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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를 위한 변론
송시우 지음 / 래빗홀 / 2023년 10월
평점 :

목소리를 잃은 이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는 것, 그 안에서 발견되는 미스터리의 힘!
적절한 위트와 진지한 물음 모두를 아우르는 확신의 페이지터너!
통상적으로 미스터리 소설은 ‘살인사건’, ‘살인동기와 알리바이’, ‘헛갈리는 용의자들’, ‘뜻밖의 반전’ 등의 지배를 받는 장르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한계 속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플롯과 다양한 변주를 향한 시도는 늘 독자들을 즐겁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송시우의 미스터리 소설집 『선녀를 위한 변론』은 익숙한 전래동화를 법정 미스터리로 재탄생시킴으로써 발상을 전환시킨 데에 대한 탁월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목소리를 잃은 인어와 날개옷을 빼앗긴 선녀가 현대적 사법 체계 속에서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목소리’를 획득할 수 있다면, 과연 이야기는 어떻게 바뀔 것인가?” 중요한 것은 단순한 패러디가 아니라, 대상화되고 무력했던 인물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미스터리 본연의 힘까지 야심차게 밀고 간다는 점에서 송시우의 작품들은 매우 특별하다.
법정과 일상, 범죄를 부추기는 커뮤니티를 배경으로 한 사회파 미스터리까지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인어의 소송」과 「선녀를 위한 변론」은 왕자와 나무꾼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유사 설정을 통해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인어공주인 에일은 주변 인물들 중 왕자를 죽일 가장 절박한 동기를 가진 인물이었기에 유력한 살인범으로 체포된다. 왕자를 구한 것으로 알려진 카스 공주와 왕자가 결혼하게 되면, 마녀의 마법에 의해 에일은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일은 자신에게 쏠린 혐의를 전면 부인하며 마녀를 상대로 ‘불공정 계약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한다.
판사는 “인간이 되는 조건으로 마녀가 에일의 신체를 훼손한 정도가 너무 가혹하여 사회질서에 반하고, 맥스 왕자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면 무슨 희생을 감수해도 괜찮다는 식의 분별없는 생각에 빠진 어린 인어의 궁박과 경솔, 무경험을 이용하여 현저하게 불공정한 계약을 맺었다”며 이 계약을 무효라 선고하고, 덕분에 에일은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는다. 이렇게 목소리를 되찾은 에일은 왕자와 본인, 카스 공주 사이에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낱낱이 밝히고, 이로 인해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전면 뒤집어지며 살인 사건을 둘러싼 여러 인물들의 입장이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한다. 과연 에일은 자신의 혐의를 벗을 수 있을까?
한편, 고리아 왕국이라 불리는 동아시아의 작은 반도에서도 사법 체계에 격변이 일어난다. 이때 사법 시스템과 과학수사의 첫 시험대에 오른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나무꾼 살인 사건’이다. 피해자 이쇠돌은 식구들과 점심을 먹고 오후 2시경부터 뒷마당에서 장작을 패고 있었는데, 오후 4시경 산보하러 방 밖으로 나온 이쇠돌의 친모에 의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평소 남편에 대한 불만이 누적돼 있던 선녀가 남편을 살해했다고 발표했고, 이에 심순애 변호사가 나서 선녀에 대한 유죄 판결을 규탄하고 선녀의 무죄를 주장하는 변론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앞서 「인어의 소송」에서 인어 에일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돌려주었듯 「선녀를 위한 변론」 역시, 인간 세계에 아무런 인맥도 자원도 없었던 선녀가 이쇠돌이 강요하는 삶 이외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상태로 이쇠돌의 아내로 살며 홀어머니를 부양하고 자식들을 낳았던 처지를 변론하며, 그간 동화 속에서 묵인되었던 선녀에게 새로운 목소리를 부여한다. 그런 가운데 선녀에게 쏠린 혐의를 하나씩 무너뜨리며 명쾌한 논리로 허술한 사법 체계를 파고드는 심순애 변호사의 활약 또한 흥미를 더한다.



“가지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눈앞에서 없어지길 원했던 거군요.” / 110p
이 외에도 「누구의 편도 아닌 타미」, 「모서리의 메리」, 「알렉산드리아의 겨울」로 이어지는 작품들은 혼자 사는 여성이나 소외된 자들을 노린 범죄, 비상식적인 범죄를 부추기는 커뮤니티의 양산,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감수성 결여가 낳은 사회적 문제 등에 공감하며 현실 감각과 미스터리를 유연하게 아우른다. 특히, 특정한 세계관이 설정되고 각자 자기를 대변하는 아바타라 할 수 있는 ‘자기 캐릭터’들이 참여하여 하루에도 수천수만 건의 잔혹한 살인과 고문, 사체 유기, 학대, 능욕이 벌어지고 있는 커뮤니티의 실상을 드러낸 작품 「알렉산드리아의 겨울」은 우리 사회에 진지한 물음을 던진다.
“흥! 쎄 보이니까요.”
김윤주가 말했다.
“쎄 보여? 그런 게?”
“관종이니까.”
김윤주가 뻐기는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존나 금지된 게 나에겐 아니라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던 거지. 개쩔잖아. 보통 사람들은 듣기만 해도 지랄, 펄쩍 놀라면서 하지 말라고 하는 걸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이거지.” / 「알렉산드리아의 겨울」 중에서 215p
김윤주는 촉법소년 연령을 잘못 알고 있었다.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형사처벌을 할 수 없고 보호처분에만 처할 수 있는 촉법소년의 범위는 만 14세까지인데, 김윤주는 미성년자가 곧 촉법소년인 줄로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상상을 현실로 옮길 수 있었다.
죽여도 처벌받지 않을 테니까! / 「알렉산드리아의 겨울」 중에서 221p
“그거 알아요, 형사님? 아무리 해도 행복해지지 않으면. 정말 별짓을 다 해도 행복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글쎄.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면 돼요.”
음산한 목소리였다.
“그럼 내가 좀 행복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잖아요.” / 「알렉산드리아의 겨울」 중에서 237p


아마도 미스터리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인물들의 오고가는 대화 속에서 쉽게 진범이나 사건의 정황을 포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점이 얼마간 아쉬울 수 있겠으나, 하드코어나 잔혹한 설정으로 일관된 미스터리와는 또 다른 담백한 맛의 미스터리를 즐기고 싶은 분들이라면 충분히 매력을 느끼실 수 있을 듯하다. 송지우 작가의 차기작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려야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