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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인생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75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2월
평점 :
![](http://image.yes24.com/blogimage/blog/h/j/hjh8s/IMG_20220720_1.jpg)
평범의 이중성을 건드린 책!
좋은 작품은 이처럼 그저 책 속의 이야기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삶까지 함께 밀어 올릴 수 있어야 하는 것!
“고요하게, 평범한 삶을 살았다.”
만약 나의 묘비명에 단 한 줄의 글을 새겨야 한다면 나는 이렇게 새기고 싶다. ‘나’라는 사람을 떠올리면 무난하고 무던하게, 고요하고 평범하게 살다 간 사람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해서다. 그럼에도 내심 ‘당신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노라는, 묘비명과는 아주 다른 말로 기억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일 테다. 많지는 않지만 적지도 않은 인생을 살다보니 무난하고 평범하게 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고, 특별한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지만, 내 삶을 반추했을 때 좀 더 반짝이는 무언가가 만져졌으면 하는 바람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때문에 카렐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이란 제목을 본 그 순간에도,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마주하리라는 상상을 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 속에서 뭔가 특이하고,
중요하고, 아주 극적인 면을 보고 싶어 하는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자신이 경험한 사건에 주목해 주기를 바라고,
그로써 더 많은 관심과 경탄의 대상이 되기를 기대하는가 보다. / 19p
서로 다른 자아, 그러나 하나뿐인 우리의 인생
오랫동안 철도 공무원으로 일했던 한 남자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세례 증명서와 거주 증명서, 결혼 증명서와 임명장, 학교 성적표를 비롯해 타계한 아내의 편지에 이르기까지, 단순하고 정돈된 삶을 살아온 그답게 서류는 더 이상 정돈할 게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갑자기 허전한 생각이 들었고, 어떤 중요한 것을 잊은 듯한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자신의 삶을 짧고 간결하게 기록하기로 한다.
나의 삶에서는 비일상적이고 극적인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게 기억나는 것이라곤 조용하고 당연해 보이는, 거의 기계적인 세월의 흐름이며, 내게 다가올 마지막 순간까지도 다른 시간들과 마찬가지로 별로 극적이지 못할 것이다. 돌이켜 볼 때, 내 뒤에 놓인 직선적이고 분명한 길을 걸어온 것이 기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길은 잘 닦인 대로처럼 아름다웠고, 그 길 위에서는 방황할 일이 없었다. / 19p
참으로 평범하다면 평범한 삶이었다. 소목장이의 아들인 ‘나’는 아무도 오르지 못하는 목재 더미 위에 올라가 종종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곤 했던 꼬마 아이였다. 아버지는 강인하고 단순하지만 통장에 든 노동의 결과를 셈하며 검소하게 사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분이었고, 어머니는 예민하고 감성적이며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넘쳐흐르던 분이었다. 마을 아이들 가운데 소목장이 아들은 별로 두드러지지 못했기 때문에 곧잘 무시를 당하는 편이었지만, 학교에서는 조용하고 부지런한 모범생으로 선생님께 인정받는 아이였다. 1등을 빼앗기지 않는 데서 인생의 의미를 찾은 그는 공부벌레가 되었고, 프라하의 김나지움으로 진학해 마을을 떠난다.
하지만 젊음이란 자고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원하고 가질 수 없으면 화를 내는 존재였던가. 8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는 시를 쓰고 장황하기 그지없는 토론을 벌이거나 이성 경험을 남자의 가장 자랑스러운 트로피로 여기며 혼란과 방황으로 점철된 시간을 보낸다. 훗날 아버지로부터 끔찍한 모욕을 들은 그는 철도청 하급 공무원에 지원하고, 그곳에서 오래된 황실 시종 집안 출신의 아내를 만나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하며 이른 나이에 역장이 된다. 그 사이 전쟁을 치러야했지만 뒤로는 체코인 동포를 돕는 영웅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역장 일을 훌륭하게 해내며, 철도청 공무원으로서 말년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삶을 살았노라 담담하게 술회한다.
그러나 학교는 아이의 삶에서 또 다른 새롭고 커다란 경험을 의미했다. 그곳에서 아이는 처음으로 인생의 위계질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 전에도 아이가 누구에게든 복종해야 했던 것은 다를 바 없었다. 어머니는 명령을 했지만 자기편이었다. 어머니는 요리를 해주었고, 입을 맞추며 머리도 쓰다듬어 주었다. 아버지는 때때로 화를 냈지만, 여느 때에는 아버지의 무릎에 올라앉거나 그의 두툼한 손가락을 붙잡을 수 있었다. 다른 어른들이 가끔 호통을 치거나 욕을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았고, 달아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달랐다. 그는 오로지 주의를 주고 명령하기 위해 존재했다. 달아나 어디론가 숨을 곳이 없었고, 그저 면박이나 창피를 당할까 두려울 뿐이었다. (…) 이제 모든 세계는 두 개의 계층으로 구분되었다. 보다 높은 세계에는 선생님과 신부님, 그리고 그들과 교제하는 약제사, 의사, 행정관과 판사가 속했다. 그리고 아버지들과 그들의 아이들이 속하는 평범한 세계가 있었다. / 34p
인생은 아이의 상태에서 서서히, 그리고 눈에 띄지 않게 남자가 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갑자기 아이에게서 놀랍게도 완성되고 성숙한 인간의 면모가 나타난다. 그러한 면모는 서로 들어맞지도 조직적이지도 않으며, 아이의 내면에서 연관성이나 논리성없이 상충되어 거의 광기처럼 나타난다. 다행히도 우리 어른들은 이 상태를 사려 깊게 관조하는 데 익숙하며, 인생을 대단히 심각하게 여기기 시작하는 소년들에게 그 시기는 지나가는 것이라며 위안을 준다. / 57p
땅거미가 내려앉아 공부를 계속하기엔 너무 어두워졌고, 열린 창으로 병영의 소등 신호가 들릴 때면, 나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창가에 서서 너무나 아름다우면서도 절망적인 그리움에 숨 막혀 했다. 대체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이름이 없고 매우 광활하고 깊은 느낌이어서, 사방에서 내성적인 나를 괴롭히던 모든 사소한 모욕감, 굴욕감, 패배감, 실망감의 예리한 바늘들이 그 안에 용해되었다. 그래, 이것은 고통과 사랑으로 넘치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억척스럽게 몰두하는 모습은 아버지였고, 한없이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모습은 어머니였다. 내 소년기의 좁은 가슴에 이 두 가지의 모습은 어떻게 합쳐지고 조화를 이루었을까? / 61p
남자에게는 자신의 일을 몰두할 수 있는 곳이 가정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 116p
이렇듯 질서정연하게 정돈된 듯한 그의 평범한 인생이 다소 심심하게 읽힐 즈음, 갑작스러운 심장 발작과 함께 그에게 온전한 진실을 촉구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아주 사소한 일화처럼 다뤘던 그의 기억들이, 가벼운 일탈처럼 치부하고 지나쳤던 사건들이, 내면에 깊숙이 감추어 놓고 힘껏 줄행랑 쳤던 진짜 이야기들이 하나씩 새로운 목소리를 내며 선명히 드러난다. 그러면서 평범하고 행복한 사람으로서의 나, 출세를 위해 몸부림치는 억척이, 우울증 환자로 대표되는 세 개의 자아가 서로 뒤섞이다 때로는 이 삶이, 때로는 다시 저 삶이 두각을 드러내며 생애의 대부분을 지배했음을 자각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낭만적인 자아, 영웅적인 자아, 시인 등 평범하고 단일해 보였던 하나의 삶에 숨겨져 있던 또 다른 자아들이 이따금 출몰하기도 했으니 이 모든 자아들의 총합이 바로 그 자신이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처럼 그 시에는 많은 것들이, 신기하고 소위 인광을 발하면서 작열하는 것들이 들어 있었음에 틀림없다. 시가 훌륭한가 형편없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 시 속에 들어 있는 사물들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한때 코코넛 야자나무와 이상하고 인광을 발하면서 작열하던 무언가가 들어 있던 삶이 있었다. 자, 여기 그 삶이 있으니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라고. 넌 네 인생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 야자나무를 어디론가, 서랍 속 같은 곳에다 감춰 방해가 되지 않게, 눈에 띄지 않게 하려 했었지? / 170p
내 경우를 들어 보자. 나는 전혀 유별난 사람이 아니다. 나의 삶은 끊임없이 뒤엉킨 몇 개의 운명들로 이루어졌다. 한 번은 이 운명이, 한 번은 저 운명이 지배적이었다. 그 후로는 그리 지속적이지 못하고, 전체 삶을 비추어 볼 때 그저 바다에 드문드문 나타나는 섬이나 에피소드처럼 보이는 몇몇 운명들이 나타났다. (…) 그러나 그때의 내가 이 운명들 가운데 어떤 것이었거나, 이 인물들 가운데 누구였든 간에 나는 항상 나였고, 이 나는 늘 동일한 사람이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는 존재였다. / 214p
내 경우에는, 평범한 인간과 억척이와 우울증 환자가 서로 연합하여 나의 자아를 나누어 가졌다. 그들은 서로 조절해 가며 내 생애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그들은 서로 조절해 가며 내 생애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때로는 억척이가 실망을 하고, 때로는 평범한 인간이 자신의 선한 심성 때문에나 당황한 나머지 양보를 하고, 또 때로는 우울증 환자가 의지가 박약하여 낙심하는 때가 있었다. 그럴 때 나의 왕기는 잠시 다른 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평범한 인간이 가장 강하고 지속적이었고, 지독한 일벌레였으므로, 가장 빈번하고 오랜 기간 나의 자아였다. / 21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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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는 ‘나’라는 객체 속에 또 다른 객체의 존재들까지 인식하기에 이른다.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의 아버지 또는 어머니의 어머니 나아가 세대를 거쳐 끊임없이 이어져 오는 우리의 선조들까지. 어떤 모습으로든 그들이 내 안에 존재하고 있고, 내 자아들 중 누군가가 그들의 모습을 닮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 내가 관계 맺을 가능성을 갖고 있던 사람들, 내가 겪어보지 못한 또 다른 삶의 가능성에 이르기까지, 그 무수한 가능성의 집합이 곧 ‘나’일지도 모른다는 거대한 인식의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내 안의 목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똑같은 사람들이다. 네가 누구든 너는 나의 무수히 많은 자아이다. 네가 악인이든 선인이든, 그건 내 속에도 있는 거야.’ 결국 인생이란, 온전히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기에 이토록 평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뒤지는 일을 하라는 게 아니야. 그건 아무 곳으로도 이끌지 못해.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들이 누구이건 간에, 너와 같은 집합이라는 걸 모르겠나? 너는 그들과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보기만 해. 그들의 삶 또한 네 속에 있는 무수히 많은 가능한 삶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너도 다른 사람처럼 신사나 거지, 허리춤까지 옷을 벗어젖힌 날품팔이꾼이 될 수 있었다. 너도 냄비 장수, 빵집 주인, 또는 얼굴 전체에 잼을 묻히는 아홉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너이다. 네 속에 그런 다양성이 있으니까. / 238p
그것이 진정하고 평범한 인생이며, 가장 평범한 인생이다. 내 것이 아닌 우리의 삶, 우리 모두의 광대한 생명 말이다. 우리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면 우리 모두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평범하면서도 그것은 축복이다. / 24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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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평범한 인생』은 죽음을 앞두고 이미 알고 있거나 잊고 있었던, 혹은 편집되었던 여러 ‘자아’와 조우함으로써 진정으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인생은 여러 상이하고 가능한 삶들의 집합’이라는 인식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은 온전히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니며, 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고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수록 자신의 삶도 완성될 거라는 깨달음을 전한다. 인생이란 어느 역에나 멈춰 서는 아주 평범한 완행열차 같은 것, 그 역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이 곧 나이며 마지막 종착역까지 그들과 함께 가는 것임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무엇보다 한 남자의 개별적인 기억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장면 하나하나마다 나의 기억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이 특별한 독서 경험이야말로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다. 아버지와 어머니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 머물러 있던 유년 시절을 지나 위계질서와 서열로 구분되는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 젊음이라는 객기와 광기의 시대에서 명예와 성취욕, 안정으로 이어지는 삶의 여러 단계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내 삶의 한 장면 한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이었다. 이를 테면 내 인생 최초였으나 결코 아름답지 않았던 로맨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수치스러운 경험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내 안의 진솔한 목소리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곧 평범의 이중성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 삶 속에서 뭔가 특이하고, 중요하고, 아주 극적인 면을 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으면서도 기억을 왜곡하고 때로는 인생을 편집하기도 함으로써 또한 여느 보통의, 그럭저럭 괜찮은 삶이기를 포장하곤 하는 나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건 정말 엄청난 경험이었지……
난 네가 그런 경험을 어떻게 너의 삶에서 지울 수 있는지 모르겠다. / 183p
‘토마스 만이 극찬하고 밀란 쿤데라에게 영향을 준 20세기 최고의 이야기꾼’이라는 수식어가 전혀 놀랍지 않을 만큼 걸작 중에 걸작이다. 감히 내 인생책이라 말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인상 깊게 읽은 작품이다. 중반부까지는 다소 심심하게 읽히는 듯하지만 이 책의 진가는 중후반부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니 부디, 끝까지 다 읽어보시라 추천드린다. 덧붙여 이 책의 특별함은 인생 50회 차 정도쯤에는 이르러야 더 깊이 와 닿지 않을까 싶다. 그때가 되어서 다시 찾는다면 이 책은 또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줄까.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