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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미스터리 2025.여름호 - 86호
박광규 외 지음 / 나비클럽 / 2025년 6월
평점 :

인생의 곳곳에 미스터리가 있다!
단순한 장르가 아닌, 삶을 사유하는 사고방식으로써의 미스터리를 즐기는 법!
“Life is full of mystery.”
‘2025서울국제도서전’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스라 하면 나비클럽을 빼놓을 수 없을 듯하다. 작은 부스였음에도 불구하고 미스터리 장르 문학 전문 출판사로써 컨셉에 충실하되 ‘우리의 본질은 무엇인가’ 근원적인 질문으로 되돌아가 독자와 어떻게 소통하고 또 어떤 가치를 제시할 것인가 출판사의 비전을 제시하려는 흔적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홀린 듯이 《계간 미스터리》 여름호를 구매했고 1년 정기 구독도 신청한 상태다. 이번 호에서 한이 편집장은 이렇게 말한다. “인생은 미스터리로 가득하다”는 이 슬로건은 단순한 장르가 아닌, 삶을 사유하는 사고방식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미스터리를 장르라는 특수성에 가두지 않으려는 나비클럽의 행보가 기대되는 대목이다. 응원을 보낸다.
모두 중요하거나 아무도 중요하지 않다
《계간 미스터리》를 읽는 즐거움 중에 하나는 여러 편의 단편 미스터리를 한번에 만날 수 있다는 데 있다. 단편이다 보니 작가 개인적으로는 한정된 분량 안에서 설득력 있는 전개와 범행 동기, 단서를 촘촘히 엮어야하는 고충이 있겠으나, 독자의 입장에서는 단숨에 몰입해 속도감과 긴장감을 그대로 쭉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읽는 즐거움이 크다. 먼저 신인상을 수상한 은혜성의 <아로니아 농장 살인>의 경우, 호우경보로 인해 고립된 주인공과 일행들, 그 안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형사인 주인공이 오히려 범인에 몰리는 흥미로운 전개, 설득력 있는 범행 동기로 미스터리의 주요 요건을 아주 잘 갖췄다는 인상을 주는 작품이다. 다만, 각각의 알리바이와 몇 개의 단서를 통해 용의자를 배제하고 나면 단 한 명의 범인이 남는 단순한 결과가 아쉬움을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 범행을 실행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읽다보면 분명 재미있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채강은 그를 돌아보았다. 법으로도 풀리지 않는 원망, 세대를 이어 내려오는 오래된 연쇄의 고리를 끊을 방법을 그로서는 알지 못했다. / 은혜성, 신인상 수상작 <아로니아 농장 살인> 중에서 70p
미스터리 장르의 매력은 다음 장을 기대하게 만드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복잡한 수수께끼를 직면했을 때의 막막함, 그 밑에 숨겨진 진장을 알고자 하는 기대감은 결국 우리가 불확실하고 때로는 두렵기까지 한 내일을 꿈꾸는 것과 동일한 뿌리를 공유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인들이 타인의 비극을 통해 영혼을 정화하는 수동적인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면, 반대로 미스터리는 독자가 타인의 문제와 비극에 합류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분투하는 능동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도 무척 매력적입니다. / <신인상 수상자 은혜성 인터뷰> 중에서 102p


‘맥주’를 소재로 연이어 세 편의 단편작을 수록한 점이 눈길을 끈다. 마당에서 키우던 풍산개가 느닷없이 주인을 물어 죽였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로 시작하는 류재이의 <나는 맥주를 좋아하지 않아>는 ‘살인 명령어’라는 범행 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점이 인상적이다. 한편, 박향래의 <서핑 더 비어>는 한 가족의 슬픈 비극을 담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서핑을 즐기고 난 뒤 시원하게 수제 맥주 한 잔을 들이키는 장면(정작 서핑은커녕 바다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나란 사람이지만)이 상상돼 읽는 내내 입맛을 달싹이게 되는 아이러니한 작품이다. 한이의 <시초에 맥주가 있었다>는 아파트 경비원과 주민과의 갈등으로 인해 일어나는 파국을 담은 작품으로, 일상 속에서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적의가 얼마나 거대한 나비효과가 되어 돌아오는지 모골을 송연하게 만든다.
공 법무사는 손을 흔들어 보이고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파산신청란에 머물러 있는 커서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오래도록 묻어두었던 감정이 조금씩 되살아나는 걸 느꼈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것. 그건 일종의 직감이자, 무의식에 내재한 경험칙 같은 것이었다. 어딘가에 거짓이 도사리고 있다는 느낌. / 류재이 <나는 맥주를 좋아하지 않아> 중에서 112p
『링컨 타는 변호사』와 ‘해리 보슈’ 시리즈로 유명한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 세계를 탐구한 특집도 흥미롭다. 마이클 코넬리는 현재 생존 여부 기준으로 영어권 추리작가 중 국내에서 가장 많은 작품이 번역된 작가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순수 출간된 작품만 훑어본다고 해도 분량이 방대하다. 잘 설계된 매력 있는 캐릭터 하나가 이토록 거대한 세계관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은 참 부러운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이클 코넬리 같은 역량을 지닌 추리 소설 작가가 많이 등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법의학자가 대부분 극의 중간이나 초반에 잠깐 등장하여 ‘사망 시각은 몇 시경입니다’, ‘외상 흔적은 없습니다’ 같은 간단한 정보만 전달하고 사라질 때가 많아 아쉽습니다. 법의학자는 단순한 기술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고인의 몸에서 진실을 읽어내고, 고인의 삶과 죽음을 깊이 이해함으로써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니까요. / <법의학자 이호 인터뷰> 중에서 207p
직접적인 사망 원인뿐 아니라 그 사람이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과 개인적인 사정, 더 나아가 사회 구조적인 문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 후에야 죽음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이 생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 <법의학자 이호 인터뷰> 중에서 207p

이 외에도 오이디푸스 마스터플롯을 중심으로 다양한 장르문학을 읽어보는 박인성 문학평론가의 연재글과, 『수상탑의 살인』으로 본격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분석한 무경 작가의 글도 기억에 남는다. 본격 추리소설이라는 말이 등장한 게 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점점 세분화되는 장르 문학과 그 추이를 살펴보고 장르 문학을 읽는 눈을 키울 수 있어 좋았던 글이다. 앞으로도 《계간 미스터리》가 장르 문학에 더 큰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칼럼을 많이 개재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장르 문학의 다양성을 사유할 수 있는 매력 있는 계간지로 더욱 거듭나길 바라며 다음호도 기쁜 마음으로 기다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