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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 이야기
조예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7월
평점 :

기묘하고 잔혹하며 씁쓸하고 아린, 조예은이라는 장르의 맛!
우리가 조예은 소설에서 기대하는 모든 것이 이번에도!
한입. 그 한입이 잊히지가 않더군요.
표제작 「치즈 이야기」를 떠올리면 꿈속에서 단 한 번 맛보았던, 다시 맛볼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다던 희지의 고백이 자꾸만 생각난다. 배고픈 마녀에 의해 치즈로 변한 부모님을 먹는 순간 그 허우적대는 모양새가 세상에서 가장 역겨운 노란 벌레 같았다던 께름칙한 부연까지. 고작 일곱 살짜리의 아이가 꾼, 잔혹 동화를 닮은 이 발칙한 꿈으로 시작되는 이야기에 먼저 입맛부터 달싹이게 되는 ‘조예은이라는 장르의 맛’을 나 역시 기다렸으니까.
어두운 기억을 먹고 피어난 푸른 꽃
밀란 쿤데라는 모든 소설가들에게는 늘 따라다니는 마법의 오브제들이 있다고 했다. 아마도 조예은 작가에게는 ‘푸른곰팡이’가 아닐까 감히 짐작해본다. 전작인 『트로피컬 나이트』에 수록된 「푸른 머리칼의 살인마」에서는 빵집 주인이 갓 태어난 아이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존재 중 가장 강하고 질긴 생명력을 가진 푸른곰팡이를 떠올려 ‘블루’라고 이름을 지어주는 장면이 있다. 마찬가지로 「치즈 이야기」에서도 푸른곰팡이가 등장하는데 일명 ‘블루 치즈(푸른곰팡이로 숙성한 치즈)’라 불리는 것으로, 주인공인 희지가 언젠가 꿈속에서 맛보았던 (부모님이 변신한) 치즈맛과 꼭 닮은 블루 치즈를 찾아 헤매는 모습이 그러하다.
유년시절, 희지는 마치 숙성되길 기다리는 치즈처럼 그 방안에 머물러 있었다. 엄마는 희지를 방에 가둔 채 할머니가 쓰던 요강과 텔레비전만을 남겨두고 자주 외출하곤 했다. 그 방에서 희지는 꽤 자주, 오랫동안 방치되고 유기되어 몇 번이고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어쩌면 희지가 꾸었던 꿈속의 치즈 맛은, 먹어보기 전에는 모두가 코를 싸쥐지만 입안에 넣는 순간 황홀경을 느낀다던 잘 숙성된 블루 치즈와 꼭 닮은 그 맛은, 희지의 가장 어둡고 음습한 기억을 먹고 피어난 푸른 꽃의 맛은 아니었을까. 때문에 십오 년 만에 마주한 엄마가 전신마비로 악취를 풍기며 누워있는 방에 들어선 순간 오랜 복수심과 증오로 성숙해진 그 맛이 ‘떠오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쯤에서 ‘바로 꿈속의 그 맛입니다. 제가 어떻게 이 맛을 찾아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하고 독자에게 천연덕스럽게 물었던 희지의 그 대사가 아찔하게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아, 이런…….
성아는 오후 두시지만 새벽 두시나 다름없는 방안에 누워 굳게 닫힌 암막 커튼을 노려보았다. 저 커튼 너머에 있는 것은 살풍경하고 지저분한 골목과 담장처럼 앞을 막아선 맞은편 빌라 벽뿐이었다. 그리고 피곤에 찌든 채 오가는 취객들. 취객과 취객과 취객들. 그런 취객의 머리통을 노리는 무리들. 어쩌면 도시 괴물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보증금을 돌려받고, 무사히 이사를 마칠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터였다. / 「보증금 돌려받기」 중에서 65p
엄마의 ‘공평함’이란 물질적 축하와 정신적 축하를 완전히 구별해 중복되지 않게 부여하는 걸 뜻했다. 둘 모두를 받을 수는 없었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는 포기해야 했다. 그날의 경험으로 나는 깨달았다. 누군가 선점한 것을 다른 한 명은 영영 가질 수 없다는 걸. / 「수선화에 스치는 바람」 중에서 91p
이유? 그런 게 있을까? 나도 한때는 세상 모든 일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 이름이 우승하인 것도, 이름처럼 전국의 각종 육상 대회에서 상을 휩쓴 것도, 하다못해 출전을 앞두고 발목을 접질렀을 때도 전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건 주인공의 극적인 성공을 위한 일시적인 시련에 불과해, 다 이유가 있을 거야,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건 없다는 걸 안다. 있다고 하더라도, 꼭 모든 사건에 대단한 의미가 있지는 않다는 걸 안다. / 「반쪽 머리의 천사」 중에서 143p




도시가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존재할 현실 밀착 도시 괴담 「보증금 돌려받기」 도 흥미롭다. 집이 나갈 때까지 보증금을 주지 않겠다는 집주인, 유독 여성에게 가혹하고 안전하지 않은 도시의 일상이 가하는 압박은 지독히도 공포스럽다.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내 돈 떼어먹겠다는 놈들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는 것을 또 한 번 느끼게 되는 작품이다. 한편, 모두가 주연이 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비록 주연은 아니지만 모든 삶이 아름답길 희망해보는 「반쪽머리의 천사」는 짜고, 달고, 역하지만 사랑스러운 조예은 식 장르의 맛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외에도 기억하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전하는 「소라는 영원히」, 「두 번째 해연」, 「안락의 섬」도 인상적이다. 괴랄한 듯하지만, 끝끝내 지키고 싶은 것과 그것을 감당해내려는 조용한 결의들을 따듯하게 그려내, 마지막까지 잘 읽었다는 감상을 남기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작품들이다.
진실은 씁쓰름하고 비릿하면서 동시에 중독적인 맛입니다. / 「소라는 영원히」 중에서 182p
남은 시간 동안, 눈을 감고 꿈속 플루와 라미를 생각했다. 안락의 섬과 무의미한 바깥을 생각했다. 삶과 죽음을, 시작과 끝을, 종말과 재건을, 망각과 사랑을 생각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건 사랑의 기억들. 이 섬에서도 그런 기억은 계속 쌓였으니 나는 아마 그만큼 더 슬퍼질 것이다. 어디선가 하피가, 라미가, 플루가 이렇게 묻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모든 걸 없는 셈 치고 무로 돌아가는 건 너무 슬프지 않아? 기억이란 쇠퇴하지. 그리고 소중한 것은 다시 생겨나.
수수, 우리는 어디에나 있어.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있어. / 「안락의 섬」 중에서 324p
대체 이 이야기의 끝이 어디로 향할지 종종 숨을 참고 읽느라 힘겨운 반면, 유머러스하고 때로는 가슴이 저릿해지는 말랑말랑한 이야기까지도 만나볼 수 있는 소설집이다. 이제는 조예은이라는 장르가 되어버린 독특하고 색다른 컬러의 소설을 다양하게 즐기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