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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듣는 소년
루스 오제키 지음, 정해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4월
평점 :

책과 쓰기를 향한 예찬, 이 아름다움, 이 위대함!
상실 뒤의 회복을 책에서 구하는 마법 같은 이야기!
물건들은 바라는 게 많다. 그것들은 공간을 차지하고, 관심을 원하고, 가만두면 당신을 미치게 할 거다. 그러니 이것만 기억하자. 당신은 항공관제사와 같다. 아니, 지구상의 온갖 재즈 연주자들로 이루어진 브라스 백밴드의 리더와 같다. 당신은 우주 속에 떠 있다. 세상의 이 거대한 쓰레기 더미 위에 서 있다. 머리를 뒤로 빗어 넘기고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지휘봉을 들고 온갖 열정적인 물건들에 둘러싸여서 말이다. (…)
음악을 만들어낼 것이냐 미칠 것이냐. 그것은 순전히 당신에게 달려 있다. / 14p
처음부터 목소리가 들린 것은 아니다. 베니는 술에 취해 1층 쓰레기더미 속에 누워있던 아빠를 트럭이 치는 불행의 사고를 목격한 후, 죽은 아빠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 뒤, 한 목소리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나머지가 따라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온갖 사물들의 목소리가 시시때때로 들려왔다. 시든 상추의 한숨 혹은 유리창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모래의 울음 같은 것들에서. 문제는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목소리가 마치 옷에 진하게 배어서 털어낼 수 없는 냄새처럼 달라붙어 있기도 했다. 때로는 낮은 음역대로, 때로는 비명 같은 외침으로, 때로는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어느 날엔 가위가 베니를 충동질하며 폴리 선생님을 찌르라고 부추겼다. 참다못한 베니는 일어나 한 발 한 발 선생님 앞에 나아가 제발 가위를 가져가달라고 애원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가위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는 이내 자신의 다리를 찔러버렸다.
온갖 사물의 목소리를 듣는 베니,
도서관에서 마주한 작지만 위대한 기적
『우주를 듣는 소년』이라니, 한 편의 동화 같은 판타지를 기대하게 되는 제목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아빠의 죽음 이후 온갖 사물들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한 열네 살 소년 베니와 저장강박증을 지닌 엄마 에너벨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라는 비극 뒤에 맞은 상실감과 고통에 주목한다. 베니가 사물들이 내는 목소리를 듣게 된 건 극도의 슬픔이 가져다준 충격 때문이었을까. 평범한 학교생활조차 해내기 어려울 정도로 사물들이 내는 소리에 예민해진 베니는 가위로 자신의 다리를 찔러버린 일을 계기로 상담과 병원입원, 퇴원을 반복하지만 그의 상황을 온전히 이해해줄 수 있는 이는 어디에도 없다. 엄마인 에너벨 역시 그녀대로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상처를 그러안은 채 생계의 위협과 베니의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충동, 저장강박증에 시달린다.
“네가 두려워서 그러는 게 아닐까, 베니? 너는 두려워. 그래서 목소리를 듣는 거야.”
“아뇨. 저는 목소리를 들어요. 그래서 두려운 거예요.” 그가 지쳐서 말했다. / 141p



와해되지 못하고 끝없이 어긋나고 있던 베니와 에너벨을 붙든 건 뜻밖에도 ‘책’이다. 학교 생활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베니는 공공 도서관으로 숨어들기 시작하면서 그 안에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을 느낀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머릿속의 모든 목소리들이 점점 조용하고 고요해지고, 책들이 그의 주변에서 펼쳐내는 조용한 이야기에 안락한 누에고치 속에서 쉬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한편, 에너벨 역시 그녀의 쇼핑 카트로 스스로 뛰어들기라도 한 것처럼 《정리의 마법》이란 책을 마주한다. 책은 마치 혼자 돌아다닐 수 있는 것처럼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곳에, 마침 필요한 순간에,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다. 이후 에너벨은 한 페이지 그리고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수습하기 어려웠던 마음과 어지러운 집안과 베니와의 관계를 차츰차츰 정리해나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책은 두 사람의 무너진 마음을 매만지고 상처를 감당하고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보여준다.
책은 첫 문장이 제일 중요하다. 첫 조우의 순간, 독자가 첫 페이지를 펼쳐서 시작하는 문구를 읽을 때, 그건 마치 누군가와 처음 눈이 마주치거나 처음 손을 잡는 것과 같다. 우리도 그것을 느낀다. 책은 눈이나 손이 없다. 사실이다. 그러나 책과 독자가 서로를 위한 존재라면, 둘 다 그것을 안다. 그리고 에너벨이 《정리의 마법》을 펼친 순간,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녀가 첫 문장을 읽었을 때 그녀와 책 모두 등줄기에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 125p
그후 에너벨이 다시 《정리의 마법》을 읽기까지는 한참이 걸렸지만, 책은 인내심이 많다. 우리는 당신들의 삶이 얼마나 긴박하고 절박한지 알고, 그래서 가만히 때를 기다린다. / 132p
베니, 도서관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지. 공공도서관은 꿈의 사원이고, 사람들은 늘 여기서 사랑에 빠지지. 어쩌면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사실이야. 책은 결국 사랑의 작품들이야. 우리는 몸의 육체적 결합의 신비를 즐기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우리 중에 가장 재미없고 딱딱한 책들, 가장 낭만적이지 않은 책들조차 인간의 꿈을 실현시켜줄 수 있어. / 248p



이 소설이 흥미로운 건 베니와 에너벨 두 인물 외에 ‘책’이 화자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책’은 말한다. 책은 사랑의 작품이라고. 우리 중에 가장 재미없고 딱딱한 책들, 가장 낭만적이지 않은 책들조차 인간의 꿈을 실현시켜줄 수 있다고. 다만 동화 같은 이야기를 지어서 ‘그 후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따위의 이야기로 꿈을 보여줄 수는 있겠지만, 설령 아프더라도 책은 ‘진짜’를 담아 ‘진짜’ 이야기로 읽는 이가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결국엔 베니 네 삶을 살 수 있는 건 너 뿐이라고.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을 통해 저마다의 책을 써내려가는 작가가 아닐까. 작가 루스 오제키가 이 특별한 화자로 하여금 베니가 듣는 역할에서 벗어나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독려했던 이유 역시 이 때문이리라.
“위대한 모든 혁명가들도 모두 목소리를 듣고, 목소리에 의지했지!”
마틴 루서 킹이 누군지 안다는 것이 베나에게 발언할 용기를 주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요? 말하자면 어린애처럼요. 시인이나 혁명가나 뭐 그런 거 말고…….”
(…) “이봐. 시도한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없지. 그래서 난 자네에게 당장 시도할 것을 제안하겠네. 작게 시작해야 해. 작은 시나 단순한 철학적 질문이나 작은 혁명으로 시작하는 거야.” / 298p
세상은 끝없이 창의적이고 그 생성적 속성이야말로 당신들의 일부분이다. 세상은 당신들에게 산과 강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과 바람과 바다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귀, 그것을 말하기 위해 필요한 목소리를 주었다. 우리 책들은 그런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다. 우리는 당신들을 돕기 위해 여기 존재한다. / 330p
보틀맨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모두 써 내려가게. 사물들이 하는 모든 말들을. 그들의 모든 문제들도…….”
“사물들의 문제요?” 베니가 물었다.
“그래. 사물들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이 듣지 않지. 그래서 답답해하는 걸세. 당연히 답답할 수밖에! 누구도 자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기분이 어떻겠나?” / 356p
상실 뒤의 회복을 책에서 구하는 이 마법 같은 이야기에 어떻게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특별한 초능력을 지니지 않았어도 우리는 꽤 오랫동안 세상의 수많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해 읽고 또 써왔다. 『우주를 듣는 소년』은 이 사랑스러운 행위에 믿음을 실어주는 이야기라 좋았고, 읽는 내내 행복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