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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에 균열을 낸 결정적 사건들
김형민 지음 / 믹스커피 / 2024년 10월
평점 :
강자 골리앗에 맞서 분연히 일어선 위대한 다윗들의 역사!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불린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인류의 탄생한 이래 생존을 건 경쟁과 투쟁, 전쟁은 늘 있어왔고 그 안에서 살아남은 자들에 의해 역사가 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한다. 포로로 끌려가던 고려인 3만 명을 구출하기 위해 적의 파도 속으로 뛰어든 고려 장수 양규를, 일제강점기에 3·1만세운동을 이끌어낸 유관순 열사를, 열악한 노동현실을 고발하고 개선하기 위해 분신했던 전태일을…. 강자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며, 때로는 약자가 강자를 이길 때 역사는 새로 쓰인다는 것을 이들이 증명해주지 않았던가.
인류가 탄생한 이래 지금까지 도덕과 이성이 쇠퇴하고 불평등과 부정으로 어지럽지 않은 시기는 단연코 없었었지만, 변화를 꿈꾸며 조금이라도 균열을 내려는 시도 역시 끊인 적이 없었다. 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해도 뒤를 잇는 이들의 등불로 남아 거대한 잉걸불의 단초가 된 사람들이 존재했다. 『세계사에 균열을 낸 결정적 사건들』은 이처럼 역사의 변곡점에서 펼쳐진 언더독의 치열한 저항의 순간들을 엮은 책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인류의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언더독이 있었음을, 작은 힘으로도 세상을 뒤집을 수 있음을 전하는 그 뜨거운 온기와 울림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역사는 차마 이것만은 참지 못하고 일어선 사람들, 차마 그들을 외면하지 못한 사람들, 한없이 작아 보이나 더할 수 없이 위대한 인간들이 몸으로 써 내려간 기록의 합이다. 그 대부분은 보잘것없고 대단한 역량도 없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었다. / 138p
역사 이야기꾼으로 정평이 난 저자 김형민은 ‘전략’ ‘용기’ ‘결의’ ‘지혜’ ‘신념’이라는 주제로 나뉘어 역사 속의 다양한 언더독들을 조명한다. 베트남의 붉은 나폴레옹으로 불리며 거대한 골리앗인 미국을 물리친 보응우옌잡, 대군을 이끌고 온 수나라를 물리치기 위해 이들의 약점을 파고든 을지문덕, 아우슈비츠에 자발적으로 입소해 인류 최악의 범죄를 최초로 알린 비톨트 필레츠키, 한국전쟁에서 3만 대군을 상대한 600명의 영국 영웅들, 똥물을 뒤집어써가면서까지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을 드러내고자 했던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과 사진사 이기복씨, 억압된 자유와 종교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보편적 권리를 주장했던 사우디아라비아의 미샬 공주 등 탄압과 부정, 불합리에 저항했던 놀라운 순간들을 마주한다.
스페인 사람들은 이런 투쟁을 ‘게릴라(소규모 전투)’라고 불렀다. 제복을 입은 정식 군대가 아니라 지역의 민간인들이 무장하고 익숙한 지형을 활용해 적에 맞서는 ‘게릴라전’의 이름은 이렇게 역사에 등장한다. 그리고 이 ‘작은 전쟁’의 전사들은 희대의 거인이자 유럽의 지배자 나폴레옹에게 뼈아픈 타격을 입힌다. 프랑스군은 스페인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먼 훗날 세인트 헬레나에 유배되어 일생을 마친 나폴레옹이 “나를 쓰러뜨린 건 스페인의 상처였다”라고 고통스럽게 술회할 정도였다. / 50p
최전방의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성을 지키는 임무를 다했고, 주력군이 붕괴된 가운데서도 자신의 변방 수비대만으로 전략적 요충지를 되찾았으며, 철수하는 적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끌고 가려는 동족을 구출하고자 적의 숫자가 얼마든 개의치 않고 적의 파도 속으로 뛰어든 양규와 그의 사람들.
양규의 본관과 출신은 물론 나이조차 모를 만큼 일천한 기록이 아쉬울 뿐이지만 남아있는 기록만으로도 가시지 않는 감동으로 남는다. 그리고 타인을 구속과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자신의 목숨을 내던진 사람들은 어떤 시각으로는 ‘한국사 속 영웅들’을 넘어 ‘한국인을 만든 사람들’로 격상된다. 그들은 진정으로 용감한 다윗들이었다. / 65p
지난 해, 황모과 작가의 소설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참혹함을 처음으로 접한 적 있다. 관동대지진이라는 굵직한 재난에 가려 조선인들이 대학살을 당한 초유의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나의 무지함에 읽는 내내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다. 『세계사에 균열을 낸 결정적 사건들』 속에서도 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국가 초유의 재난에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향한 온갖 근거 없는 낭설을 퍼뜨리며 마구 학살했다.
이 사건이 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는 조선인들에게 죽창질을 하고 칼을 휘두른 일본인들은 평소 선량한 얼굴로 조선인들과 곧잘 어울리기도 했던 보통 사람들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1923년 5월 25일의 우리 역사 속에도 이 같은 사례가 있었다. 백정 해방 운동에 뛰어들었던 강상호의 두 뺨을 무수히 난타하며 의복을 찢고 봉욕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백정 편을 드는 이들을 ‘신백정’이라 규정하며 표적으로 삼았던 이들 역시 그저 보통 사람들이었다. 대개 ‘공포와 혐오는 한 몸’이라던 저자의 말처럼, 국가 대재난과 시스템의 균열로 인한 위기 앞에서 민중들은 혐오를 통해 그에 대한 공포를 잊으려 했던 게 아닐까.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학살에 쫓겨 경찰서로 몸을 피한 조선인과 중국인 300여명을 지킨 당시 쓰루미 경찰서장인 오카와 쓰네키치 같은 인물이 있었고, 일제 강점기 내내 경찰의 감시를 받고 천석꾼 부자에서 빈털터리로 전락했으나 차별과 계급이라는 인습을 타파해나갔던 강상호 같은 인물이 있었다. 이 책이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이렇게 ‘절망의 바닷속에서 희망의 섬을 찾고 야만의 칼바람 속에서 인간의 가치’를 찾은 이들과 역사를 들려준다는 데 있는 것 같다. 승자들의 역사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만의 역사를 써내려갔던 사람들, 우리가 그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역시 지금의 우리에게도 그러한 태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셸이 살았던 모진 세상의 굽이마다, 길목마다 그녀에게 벅찬 골리앗들은 버티고 서 있었다. 귀족의 사생아라는 태생의 한계와 싸워야 했고, 완고한 교육정책을 머리로 들이받아야 했으며, 파리 코뮌조차도 여성 투표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여성 억압적 현실과도 맞서야 했다.
“여자가 무슨 총을” 하며 고개를 흔드는 미덥잖은 동료 혁명가들 옆에서 막강한 프랑스 정부군에 총을 쏘며 맞서야 했고, 식민지의 무장 투쟁을 지지하면서 황망하게도 자신들이 혐오하던 지배자의 편으로 전락해버린 왕년의 코뮌 동료들과도 척을 져야 했다. / 205p
결국 기억이 세상을 움직인다. 아울러 오늘날 우리 곁에서 골리앗과 대항해 싸우는 사람들은 없는지 살펴보자. 그리고 그들을 기억하자. 그들 역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우리가 쓰러진다 해도, 우리를 기억해주시오.” / 166p
드라마를 보듯 몰입하여 읽었다. 강자 골리앗에 맞서 분연히 일어선 위대한 다윗들의 역사에 다가갈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토록 여운과 울림이 가득한 역사책이라니, 역사책을 좋아하는 분들은 물론 즐겨 읽지 않는 분들도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추천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