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개의 말·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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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의 문장은 하나하나 무게감이 남다르다!

밀란 쿤데라, 그 이름만으로도 이미 증명되었을 테지만 그의 존재감을 더 가까이 느끼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하고픈 책!






  소련의 침공으로 자유를 상실한 체코의 시대 상황과 그로부터 폭발한 문학적 감수성으로 미루어볼 때, 밀란 쿤데라는 그 누구보다 체코의 실상을 예민하게 감지한 것이 틀림없다. 격동의 역사에 휘말린 채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 『웃음과 망각의 책』이, 역사의 상처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네 남녀의 사랑을 그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그러했듯이. 『89개의 말 · 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의 서두에서 자신이 번역에 그토록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물리적·언어적 망명 상태에 놓인 현실에서 찾았다. 체코어로 쓴 작품들이 조국에서 판매 금지되자 프랑스로 건너갔지만, 체코어가 가진 어감을 프랑스어 번역으로는 오롯이 전달할 수 없어 괴로웠던 순간들이 그를 더 큰 상실감에 빠지게 하지 않았을까.





어느 날, 피에르 노라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 모든 번역본을 검토할 때, 단어 하나하나에 대해 깊이 숙고할 수밖에 없었을 거야. 그렇다면 자네의 개인 사전을 써보면 어떻겠나? 자네가 중요시하는 말들, 자네를 골치 아프게 하는 말들, 자네가 애착하는 말들을 모은……?” 나는 그의 이 생각에 매료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 사전이 만들어졌다. / 18p




  이제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써야만 했던 밀란 쿤데라는 프랑스 역사학자인 피에르 노라의 제안에 따라,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한 단어들을 엮어 작은 사전을 만들기로 한다. 「89개의 말」은 그가 평소 매력적으로 느끼고 애착하는 말들, 쓰기 꺼려하는 말들, 표현의 맛을 살리는 말들 등을 수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단어들이 현실과 작품 세계를 어떻게 투영하고 배격하고 성찰할 수 있게 하는지를 고찰한다.












  그 중 유독 ‘미경험’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처음 제목이 실은 ‘미경험의 행성’이었다고 고백한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단 한 번만 태어나며, 결코 이전 삶의 경험을 갖고 다른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없는 미경험자들이다. 젊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결혼하며, 노년에 접어들어서도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또한 노인들은 자신의 노년을 모르는 천진한 아이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지구는 미경험의 행성이란 말이 어쩜 훅, 와 닿는다. 물론 제목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하길 잘한 것 같지만….





  그가 마법의 오브제로 사용했다던 단어, ‘옷걸이’. 겨우 옷걸이라는 단어에 이토록 의미를 두다니, 처음엔 의아하다가도 몇 줄의 묘사에 이내 마음이 덜컥 낚이고야 만다. “이 옷걸이에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어딘가 사람 비슷한 모양을 한 그 옷걸이는 꼭 고아 같았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철제 몸통에 우스꽝스럽게 팔을 위로 치켜들고 있는 그 모습은 어쩐지 내 마음에 짙은 불안을 몰고 왔다.” 그리고 좀 더 뒤에 가서는, “……투항하는 병사처럼 두 팔을 높이 쳐들고 있는 그 앙상한 철제 옷걸이.” 그는 『농담』의 표지에, 이 소설의 전체 분위기를 구현하는 것만 같은 이 오브제의 이미지를 몹시도 넣고 싶었다고 전한다. 아, 탁월하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지.





예술에서의 아름다움이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것이 발하는 돌연한 빛이다. 위대한 소설들이 발하는 그 빛은 세월이 흘러도 어두워지지 않는다. 인간은 늘 인간의 실존을 망각하기에, 소설가들이 이룬 그 발견들은 아무리 오래되어도 부단히 우리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기 때문이다. / 22p



모든 소설가에게는 늘 따라다니는 ‘마법의 오브제들’이 있다.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는 모자 하나가 무덤구덩이 속으로 떨어져 관 위에 놓인다. “마치 죽은 사람이, 존엄에 대한 부질없는 욕망으로, 엄숙한 순간에 맨머리로 있고 싶지 않았던 듯이” 말이다. / 25p



유럽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이미지는 자꾸만 과거 속으로 멀어져 간다. 유럽인이란 곧 유럽에 향수를 느끼는 사람이다. / 35p



내 책’, 그것은 자기 희열의 음성적 승강기다. / 54p











  다음에 수록된 「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는 르네상스 말기, 유럽의 미학과 환상 예술의 중심지였던 프라하가 전체주의의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과 고국을 향한 향수를 담은 산문이다. 밀란 쿤데라는 소련 문명이 ‘카프카가 말한 소송들, 하셰크가 말한 어리석음, 야나체크가 말한 감옥들’을 가져오기만 한 게 아니라, 그것들을 예견했던 문화 전체를 소멸시켰음을 애통해한다. 이 나라의 시가, 하나의 위대한 문화 전체가 불타고 있는 전체주의의 광풍 속에서 어떻게 하면 그것에 저항할 수 있을 것인지, 어떻게 하면 끈질기게 다시 시를 복원할 수 있을 것인지 고뇌했을 그의 외로운 투쟁이 날카로운 언어 너머로 절절하게 다가온다.




시가 사라져 가는,

불길에 휩싸인 종잇장처럼……

베티즈슬라프 네즈발, 「복수형 여인」 / 128p




  밀란 쿤데라의 유고작이자 세월이 흘러서도 사라지지 않는 거장의 광휘가 느껴지는 책이다. 두께가 얇지만 실감하기 어려울 만큼 문장 하나하나의 무게감이 남다르다. 밀란 쿤데라, 그 이름만으로도 이미 증명되었을 테지만 그의 존재감을 더 가까이 느끼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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