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
송복 지음 / 시루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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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화 「명량」을 보지 않았다. 안 본 것인지, 못 본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아마 못 본 것일 가능성이 더 크다. 수준 낮은 국수주의·애국주의에 대한 염증 때문이 아니었다. 분명히. 순전히 딸아이 때문이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그만 생명체는 하루 종일(24시간 내내는 아니다. 물론) 우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드러냈다. 한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영화 「파이란」을 본 후 최민식씨의 팬이 되었다. 이후 그가 출연하는 영화는 모조리 봤다. 「올드보이」같은 영화는 열 번은 넘게 본 것 같다. 그런데 「명량」을 보지 못했다. 아무리 아기가 울고, 아내가 혼자 고생을 해도 최민식씨에 대한 팬심을 버리지 않고 「명량」을 보려고도 생각 했지만! 나는 가정을 생각했다.

임진왜란을 생각하면 이순신이 전부다. 그가 거둔 눈부신 해전의 승리들. 무능하고 유약한 조선 최악의 임금 선조, 이순신에 대한 질투와 시기에 눈이 멀어버린 원균 등이 전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이고 바다에 이순신이 있었다면 육지와 선조 곁에는 류성룡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류성룡은 그 유명한 저작 「징비록」보다 배우 류시원의 시조라는 것으로 더 유명해 졌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안동을 방문했을 때, 여왕의 옆에 서 있던 사람이 배우 류시원이었다. 남자들에게는 손톱만큼의 인기도 없었던 류시원이었기에 뉴스나 언론에서 띄우는 것만큼 회자되지는 않았다. 그냥 류시원이 가문도 좋구만. 좋겠네. 정도?

 

 

“임진왜란 7년 동안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과 문이가 549건이나 된다니, 그것부터 기록적이다. 이것만 해도 4-5일에 한 건씩 임금에게 보고했다는 것이 된다.” (p.16)

 

조선왕조의 역사를 임진왜란 전·후로 나누는 역사가가 많다. 조선 역사 이래로 수많은 전쟁과 전란이 있었지만 임진왜란은 그만큼 치욕적이고 치명적이었다. 7년 동안 이어진 전쟁이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이순신이다. 망하기 직전인 조선을 지킨 용맹하고 충성스러우며 대단한 장군이었던 이순신. 그의 충무 정신과 희생정신은 조선 왕조가 가졌던 내재적 무능을 약화시키는 단점이 있다. 어쨌든 이순신의 대단한 해전의 승전보로 호남을 지키고 조선과 왕조를 지킬 수 있었다. 대단한 승전보를 여러 번 올렸음에도 명의 눈치를 보느라 영웅을 하옥하고 고문하고 참수하기 직전까지 간다. 시스템 자체가 바뀌지 않고 몇 명의 영웅에 의해 간신히 지켜낸 왕조는 바로 뒤이은 정유재란을 불러 일으켰다.

류성룡은 치열하게 임진왜란을 살았던 인물이다. 왕인 선조를 제외하고 조선의 가장 큰 실력자였던 류성룡은 조선 땅에 들어온 명과 왜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나라의 재상이 7년의 전쟁을 좌우 한 것이다.

물론,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류성룡에 대한 극찬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저자보다 더 전문적인 공부를 하거나 역사적 자료·사료를 찾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의구심만 가질 뿐이다. 의구심이 있다 하더라도 류성룡이 임진왜란 내내 임금에게 올린 상소와 명과 왜를 오가며 행한 외교적 노력은 역사적 사실로 보인다. 전쟁 7년 동안 올린 상소문이 500건이 넘는다고 한다. 그 숫자 자체도 놀랍고 성실하지만 그 내용의 참혹함과 좌절을 이 책을 통해 읽게 되면서 류성룡이라는 한 인간이 겪었을 고통이 조금이나마 전해져 나까지 땅으로 꺼지는 느낌이었다.

 

 

“오늘의 나라 형세는 마치 오랫동안 고치지 않고 방치해둔 만간대하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크게는 대들보에서 작게는 서까래에 이르기까지 썩지 않는 것이 없어, 근근이 날만 넘기며 지탱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동쪽을 수리하면 서쪽이 따라 기울고, 남쪽을 뜯어 고치면 북쪽이 휘어 넘어져서 어떤 장인도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p.30)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 이 한마디가 바로 군량전쟁의 요약이며,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요약이다.” (p.113)

 

 

오늘의 나라 형세에서 ‘오늘’을 임진왜란 때가 아니라 ‘2015년 오늘’로 바꿔 읽어도 무리가 없는 문장이다.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바뀐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 서글프다. 아무튼 그런 시절이었다. 걸출한 인물 몇을 빼고는 임금이 믿고 일을 맡길 있는 신하가 없었다. 그래서 류성룡이 몇 개의 관직을 겸하기도 했다. 썩지 않은 것이 없어 근근이 날만 지탱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나라의 형국이었다. 국가시스템 전체가 비정상으로 근근이 하루를 버티고 있는 상황. 낯설지 않다. 군대도 제대로 훈련하지 못하고 모을 수 있는 숫자 자체도 소수였다. 군대를 유지할 군량도 확보할 수 없었다.

왜의 침략으로 명에 구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 특히 임금이 팽개친 전시상황을 책임져야 할 류성룡에게 있어 군량의 확보는 생존의 문제였다. 전시였고 백성의 민심은 이미 임금과 조정에서 떠난 지 오래였다. 군량을 확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때였다. 하지만 당장 왜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명을 불러 들어야 했다. 그런 명군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서는 최대한 군량을 긁어모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류성룡은 하루에도 몇 번씩 상소를 올리고 싶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은 왜와 명에겐 ‘조선분할전쟁’이었다. 조선 영토를 반으로 갈라 명에 할지하려 했고, 명은 조선의 영토라도 사수해 왜로부터 명을 지키는 울타리로 삼으려 했다.” (p.257)

“류성룡은 왜에 대해서는 조·명 연합군을 만들어 싸움을 돋우고 공격해서 명·왜 간의 강화 기반을 깼고, 명에 대해서는 분할이든 역치든 그 어느 것도 시도하거나 감행할 수 없도록 최대한 외교전을 펼쳤다.” (p.258)

 

 

명의 원조로 생각보다 쉽게 조선 반도를 차지하지 못한 왜, 대륙의 북방 유목민족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도 숨이 차고 쌓일 대로 쌓인 재정난을 타개하기에도 힘이 부족했던 명. 명과 왜는 조선의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왜와 명에게 ‘조선분할’은 매력적인 해결책이었다. 언제 끝날지 모를 지루한 전쟁을 지속하면서 계속 서로 피해를 입는 것보다 합리적인 해결 방법을 원했다. 물론, 그것에 ‘조선’은 없었다. 얼마나 당시 명과 왜가 조선과 조선의 임금, 조정을 우습게 봤는지 단정할 수 있는 증거다. 저자의 중요 논리가 그것이다. 400년이 지난 지금의 형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과 일본, 러시아와 미국 각자의 이해와 논리가 부딪히는 곳이 여전히 한반도다. 최소한 지금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던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의 외교적 노력과 능력만으로 명과 왜의 ‘조선분할’야욕을 막아 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류성룡 1인의 전적인 능력 때문이라는 논리가 억지스럽기는 하지만 책의 내용 만으로만 보면 임진왜란을 막은 이는 류성룡과 이순신이다.

지금도 류성룡과 같은 능력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 류성룡 같은? 인물? 불가능하다.

 

 

“자강파에는 류성룡과 이순신, 그리고 의병들이 있었고, 의명파에는 선조를 필두로 한 대다수 신하들이 속해 있었다.” (p.13)

 

 

임진왜란 이후 명(크게는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더 심각해 졌다고 한다. 명이 실제로 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진 후에도 청나라를 무시하고 명의 잔존세력을 추종하는 정신 나간 조선의 대신들이 많았다. 힘을 길러 자주적으로 외세와 맞서자는 자강파의 논리는 의명파들에게는 말도 되지 않는 코미디였을 것이다. 명나라를 아버지로 모시고 살면 편하고 언제든지 우리를 도와줄 텐데, 구태여 왜 명을 떠나려 하는 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그 구차하고 태만한 의존성이 일본의 식민 침탈을 낳았다. 저자의 논리도 그렇다.

 

 

“불가합니다. 임금께서 우리 땅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떠나신다면, 그때부터 조선은 우리 소유가 아닙니다.” (p.49)

“이 술로 경과 영결한다. 내일 나는 곧바로 사신 앞에 왕위를 내놓는다. 오직 그것만이 내가 할 일이다.”

“원컨대 성상께서는 결코 뜻을 요동하지 마십시오. 내일 사신 앞에서 절대로 양위한다는 말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신이 감히 죽기를 각오하고 청하옵니다.” (p.278)

 

 

류성룡이라는 걸출한 재상을 가지기에 선조는 너무 무능하고 멍청한 임금이었다. 의명파가 대다수인 신하들 탓인지, 타고난 무능과 유약함 탓인지 임진왜란 초기 왜의 강력한 공세에 피난을 가다 가다 국경에까지 이르렀다. 왜가 좀 더 치고 올라온다면 명나라로 망명할 것이라고 했다. 임금이 말이다. ‘서울은 안전하니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시라.’고 하고선 대전으로 부리나케 도망갔던 대통령이 생각난다. 오랜 기간 지속된 전쟁과 안정되지 않는 왕권이 지겨웠던지 선조는 자주 왕위를 내놓으려 했다. 명의 압박도 있었다.

의명파인 신하들에게 그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임금이 명나라로 도망가면 오케이! 나도 같이 가면 된다! 이었을 테고, 임금이 왕위를 내놓는다 해도 그들의 안위가 크게 흔들릴 염려는 없었다. 어차피 조선의 임금이 아니라 명의 황제를 받들던 그들이니까.

류성룡은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간언한다.

결국 류성룡도 긴 전쟁 후 다른 신하들에 의해 관직을 박탈당한다. 전쟁 중에는 나 죽었소. 하며 바짝 엎드려 살던 놈들이 전쟁이 끝나자 이제 내가 뭐 해먹을 거 없나. 하고 기어 나와 눈엣가시 류성룡부터 손 본 것이다.

 

 

 

“류성룡의 전 생애를 돌아보면 백성에 관한 한 ‘강제’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백성들에게 관이 갖는 위압이나 위세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일을 발견할 수 없다.” (p.104)

 

 

이 책은 재미있다. 흔히 ‘임진왜란’ 이라고 하면 알고 있거나 봤거나 배웠던 것들이 떠오르기 마련인 데, 그런 것들과는 다른 측면에서 임진왜란과 조선을 볼 수 있었다. 앞서 몇 번 언급했지만 저자의 류성룡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사는 좀 지나치다 싶다. 임진왜란 당시 농업경제는 참담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당장 먹고 사는 일에도 벅찬 백성들이었을 것이다. 류성룡은 전쟁 중 재상으로 군량에 대한 모든 정책을 다뤘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양이었지만 조선 전 국토를 탈탈 털어 군량을 채웠다. 그런데 단 한 번도 백성에 대한 ‘강제’가 없었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물론, 류성룡이 처음 명령을 내릴 때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고려해서 양반들이나 중인들의 쌀만 거두어 오라.”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있든 없든 다 걷어오라.”라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명령이 처음 내려진 높은 곳에서부터 당장 민가에 찾아가 쌀을 걷어와야 하는 하급 관리에 이르게 될 때, 중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안 봐도 뻔 한 것 아닌가? 그것도 전시 상황에 말이다.

 

 

이런 문장이 없었다면 인간 류성룡에 대한 재평가에 더 큰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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