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진실을 말하는가 -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 쓴 음모론과 위험한 생각들
캐스 선스타인 지음, 이시은 옮김 / 21세기북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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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

 

 

컨스피러시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번뜩했다. 음모, 음모론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다. 반대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지난 이명박 정권에서부터 음모론이 횡행했다. 사람들은 음모론에 열광했다. 일부에서는 음모론 열광을 넘어서 신봉, 신앙, 빠, 팬덤 현상에까지 이르렀다고 어설프게 계몽하려 든다. 나는 그들을 가장 경멸한다. 음모론의 주체가 되는 국가나 정부, 여당, 기득권, 정보기관에서 부인하고 협박하고 고소하고 고발하고 하는 것들은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음모에 대한 진위를 판단하는 과정까지 가면 불리한 것은 그들이니까. 그런데 그런 음모론에 무작정 팬이 되고 그것에 휘둘리고 그것에 빠져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인식과 행동을 하지 못한다고 까대는 진보입네 하는 입쟁이들의 비난에는 구역질이 난다. 나꼼수 이야기다. 나꼼수가 엄청나게 큰 인기를 얻고 실제로 정치판의 지형을 새롭게 재편하기도 하고 아젠다 설정 능력을 단번에 획득하기 하면서 사람들은 기존의 언론과 기존의 진보적 지식인들에 집중하지 않았다. 이것을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공격? 내지는 밥그릇을 뺏어 가는 폭력?으로 인식되었나 보다. 엄청나게 까기 시작했다. 2012년 대선에서 결국 선거에 패하게 되자 이 공격은 노골적이고 집요하게 대중을 갈라놓았다. 그러게 봐라~ 그런 음모론에 빠져 있다 보니까 선거에서 지지 않았냐? 무지몽매한 대중을 음모론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책임을 져라! 지랄도 풍년이다.

그들의 논리의 핵심은 대중의 무지몽매다. ‘대중(국민, 유권자, 시민 모두를 포함한 개념)은 부유하는 존재고 계몽해야 할 존재’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자세다. 음모론만 주구장창 떠들어 내는 나꼼수로 인해 더 이상 그들의 입을 대중이 소구하지 않게 되자, 떼로 달려들어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방송이 종영된 지 4년이 지난 지금도, 종종 진보 입쟁이들은 나꼼수와 팬덤현상을 가지고 씹고 비틀며 즐긴다. 아니, 팬덤현상의 중심에 있던 팬들이 그렇게 너희들 생각하는 것처럼 무지하거나 몽매하지 않다고!! 이 양반들아! 우리도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논리로 충분히 사건과 사안을 구별하고 해석할 줄 안다고!! 입만 놀리는 입쟁이들아!!

아무튼, 나꼼수가 제기한 음모론 중에서 사실로 입증된 것도 있고 여전히 음모론의 범주에 속해 있는 것도 있다. 두고 볼 일이다.

이 책은 제목에 컨스피러시가 들어가 있었지만 결코 음모론만을 다루는 책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내용도 어려웠다. 내가 기대하던 내용이 전혀 아니었지만 이전까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도 있고, 미래에 화두가 될 만한 내용도 있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음모론은 우리 주위 어디에나 있다. 2004년 8월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뉴욕 시민의 49퍼센트가 미국 정부 관료들이 ‘2001년 9월 11일 즈음에 계획된 공격을 사전에 알고도 의도적으로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다.” (p.21)

 

 

9.11테러를 슈퍼마켓에서 지켜봤다.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취방 근처 슈퍼에 들렀다. 뭘 사려고 들렀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슈퍼에 들어오는 손님에게 과할 정도로 친절하게 인사하던 사장 아저씨가 인사를 하지 않고 TV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TV를 봤다. 처음에는 영화인 줄 알았다. 세계 경제 중심을 상징하는 맨하탄의 쌍둥이 빌딩이 화염에 휩싸인 장면은 지극히 영화적이었다. 영화적일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상상 속에서, 영화 속에서나 일어날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CNN 브레이킹 뉴스를 그렇게 오래 쳐다본 것은 처음이었다. 좁은 슈퍼에 들어오는 학생들 모두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데 9.11테러에 대해서도 뭔가 음모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미국 국민이 많다고 한다. ‘진실’이라는 것이 드물게 발견되고, 그것의 힘이 어떤 것인지 모호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음모론을 쉽게 마주하게 된다. 일단 재미있고, 뭔가 수상하고 미심쩍고 앞뒤의 논리가 잘 맞지 않는 일을 마주하면 아드레날린이 방출된다. 재미있으니까.

 

 

“사람들은 늘 그렇듯이 이 경우에도 자신의 많은 신념들 간에 모종의 균형 상태를 추구하므로, 음모론의 수용이나 거부도 대체로 둘 중 어느 쪽이 인식의 균형 상태를 유지시켜주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p.39)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음모론은 늘 존재하고, 존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 그 음모론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은 각자 나름의 균형 상태를 추구하므로 별로 결정할 바가 아니라는 것. 한국의 진보 입쟁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앞으로 굳이 나꼼수 같은 방송이 나오지 않더라도 음모와 음모론은 넘쳐 날 것이다. 며칠 전에 있었던 청문회에서도 총리후보자로 지명된 사람이 자신을 둘러싼 음모라고 했는데, 몇 가지 증거가 나오자 바짝 엎드려 사과하지 않았나? 황우석 같은 사람의 사기사건도 일부에서는 황우석과 그의 기술을 세상에 내놓지 못하게 하려는 집단의 음모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수용과 거부는 각자의 균형에 맡겨야 하는 것이다. 옆에서 왈가왈부 할 일이 아니다.

 

 

동물권

 

 

아파트 같은 통로에 사는 아줌마가 개를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개가 이를 그르렁 거리더니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열리자 나를 보고 짖었다. 나는 아줌마에게 이야기했다. 공공장소에 개를 데리고 나올 때는 꼭 목줄을 하시라고. 아줌마는 알았다거나 미안하다거나는 말없이 자신의 개를 나무랐다. 00야! 왜 그래~ 이리와!. 개를 기르는 것은 자유다. 개를 기르는 것을 싫어하는 것도 자유다. 개를 공공장소에 데리고 나오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공공장소에서 개가 마음대로 뛰어 다니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싫은 일이다. 그래서 목줄을 반드시 착용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반려동물을 키워보지 않았다. 앞으로도 키울 일은 없을 것이다. 특별히 동물을 사랑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지만 반려동물을 키워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그런데 동물들에게도 권리가 있다고?

생소한 말과 개념이다.

 

 

“2002년에 독일은 국가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헌법 조항에 ‘그리고 동물’이란 문구를 추가해, 유럽 최초로 헌법상 동물권을 보장하는 국가가 되었다.” (p.130)

 

 

‘역시 독일이다’라고 감탄해야 할까? 한국에서는 동성애를 포괄적 인권 개념에 넣는 것조차 불을 켜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물며 동물에게? 헌법 조항에 ‘그리고 동물’이라는 문구를 추가하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헌법 조문에 다섯 글자 추가하는 행위 자체는 별거 아니지만 사회적·문화적 합의가 선행되어야 할 일이다. 독일은 그만큼 앞서 있는 것이다. 동물의 권리를 보호하는 조항을 헌법에 추가한 공동체에서의 인권은 우리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 할지도 모르겠다.

 

 

“가장 핵심적인 이슈는 육식이다. 나는 식용동물을 온당하게 처우하는 한, 육식이 허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식용동물이 끔찍한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인간이 육식을 삼가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것이다.” (p.139)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육식의 문제.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이어 온 인류의 패턴이다. 육식이 죄악시 되는 것도 문제다. 채식의 범위와 규정 자체에 대한 한계도 엄연히 존재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채식인지 딱 잘라 규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인류의 육식을 위해 사육되고 가공되며 유통되는 동물의 환경이 처참한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쉽게 바꾸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에서 표현된 도살장의 모습은 지금도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 더 많이, 더 빨리 인간에 의해 소비되기 위해 항생제를 맞고 성장 촉진제가 함유된 사료를 먹고, 최소한의 동물다운 아니, 생명체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한 채 도살되는 동물들의 권리. 논의가 되고 토론이 되어야 하는 문제다. 어쩔 수 없잖아. 라는 책임 회피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자연은 실로 가혹한 서식 공간이라, 많은 동물이 야생에서보다 인간과 함께할 때 더 오랫동안 잘 살아 간다. 물론 오래 산다고 더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훌륭한 동물원은 멸종 위기에 처한 종을 보호하는 번식 프로그램이 있고, 동물들을 잘 보살펴주며, 사람들에게 자연과 동물의 가치를 교육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실제로 동물원에 갇혀 지내더라도 인간의 도움을 받아 본래의 서식지에서보다 훨씬 더 나은 생활을 하는 사자, 코끼리, 기린, 돌고래를 떠올려 볼 수 있다.” (p.142)

 

 

이런 견해도 합리적이다. TV의 동물 다큐멘터리에서는 낭만적으로 그려지는 사바나에서의 추격전. 굶주린 암사자가 가젤을 사냥하기 위해 벌이는 추격전. 사자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반대로 뛰기 시작하는 가젤 무리. 흙먼지. 가젤의 튼튼한 다리에서 전해지는 근육. 생동감. 같은 것들은 낭만적인 무책임이다. 살기 위해 뛰는 것이다.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 뛰는 것이다. 마침내 암사자에게 목덜미를 물린 채 매달린 어린 가젤을 멀리서 지켜 볼 수밖에 없는 비참함은 앵글에 담기지 않는다.

동물원에 갇힌 동물이 아니라, 동물원에서 생활하는 동물이라고, 생각을 전환해 보면 저자의 주장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다. 어쨌든 동물원에서는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으니까. 사파리 우리를 타고 넘어 가젤이 모여 있는 곳까지 찾아와 사냥을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야생에서 본연의 모습으로 사는 사자, 코끼리, 기린, 가젤의 모습보다 동물원에서의 모습이 더 행복한 걸까? 사실 이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입장은 달라진다. 주장도 달라질 테고.

음모론과 동물권 말고도 여러 가지 현대 사회의 논쟁거리가 담긴 이 책, 읽을 만하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문장이 어려웠다는 점이다. 내용이 어렵다기 보다 문장이 어려웠다. 전형적으로 법을 전공한 사람이라서 그런가? 번역의 문제인가? 문장이 조금 더 쉽고, 딱딱하지 않았다면 이해가 더 쉬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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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갈트의기사 2019-09-18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에 굴복하는 머슴 종자들이나 보슈
 
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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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전히 눈 감고 있다.

세월호 유족들이 서울에서부터 진도 팽목항으로 도보 행진을 하고 있다. 엄동설한에 걸어간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얘기인데, 유족들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나 보다. 그렇다. 아무것도 된 것이 없다. 차라리 무지렁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들이 비아냥대고 비난하고 힐난했다. 초코바를 던지고 치킨을 처먹고, 힘 있는 놈들은 입 놀리기에 바빴다. 조사위원회라고, 억울함을 들어주겠다고, 진상을 밝히겠다고 한 놈들은 이미 관심 밖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들딸을 가슴에 묻은 핏자국을 드러낸 채 걷고 있다. 당연히 그렇듯이 보도하는 언론이 없다. 그렇다. ‘전원구조’라는 역사 상 최악의 오보를 쏟아도 반성이 없다. 이제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다 된 거 아니냐는, 이제 그만하라는 먼지처럼 부유하는 떠돌이 잡탕 쓰레기들을 옮기는 것으로 처세를 다하고 있는 모양이다. 서울끝에서 남쪽 바다 끝까지 걸어가는 슬픈 무리에 대해 우리들의 관심은 전무하다. 가끔 트위터로 전해지는 소식이 전부다.

그렇다. 우리는 여전히 눈 먼 자들이다.

 

 

 

“바다는 잔잔했다.”

“그래서, 더 잔혹했다.” (박민규 <눈먼 자들의 국가> 중, p.49)

 

그렇다. 잔잔했다. 그래서, 더 잔혹했다. 오랜 시간 봐 온 동해바다와는 다른 색깔이었다. ‘시커멓다’라고 할 수는 없는 거무칙칙한 색깔이었다. 수심이 엄청 깊은가 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깊은 바다는 아니었단다. 그래서 오히려 더 빨리, 더 많이, 더 안정적으로 구조해 냈어야 했다. 세월호가 좌초된 곳이 반도에서 가장 물살이 센 곳이라는 말도 쏟아졌지만 실제로 거꾸로 가라앉은 곳의 물살은 세지 않았다. 작은 배, 해경의 배가 거꾸로 가라앉고 있는 세월호에 근접한다는 것이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접근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특종을 잡아내기 위해 있는 카메라를 다 동원해 전국에 생중계한 당시를 떠올려보면 주변 어민들의 작은 어선은 아무런 위험 없이 선미에 접근해 사람들을 구조했다. 국가로 상징되는 해경의 작은 배는 웬일인지 선미가 아니라 선원들이 있는 선수로 갔다. 그들만 구했다. 당시 그 화면을 중계로 보고 있었다. 어? 해경이 구조하네? 싶었다. 사람들을 구했으니 다시 접근해서 구조하면 다 구하겠다 싶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배는 다시는 세월호 곁으로 가지 않았다.

곁을 지키지 않았다.

 

그렇다. 우리들도 그들의 곁을 지키지 않았다.

4월16일. 5월16일. 6월16일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관심도 멀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자위했다. 나도, 나도 살기가 너무 힘들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렇게 할 말은 이미 준비되어 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부족했다.

 

 

“당신들은 너무 많은 거짓말을 했다.” (박민규 <눈먼 자들의 국가> 중, p.60)

 

 

그들만의 잘못일까? 맞다. 그들의 잘못 맞다. 세월호가 가라앉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온통 거짓말로 그들의 잘못을 대체하고 있다. 그 거짓말이 입과 귀를 가려버린 언론에 의해 진실인 것처럼 포장되어 투사된다. 지속적, 반복적으로 노출된 대중은, 우리는 거짓이 이제 무엇인지도 모르는 지경이 이르렀다. 거짓을 찾아내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 이야기 하고 옳은 것으로 바꾸고자 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니까. 그래서 유족들이 지금 걷고 있는 것이다. 정부도, 법원도, 국민도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니까. 도와주지 않으니까. 곁을 내주지 않으니까. 무작정 걷고 있는 것이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

맞다. 그래서 슬프다. 참 슬프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내 경우 4월 16일 이후로 말이 부러지고 있습니다.” (황정은 <가까스로, 인간> 중, p.88)

 

 

소설가의 손이 부러지지 않고 말이 부러져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실소도 나오지 않는 가슴 막막한 표현이다. 황정은 작가의 책을 읽고 싶은데, 읽지 못하고 있다. 팟캐스트 방송을 통해 작가의 이름을 알게 되고, 방송을 통해 소개되는 작가 자신의 캐릭터와 작가의 작품이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책은 두 권 사두었는데 읽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런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황정은 작가의 책을 읽으면 더 우울해지고 슬퍼지고 막막해질 거 같아서 인지, 생각보다 작품은 좋지 않을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 때문인지 모르겠다. 세월호를 두고 표현한 “말이 부러지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에 가슴이 멈춘다. ‘이런 식의 표현이 넘치는 소설이라면 정말 읽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정말?

 

 

“세월은 돌이킬 수 없게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버렸다. 나 역시 그 세계에서 발을 뺄 수가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만들어버렸다. 어른들을 향해서, 당신들은 세계를 왜 이렇게 만들어버렸습니까, 라고 묻는 입장이 더는 가능하지 않게 된 것이다.” (p.93)

 

 

나도 어른이 된 걸까? 어느덧 나이가 불혹 가까이 가고 있다. 언제 이렇게 나이를 많이 먹었는지 모르겠다. 아직 나이 많은 사람, 기성세대를 향해 욕할 게 더 많고 비판하고 힐난한 게 더 많은데, 벌써 이렇게 되었나 보다. 그리고 황정은 작가의 표현대로 세월호를 가라앉힌 책임에서 나는 자유로울 수 없나 보다. 세월호를 둘러싼 각종 의혹, 국가, 정부, 공권력, 관피아, 해피아, 각종 부패와 나는 불만이 많은 사람이었다. 지금도 불만이 많다. 투덜거리고 비판하는 것 좋아한다. 그런데 내가 욕하고 투덜거리고 비판하던 대상에 어느새 내가 들어갔다는 것이 암울하다. 슬프다.

이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돌이킬 수 있을까?

그런데 뭘로 바꾸는 거지? 어디로 돌이키는 거지?

우린 아무것도 모르는데...

아직도 눈멀어 있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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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류동민 지음 / 코난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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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울을 좋아한다. 우리나라의 수도니까. 모든 것이 모여 있고,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곳이니까.

딸아이가 태어나기 전, 2년 연속으로 서울 여름휴가를 떠났다. 산으로, 바다로, 해외로 나가는 수많은 여행객들을 뒤로한 채 우리부부는 서울로 향했다. 레지던스에 며칠을 묵으면서 서울 곳곳을 여행했다. 아무리 여름휴가 기간이라도 서울은 서울이기에(그만큼 크고, 사람도 많다는)복잡했다. 그래도 보통 사람들의 여름휴가와는 전혀 다른 방식, 나름의 유니크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다는 뿌듯함이 컸다. 그리고 1년에 1-2번 오게 되는 서울은 친척 잔치가 있거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오로지 여름휴가 며칠 전부를 서울에 머물면서 평소에는 TV나 책에서만 보던 곳들을 밟아보고 만져보면서 나름의 휴가를 보냈다. 재미있었다.

잔치나 특별한 업무차, 2년 동안의 여름휴가를 통해 얻게 된 서울의 공통된 이미지는?

복잡하다. 빠르게 움직인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넘쳐 났다. 에스컬레이터에서 계단에서 거리에서 사람들은 너무나도 빠르게 움직였다. 요리조리 사람들 틈을 피해가며 움직였다. 내 걸음으로는 도저히 쫓을 수 없는 영역이었다.

서울에서 만난, 지나친 사람들(물론, 모두 서울에 거주하거나 서울에 직장을 가지고 있거나 서울에서 장사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아니겠지만)은 거의 모두 바빠 보였다. 정말 열심히 사는 것 같았다. 그렇게만 살면 모두들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결코 아니다. 모두들 아는 얘기다.

    

 

“거시적 위험과 불안이 상존하는 사회에서 개인은 누구나 알아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수밖에 없게 된다. ‘알아서 살아남기’, 그러므로 이것은 지금 여기 서울의 공간에서 적용되는 중요한 생존 원칙이다.” (p.278)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알아서 살아남기’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신기한 일이다. 국가가 있고 정부가 있고 지방자치단체가 있는데 말이다. 나라가 통째로 망해 외국의 금융구제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나라는·국가는 국민을 지켜주지 않았다. 수많은 가장이 자기 목숨을 내다 버리는 중에 국가와 나라는 없었다. 아무리 법과 상식에 호소해도 기득권을 깨뜨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옛말이 뼛속에 새겨지는 근래였다. 단숨에 한 가정의 가장의 일자리를 빼앗아도 아무런 제제와 처벌을 받지 않는 천한 자본주의 사회를 살면서 한국인들이 내제화한 진리는 이것이다. ‘국가는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 나는 내가 지켜야 한다.’

작년 삼백 명이 넘는 국민이 바다에 침몰한 여객선에서 죽어가는 상황을 실시간으로 지켜봐야 했다. 두 달 후면 벌써 1주년이 된다. 그런데 왜 여객선이 침몰했는지, 왜 구조를 하지 못했는지, 왜 진상규명의 ‘ㅈ’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지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다. 이런 사안을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지켜봐 온 한국인들은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마음 편하다.

‘맞아, 나는 내가 지키는 거지’

    

 

“사실은 매우 자주, 세상은 구성원 개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스스로의 논리를 가지고 굴러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회사건 가족이건 사람들의 모임 안에서 딱히 내 뜻도 다른 그 누구의 뜻도 아닌 방향으로, 이를테면 제도나 조직이 물 흐르듯 흘러가는 느낌, 그 하나하나의 모든 흐름을 살펴보고 의문을 제기하며 방향을 틀어보려 노력하기에는 자신이 너무도 무력함을 깨닫게 될 때 좌절은 체념으로, 체념은 다시 안일로 바뀐다.” (p.100)

 

노력 → 무력 → 좌절 → 체념 → 안일은 연쇄반응으로 일어난다. 순차적이고 일차원적이다. 중간 과정에서 다른 요소의 직접적 관여는 없다. 노력에서 안일까지는 일사천리다. 이것은 서울사람이든, 대구사람이든 상관없다. 우리는 그런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이 놈의 세상 더러워 죽겠다. 도무지 안 되겠다.’ 라고 생각하지만 갈아엎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못한다. 단 한 번도 기층 국민에서부터 시작된 혁명을 비롯한 시위나 데모 따위가 최고위층의 목을 잘라낸 적이 없다. 경험이 없으니 상상이 불가능하다. 책을 읽고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교육을 받으면 상상할 수 있다고? 구라다. 상상할 수 없다. 인간의 상상력은(특히, 한국인들의 상상력은) 생각보다 협소하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았는데,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왜 그렇게 가만히 있느냐? 왜 대들지 못하고 당하고만 있냐?’라고 하는 것은 폭력이다. 꼰대다.

    

 

“국가브랜드위원회라는 황당한 명칭의 조직이 야심차게 실행한 우측통행 정책의 안전 효과가 천 몇 백억 원이라는 홍보문구를 보면” (p.242)

“곳곳에서 강화되는 배제의 원리는 공간을 격리시킨다. 격리된 공간은 사람과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을 막는다. 공공의 공간, 사회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권리를 갖는 영역은 배제 원리가 확산됨에 따라 점점 줄어든다.” (p.276)

 

갑자기 우측통행을 한다고 난리를 쳤다. 갑자기 신호체계가 바뀐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 우측통행 시행의 가장 큰 이유가 천박한 자본의 논리였단다. 국가브랜드위원회에서 우측통행 정책의 안전 효과가 천 몇 백억 원? 경제학자인 저자의 눈에 얼마나 골 때리는 논리였을까?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정책에 대해 반기를 들거나 비판하는 경제학자들이 없다는 사실이다. 뭐, 그렇다면 그렇지요 뭐, 하고 입을 다무는 것인지, 너무 골 때리고 어이가 없어서 말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G20 정상회담을 하면 몇 조 원의 경제효과가 유발된다는 논리와도 상통한다. 그렇게 공간은 배제를 낳는다. 아무리 골 때리고, 공적 영역을 사적 이익으로 치환하는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얼마 정도의 경제적 효과를 창출하는 것은 분명할 거다. 어쨌든 생산력이나 부가가치의 일정 정도 상승은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 끄트머리 이익조차도 얻을 수 있는 구성원은 대다수가 아니라 극소수 일 테다. 그렇게 자본의 논리는 공간을 나누고 나눠진 공간은 배제를 강화한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저자의 눈에 비친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모습은 강화된 배제의 논리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 책이 바로 그 과정을 담았다. 잘 모르는 서울의 지명과 모습을 생각해보지 않더라도 각자의 고향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에게 아련한 추억을 가져다주는 공간이 그대로 남아 있기 바라면서도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 공간을 스스로 파괴하는 실천도 마다하지 않는다.” (p.27)

 

“엄마, 거기 OO. 땅값 올랐겠네요?”

“그렇겠지. KTX뚫리고 그 근처로 KTX역 들어서니까.”

“거기. 어릴 때 많이 갔었는데...”

 

얼마 전에 어머니와 나눈 대화다.

몇 년 전, 부동산을 하는 지인의 권유로 시골에 땅을 조금 사두셨는데, 그 인근에 KTX가 뚫리고 역이 들어선다고 한다. 안 그래도 시세도 알아보고 할 겸 부동산을 하는 지인분과 다녀오셨다고 했다. 엄청 놀라셨단다. 시내까지 들어오려면 자동차로 30분 넘게 걸리는 곳이라 땅값도 싸고 아파트 값도 쌌는데, 너무 올랐다는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본가 아파트 시세보다 더 올랐다면서 혀를 찼다. 그래도 은근히 기대를 하시는 눈치였다. KTX선로와 역사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인근에 상가가 개발되고 아파트가 많이 들어설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기대가 충족될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쉽다. 부모님이 산 땅에 내 어린 시절 추억이 많다. 아주 어릴 때는 아버지를 따라 간 바다낚시를 마치고 난 후 들리던 아버지 친구 집이 그 근처였다. 잡아온 생선을 회로 먹거나 구이로 먹었다. 아버지 친구 집에는 형들이 있었다. 잘 데리고 놀아줘서 한참을 놀다 밤늦게 돌아오고는 했다. 좀 더 커서는 근처에 온천이 있었다. 중고등학생 시절 공부의 피로를 덜고 스트레스를 풀라며 자주 온천을 찾았다. 온천에 갈 때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나선 바다낚시와 그 후에 꼭 들리던 아버지 친구 분과 친구 분 집, 형들의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한참 지나 온천에도 몇 해째 가지 않고, 더 이상 바다낚시를 다니지 않게 되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게 추억밖에 없는 그 곳 땅값이 오르면 내게도 좋은 일일까? 맞다. 좋은 일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천박한 자본주의 세계를 사는 한국인이니까.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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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평점 :
일시품절


젊은이가 행복하다? 그것도 절망의 나라에서? 이해되지 않는 제목이다. 읽어야 할 책이 아니라면 제목만 보고 지나치고도 남을 만한 책이다. 언뜻 “절망의 나라에서도 꿈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아파도 참으면서 청춘을 즐기며 스펙을 쌓고 자기관리와 자기성찰을 병행하면서 힐링 주사 한 방씩 맞아가며 노력하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라는 흔하디흔한 자기계발서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정말 절망적인 책이다.

지난 대선과 총선을 통해 확인한 바, 일정 정도 투표율을 넘기면 예전 선거에서는 야당 후보의 당선이 유력시 되었다. 하지만 지난번 선거들에서는 모조리 그 법칙이 깨졌다. 20,30대 보다 50,60대가 더 투표를 많이 하게 된 것이다. 선거 후 각종 비난과 비판이 젊은 세대에게 쏟아졌다. 하루 놀러가고, 하루 일하는 거 그거 좀 안 하고 투표를 해야 세상이 바뀌지 언제까지 계속 이런 세상을 살겠냐고.

 

이 책을 해제한 오찬호 선생의 책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를 읽고 받은 충격이 떠오른다. 지성인이고 파릇파릇한 젊은이들인 한국의 대학생들이, 서로가 서로를 차별하고 그것을 정당화하고 계급을 나눠 내면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말 충격이었다. ‘내가 대학 다닐 때는 말이야~’라는 말은 나도 정말 듣기 싫었다. 특히 386들 한테. 그런데 오찬호 선생의 책을 읽고 나도 모르게 ‘나 때와는 정말 다르구나~’탄식하게 되었다. 소위 인서울 해 있는 대학 중에서도 SKY를 제외하고 가장 높은 수준에 있는 대학에 다니는 한 학생의 인터뷰였다. 자기는 한 번도 그 대학을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나는 연세대, 고려대 갈 수 있는데 전공 때문에 여기 온 거야’라고 한다는 것. 지하철에서 다른 학교 학생이 영문으로 학교 이름이 새겨진 야구점퍼를 입은 것을 보면 ‘나보다 못한 학교에 다니면서도 쪽팔리지도 않아’라고 생각한다는 것. 혹시 자신보다 좋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야구점퍼를 입고 있으면 들고 있는 전공서적이나 파일에 담긴 서류를 봐서라도 꼭 전공을 확인한다는 것. 전공이 경영·경상계열이면 그냥 넘어가고 혹시 인문계열이면 ‘풋! 나는 거기 들어가고도 남는 성적이었어.’라고 생각한다는 것.

더군다나 이것이 한 두 학생의 생각이 아니라 20대 대학생들에게 만연해 있다는 것이었다. ‘지역균형발전 특례입학’으로 들어 온 학생에 대해 ‘지균충’이라 비하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일본의 젊은이들은 행복하단다. 정말?

나는 일본이 한국보다 정치·경제·사회·문화·의식 모든 수준에서 20년 정도는 앞서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이미 겪은 버블경제를 따라가고 있고 노동형태나 정치형태도 일본의 이전 20년 정도를 답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책이 주는 의미는 더 크다고 생각한다. 아직 야구점퍼 따위로 몇 사람 건너면 아는 사람일 지도 모를 동년배를 계급화해서 무시하고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기임에도 지균충, 기균충 이라며 비하하는 한국의 대학생, 나아가서 젊은이들이 20년 쯤 후면 이 책에 소개된 일본의 젊은이들과 비슷해 질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20년 후면 한국의 젊은이들도 행복하다고 말할까? 정말?

    

 

“그가 발견한 젊은이들의 ‘행복’은 ‘희망적인 미래’를 기대하지 않기에 가능하다. 쉽게 말해, 미래를 포기했기 때문에 가능한 선택지다.” (p.8)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소박하게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생각을 믿지 않는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그저 ‘끝나지 않는 일상’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었을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p.136)

 

제목은 순전히 낚시용이었다.

아니, 낚시가 아닐 수도 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분명 일본의 젊은이들은 행복하단다. 여론조사와 여러 사회조사의 통계결과라고 한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 없으니 차라리 오늘에 만족하고 살자.’라는 것이란다. 이 무슨 니체적이고 염세적인 생각일까? 생각되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 같다. 오랜 기간 경기불황과 정체된 사회적 분위기에서 나고 자란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도전과 모험, 시도와 변혁, 전복과 반전 같은 단어는 외계어와 같은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었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순적이고 슬프다. 더 이상 내 삶이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국가나 사회가 나서서 내 삶을 인도해 주지도 않는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일본의 젊은이들은 삶의 미시적 세계에 몰입한다. 나와 내 가족, 내가 만나는 주변 사람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옳거나 그르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각자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고 그 세상을 살아내는 방향이 다르니까. 다만, 슬프고 암울하다. ‘더 나아질 것이 없어서 차라리 행복하다고 착각해 버리자.’라는 말로 들르기 때문에.

비단 일본만의 문제는 아닐 것 같아서 더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20대 초반 세상과 자아와 사회와 이웃과 정의와 상식을 생각해야 할 한국의 청춘들이 기성세대와 천박한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틀에 그대로 짜 맞춰 들어가, 친구들을 무시하고 비하하고 단순히 대학 서열 하나 만으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판단해 버리는 괴물들이 있는 상황. 이들의 20년 후가 일본의 현재보다 한 치도 나아질 것 같지 않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마저 드니 깜깜하다.

    

 

“참으로 열렬히 ‘일본’을 응원했다. 나는 ‘어쩌면 일본의 패배에 분노해 폭도로 돌변할지도 몰라.’라고 속으로 은근히 기대해 봤으나, 그러한 일은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수고했어! 라는 목소리였다. 뭐라고, “수고했다”라고?”

“‘일본’이 졌다는 사실에 달리 속상해하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한결 산뜻해진 얼굴로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이 많았던 듯 싶다. 마치 ‘무언가를 해냈나.’라는” (p.154)

“2005년에 실시된 「세계 가치관 조사」에 따르면,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국가를 위해 싸우겠는가?’라는 설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한 일본인의 비율은 15.1%였다. 일본은 조사 대상국인 스물 네 곳의 국가 중에서도 최저 수치를 보였다.” (p.186)

    

전 세계적으로 젊은이들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사람들은 많다. 정치인, 사회학자, 언론인 등등. 그들은 거의 공통적으로 이야기한다. 요즘 젊은 애들은 용기가 없다. 생각이 없다. 주관이 없다. 꿈이 없다. 희망이 없다.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쓸고 각국은 빠르게 국수주의·보수주의화 되고 있다. 그래서 유럽의 젊은이들이 극우주의에 빠질 것을 염려하는 칼럼도 유럽 유수의 언론에서 읽은 적이 있다. 한국도 일베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실정이다. 일베의 전형이 되는 것이 일본의 넷우익인데, 일본은 극우에서 극좌까지 정치지형만으로는 한국보다 훨씬 민주적이고 다면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만큼 극우화될 위험이 많다는 뜻이다.

저자도 그 부분을 염려했는데, 책에 소개된 월드컵 기간 동안 일본의 젊은이들이 보여준 모습을 보면 어른들의 걱정쯤은 저 멀리 붙들어 매도 괜찮을 것 같다.

열렬히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을 응원한다. 다음날 출근을 하고 등교를 해야 하는 젊은이들이 새벽3시30분에 시작되는 축구경기를 위해 유니폼을 입고, 일장기를 들고 거리로 모여 든다. 떠들썩하고 왁자지껄하게 응원을 하고 나서 하는 이야기가 ‘수고했다. 수고했어.’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이 상대팀에 패해 월드컵 토너먼트에 진출하지 못하게 된 것 쯤은 별 거 아니라는 것이다. 흥분되고 고조된 열기 탓에 자칫 폭동이나 시위가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했던 저자의 염려를 무색케 만들었다. 마치 ‘한 판 시원하게 자~알 놀았다.’정도의 느낌이랄까. 넷우익인 재특회의 가입숫자가 늘어나고 있고 그들이 벌이는 재일 한국인과 타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시위와 테러가 늘어나고 있지만 염려할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참여자들도 ‘내 마음을 둘 곳으로 이러한 곳’을 찾고 있었다.” (p.226)

 

희망의 끄트머리도 찾을 수 없는 국가에서 나고 자란 절망의 젊은이들에게 넷우익, 극우, 백색테러 같은 것들은 ‘한 번 쯤은 가볼 만한 곳.’ 정도일 뿐이지. 사명감을 가지고 목숨을 걸고 하는 절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소수의 젊은이들은 그것에 목숨을 걸고 있겠지만 다수의 경우는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이 월드컵 토너먼트에 진출하지 못한 것이 너무 속상하고 가슴 아파서 며칠을 밥도 안 먹고 끙끙 앓는 일본 젊은이도 있겠지만 다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다. 그저 ‘내 마음 둘 곳’ 정도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전쟁과 입대 같은 개념은 외계어다.

‘왜 내가 일본이라는 국가를 지켜야 돼? 내게는 당장 내일의 희망이 없는데? 전쟁에 참전해 승리한다고 해도 내 삶의 어떤 것이 더 나아질까?’

무서운 논리가 이미 내면화된 젊은이들의 ‘행복’은 그만큼 처참하다. 책에서 ‘내 삶은 행복해’라고 말한 젊은이나 설문조사에 참여한 젊은이의 생각을 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들의 생각은 그들에게는 정답이다. 한국이라는 다른 국가에 살고 있는 30대 중반을 넘어선 아저씨의 생각에서는 처참한 ‘행복’이지만, 그들에게는 최선의 ‘행복’일 수 있는 것이다. 이건 인정해야 할 차이다.

    

 

“아무리 과거의 정책을 비판하더라도 현재 일본의 상황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세대 간 격차’가 여러 사회 문제들의 본질이 아닐지라도, 일본의 미래가 절망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이렇듯 절망적인 미래를 더 오랫동안 살아가야 하는 쪽이 젊은이 혹은 아이들이라는 점이다.” (p.289)

 

한국의 젊은이(나를 포함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일본보다 더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한국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복’을 찾아야 할까? 날씨가 조금 따뜻해져 8개월 된 딸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려 해도 미세먼지 농도가 매번 ‘나쁨’이라고 표시되는 곳에서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하나? 모르겠다. “‘희망’이 없으니 ‘행복’이라는 착각을 해버리자!?” 20년 후에나 답을 알게 될까? 내 딸아이가 대학에 들어가는 그때, 시원한 맥주 같이 마시며 딸아이에게 물어봐야겠다. “너 행복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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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
송복 지음 / 시루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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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화 「명량」을 보지 않았다. 안 본 것인지, 못 본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아마 못 본 것일 가능성이 더 크다. 수준 낮은 국수주의·애국주의에 대한 염증 때문이 아니었다. 분명히. 순전히 딸아이 때문이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그만 생명체는 하루 종일(24시간 내내는 아니다. 물론) 우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드러냈다. 한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영화 「파이란」을 본 후 최민식씨의 팬이 되었다. 이후 그가 출연하는 영화는 모조리 봤다. 「올드보이」같은 영화는 열 번은 넘게 본 것 같다. 그런데 「명량」을 보지 못했다. 아무리 아기가 울고, 아내가 혼자 고생을 해도 최민식씨에 대한 팬심을 버리지 않고 「명량」을 보려고도 생각 했지만! 나는 가정을 생각했다.

임진왜란을 생각하면 이순신이 전부다. 그가 거둔 눈부신 해전의 승리들. 무능하고 유약한 조선 최악의 임금 선조, 이순신에 대한 질투와 시기에 눈이 멀어버린 원균 등이 전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이고 바다에 이순신이 있었다면 육지와 선조 곁에는 류성룡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류성룡은 그 유명한 저작 「징비록」보다 배우 류시원의 시조라는 것으로 더 유명해 졌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안동을 방문했을 때, 여왕의 옆에 서 있던 사람이 배우 류시원이었다. 남자들에게는 손톱만큼의 인기도 없었던 류시원이었기에 뉴스나 언론에서 띄우는 것만큼 회자되지는 않았다. 그냥 류시원이 가문도 좋구만. 좋겠네. 정도?

 

 

“임진왜란 7년 동안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과 문이가 549건이나 된다니, 그것부터 기록적이다. 이것만 해도 4-5일에 한 건씩 임금에게 보고했다는 것이 된다.” (p.16)

 

조선왕조의 역사를 임진왜란 전·후로 나누는 역사가가 많다. 조선 역사 이래로 수많은 전쟁과 전란이 있었지만 임진왜란은 그만큼 치욕적이고 치명적이었다. 7년 동안 이어진 전쟁이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이순신이다. 망하기 직전인 조선을 지킨 용맹하고 충성스러우며 대단한 장군이었던 이순신. 그의 충무 정신과 희생정신은 조선 왕조가 가졌던 내재적 무능을 약화시키는 단점이 있다. 어쨌든 이순신의 대단한 해전의 승전보로 호남을 지키고 조선과 왕조를 지킬 수 있었다. 대단한 승전보를 여러 번 올렸음에도 명의 눈치를 보느라 영웅을 하옥하고 고문하고 참수하기 직전까지 간다. 시스템 자체가 바뀌지 않고 몇 명의 영웅에 의해 간신히 지켜낸 왕조는 바로 뒤이은 정유재란을 불러 일으켰다.

류성룡은 치열하게 임진왜란을 살았던 인물이다. 왕인 선조를 제외하고 조선의 가장 큰 실력자였던 류성룡은 조선 땅에 들어온 명과 왜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나라의 재상이 7년의 전쟁을 좌우 한 것이다.

물론,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류성룡에 대한 극찬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저자보다 더 전문적인 공부를 하거나 역사적 자료·사료를 찾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의구심만 가질 뿐이다. 의구심이 있다 하더라도 류성룡이 임진왜란 내내 임금에게 올린 상소와 명과 왜를 오가며 행한 외교적 노력은 역사적 사실로 보인다. 전쟁 7년 동안 올린 상소문이 500건이 넘는다고 한다. 그 숫자 자체도 놀랍고 성실하지만 그 내용의 참혹함과 좌절을 이 책을 통해 읽게 되면서 류성룡이라는 한 인간이 겪었을 고통이 조금이나마 전해져 나까지 땅으로 꺼지는 느낌이었다.

 

 

“오늘의 나라 형세는 마치 오랫동안 고치지 않고 방치해둔 만간대하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크게는 대들보에서 작게는 서까래에 이르기까지 썩지 않는 것이 없어, 근근이 날만 넘기며 지탱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동쪽을 수리하면 서쪽이 따라 기울고, 남쪽을 뜯어 고치면 북쪽이 휘어 넘어져서 어떤 장인도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p.30)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 이 한마디가 바로 군량전쟁의 요약이며,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요약이다.” (p.113)

 

 

오늘의 나라 형세에서 ‘오늘’을 임진왜란 때가 아니라 ‘2015년 오늘’로 바꿔 읽어도 무리가 없는 문장이다.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바뀐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 서글프다. 아무튼 그런 시절이었다. 걸출한 인물 몇을 빼고는 임금이 믿고 일을 맡길 있는 신하가 없었다. 그래서 류성룡이 몇 개의 관직을 겸하기도 했다. 썩지 않은 것이 없어 근근이 날만 지탱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나라의 형국이었다. 국가시스템 전체가 비정상으로 근근이 하루를 버티고 있는 상황. 낯설지 않다. 군대도 제대로 훈련하지 못하고 모을 수 있는 숫자 자체도 소수였다. 군대를 유지할 군량도 확보할 수 없었다.

왜의 침략으로 명에 구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 특히 임금이 팽개친 전시상황을 책임져야 할 류성룡에게 있어 군량의 확보는 생존의 문제였다. 전시였고 백성의 민심은 이미 임금과 조정에서 떠난 지 오래였다. 군량을 확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때였다. 하지만 당장 왜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명을 불러 들어야 했다. 그런 명군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서는 최대한 군량을 긁어모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류성룡은 하루에도 몇 번씩 상소를 올리고 싶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은 왜와 명에겐 ‘조선분할전쟁’이었다. 조선 영토를 반으로 갈라 명에 할지하려 했고, 명은 조선의 영토라도 사수해 왜로부터 명을 지키는 울타리로 삼으려 했다.” (p.257)

“류성룡은 왜에 대해서는 조·명 연합군을 만들어 싸움을 돋우고 공격해서 명·왜 간의 강화 기반을 깼고, 명에 대해서는 분할이든 역치든 그 어느 것도 시도하거나 감행할 수 없도록 최대한 외교전을 펼쳤다.” (p.258)

 

 

명의 원조로 생각보다 쉽게 조선 반도를 차지하지 못한 왜, 대륙의 북방 유목민족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도 숨이 차고 쌓일 대로 쌓인 재정난을 타개하기에도 힘이 부족했던 명. 명과 왜는 조선의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왜와 명에게 ‘조선분할’은 매력적인 해결책이었다. 언제 끝날지 모를 지루한 전쟁을 지속하면서 계속 서로 피해를 입는 것보다 합리적인 해결 방법을 원했다. 물론, 그것에 ‘조선’은 없었다. 얼마나 당시 명과 왜가 조선과 조선의 임금, 조정을 우습게 봤는지 단정할 수 있는 증거다. 저자의 중요 논리가 그것이다. 400년이 지난 지금의 형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과 일본, 러시아와 미국 각자의 이해와 논리가 부딪히는 곳이 여전히 한반도다. 최소한 지금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던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의 외교적 노력과 능력만으로 명과 왜의 ‘조선분할’야욕을 막아 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류성룡 1인의 전적인 능력 때문이라는 논리가 억지스럽기는 하지만 책의 내용 만으로만 보면 임진왜란을 막은 이는 류성룡과 이순신이다.

지금도 류성룡과 같은 능력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 류성룡 같은? 인물? 불가능하다.

 

 

“자강파에는 류성룡과 이순신, 그리고 의병들이 있었고, 의명파에는 선조를 필두로 한 대다수 신하들이 속해 있었다.” (p.13)

 

 

임진왜란 이후 명(크게는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더 심각해 졌다고 한다. 명이 실제로 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진 후에도 청나라를 무시하고 명의 잔존세력을 추종하는 정신 나간 조선의 대신들이 많았다. 힘을 길러 자주적으로 외세와 맞서자는 자강파의 논리는 의명파들에게는 말도 되지 않는 코미디였을 것이다. 명나라를 아버지로 모시고 살면 편하고 언제든지 우리를 도와줄 텐데, 구태여 왜 명을 떠나려 하는 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그 구차하고 태만한 의존성이 일본의 식민 침탈을 낳았다. 저자의 논리도 그렇다.

 

 

“불가합니다. 임금께서 우리 땅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떠나신다면, 그때부터 조선은 우리 소유가 아닙니다.” (p.49)

“이 술로 경과 영결한다. 내일 나는 곧바로 사신 앞에 왕위를 내놓는다. 오직 그것만이 내가 할 일이다.”

“원컨대 성상께서는 결코 뜻을 요동하지 마십시오. 내일 사신 앞에서 절대로 양위한다는 말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신이 감히 죽기를 각오하고 청하옵니다.” (p.278)

 

 

류성룡이라는 걸출한 재상을 가지기에 선조는 너무 무능하고 멍청한 임금이었다. 의명파가 대다수인 신하들 탓인지, 타고난 무능과 유약함 탓인지 임진왜란 초기 왜의 강력한 공세에 피난을 가다 가다 국경에까지 이르렀다. 왜가 좀 더 치고 올라온다면 명나라로 망명할 것이라고 했다. 임금이 말이다. ‘서울은 안전하니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시라.’고 하고선 대전으로 부리나케 도망갔던 대통령이 생각난다. 오랜 기간 지속된 전쟁과 안정되지 않는 왕권이 지겨웠던지 선조는 자주 왕위를 내놓으려 했다. 명의 압박도 있었다.

의명파인 신하들에게 그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임금이 명나라로 도망가면 오케이! 나도 같이 가면 된다! 이었을 테고, 임금이 왕위를 내놓는다 해도 그들의 안위가 크게 흔들릴 염려는 없었다. 어차피 조선의 임금이 아니라 명의 황제를 받들던 그들이니까.

류성룡은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간언한다.

결국 류성룡도 긴 전쟁 후 다른 신하들에 의해 관직을 박탈당한다. 전쟁 중에는 나 죽었소. 하며 바짝 엎드려 살던 놈들이 전쟁이 끝나자 이제 내가 뭐 해먹을 거 없나. 하고 기어 나와 눈엣가시 류성룡부터 손 본 것이다.

 

 

 

“류성룡의 전 생애를 돌아보면 백성에 관한 한 ‘강제’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백성들에게 관이 갖는 위압이나 위세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일을 발견할 수 없다.” (p.104)

 

 

이 책은 재미있다. 흔히 ‘임진왜란’ 이라고 하면 알고 있거나 봤거나 배웠던 것들이 떠오르기 마련인 데, 그런 것들과는 다른 측면에서 임진왜란과 조선을 볼 수 있었다. 앞서 몇 번 언급했지만 저자의 류성룡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사는 좀 지나치다 싶다. 임진왜란 당시 농업경제는 참담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당장 먹고 사는 일에도 벅찬 백성들이었을 것이다. 류성룡은 전쟁 중 재상으로 군량에 대한 모든 정책을 다뤘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양이었지만 조선 전 국토를 탈탈 털어 군량을 채웠다. 그런데 단 한 번도 백성에 대한 ‘강제’가 없었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물론, 류성룡이 처음 명령을 내릴 때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고려해서 양반들이나 중인들의 쌀만 거두어 오라.”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있든 없든 다 걷어오라.”라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명령이 처음 내려진 높은 곳에서부터 당장 민가에 찾아가 쌀을 걷어와야 하는 하급 관리에 이르게 될 때, 중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안 봐도 뻔 한 것 아닌가? 그것도 전시 상황에 말이다.

 

 

이런 문장이 없었다면 인간 류성룡에 대한 재평가에 더 큰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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