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석 지음 / 네오픽션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케이블 채널에서 <천장지구>를 보게 되었다. 몸의 곳곳에 거뭇한 털이 올라오기 시작할 무렵, 친구 놈들과 모여 앉아 비디오테이프를 보는 게 낙이었다. 남자 놈들끼리 보는 것이 대부분 장롱 깊이 숨겨져 있던 친구 부모님의 비디오테이프였고, 친구 놈의 형이 빌려 놓은 프로레슬링 비디오테이프, 그리고 홍콩 영화였다. <첩혈쌍웅>, <영웅본색> 등등 거의 모든 종류의 홍콩 액션 영화를 보면서 끓어오르는 혈기를 해소시키고는 했다. 해소가 되기도 했지만 영화를 다 본 후 다들 얼굴이 벌게져 마치 자신이 방금 본 영화의 주인공이 된 양 서로 레슬링을 하고 주윤발 형님을 따라 성냥개비를 물어보기도 했다. 멋지게 바바리코트를 입고 선글라스를 쓴 채 총을 난사하는 윤발 형님처럼 되고 싶었다. 어두운 과거를 가진 주인공이 폭력조직에서 활동하며 경찰과 싸우고 너무나 예쁜 누나와 사랑을 하면서 조직에게 배신을 당하고, 다시 조직에 복수하지만 결국 죽게 되는, 이런 뻔 한 스토리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단 멋있었으니까. 윤발 형님, 덕화 형님, 국영 형님은 학교 앞 문방구의 책받침과 브로마이드에서도 멋지게 폼을 잡고 계셨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은 그런 홍콩 영화들이 ‘느와르’라는 장르이고,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완전히 망해서 더 이상 그런 종류의 ‘홍콩느와르’는 만들어지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윤발 형님과 덕화 형님은 참 멋진데, 내가 가장 좋아하던 국영 형님은 돌아가셨다. 한 번씩 국영 형님이 출연했던 영화를 잠깐이라도 보게 되면 좁은 방에 둘러앉아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성인영화보다 더 몰입하며 보던 그때의 나와 친구들이 생각난다.

 

이 책 「통」은 여러모로 아쉽다. 작가가 홍콩느와르를 표방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내게는 홍콩느와르에 대한 오마쥬로 읽혔다. 부산의 통이던 정우가 서울의 동진고로 전학하게 되면서 겪는 스토리는 홍콩느와르의 그것과 거의 일치한다. 새롭게 적응하게 된 서울의 학교에서도 갖은 사건을 통해 통이 되고 자연스럽게 범죄조직에 들어간다. 그러는 중간에 교생인 정임과의 설익은 러브스토리가 전개되고, 또 자연스럽게 조직의 보스인 재식의 배신을 겪게 된다. 홍콩느와르와 다른 점은 마지막이다. 내가 본 홍콩느와르의 대부분은 주인공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끝나게 되는데, 이 책에서 이정우는 끝까지 살아남는다. 또 다른 삶은 향해 살아가는 이정우의 모습으로 책은 끝난다.

그냥 시간 때우기 정도로 책을 읽는다면 ‘그런가 보다’하면서 책을 덮겠지만, 이 책을 읽으며 홍콩느와르를 생각하고, 국영 형님이 생각하면서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이 책은 PC통신 시절 작가가 올린 연재를 새롭게 엮은 책이다. PC통신이라 하면 지금 어린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 인터넷 보급기에 성행하던 것이다. 천리안, 나우누리 등 전화기와 삐삐 말고도 쌍방향으로 소통하는 것이 대유행이었다. 그 당시 이 책이 꽤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과는 다른 상황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지금처럼 정보가 흘러넘칠 지경의 인터넷 환경에서는 이 책의 내용이 좀 유치하게 생각된다. 나의 홍콩느와르 영화의 대사를 그대로 책으로 옮긴 것보다 더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통이다. 어느 때이든지, 어느 곳이든지. 그것이 진리다.” (p.53)

“그것은...정말로...비상이었다!”

“그만큼 나의 동작은 화려했고 완벽했으며 재빨랐다.” (p.103)

“순간적으로 넋이 나간 것 같았다. 나는 녀석의 공격을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피하며 이중 점프를 했다. 공중에서 걸어 다니듯이 움직이는 내 모습을 처음 본 그들로써는 눈이 현혹되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p.209)

 

책의 주인공인 정우의 대사는 손발이 오그라들 지경이다. 정우는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싸움에서 결코 지지 않는다. 키가 175cm 정도이고 마른 체형임에도 불구하고 정우는 불사조처럼 싸운다. 자기가 통이라는 사실을 자랑하지는 않지만 책의 곳곳에 등장하는 독백에서 스스로 인정한다. 자신이 통이기 때문에 약한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되고 누구라도 자신에게 명령을 해서도 안 된다. 그것이 학교 선생님이든, 조직의 보스이든, 친구이든, 썸을 타는 정임이든 간에.

정우의 싸움 장면은 거의 무협소설 수준이다. 정우보다 훨씬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상대, 그리고 귀신과 같은 칼솜씨를 가진 칼잡이라도 정우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학교 단상 위에 있는 상대를 향해 날아서 공격을 하는 가하면, 한 번 도약한 상태에서 다시 도약하는 만화와 같은 기술을 선보인다. 이런 정우의 싸움 기술은 같은 편은 물론, 상대편까지 넋이 나가게 만든다. 이 장면에서 더욱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은 공중에서 기술을 선보이면서 동시에 정우가 독백을 한다는 것이다. 만화에서 컷이 나눠지면서 주인공의 움직임이 촤르르 펼쳐지는 것처럼 그렇게 표현된다. 차라리 만화라면 ‘무협장르려니...’라면서 읽을 수 있었을 텐데...

 

 

“그래, 젠장. 어차피 살아봐야 뻔 하잖아. 우리 같은 놈들. 어른 돼서 공사판에서 벽돌을 나르게 될지 몰라도. 지금 이 순간은 즐겨야지” (p.242)

“이정우, 난 이것밖에 몰라. 이정우란 녀석을 위해서라면 난 언제든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 말이다.” (p.342)

 

조직을 향한 복수를 위해 정우는 인근 학교의 통들을 끌어 모은다. 고작 열일곱에서 열아홉인 아이들이 조직폭력배를 향해 복수를 감행한다. 아~ 이 부분쯤에 이르러서는 읽기가 버거웠다. 어차피 살아봐야 뻔하고, 어른 되면 공사판에서 벽돌을 나르게 될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지 어이가 없었다. 죽으러 가는 길일지도 모르는 싸움에 뛰어들면서 ‘이 순간은 즐겨야지’라고 하는 고등학생이 실제로 있을까?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영악한데! 그리고 오직 통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놓는다는 말을 하는 것이 너무 비현실적이다.

앞에서 말한 홍콩느와르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흔한 무협소설쯤 되는 내용이다. 2014년인 지금 읽기에는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고, 유치한 내용의 책이 될 수밖에 없다. 혹시 30,40대 남성들을 공략하기 위함이라면 조금 이해는 된다. 정우에게 감정을 이입하며 한번쯤 읽기에는 별 무리가 없는 내용이니까. 그런 30,40대 아저씨들을 제외하고는 읽기가 버거운 책이다.

 

 

“저것도 연기야. 반가운 척하는 거라고. 한두 번 당하는 것도 아니고 당신 같은 선생들 스타일을 알지. 어떻게 보면 말로 은근히 어르는 당신 같은 타입이 더 야비하다는 것도.” (p.126)

 

책에 등장하는 정우의 무조건적인 학교와 교사에 대한 반감의 이유가 전혀 나오지 않는 것도 좀 불만이다. 무작정 싫어하다가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교사 강덕중에게 조금이나마 마음을 털어놓게 되는데, 이 부분도 좀 억지로 보인다. 정우가 서울로 전학 오기 전 부산에서의 생활이나 정우의 가정환경에 대해서 일부라도 묘사가 되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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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애니비평 2014-08-06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것 글을 쓰시는 분 전번에 만났는데

lmicah 2014-08-06 20:40   좋아요 0 | URL
혹 다시 만나신다면 재미없었다고 전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