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미화되었다
제페토 지음 / 수오서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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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페토 시인의 시를 처음 만난 건, 《그 쇳물 쓰지 마라 》에서였다. 뉴스와 나란히 놓인 시를 처음 만났을 때, 마음을 찌르르 떨게 하는 시에 멈칫 멈추곤 했다. 뉴스와 나란히 놓인 시는 시를 먼저 읽고 뉴스를 읽어도 뉴스를 읽고 시를 읽어도 마음을 아릿하게 울렸고,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그때 느꼈다. SNS에 글 잘 쓰는 사람이 참 많고 잘 쓴 글도 많지만, 잘 쓴 글과 마음을 울리는 글이 무엇이 다른지. 제페토 시인의 시로 난 경험했고, 시인의 다음 시집을 기대하고 기다렸다.

제페토 시인이 시를 쓴 지 10년이 되는 해에 나온 《우리는 미화되었다》는 《그 쇳물 쓰지 마라》 이후 6년간의 기록이 담겨 있는 시집이다. 2016년에서 2018년까지 그리고 2018년에서 2020년까지. 헤아리면 6년의 세월인데, 벌써 6년이나 지났나 싶어 놀랐다. 지난 6년이 그 이전과 비슷하게 흐른 것 같아 서글펐고 달라진 것 없는 오늘의 모습에 씁쓸했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서문을 처음 읽었다.

댓글의 부작용을 오랫동안 지켜본 탓일까. ˊ를 읽고 거침없이 글을 써 올렸던 과거와 달리 비판적인 시각으로 자기 검열하기 시작했다. 내게 있어 댓글은 손쉬운 유희가 아닌,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할 목소리가 된 셈이다. (중략) 말(글)은 가시 돋친 생명체다. 밖으로 내보내기 앞서 구부리고 깎고 표면을 다듬지 않으면 필경 누군가를 다치게 한다.
_ 서문 <소풍 전날 밤 같은 시간이 우리를 견디게 한다>

달라지지 않은 상황이 시에 담겨 있었지만, 6년이란 시간 동안 달라진 제페토 시인의 마음이 서문에서 전해졌다. 댓글로 건네는 시에 자기검열을 시작한 만큼, 그러한 성찰을 일깨운 만큼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비슷해 보이는 우리 삶의 궤도가 달라져 있다고 믿고 싶었다.

손 뻗으면
닿을 거리였지만
한 줌 움켜쥐니
틈새로 도망쳐버렸습니다.
아마도 별빛이
매끄러워서겠지요.
<빛나는 것의 속성>중에..

유독 별자리, 밤하늘에 대한 시가 많아서일까. 시집이 나는 마음에 별자리를 만들어주는 것만 같았다. 작지만 우리가 발견해야 할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 따뜻한 면을 하나둘 발견해 시로 이어나간 시집은 6년이란 장대한 시간에 새긴 별자리였다. 캄캄한 밤, 어둠에 익숙해져야 더 밝게 보이는 별처럼.
어두운 시간을 깊이 들여다보며 쓴 마음 무거운 시와 그 마음에 잔잔한 미소를 부르는 시를 함께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절망하게 하는 모습만이 아니라 희망을 품게 하는 모습도 함께 있어 다행이라고.

그림자가 사라질 수 없듯이, 절망하게 만드는 일은 계속 있을 것이다. 굵직한 이슈는 사라지지 않고 우리 삶에 계속해 엄습할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조금 더 따뜻한 손길이, 서로에게 다정한 안부를 묻는 말이 필요하다. 하지만 마음이 갈라지고 매마르는 일상에 두 손은 움츠러들어 주머니에 감추기 바빴고, 귀는 에어팟으로 매웠고, 건네야 했던 많은 말을 삼키기 바빴다. 저마다 달랐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랬었다. 《우리는 미화되었다》 속 시에는 내가 지나치고 삼켰던, 하지만 세상에 존재해야 했던 말이 글로 남겨져 있었다.

인터넷에서 정말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고, 그 정보 대다수는 금방 잊힌다. 난 다정하고 따뜻했던 시보다 쉽게 잊어버린 절망이 머물고 간 일을 쉬이 잊어버리고 무뎌진 나를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다. 억울한 죽음, 참담한 삶을 쉬이 지나친 내가 시를 읽는데 보였다.
2020년,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너무 많이 쏟아지고 잊힌 시간에 휩쓸린 나를 돌아보고, 마음을 챙기는 시간이 아닐까.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뉴스에 남아있던 댓글 시에서 우리가 지나칠 수 없는 사연에 멈추고, 삼키지 않고 무어라 말해야 하는 감정을 돌아보면 어떨까?

유독 힘들었던 올해, 나만큼 힘들었을 누군가의 마음을 살펴보는 시간. 제페토 시인의 《우리는 미화되었다》가 그 시간을 만들어주리라 확신한다. 그 시간이 지금을 미화하지 않을, 아름다운 시간이 아닐까 싶다.

※ 본 서평은 수오서재 마케터가 진심을 담아 쓴 글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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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화되었다
제페토 지음 / 수오서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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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페토 시인의 시를 처음 만난 건, 《그 쇳물 쓰지 마라 》에서였다. 뉴스와 나란히 놓인 시를 처음 만났을 때, 마음을 찌르르 떨게 하는 시에 멈칫 멈추곤 했다. 뉴스와 나란히 놓인 시는 시를 먼저 읽고 뉴스를 읽어도 뉴스를 읽고 시를 읽어도 마음을 아릿하게 울렸고,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그때 느꼈다. SNS에 글 잘 쓰는 사람이 참 많고 잘 쓴 글도 많지만, 잘 쓴 글과 마음을 울리는 글이 무엇이 다른지. 제페토 시인의 시로 난 경험했고, 시인의 다음 시집을 기대하고 기다렸다. 


제페토 시인이 시를 쓴 지 10년이 되는 해에 나온 《우리는 미화되었다》는 《그 쇳물 쓰지 마라》 이후 6년간의 기록이 담겨 있는 시집이다. 2016년에서 2018년까지 그리고 2018년에서 2020년까지. 헤아리면 6년의 세월인데, 벌써 6년이나 지났나 싶어 놀랐다. 지난 6년이 그 이전과 비슷하게 흐른 것 같아 서글펐고 달라진 것 없는 오늘의 모습에 씁쓸했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서문을 처음 읽었다. 


댓글의 부작용을 오랫동안 지켜본 탓일까. 늇를 읽고 거침없이 글을 써 올렸던 과거와 달리 비판적인 시각으로 자기 검열하기 시작했다. 내게 있어 댓글은 손쉬운 유희가 아닌,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할 목소리가 된 셈이다. (중략) 말(글)은 가시 돋친 생명체다. 밖으로 내보내기 앞서 구부리고 깎고 표면을 다듬지 않으면 필경 누군가를 다치게 한다. _ 서문 <소풍 전날 밤 같은 시간이 우리를 견디게 한다>


달라지지 않은 상황이 시에 담겨 있었지만, 6년이란 시간 동안 달라진 제페토 시인의 마음이 서문에서 전해졌다. 댓글로 건네는 시에 자기검열을 시작한 만큼, 그러한 성찰을 일깨운 만큼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비슷해 보이는 우리 삶의 궤도가 달라져 있다고 믿고 싶었다. 



손 뻗으면 

닿을 거리였지만


한 줌 움켜쥐니

틈새로 도망쳐버렸습니다.


아마도 별빛이 

매끄러워서겠지요.


<빛나는 것의 속성>중에..



유독 별자리, 밤하늘에 대한 시가 많아서일까. 시집이 나는 마음에 별자리를 만들어주는 것만 같았다. 작지만 우리가 발견해야 할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 따뜻한 면을 하나둘 발견해 시로 이어나간 시집은 6년이란 장대한 시간에 새긴 별자리였다. 캄캄한 밤, 어둠에 익숙해져야 더 밝게 보이는 별처럼. 

어두운 시간을 깊이 들여다보며 쓴 마음 무거운 시와 그 마음에 잔잔한 미소를 부르는 시를 함께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절망하게 하는 모습만이 아니라 희망을 품게 하는 모습도 함께 있어 다행이라고. 


그림자가 사라질 수 없듯이, 절망하게 만드는 일은 계속 있을 것이다. 굵직한 이슈는 사라지지 않고 우리 삶에 계속해 엄습할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조금 더 따뜻한 손길이, 서로에게 다정한 안부를 묻는 말이 필요하다. 하지만 마음이 갈라지고 매마르는 일상에 두 손은 움츠러들어 주머니에 감추기 바빴고, 귀는 에어팟으로 매웠고, 건네야 했던 많은 말을 삼키기 바빴다. 저마다 달랐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랬었다. 《우리는 미화되었다》 속 시에는 내가 지나치고 삼켰던, 하지만 세상에 존재해야 했던 말이 글로 남겨져 있었다. 


인터넷에서 정말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고, 그 정보 대다수는 금방 잊힌다. 난 다정하고 따뜻했던 시보다 쉽게 잊어버린 절망이 머물고 간 일을 쉬이 잊어버리고 무뎌진 나를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다. 억울한 죽음, 참담한 삶을 쉬이 지나친 내가 시를 읽는데 보였다. 

2020년,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너무 많이 쏟아지고 잊힌 시간에 휩쓸린 나를 돌아보고, 마음을 챙기는 시간이 아닐까.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뉴스에 남아있던 댓글 시에서 우리가 지나칠 수 없는 사연에 멈추고, 삼키지 않고 무어라 말해야 하는 감정을 돌아보면 어떨까?


유독 힘들었던 올해, 나만큼 힘들었을 누군가의 마음을 살펴보는 시간. 제페토 시인의 《우리는 미화되었다》가 그 시간을 만들어주리라 확신한다. 그 시간이 지금을 미화하지 않을, 아름다운 시간이 아닐까 싶다. 

 

2020년 11월에 난 이 시를 읽다가 울컥했다. 



죽음의 경계를 지키는 초병이 되어 

마음이 여린 신의 명을 

받들 수 있다면.


허술한 담장을 넘나들며

번개탄을 치우고

밧줄을 숨기고

옥상 문을 잠그고

낯빛이 불안한 이들을 

내쫓을 수 있다면.


세상은 언제나 해가 붉은 오후 여섯 시.

눈뜨면 다시 감고픈 이곳에서

내 머무는 동안 누구라도 함께

불안한 밤을 지켜낼 수 있다면.


늦은 아침에 아무도

발견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할 수 있다면>


​※ 본 서평은 수오서재 마케터가 진심을 담아 쓴 글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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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하는 정신 -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유유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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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하는 정신》을 읽었지만, 무엇으로 어떤 부분에 위로가 되는지 확 와닿지 않는다. 부제는 그의 일대기에서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미지근하게 좋아하던 작가를 정확하게 올바른 순간에 발견할 때의 현상을 알고 계시지요. 체념과 물러남의 대가이며 스승인 작가를 말입니다."라는 원서 편집자 후기로 궁금증에 마침표를 찍었다. 하지만, '위로하는 정신'이란 제목은 여전히 물음표가 남아 있다.

자신의 가장 내밀한 자아, 자신의 '본질'을 혼탁하고 독성이 짙은 시대의 거품에 뒤섞이지 않도록 깨끗하게 지키기 위해 그보다 더 정직하고 격렬하게 싸운 사람은 세상이 드물고, 내적인 자아를 자기 시대에서 구하여 모든 시대를 위해 보존하는 데 성공한 사람도 드물다. _ 34쪽

《수상록》을 읽지 않았지만, 에세이란 장르에서 몽테뉴의 문학적 의의는 매우 높다. 그가 중요한 사람임은 알지만, 왜 중요한 사람인지는 몰랐다. 책을 읽으며 개인주의자로 살고 싶었던 한 사람의 인생을 짧게 보았다. 그의 글과 그 안에 수없이 반복되는 자신에 대한 물음표와 그 대답을 슈테판 츠바이크가 간추린 책을 읽으며 《수상록》이 궁금해졌다.

라틴어를 자연스레 익힐 수 있었던 교육환경, 학교에 대한 그의 관점, 책을 읽는 자세, 갑작스러운 유럽 여행과 공직 생활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그의 관심을 끌었던 것, 그가 알고 싶었던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자아만 들여다보도록 세상은 그를 두지 않았다. 종교전쟁, 페스트, 국가의 부름 등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분투는 점점 체념과 달관의 모습을 보인다.

그가 자기 자신에게 가닿기 위한 분투는 일생에 거쳐 지속하나 미완으로 끝난다. 그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완전하게 닿을 수 없는 목표다. 페스트가 창궐할 때 소시민을 버리고 자신의 안위만을 고려한 시장의 모습, 왕의 부름이 싫어서 자살을 고민하는 실망스러운 과정 등. 그는 정당할지 몰라도 난 그의 얼룩진 모습인 것만 같아 놀라기도 했다. 자기 자신을 최우선시하는 태도가 이따금 나에겐 이기심으로 보였다.

그는 "국가나 가족, 시대, 상황, 돈, 소유 등에 속하지 않는 자신의 참된 자아"를 탐구했다. 그 자아에 대해 "아무도 그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자아"임을 선을 긋고 생각에 잠겼다. 내적인 자아를 추구하고 있지만 그런 노력을 했다는 것을 그 누구도 제대로 모를지도 모른다. 내가 이따금 보았듯, 결점이 많고 혼란스러운 흔적으로만 기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 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정직하고 단호했고, 결점의 순간에도 그는 그런 자신에게마저 정직하고 단호했을 것만 같다.

몽테뉴의 삶을 보면 스스로조차도 알아보지 못하는 자아에 수없이 반복되는 질문과 물음표에 때론 답을 때론 물러나고 체념하곤 했다. 돌파하겠다며 나아가기보다 멈추는 순간이 많았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그 멈추는 순간에도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선을 고찰하며 나로 살아간 몽테뉴의 삶이 있음을 말한다. 그의 일생 곳곳에 나로 나아가는 발돋움은 슬금슬금 도망치기도 하며, 때론 홀로 존재하는 고독으로 단단히 발밑을 다졌다.

그럼 일생이 우리에게 '위로하는 정신'이 되는 것일까. 난 여전히 물음표가 남았고, 물음표 뒤에 대답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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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부르는 이름
임경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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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영화 같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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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부르는 이름
임경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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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같았다. 잔잔한 독립 영화 한 편을 읽은 것만 같았다. 서른 여섯 살의 수진과 그녀보다 여덟 살 많은 혁범과 그녀보다 여덟 살 어린 한솔. 세 사람의 관계는 정말 어디선가 본듯한 익숙한 느낌이었다.

'나'보다 '너'를 연민하는 마음.

'나'보다 '너'가 마음이 아프거나 상처 입을 것을 먼저 걱정하는 마음.

'너'가 '나'의 마음에 보답해주지 못한다 해도 기꺼이 먼저 '나'를 내어주는 마음.

'나'의 가혹함을 덜어내고 '너'의 취약함과 불완전함을 끌어안는 마음.

아마도 그런 마음들이 다름 아닌 사랑의 감정일 것이다.

_ 작가의 말 중에..

소설을 읽으며 난 어딘가 덜그럭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주인공 수진의 마음이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마감이 매끄럽지 않은 사기그릇과 그 뚜껑의 합을 천천히 맞추어가는 느낌이었다. 묵직한 도자기를 천천히 돌려 그릇의 합이 딱 맞는 순간을 맞추어가는 듯한 느낌. 조금은 거친 도자기의 질감이 움직이는 동안 깎아지고 맞춰져서 어느 순간 덜그럭 맞아들어가는 듯한 과정이 보였다. 사랑하는 건 여간 쉽지 않고, 받기도 쉽지 않아 어디에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수진이 마음을 놓을 자리를 찾아가는 이야기였다.

난 수진이 누구와도 이루어지지 않길 바랐다. 모두 수진에게 맞지 않는 사람인 것만 같았다.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수진이 혼자 자신을 좀 더 끌어안는 시간을 가지길 바랐다. 정말 그랬다.

그러나 미움은 사랑의 모습을 닮아 있기도 했다.

애초에 사람과 사람 간의 만남은 첫순간에 이미 사랑하는 역할과 사랑받는 역할로 정해져버리는 것을까. _ 83쪽

혁범의 사랑은 수진에게 서운함과 충만하지 않은 느낌을 주었다. 사랑하지만 외롭다고 느끼는 불안함을 주는 사람이었다. 한솔의 사랑은 수진에게 벅참과 당혹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사랑을 받을수록 부담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둘 다 그녀에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좋은 사람과 만나면 좋지만, 역시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오면 모두가 말리고 머리로 안 된다 생각해도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래서 나도 (굳이 선택해야 했다면) 혁범이었을 것이다.

한솔은 내내 부담스러웠다. 그의 사랑은 받는 것에서 하는 것으로 넘어가 지지 않고, 받을 때마다 고맙기보다 미안하단 생각이 자꾸만 드는 사람이었다. (낯설지 않았다. 그의 모습)

그의 더할 남위 없던 진심을, 완벽한 모양을 한 그 사랑을. 그리고 어쩌면 그래서 두려워했던 자기 자신을 _ 213쪽

내가 느낀 한솔은 쉽게 이해받는 사람보다 오해를 받아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수진을 좋아하는 감정에 지나칠 만큼 솔직해서 그의 편지와 행동과 말에 쉽게 이해란 말을 붙일 수 없었다. 그래서 오해하기도 쉬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을 만큼 한솔은 수진을 좋아했고, 오해를 받아도 괜찮았던 모양이다. 작은 바람을 가지자면 한솔이에게도 그의 마음에 잘 맞아들어가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까. 난 누군가에게 쏟은 사랑이 그 사람에게 닿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언젠가 다시 쏟은 이에게 돌아온다고 믿는다. 소설에서 "더할 나위 없던 진심을, 완벽한 모양을 한 사랑"을 한솔은 당연히 그런 사랑을 받을만한 인물이었다.

(여담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앞에 서면, 우리는 늘 조금씩 긴장하는 것 같다. 행여 그가 부서지기라도 할 것처럼 조심조심, 부드럽고 사려 깊게 말을 건네려고 애쓴다"라는 작가의 말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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