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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의 시대 - 찬란하고 어두웠던 물리학의 시대 1900~1945
토비아스 휘터 지음, 배명자 옮김 / 흐름출판 / 2023년 5월
평점 :

20세기 과학사 대혁명의 순간을 재구성한 대중과학서!
‘발전과 혁명’이라는 그 아름다운 이름 뒤에 따르는 무한한 책임감에 대하여!
1927년 브뤠셀에서 열린 솔베이회의가 남긴 흑백 사진 한 장은 20세기 아니 과학사를 통틀어 가장 기념비적인 사진이 아닐까 싶다. 오귀스트 피카르, 에르빈 슈뢰딩거, 볼프강 파울리,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폴 디랙, 아서 콤프턴, 막스 보른, 닐스 보어, 막스 클랑크, 마리 퀴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등 이름만 들어도 다 알만한 위대한 물리학자 29명이 하나의 사진 속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참가자 29명 가운데 무려 17명이 노벨상 수상자다. 이 사진이 찍히기 전인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이론물리학자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의 혁명은 없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던 때였다. 물리학의 중요한 기본 법칙과 사실들은 모두 발견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소수점 아래 몇 자리까지 정확히 측정하고 계산하기에 불과할 정도로 완성에 가까워졌다고 판단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던 물리학계가 갑자기 들끓기 시작했다.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난 걸까.
현대물리학의 황금기였던 20세기 초, 천재들의 놀라운 발견과 혁명의 순간
찬란했지만 어두웠고, 위대했지만 재앙이기도 했던 불확실성의 시대. 20세기 과학사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토비아스 휘터의 『불확실성의 시대』는 세계의 위대한 지성들이 고전물리학을 넘어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으로 대표되는 20세기 과학사 대혁명의 순간을 재구성한 대중과학서다. 책은 1900년 막스 플랑크가 에너지의 양자화를 발견하면서 양자역학 발전의 길을 연 이래, 1938년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이 우라늄에서 핵분열을 발견하고 이후 맨해튼 프로젝트의 추진으로 원자폭탄이 개발되기까지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엮고 있다. 이 책은 대중과학서인 만큼 어렵고 복잡한 물리 개념을 설명하기보다 플랑크부터 퀴리, 아인슈타인과 보어, 하이젠베르크까지 현대물리학사에 이름을 남긴 천재들의 놀라운 발견과 혁명의 순간들을 드라마처럼 그려나간다. 과학자의 사생활을 비롯해 그들의 내면과 고뇌를 함께 따라가는 여정으로 하여금 과학을 잘 모르는 일반 독자들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한 것 또한 이 책의 큰 묘미다.
먼 세상, 넓은 삶,
오랜 세월, 정직한 노력,
항상 연구하고 항상 입증하고,
끝맺음이 없고, 종종 두루뭉술 마무리하고,
옛것을 신의로 보존하고,
새것을 친절하게 받아들이고,
맑은 마음과 순수한 목적:
이제, 한 구간을 지난다. / 61p
원자물리학의 창시자인 닐스 보어는 자신의 약혼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괴테의 시를 인용한 다. 아직 스물여섯 살이 채 안 된 어린 청년이 덴마크에서 영국 케임브리지로 와 자신의 뛰어난 과학적 재능을 세상과 자기 자신에게 증명하고자 하는 데에 따르는 고뇌가 느껴지는 시다. 보어가 그러했듯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숱한 반박과 싸우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자신이 증명하고자 하는 바를 하나의 이론으로 수렴하기 위한 물리학자들의 외로운 사투가 유독 눈에 밟혔다. 프랑스 공작이자 독일의 왕자인 드브로이는 명문가 딸과의 약혼을 파기하고 출신과 명예를 선택하는 대신 과학에 전념했고, 방으로 들어가 공식이 적힌 종이 더미 속에서 길고 외로운 숙고 끝에 그동안 입자로 간주되어온 전자가 파동을 지닌다는 점을 수학적으로 입증해냈다.
아울러 과학의 여정에 있어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최고점에 있었지만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힌 악몽으로 정신분열의 증세를 보였던 파울리. 여성에게 고등 교육이 금지되었던 시대 속에서 특히 남성의 전유물이라 여겼던 과학계 안에서 치열하게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을 리제 마이트너도 마찬가지다. 20세기 초, 어느 하나 완전한 것이 없었던 격동의 시대 속에서 부단히 자신이 믿는 것을 완전한 것으로 실현하기 위해 몰두하고 또 몰두했던 그들의 시간을 나는 이 책을 읽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러나 보어는 여전히 광양자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 교수님, 잘 생각해보십시오. 정확히 보셔야 합니다….” 보어가 덴마크 억양의 독일어로 맞선다. “아니, 아니죠….” 아인슈타인이 보어의 양자 도약을 반박한다. “하지만, 하지만….” 보어 역시 물러서지 않는다. 두 사람은 다른 승객의 놀란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친 것도 모른 채 한참을 더 간다. “여기가 어디죠?” 아인슈타인이 묻는다. (…) 보어는 나중에 이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전차를 타고 같은 구간을 여러 번 오갔다. 그리고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안중에 없었다.” / 150p
아인슈타인은 하룻밤 사이에 세계적 스타가 되었다. 왕립학회 회장인 톰슨은 영국 신문에서 “상대성이론이 새로운 과학 아이디어의 신대륙을 열었다”고 말했다. 전후 독일에서도 아인슈타인은 축하를 받았고, 곳곳에서 그와 상대성이론에 관한 기사가 쏟아졌다. 독일 주간지 <베를리너 일루스트리르테 차이퉁>은 그를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뉴턴의 뒤를 잇는 사람으로 소개했다. 런던의 <타임스>는 “과학의 혁명/우주의 새 이론/뉴턴의 아이디어가 전복되다”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냈다. 런던 팔라디움의 버라이어티쇼가 아인슈타인을 3주간 게스트로 초대했지만, 그는 초대를 거절했다. 한 젊은 여성은 아인슈타인을 보고 기절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이 말은 대중문화, 광란의 1920년대, 미국화의 슬로건이 되었다. / 104p
이제 양자물리학자들은 슈뢰딩거의 파동 아니면 하이젠베르크의 행렬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대다수 물리학자는 예전부터 알았던 파동을 선호했다. 그들에게 행렬은 여전히 낯설고 복잡했다.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를 설명하는 ‘옳은’ 방식은 오직 단 하나일까? 아니면 그저 취향과 편리함에 따라 선택할 수 있을까? / 226p



하지만 이 책은 과학의 밝은 면 만을 조명하지 않는다. “신념의 확실성이 흔들렸고, 이제 중요한 것은 지식을 통해 힘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을 길들이는 것이며, 그러지 않으면 지구적 재앙이 올 것”이라던 과르디니의 우려는 기어코 실현되고 말았으니까. 아인슈타인이 훗날 “인생 최대 실수”라 한 바로 그것은, 그저 아주 기이한 우연에서 시작되었지만 점점 놀라운 결론으로 다가가는, 늘 그렇듯 이것이 거대한 살상 무기로 이용될 줄은 몰랐던 과학자들의 그저 새로운 발견에서부터 시작되었을 뿐이다. “내가 25년 동안 함께 겪었던 원자물리학의 진보가 수십만 명이 훨씬 넘는 사람을 죽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직시해야만 했다.”던 하이젠베르크의 고백은 ‘발전과 혁명’이라는 이름 뒤에 따르는 무한한 책임감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한다.
교수 313명을 포함해 1,000명 이상의 학자들이 자리를 잃었다. 대학에서 일하는 물리학자의 약 1/4, 이론물리학자는 심지어 절반이 망명을 강요받았다. 1936년까지 1,600명 이상의 학자들이 추방되었는데, 그중 1/3이 자연과학자였고, 그중 20명이 당시 또는 장래의 노벨상 수상자였다. 물리학 11명, 화학 4명, 의학 5명. (…) 히틀러는 유대인에게 관대하다는 인상을 주느니 차라리 독일 과학을 버리는 사람이다. / 380p
1938년 12월 19일, 오토 한은 스톡홀름에 있는 마이트너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모든 혼란과 좌절을 얘기했다. “지금은 밤 11시입니다. 11시 반에 슈트라스만이 다시 올 예정입니다. 그래서 조금 있으면 나는 퇴근할 수 있습니다. ‘라듐 동위원소’에 뭔가가 있는데, 그게 너무 이상해서 우선 귀하에게 먼저 말합니다. 물론, 아주 기이한 우연일 수 있지만… 우리는 점점 더 놀라운 결론에 다가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라듐 동위원소가 라듐이 아니라 바륨처럼 행동합니다.” / 438p



공식과 이론이 아닌, 과학자들의 드라마 같은 삶을 조명한 책이라 흥미롭게 읽었다. 오늘날 마리 퀴리나 아인슈타인 정도로만 기억되는 과학자들 속에서 보다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보고, 현대물리학사의 전체적인 흐름까지 살펴볼 수 있었던 것 유쾌한 일이었다.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청소년들이 이 책을 읽어볼 수 있다면 참 좋겠다. 과학이 점점 그들만의 영역으로 굳혀져가고 있는 지금, 청소년들이 그 단단한 틈을 계속해서 파고들고 호기심을 가질 수 있도록 이 책이 길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