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자, 사랑과 평화의 철학 살림지식총서 469
박문현 지음 / 살림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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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라는 학자의 이름을 들어 본 이가 많을까? 난 도덕 시간에 딱 한 줄로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 중 묵자는 겸애사상을 주장했다고만 배웠다. 그리고 나의 머릿속에서는 증발해버린 사상가였다. 이번에 살림지식총서 <‪‎<‪‎묵자, 사랑과 평화의 철학>을 보니 '어, 이런 혁명적 사상가가 묻히다니... 뭔가 있었네'하는 생각이 든다. 기득권 세력에게는 이 묵자의 사상이 위협적이었을 것이다. 예수가 그랬듯이. 그 둘은 서로 닮은 지점이 있다.
묵자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더불어 사랑한다면 힘이 센 나라가 힘이 약한 나라가 가진 것을 빼앗지 않을 것이며 다수의 무리가 소수가 가진 것을 강압적으로 빼앗지 않을 것이다. ... 서로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평등을 말하고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실천가였던 묵자를 이 시대로 다시 불러오고 싶어진다.

묵자는 맹자에 의해 '애비도 모르는 금수같은 존재'로 비난받은 바 있다. 그것으로 그의 출신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묵자는 기원전 479년에 태어나 기원전 381년에 죽었다고도 하고 기원전 480년에 태어나 기원전 420년에 죽었다고도 한다. 공자의 사상을 공부했으나 점차 유가의 학설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자기의 학설을 세우며 학파를 결성하고 공개적으로 유가를 비판했다. 그의 문도들은 주로 수공업자가 많았다고 하는데, 진한시대에 이르러 그의 학파는 자취를 감추고 2천 년 동안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가 청대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자의 유가에 대한 비판은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부분이 많다. 특히 유가의 예가 너무 번잡하여 과소비를 한다는 부분에는 지금도 여전한 남의 눈치 때문에 벌어지는 '과소비'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묵자의 사상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차별 없는 사랑을 주장한 것과 침략 전쟁을 반대한 것이다. 혼란의 원인을 차별적인 사랑으로 보고 겸애(兼愛) 즉, 보편적이고 평등한 사랑을 주장했다. 이런 묵자의 사상을 보면 그 당시나 지금이나 너무 혁명적이어서 반대한 세력이 많았을 것이다. 또한 "생각은 좋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는~~"하면서 치켜세우고만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이렇게 치켜세우고 이용하고 버리는 이론들이 너무 많다.

묵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세상이 좋은 것이라 하면서 실천이 안되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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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 이익을 반대한 경세가 살림지식총서 455
장현근 지음 / 살림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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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기원전 372년에 태어나 기원전 289년에 죽은 걸로 알려졌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춘추전국시대였다. 맹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학통을 계승한 것으로 알려진다. 살림지식총서의 <맹자, 이익을 반대한 경세가>는 아직 맹자를 잘 모르는 이에게 맹자의 '경세 정책'을 소개하고 있다. 맹자의 구체적인 정책 아이디어에 포커스를 맞춤으로서 이익이 경세의 중심이 된 시대에 이익에 반대한 맹자의 생각을 한 번 생각해보자는 의도라고 한다.

맹자의 생각은 이익을 따지는 사회는 망한다는 것이었다. '힘과 이익을 목표로 삼아 정치를 하면 결국 나라는 망할 것이다.' 이렇게 주장한  맹자의 정치사상은 한마디로 인정(仁政), 즉 어진 정치다. 강병의 기초가 되는 힘과 부국의 기초라고 하는 이익에 반대한 정치를 주장했다. 현실적인 부강의 논리에 반대하고 이상적인 도덕의 정치를 주문했다. 그러니 맹자의 유세는 실패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이런 인치 주의의 한계는 만약 어질지 못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남긴다. 그것에 대한 맹자의 답은 필부 따위는 죽여도 좋다, 반복해서 간언을 해도 듣지 않으면 군주를 바꾸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혁명의 논리가 들어있다.

맹자의 경제정책은 이 한마디로 알 수 있다. '항산(恒産:항상 일정한 생업)이 있어야 항심(恒心:일정한 도덕적 심성)이 있다.' 항산(恒産)이 있도록 하려면 기본적으로 공평한 토지분배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의 구체적인 실천 방법으로 정전제(井田制)를 주장했다. 맹자는 정치를 '세상을 바꾸려는 끝없는 노력'이라고 생각했다.  


간략하게 동양 고전을 읽는 방법. 혹은 쉽게 고전에 다가가는 방법 중 하나로 살림지식총서는 썩 괜찮은 책이다. 오늘 읽은 맹자는 아직 맹자를 잘 모르는 이에게 맹자의 경세 정책을 소개하는 책이다. 공자왈 맹자왈 한다는 그 맹자가 아니라 현실 경제와 사회문제를 고민하고 그 대안을 내놓은 경세가로서의 맹자를 만나볼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게 가장 와 닿은 것은 "일반 백성들은 항산 (일정한 생업)이 있어야 도덕심(항심)을 유지할 수 있다 "라는 문장이다.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해 충분히 먹고살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그리고 우리나라의 정치가들과 사회지도층이 고민해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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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 진리를 찾아가는 길 살림지식총서 454
이기동 지음 / 살림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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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하면 호접지몽 밖에 몰랐다. 이번에 읽은 살림지식총서 <장자 진리를 찾아가는 길>은 노장사상이란 뭉뚱그려진 말로 들었던 장자의 사상을 쉽고 간단히 접할 수 있었던 책이다. 요즘 뉴스를 보다 보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선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있는 분부터 예전 자신이 했던 말과 지금의 말이 다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있고 말한다. 거기다가 요즘 많이 등장하는 뉴스 중 하나는 자신이 보호해야 할 가족을 학대하는 일에 대한 것이다. 과연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 옳은 길인지조차 의심하게 만드는 요즘 읽어야 할 고전으로 작가는 <장자>를 꼽는다.

왜 하필이면 장자일까? 장자가 살던 당시는 끝없는 전쟁으로 혼란의 시대였다. 그 당시에는 여러 사상가들이 등장해서 서로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를 내놓았다. 장자는 당시의 사상가들이 주창한 이론은 모두 자기의 입장에서만 옳은 것이므로, 입장을 달리하며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이 세상의 원래 모습은 '혼돈'이고 사람은 자연물이어서 숨을 쉬고, 자라고 늙고 병들어 가는 존재임을 밝힌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을 두고 인간은 자기의 삶을 자기가 운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의식은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낸 가공의 세계다. 지위와 권위 또한 인간이 만들어 낸 꿈같은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것일 뿐, 진실의 세계, 참된 세계에서는 그것이 통용되지 않는다. 장자는 이렇게 인간의 삶이 소꿉장난임을 알고 왕을 시켜준다고 해도 하지 않았다.


<장자 진리를 찾아가는 길>의 쉬운 이야기 속 깊은 의미를 내가 다 이해하긴 힘들지만 재미있게 읽은 대목이 많다.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는 좁은 공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바다에 대해서 말을 해도 소용이 없고, 여름에 사는 벌레는 더운 계절 밖에 모르기 때문에 얼음에 대해서 말을 해도 소용이 없으며, 왜곡된 사람은 자기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진리를 말해줄 수 없지만,  p.39

장자의 글을 읽으면 앞이 밝게 보이다가도 현실의 소식을 들으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우리들의 소꿉놀이가 너무 한심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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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 양심을 밝히는 길 살림지식총서 453
윤홍식 지음 / 살림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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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시대를 '양심이 땅에 떨어진 시대'로 규정한 작가는 그 이유가 근대화 과정에서 물질문명만을 과도하게 추구하다가 보니 인간의 양심과 도덕성을 근간으로 하는 정신문명에 대해서 무관심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다. 나는 저자의 이런 진단이 지금 우리 사회가 이익만을 추구하며 어제의 말과 오늘의 말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태도가 만연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런 시대에 '보편적인 도덕률'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그 보편적인 도덕률로 저자는 공자의 <<논어>> <위령공>편의 己"所不欲勿施於人, 즉 내가 당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가하지 말라"를 든다. 양심의 계발에 동서양의 어떤 고전보다도 자세한 가르침이 나와 있다는 <<논어>>에 대한 짧고 쉬운 이야기가 담긴 <<논어, 양심을 밝히는 길>>은 의외의 문장을 만나는 재미도 또한 있다.

네 가지가 없던 공자? 언뜻 듣기에 싸가지가 없었던 공자로 다가온다. 그럴 리가.
그래서 다음 문장을 얼른 읽어보니 ...

1. 이런저런 잡념이 없으셨고
2. 반드시 이러해야 한다는 기대가 없으셨고

3. 묵은 것을 굳게 지키는 고집이 없으셨고
4. 자신만을 중시하는 아집이 없으셨다.

                                  <<논어>>, <자한>
이런 네 가지라면 없어야겠다. 공자가 말하는 인(仁)이란 남을 자신과 똑같이 여기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공자는 잡념, 기대, 고집, 아집을 내려놓고 살았으며 극단적으로는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나는 모를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공자는 이렇게 개인의 철학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위정자를 위한 철학인 듯하다.

"양심으로 천하를 경영하라." 

애공이 '어떻게 해야 백성이 복종하겠습니까?'라고 묻자 공자께서 대답하시길 '곧은 것(군자)을 들어다 굽은 것(소인) 위에 놓으면 백성들이 복종할 것이며, 굽은 것을 들어다 곧은 것 위에다 놓으면 백성들이 복종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하셨다.-<<논어>>, <위정>

이제 곧 총선이다. 우리는 어제의 말과 오늘의 말이 다른 정치가들을 너무나 많이 봤다. 스스로 자기 말을 자기가 부정할 수 있으니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을 지경이다. 공자의 <<논어>>에 나온 말과는 너무나 먼 이들이 사라지길 바라며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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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너리스 2
엘리너 캐턴 지음, 김지원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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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병자리에서 힐끗 본 것이-기대하고, 믿고, 예언에 나오고, 예측되고, 의심하고, 미리 경고를 받았던 것들-물고기자리에서는 명백해진다. 한 달 전에는 오로지 몽상가만이 꿈꾸던 그런 환영이 이제는 현실의 형태를 갖고 실체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택의 산물이고, 자신의 손으로 결말을 선택한다.

물고기자리를 넘어가면? 자궁에서 피투성이의 생명이 태어난다. 우리는 따라갈 수 없다. 끝에서 처음으로 뛰어넘을 수 없으니까. 양자리는 집단적인 관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황소자리는 주관적인 태도를 단념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쌍둥이자리의 규칙은 배타적이고, 게자리는 원인을 찾고, 사자자리는 목적을 추구하며, 처녀자리는 계획을 바란다. 하지만 이것들은 제각기 진행되는 일들일 뿐이다. 12궁의 두 번째 행동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천칭자리는 개념으로, 전갈자리는 재능으로, 궁수자리는 목소리로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염소자리에서 우리는 기억을 얻고, 물병자리에서는 통찰력을 얻는다. 그리고 12궁에서 가장 오래되고 마지막을 점하는 물고기자리에 와서야 일종의 자아를 얻어 완전해진다. 2권 p.250

 

1권에서 이야기의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준 작가는 이제 2권에서는 각각의 진술을 통해서 진실을 찾아간다. 앞의 글에서 작가의 표현처럼 모든 것들이 운행을 마치고 완전함을 얻는 것이다.

 

크로스비 웰스의 오두막에서 나온 금은 리디아 웰스가 꿰매었고, 안나 웨더렐이 구입했던 4벌의 드레스에서 나온 것이다. 또 이 금은 아 퀴가 끄집어내 제련했다. 그럼 이 금은 스테인스가 웰스 오두막에 숨긴 금이다. 이 금을 둘러싼 이들의 욕망과 운명이 때로는 죽음에 가까워지기고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이뤄가기도 한다.

 

맨 부커상을 받은 내가 읽은 다른 소설들- 파이 이야기,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추락 등-과 비교해 보았을 때 <루미너리스>는 조금 아쉽다. 우선 이 소설은 지금 여기 현실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 그것은 이 책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달라서일 수도 있지만, 작가가 쓰고자 한 것이 달라서일 것이다. 다층적이고 복잡한 구성이 말하는 사람은 흥겹지만 읽는 독자에게는 지루할 수도 있다. 이 지루하고 복잡한 이야기의 끝이 당연히 예측 가능하다거나 그럴 수밖에 없는 결말일 경우 이 두꺼운 책을 다 읽은 독자는 맥이 빠져버린다. 이런 결말을 보려고 이 두꺼운 책을 읽었단 말인가 하는.

결국 이 소설은 착한 소설이 되고 만다. 사람들이 결국 쫓았던 그 금은 단 한 번 땅에서 캐었던 것으로 결국은 돌고 도는 그 어떤 것이었다. 마치 자본처럼 눈에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실체가 있는 듯 있지도 않은 욕망 덩어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소설의 결말에서 보여준 운명 같은 사랑의 결실과 헛된 욕망은 이 소설이 갖고 있는 한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인간은 그 한계를 극복해내지 못하고 끌려가고 있으며 욕망을 거슬러 사랑을 이루기보다는 욕망에 굴복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이런 결말은 동화 속 이야기같이 순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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