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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 - 하버드대 마틴 푸크너의 인류 문화 오디세이
마틴 푸크너 지음, 허진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2월
평점 :
이처럼 지적이고 수준 높은 문화 역사서라니, 반갑다!
문화라는 렌즈를 통해 들여다본 인류의 역사!
여기, 문화에 관한 아주 지적이며 수준 높은 통찰이 담긴 책이 있다. 하버드대 영문학과 비교문학 교수이자, 세계 최고 수준의 업적을 쌓은 연구자에게 수여되는 홈볼트상을 수상한 마틴 푸크너의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다. 들어가기에 앞서 이 책은 문화에 관한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하나는 전통 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며 문화를 민족 고유의 자산으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문화를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관점이다. 문화를 한 공동체의 자산으로 여기기보다는, 시간과 장소라는 제약을 뛰어넘어 서로 다른 문화들이 만나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끼쳐왔다고 여기는 시각이다.
문화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문화는 접촉을 통해 결합되어
광범위한 영향력을 끼치고, 깨진 전통을 조각조각 이어 붙여서
혁신을 이끌어낸다. / 11p
이 책은 문화를 소유할 수 있다는 주장을 경계하며 인간이 시대와 대륙을 초월하여 각기 다른 문화를 어떻게 빌려오고, 또 기존 문화와 혼합하여 마침내 문명을 성장시켰는지를 살펴본다. 쇼베동굴 같은 곳에 아주 오래전 인간이 남겨둔 흔적부터 이집트의 피라미드, 그리스의 극장, 불교와 기독교 사원, 샤를마뉴의 궁정 도서관, 파리의 살롱, K-POP에 이르기까지, 세계사를 뒤흔든 결정적인 장면을 통해 문화가 어떻게 형성되고 작동하는지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의미를 만들려는 인류의 열망과, 그들이 운명을 빚어내는 방식까지 치열하게 고민한 이 책은 그래서 무척 특별하다.
문화사가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문화가 그 잠재력을 모두 실현하려면 종종 오류와 몰이해, 파괴가 뒤따른다 해도 과거와 그리고 서로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문화, 서로의 문화와 절연한다는 것은 문화를 살아 있게 하는 산소를 제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26p
저자의 안내에 따라 저장, 상실, 복원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면서 문화사를 들여다보면 복잡해보였던 문화사가 명쾌해진다. 동굴은 어떻게 인간의 기억 장치이자 의미를 만드는 장소로 사용되었는가? 아소카는 어떻게 석주와 바위에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새겨 넣을 생각을 했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문화의 저장과 전파를 위해 인류가 다음과 같은 수단을 활용해 지식을 저장하고 다음 세대로 넘겨주려 했음을 엿보게 한다.
한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화재로 불타서 수많은 그리스 문헌이 파괴되었고, 기독교 수도사들이 기독교 이전 시대의 문헌은 필사를 거부하는 바람에 수많은 작품이 사라짐으로써 문화는 상실과 파괴라는 부침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필사를 통해 지식을 보존하고 재생산하려 했던 움직임, 현장법사나 번역가와 같은 문화 매개자들을 통해 서로 다른 문화가 접목됨으로써 문화는 끊임없이 진보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인문학이라는 학문은 새롭게 복원된 과거를 되살리고자 하는 욕망에서 탄생했고, 실제로 그렇게 한 적도 여러 번 있다. 중국 학자 한유(768~824년)는 유교의 좋은 본보기를 잃었다는 생각에 불교를 거부하고 유교 고전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그를 비롯한 학자들에게 옛 문헌을 되살린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비평과 해석, 교육을 확립한다는 뜻이었다. 근동에서는 철학자 이븐 시나(980~1037년)가 그리스 철학을 포함한 이슬람 이전 시대의 문헌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운동에 참여하여 이슬람 환경에서 다양한 지식 형태를 새롭게 종합했다. / 21p
현재 우리가 번역을 통해 다른 문화권의 문학을 일상적으로 즐기고 있다면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로마인들이 처음으로 했던 일을 하는 것이다. 번역은 로마인들의 놀라운 문화적 접목 실험의 일부였다. 그리스 문화에서 로마 문화로 자연스럽게 발전했다는 잘못된 생각이 퍼진 것은 이 실험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문화적 접목이 잘 통했던 것이다.
접목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연극, 서사시, 조각, 회화 같은 문화재는 보통 그것을 만들어내는 문화와 함께 발전하면서 국내 소비자들의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한다. 식자율이 높아지자 구전 이야기 모음집이 등장했고, 구전 서사시는 텍스트로 변모해 후대 문학이 초기 텍스트를 참조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이를 구식으로, 이전 시대의 산물로 여기게 만들었다. / 116p
저자는 ‘문화culture’라는 말이 ‘농업agriculture’에서 비롯된 이유는 과거의 문화는 새로운 문화가 자라나는 터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과 먼 조상을 연결하고 서로 다른 문화를 연결함으로써 새로운 문화를 계속해서 가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야만 정체성과 이해관계의 충돌, 상반된 신념,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도 유의미한 가치를 찾고 갈등을 벗어날 방법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상들이 만들어준 귀중한 문화를 잘 간직하되, 문화적 다양성의 중요성과 즐거움을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이 우리 세대가 해야할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문화란 본래 어디서 나왔는지보다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저자의 메시지 역시 기억해야겠다.
우리는 문화를 평가할 때 독창성을, 언제 어디서 처음 발명되었는지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원조라는 주장은 종종 우월성과 소유라는 미심쩍은 주장을 뒷받침할 때 사용된다. 그런 주장은 편리하게도 모든 것이 어딘가에서 왔음을, 발굴되고 차용되고 옮겨지고 구매되고 도난당하고 기록되고 복사되고 종종 오해받는다는 사실을 잊는다. 무언가가 본래 어디서 나왔는지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이다. 문화는 거대한 재활용 프로젝트이며, 우리는 다음에 사용될 때를 기다리며 그 유적을 보존하는 매개자에 불과하다. 문화에 소유자는 없다. 우리는 다만 다음 세대에 문화를 물려줄 뿐이다. / 168p
전 지구적 문화 유산으로서의 ‘나’를 감각케하는 경이로운 책이다. 문화사에 관한 방대한 인사이트와 지적유희를 맛볼 수 있는 책을 찾으시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