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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8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23년 7월
평점 :

전설적인 ‘불패의 명인’ 슈사이의 생애 마지막 대국 관전기!
생애 마지막 불꽃을 틔우며 오늘도 제 자리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을 분들에게 바치는 헌사!
일본이 태평양 전쟁으로 치닫기 전, 일간 신문은 대대적으로 혼인보 슈사이 명인과 기타니 미노루 7단의 역사적인 대국을 알리는 기사를 실었다. 메이지, 다이쇼 그리고 쇼와, 세 시대에 걸쳐 ‘불패의 명인’이라 불리며 빛나는 전력을 이룬 슈샤이 명인의 일생일대 마지막 승부였다. 명인의 은퇴기는 그 자체로 주목받을 만한 것이었지만, 예순다섯의 연로한 명인이 병고를 겪으며 패기만만한 현역 최고의 실력자와 맞붙는다는 사실은 바둑 애호가는 물론, 일반인들까지 관심을 불러일으킨 초유의 대국이었다. 결과는 237수 흑 5집 승. 소비 시간 백 19시간 57분, 흑 34시간 19분. 단 한 판이었다고는 믿기지 않는, 무려 반 년이란 기간에 걸친 대국이었다(명인이 대국 중반에 병으로 쓰러졌기도 했고, 연로한 나이와 병환을 고려하여 14회에 걸쳐서야 치를 수 있었던 대결이었다-현대 바둑에 있어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소설 『명인』은 실제 이 대국의 관전기를 담당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신문에 총 64회에 걸쳐 연재했던 것을 단행본으로 출간한 작품이다. 어찌 보면 기록소설이라 할 수 있으나, 승부사가 아닌 구도자의 정신으로 네모난 반상 위에서 자신의 마지막 불꽃을 피운 명인을 위한 헌사에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명인을 과장되게 묘사하거나, 승부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지도 않는다. 마치 풍경화를 그려내듯 그날, 대국을 나누는 두 인물의 미세한 감정 변화와 온도, 기류를 섬세하게 포착해냄으로써 한 판의 대국을 위해 혼신을 다하는 이들의 숭고한 정신에 온 마음을 기울이게 한다. 덕분에 나는 그 옛날, 저 대국의 현장 속에서 직접 관전하듯, 한 돌 그리고 한 수에 실은 대국자들의 호흡을 겸허하게 따라가는 심정이 되곤 했다. 이것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글이 지닌 품격이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면서.


바둑은 “무가치라고 하면 절대 무가치이고, 가치라고 하면 절대 가치이다.” / 95p
“이 정도면 자신의 몸을 지탱할 힘도 없을 텐데요.” 하코네에서 대국 도중에 병인 난 명인을 진찰한 의사는 이렇게 말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소설 속에서 우라가미라는 이름으로 묘사되는 ‘나’는 제대로 발육이 안 된 아이의 몸이라고 해도 될 만큼 자그맣고 얄팍한 명인의 무릎을 보며, 오랜 세월 ‘불패의 명인’으로 세상 사람들이 불패를 당연한 걸로 믿고 자신도 그렇게 굳게 믿으며 평생 대국에 임했을 명인의 무게를 체감한다. 그럼에도 바둑판 앞에 앉으면 명인은 저절로 질병도 다 잊어버리는 것처럼, 명인은 원숙한 경지에 이른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명인은 항상 제2인자, 즉 자기 다음의 실력자에게만은 온힘을 다해 두는 원칙을 두었다고 하니, 신시대의 기사와 벌이는 이 최후의 바둑에 마지막 힘을 다한 것이리라. 평생 오직 바둑이라는 외길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전부를 바쳤을 명인의 고매한 정신에 절로 숙연해진다.
명인은 눈을 감았다가 옆을 보았다가 또 이따금씩 구역질을 꾹 참는 듯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가,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인다. 모습에 여느 때와 같은 힘이 없다. 역광선으로 보는 탓인지 명인의 얼굴 윤곽이 흐릿하니 풀어져, 마치 유령 같다. 대국실도 평소의 고요와 달리 적막하다. 95, 96, 97로 이어지며 바둑판에 내리꽂히는 돌 소리가 쓸쓸한 골짜기에 쩌렁쩌렁 울리는 듯하다.
백 98을 명인은 다시 30분 남짓 생각했다. 입을 약간 벌린 채 눈을 감빡거리며 부채질하는 품이 영혼 깊숙한 곳의 불꽃을 활활 일으키려는 것 같다. 이렇게까지 해서 바둑을 두어야만 하는 걸까. / 28p
명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어깨가 들썩거리는 가쁜 숨결이다. 그러나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규칙 바른 물결이었다. 격렬한 무엇이 차오르는 것일까. 내게는 그리 보였다. 무엇인가 명인 안으로 신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명인 자신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듯, 그래서 나는 더욱 가슴이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순식간이었고 명인의 호흡은 절로 차분해졌다. 어느새 원래의 숨결대로 편안하다. 나는 이것이 싸움에 임하는 명인의 정신적 도약판인가, 싶었다. / 38p
허리를 다소 굽히면서도 상반신은 반듯하니 퍼져 있으니, 오히려 허리부터 하반신이 부실해 보인다. 한쪽에 늘어선 얼룩조릿대 아래로 도랑물 소리가 들리는, 널찍한 길이다. 단지 이것뿐인데도-그럼에도 명인의 뒷모습에 불쑥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무언가 깊은 감동이 있었다. 대국 장소를 벗어났을 뿐인데, 무심히 걷는 뒷모습은 현세를 벗어난 고요한 비애를 띤다. 메이지 시대를 품은 사람의 여운이 느껴졌다. / 58p
한편 기타니 미노루 7단, 소설 속에서는 오타케라는 이름으로 묘사되는 젊은 기사 역시 그 나름대로 병세가 심각한 환자와 싸우기 버거웠을 것이다. 질병이라는 상대의 허점을 이용해 이겼다고 여겨지는 건 싫고, 만약 진다면 더더욱 비참했을 테다. 오히려 상대의 병환을 억지로 잊으려 애써야 하는 오타케 7단 쪽이 되레 불리하다. 명인의 질병에 구애되어서도, 동정심도 가져서는 안 되는 입장에서 명인의 마지막 대국의 상대자라는 막중한 임무에 응수해야 했을 심정이란 결코 만만치 않았을 텐데, 이를 균형감 있게 그려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묘사가 참 절묘하다. 이렇듯 반상 위에서의 승부뿐만 아니라 반상 밖에서 오가는 감정의 잔영들까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특유의 섬세한 문체는, 독자들에게 한 편의 신묘한 예술 작품과도 같은 대국의 명장면을 선사한다.
백 116은 22분, 그러고 나서 백 120까지는 빨랐다. 백 120으로 온건하게 늦춰 받는 것이 보통 형인데, 명인은 맛이 나쁜 빈삼각으로 엄하게 막았다. 승부처의 기합이다. 늦추면 한 집 이상 손해이므로, 이런 미세한 바둑에선 양보할 수 없다. 게다가 미묘한, 승패의 갈림길일지도 모르는 한 수에 명인은 단 1분이라니, 적의 간담이 서늘해진다. 더군다나 백 120을 두기 바쁘게, 명인은 목산을 시작한 게 아닌가! 머리가 잔잔히 흔들리듯 바둑판의 집을 재빨리 읽으며 셈을 해 나가는 그 목산은, 기분이 언짢아질 정도다. / 136p
팽팽하게 곤두선 신경이 번뜩이고, 몸을 앞으로 쑥 내민 자세에도 절박함이 묻어난다. 예리한 칼부림이 서로 오가듯, 호흡이 거칠게 가빠진다. 지혜의 불꽃이 터지는 걸 보는 듯하다.
평소의 바둑이라면 오티케 7단은 남은 1분으로 100수까지도 도는 추격전을 보여줄 법한데, 이 바둑에서는 7단도 아직 예닐곱 시간의 여유가 있음에도, 끝내기에 들어서자 팽팽히 맞선 신경의 급류를 타고, 그 속도를 멈추기 어려운 모양이다. 자기 스스로 자신을 다그치듯 무심코 바둑통에 손을 넣었다가, 퍼뜩 놀라 생각에 잠기는 일이 빈번하다. 명인조차 일단 돌을 잡고 나서, 잠시 망설인다. / 150p



어릴 적, 나는 바둑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아빠가 보는 바둑 TV중계를 함께 보곤 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겨우 20급에 불과한 아들이 바둑 학원에서 배워온 것을 설명해줄 때마다 고개를 주억거려보지만 역시나 두 수는커녕 한 수 앞도 내다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내가 바둑 TV를 종종 찾아보는 것은 바둑을 두는 사람을 보는 게 재미있어서다. 상대의 수에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자신의 수에만 집중하고 있는 기사들의 무심한 듯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 기운에 나도 감화되는 듯해서다(정지된 사진만 보여주는 방송은 그래서 아쉽다). 그래서 승부보다 그 승부에 임하는 사람에 초점을 맞춘 이 소설이 내겐 퍽 흥미로웠다. 또한 이 소설은 바둑의 명인들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자신의 업에 몰두하며 최선을 다한 모든 분들에게 바치는 글이란 생각이 든다. 생애 마지막 불꽃을 틔우며 오늘도 제 자리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을 분들에게 이 책을 전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