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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미스터리 2025.가을호 - 87호
서미애 외 지음 / 나비클럽 / 2025년 9월
평점 :

미스터리의 즐거움은 이토록 다양하다!
드넓은 미스터리의 지대를 사유하는 시간!
정기 구독 신청 후에 받은 첫 책이라 더 큰 애정을 갖고 읽었다.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이번 호는 장르라는 특정 형식에 한계를 두지 않을 때 미스터리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게 한 호라 특별했다. 전우성 브랜딩 디렉터가 인터뷰에서 말했듯, 미스터리가 “세상에 던지는 질문이자, 정해진 틀과 규칙 없이 기존의 편견을 깨고 새로운 시각을 발견하며 세상을 탐구하는 사고방식”일 수 있다면,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스터리에 진심일 때 과연 무엇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인가, 상상만 해도 설레지 아니한가.
미스터리를 단지 장르적 접근이 아닌 세상이 던지는 질문과 연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미스터리란 추리의 과정만이 아닌, 상황과 서사를 중심으로 구축되며, 긴장과 불안, 몰입을 유도하는 가장 진화한 이야기이자 인간과 세상의 불확실성을 탐구하는 이야기라고 재정의했습니다. 즉 미스터리란 단순한 장르가 아니라 세상을 탐구하는 방식이죠. / 전우성 브랜딩 디렉터 인터뷰 중에서 32p



그래서인지 이번 호에 수록된 단편들이 모두 예사롭지 않다. SF와 미스터리를 결합한 홍정기의 <인공지능의 살의>와 서동훈의 <포 라이더스>는 텔레포트 기술과 신체 재생 기술이 상용화되는 시대의 맹점을 파고드는 미스터리로 신선한 충격을 준다. 순례길을 기약 없이 떠도는 어느 중년 남자의 이야기 <고스트 하이커: 북극성>은 불안과 우울을 견디고 살아가는 인간의 서글픈 자화상을 담은 기묘한 미스터리다. 민비시해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무경 작가의 역사 미스터리 <생문과 사문>도 흥미롭다. 예전에 <치지미포, 꿩을 잡지 못하고>를 읽었을 때도 느꼈지만, 역사와 픽션을 유려하게 넘나드는 필력이 돋보인다.
역사 미스터리의 시선은 과거를 향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를 바라보며 쓴 이야기는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과거의 누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심지어 아직도 과거에서 청산되거나 종결되지 않은 것이 남아 있다. 어쩌면 역사 미스터리는 현재 우리 주변을 둘러싼 수많은 의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시도의 다른 방향일지도 모른다. 탐정이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 본질을 찾아내듯, 역사 미스터리야말로 현재가 아닌 곳을 살펴 더욱 명확히 현재를 판단하려는 가장 현재적인 서술이다. / 무경, <진짜와 가짜 사이의 투쟁> 중에서 226p
개인적으로는 박인성 문학평론가의 <마스터플롯으로 읽는 장르문학: ⓷ 호러 장르와 공포의 사회학>을 인상 깊게 읽었다. 공포가 어떻게 집단으로 공유되거나 전염되는지, 공포라는 감정의 속성이 어떻게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지, 호러 장르 속 사회·문화적 의미를 톺아보는 특별 기획이다. 저자는 위험한 대상에게서 느껴지는 위기감이나 생존의 위기에서 느끼는 공포보다는, 사회적인 주체로서 느끼는 사회적 죽음에 대한 위기감이야말로 오늘날 공포의 주된 원인을 형성한다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한국, 일본, 미국이 어떠한 방식으로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와 공동체의 위기감을 호러 장르에 반영하는지 비교 분석한다. 단순히 읽고 즐기는 것을 넘어서, 우리 시대의 복잡성을 탐구하는 필수적인 문화적 매개체로 성장한 장르 문학을 면밀히 살펴볼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곡성>은 이러한 파편적이고 초개인화된 믿음의 시대, 서로를 악마라고 생각하는 시대에 포괄적인 공포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결국 외지인은 악마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거울이다. 그에게서 발견한 공포는 곧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공포이기 때문이다.
<곡성> 이후에 한국 호러 장르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 것은 역설적으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일상의 공포가 기존의 호러 장르를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호러가 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 박인성, <마스터플롯으로 읽는 장르문학: ⓷ 호러 장르와 공포의 사회학> 중에서 199p
일본의 호러 마스터플롯은 포기할 수 없는 대상으로서의 공동체와 그 내부에서 오롯이 개인주의자이기를 바라는 사람들 사이의 이중구속을 그려내는 장르다. 공동체는 필연적이고 가치를 유지해야 하지만 동시에 위험하고 억압적이다. 개인주의자는 매혹적이지만 취약하고 공포스럽다. 이러한 복합적인 이미지가 일본 호러의 가장 모순적이고 양면적인 욕망을 상연한다. / 박인성, <마스터플롯으로 읽는 장르문학: ⓷ 호러 장르와 공포의 사회학> 중에서 206p


말미에는 독자가 직접 추리해볼 수 있는 단편 소설이 꼭 하나씩 수록되어 있는데, 이번 <한 방의 총소리>는 도전 이래 처음으로 사건 추리에 성공한 작품이다. 추리 능력이 성장한 듯해서 뿌듯한 마음이다. 이제 다음 겨울호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겠다. 나도 미스터리에 한 진심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