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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란 무엇인가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8월
평점 :
출근길 책을 꺼내 몇 장을 넘기는데, 느낌이 왔다. '내 취향이다. 그런데 좋은 책이다'라는 생각이 스치며, 동시에 걱정되었다. 《공부란 무엇인가》를 처음 읽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첫 설렘이 모두 끝난 뒤에 아쉬워할 내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만사 모든 걱정은 기우일 뿐이다.
책을 정독하는 데 쓸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빠른 속도로 다독하여 정독의 대상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읽는다. 아르헨티나 소설가 보르헤스는 말했다. "가장 행복한 것은 책을 읽는 것이에요. 아, 책 읽기보다 훨씬 더 좋은 게 있어요.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것인데, 이미 읽었기 때문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고, 더 풍요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_ <정신의 날 선 도끼를 찾기 위해서> 중에
내 취향에 딱 맞는 정독의 대상을 찾았을 뿐이었다.생각해보니 큰 행운이었다. 1년에 수많은 책을 읽지만, 그중에 정독을 결심하게 하고, 다시 읽기에 들어가는 책은 10권 남짓이었다. 《공부란 무엇인가》는 2020년에 만난 5번째 정독하고 싶은 책이었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로 지적 언어유희가 무엇인지 보여준 김영민의 신작 《공부란 무엇인가》는 '공부'라는 주제로 대학 강의와 비슷한 골자로 구성된 책이다. 전작은 어디서부터 읽어도 상관없었으나, 이 책만큼은 순서를 지켜 읽으면 더 좋은 책이다. "수업에는 장기적인 흐름이라는 게 있으므로".
개인적으로 앞부터 뒤로 넘어가는 순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얼개를 가진 책을 좀 더 좋아한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페이지가 많이 쌓일수록 내 삶에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세상을 조금 더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을 부르는 책, 그런 책이 나는 좋다. 《공부란 무엇인가》는 그런 책이었고, 심지어 마무리까지 잘 맺은 좋은 책이자 수업이었다. (개인적으로 몇 부분은 불편했지만)
섬세함은 사회적 삶에서도 중요하다. 섬세한 언어를 매개로 하여 자신을 타인에게 이해시키고 또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훈련을 할 때, 비로소 공동체를 이루고 살 수 있다. 거칠게 일반화해도 좋을 만큼 인간의 삶이 단순하지 않다. (중략) 섬세한 언어야말로 자신의 정신을 진전시킬 정교한 쇄빙선이다.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고 싶다면, 다른 세계를 가진 사람을 만나야 하고, 그 만남에는 섬세한 언어가 필수적이다. _ <정신의 척추 기립근을 세우기 위해서> 중에
이 책이 좋은 책인 이유는 제목에서 '공부'를 논하겠다고 선언한 말을 끝까지 지켜나갔기 때문이다. 공부란 무엇인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공부에 임하는 자세가 왜 저마다 다른지, 공부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공부할 때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어떻게 공부를 즐길 수 있는지 그러다 결국 공부가 어떻게 우리를 변화시키는지 등의 주제로 정교하게 옮겨간 글은 유머러스한 문장을 빌려 날카롭게 생각을 찌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공부에 매진해본 사람만이 제대로 쉴 수 있습니다."
찔린 생각을 한 번에 다 정리하기란 쉽지 않다. 다시 읽으며 조각난 생각을 다시 이어붙이고 때론 채우지 못한 나의 논리를 탄탄히 세울 필요를 느꼈다. 그러기 위해 사랑에 빠진 듯 반한 이 책과 거리를 두어야겠다. 저자의 생각과 내 생각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을 가질 수 있도록. 내 생각을 놓치거나, 저자의 생각에 압도당하지 않도록. 잠시 이 책에 대한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담이지만 나는 책을 다 읽고서 서평 쓰기를 한 5분 정도 망설였다.
"모든 코멘트와 비평이 그렇듯이, 그 서평은 서평 대상이 된 책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만큼이나 그 서평을 한 사람에 대해 무엇인가 의미심장한 것을 말해준다. 서평은 서평 대상이 된 책뿐 아니라 서평자 자신의 지력, 매력, 멍청함, 편견 등을 대대적으로 홍보할 좋은 기회다."
이 문장 때문이었다. 이 서평으로 나의 멍청함과 편견이 드러나도 어쩔 수 없다. 이 책이 아니어도 이미 충분히 드러났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