 횡단의 정치가 자연스럽게 공유될 수 있을 때 성폭력은 근절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 소녀는 우리 또래였어요. 과거의 우리가 아닐까요?” 이화여고 학생들이 ‘주먹도끼’ 동아리를 만들어 100개 학교에 소녀상 복제품을 세우면서 한 인터뷰야말로 희생자와 나를 가르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진정한 연대로 나아가는 힘이 아닐까. 이 끝없고 광범위한 성폭력의 역사를 마주하는 일은 생각보다 녹록치 않은 일이지만, 그럴수록 더 분명하게 직시해야 하는 문제임을 이 책을 통해 많은 분들이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강간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성폭력이 ‘개인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개인·정치적’이지만도 않으며, 심지어 (특별히) 젠더화된 억압의 도구도 아니다. 성폭력을 다른 정치적·경제적·사회문화적 불평등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으므로, 성폭력을 근절하거나 한다면 활동가들은 가해자 개인과 희생자로부터 주의를 돌려, 성차별주의, 인종주의, 식민주의, 경제적 불의, 이성애 규범주의, 트랜스 혐오, 군국주의, 기후 부정,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부채질하는 체계화된 불의에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젠더 폭력에 맞서는 캠페인은 다른 진보적인 대의들과 연합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도, 번성할 수도, 세계를 바꿀 수도 없다. / 404p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