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봤어? - 내일을 바꾸기 위해 오늘 꼭 알아야 할 우리 시대의 지식
노회찬.유시민.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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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친구 녀석과 가볍게 술자리를 하던 중, 나의 전방위적 모두까기를 듣던 녀석이 대뜸 이런 말을 던졌다. “, 이렇게 문제가 많은 사회라지만, 어쨌든 좋은 점도 있는 게 사실 아니냐, 네가 말하는 것처럼 죄다 문제라면, 이미 망해도 진작 망했어야 하는 것 아냐?”

 

지당하신 말이었다. 당연하다. 대한민국은 그래도 괜찮은 나라다. 40년 가까이 살았다고, 정이 들어 무조건 편드는 것이 아니다. 외국 생활을 오래 해본 이들이 그래도 우리나라가 제일 살기 좋은 것 같아라고 말하는 것도, 괜히 폼 잡으려고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나도 우리나라가 좋다.

 

그런데 난 그런 말이 듣기 싫기도 하다. 이른 바 진보 진영, 혹은 진보적 시각을 가진 이들의 사회비판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주장들을 배부른 소리혹은 꿈같은 투정따위로 치부하는 이른 바 보수들의 지적질이 심히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상에 만족하며, 정직하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음흉하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는 늘 끊임없이 단 1cm라도 나아가기를 원한다. 그리고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만약 멈추었다면, 어쩜 이 지구는 행복했을지 모르지만, 인류는 불만으로 폭발했을 것이다. 어떻게 나아가느냐가 중요하지, 나아감 그 자체가 문제는 절대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때문에 진보는 인류에게 있어 불가피한 그 무엇이다.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있는 것처럼, 반드시 나아가야 할, 더 나아져야 할 일들이, 삶들이, 가치가 우리 주위엔 여전히, 오히려 더 많이 쌓이고 있다.

 

이름만 들어도 만만치 않은 세 명의 이빨들이 오랫동안 팟캐스트를 진행해왔다. 이들 중 노회찬과 유시민은 아주 미약하게나마 인연이 있었고, 진중권은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그의 책과 말과 행동으로 꽤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친근하다.

 

세 사람의 수다는 주로 묵직한 이야기들을 주제로 삼고 있다. 정치 팟캐스트이니 말랑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지만, 가공할 이빨 셋이 모였다는 그 자체가, 그리고 셋의 개성과 배경 그리고 철학이 저마다 다르다는 점에 폭발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꼬박 챙겨 들었다는 말은 못하겠지만, 들을 때마다 많이 배우고 또 웃었다.

 

각자 다른 차원의 내공과 아우라를 지니고 있지만,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일단 셋 다 욕을 무지하게 많이 먹고 자랐다는(!) , , 지금도 보수나 수구들 그리고 일부 진보들에게 잊힐 만하면 욕을 드시긴 한다.

 

그리고 또 하나, 현재에 수긍하거나 적응하거나 만족하지 못하고 늘 진보를 꿈꾼다는 점이다. 무기력을 거부하고, 복종과 굴종보다는 거기에 맞서는 길을 택했다. 그들은 초강력 이빨과 그에 못지않은 행동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장관, 국회의원, 교수. 일반 시민들은 좀처럼 누릴 수 없는 권력(!)을 누린 것도 사실이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엔 허투루, 거저먹은 이는 없었다. 업적은 그렇다 치고, 성과는 그렇다 치고 일단 할 만 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속성이다. 이들은 자신이 잘 나갈 때나, 그 반대일 때나 늘 앞으로 나갔고 나가고 있다. 이게 중요하다. 팟캐스트의 진행이 그걸 증명한다. 굳이 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을 것만 같은 이들이 함께 모여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떠들고 고민하는 모습. 여기에 가장 큰 평가를 하고 싶다.

 

책은 말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일단 천천히 다시 음미할 수 있고, 초대된 전문가들의 내공도 더 깊이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말로만 들었을 땐 순간 이해되지 않았던 이야기들도 쉽게 전달된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책으로 읽어 더 분통 터지기도 했다. 도대체 모두까기를 멈출 수 없는 세상 아닌가!

 

우리가, 입으로 떠든다고, 몇 안 되는, 게다가 힘도 권력도 돈도 없는 우리가 무엇을 바꿀 수 있겠는가,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새누리당의 친박 대 비박, ‘박박거림에 짜증을 내다가도 총선 때는 기억상실증이 되어 새누리당에 표를 주는 이해곤란 분들이나, 메르스 사태 와중에 황교안 후보자가 슬그머니 총리가 되고, 탄저균 파문은 파문으로 끝나버리고, 성완종 리스트가 허무맹랑하게 종결되고, 그 와중에 경제가 질식사하고, 서민들의 생계도 막막해지고, 아무튼 이따위 멍멍이 같은 짓거리들이 버젓이 벌어져도, 오로지 새정치민주연합이 무능력하고 멍청하고 썩었기 때문이라고, 멀찍이 떨어져 침 뱉는 이들과는, 그래도 다른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 창피하니까!

 

슬기로운 사람은 자신이 똑똑해서가 아니라 다른 똑똑한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런 이들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다. 이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분노하고 비판하고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를 논하는 것은, 그 어떤 허무한 자위행위술안주로 정치인 씹기 혹은 암튼 맘에 안 드는 돈 많은 인간들 씹기가 아니다. 세금 온전히 내고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당당한 권리이자, 때론 의무이기도 하다. 나라가 개 같으면 개 같다고 해야지, 개를 개가 아니라 하시면 곤란하다.

 

당연히 노유진은 나보다 똑똑하고 경험이 많다. 거기다 내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그럼 끝이다. 배우면 된다.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 중 맘에 들지 않거나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은 제외시키면 된다. 그 뿐이다. 내가 스스로 하고 싶어 하는 공부는 즐겁다. 이들과의 만남은 즐거웠다.

 

올 한 해 동안 정부는 지겹게도 광복 70주년을 떠들었고, 이와 맞추어 통일준비를 떠들었다. 권력에 눈치를 보는 여타 기타 베이스 드럼 등등도 광복이다 통일이다 뭐다 해서 전방위적 예산 낭비와 인력 낭비와 정력 낭비를 곳곳에서 벌이고 있다. 우습다 못해 처량하다. 북과는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정권이 그야말로 입으로 먹고 살고 있다. 국책연구기관이나 소속된 단체들을 그렇다 치고, 언론이나 학계나 기업들도 저마다 통일이 어쩌고 광복이 어쩌고 떠드는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안 마셔도 취한 듯 속이 좋지 않다. 허무하고 또 허무하기 때문이다.

 

책에는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편집장과 서보혁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교수의 이야기를 통해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의 화해에 대한 고민을 잠시나마 할 수 있다. 글을 읽다보면 올해 광복 70주년이란 기쁨보다 왜 분단 70년이란 치욕과 슬픔을 더 무겁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느껴진다. 진정한 광복은 우리에게 여전히 미래의 일이기 때문이다. 북과는 이미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더 강렬하게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고, 일본과는 이제 그만 친해지고만 싶은 지금도 위안부 피해할머님들은 눈을 감고 있다.

 

필립 델브스 브러턴의 장사의 시대중 어느 보험회사의 설립자가 부하 직원에게 한 조언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는 비단 세일즈맨만을 위한 조언은 아닌 듯하다. 자신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고 강하게 스스로를 세뇌시키며 살아가는 이들, 동시에 이 세상 역시 나 하나로 바뀌는 것은 쥐뿔도 없다고 체념하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충분히 필요한 조언일 듯싶다. 나 역시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사고방식이 달라지면 행동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면 습관이 달라지고, 습관이 달라지면 성격이 달라지고, 성격이 달라지면 자아가 달라진다. 그리고 일단 자아가 달라지면 새 인생이 펼쳐진다.”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도, 그렇다고 당신이 바뀔 가능성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사회에 고쳐야 할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내 삶과 어느 정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는 알게 될 것이다. 그것으로도 난 이미 본전은 뽑았다고 본다. 결국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 옳다고 믿는 것을 믿게 된다. 그 선택이 나중에 후회로 돌아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나저나, U-대회도 안 되면, 되는 게 뭐 있냐.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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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굴의 시대 - 침몰하는 대한민국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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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불의한 권력이 저지른, 그리고 당대에는 알려지지 않도록 꼭꼭 숨겨둔 추악한 거짓이나 부정일 수도 있고, 다수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매장되어 버리는 진실일 수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 바로 우리들의 뒤틀린 욕망이다. 차마 이목이 두려워, 아닌 척, 상관없는 척하지만, 끝내 악취를 풍기며 드러나고야 마는, 우리 안의 괴물. 그것은 이 시대를 자연스레 타락의 길로 이끈다.

 

때문에 박노자는 우리에게 불편한 존재다. 그를 이 시대의 가장 급진적이고 예외적인 지식인이라 평가하는 것 자체가, 지금 우리 지식인 사회가, 우리의 정신세계가 어느 정도로 천박하고 또한 획일적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우리의 욕망을 꿰뚫어본 그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닌가.

 

대학 시절 만난 그의 글은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가히 혁명적이었다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과연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뒤틀리기 시작했는지, 아니 애초부터 정상적인 때가 있었는지, 자괴감과 수치심이 일어났다. 그리고 위선과 폭력이 일상화되어버린 살풍경이 새삼 다가왔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나는 당신이 아니었고, 때문에 몸 둘 바를 끝내 찾지 못했다.

 

박노자는 소위 이 땅에서 보수라 불리는, 자처하는, 인정받는 이들 뿐만 아니라, 그 반대라 불리고, 자처하고, 인정받는 일부에게도 그리 달가운 상대는 아니었다. 특히 그들이 박노자를 불편해 하였던 것은 에 대한 그의 인식이 큰 작용을 하였다.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결코 제대로 된 사회주의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와는 더더욱 멀었다. 때문에 북에 대한 그의 비판은, 우습게도 이 땅의 일부 진보들의 분노를 사는 결과를 낳았다. 슬픈 모습이었다.

 

자신과, 혹은 자신의 진영과 상반되거나 대립되는 주장을 펼친다고 하여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또한 불온시하는 모습은, 진보라 불리는 이들이 그토록 경멸하는 보수진영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그런 모습이 나에겐 생경했고, 그런 진보 세력들에 대한 실망감이 조금씩 생겨나지 않았나 싶다. 다양한 의견과 주장을 수용하지 못하는 집단은 썩게 마련이다. 죽게 마련이다. 그 이후 그들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는지는 모두 알고 있다.

 

책에서 그는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를 전례 없는 더러운 시대라 표현한다. 지나침이 없다. “사회적 연대 의식은 증발하고, 저마다 자신과 몇 안 되는 피붙이들의 잇속만 추구하고, 타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각자도생의 사회인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비굴은 자연스레 우리 삶을 지배하는 핵심 키워드가 되어 버린다. 냉소의 시대를 지나 비굴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그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쉽지 않다.

 

이른 바 기득권 세력들은 오랜 시간동안 민중을 철저히 개인화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우리는 사라지고 오직 만 남겨졌다. 사적 욕망의 추구를 찬양하였고 적극 장려하였다. 아울러 그를 위해 남을 짓밟는 것 역시 장려되었다. 이젠 더 이상 이기주의와 몰염치가 죄악이 아닌 시대다. 박노자는 그것이 대한민국의 국시가 되었다고 표현한다. 이 표현 역시 지나침이 없다.

 

어느 한 분야라도 썩지 않은 곳이 없다. 최근 신경숙 사태가 여실히 보여주듯, 사뭇 고매함을 뽐내는 문화예술계 스포츠계도 이미 충분히 타락했다. 각 분야에서 오랫동안 권력없이 몸 담아온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술자리라도 펼쳐지면, 각자 자신들의 영역이 더 썩었고 희망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나만 잘 살게 되면 타인의 고통이나 죽음까지도 관심 밖이 되어버린 모습. 비굴함이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의 우리 모습이다.

 

책은 그의 눈을 통해 나타난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모순과 불의를 보여준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첨단을 걷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지독하게 작동하고 있는 전근대적 습성까지 가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독특한 이중성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아울러 그는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정치사회적 문제에도 눈길을 돌린다. 급격히 자본에게 인간자유를 빼앗긴 세계. 이젠 인간 없는 세계, 인간 없는 번영이 더 이상 상상의 그것이 아님을 그는 말한다. 인간을 소외시키는 흐름의 확산은 결국 인간의 주변화, 그것의 장기화와 상시화를 초래하고야 만다.

 

북한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여전하다. 그는 남과 북이 적대적 의존관계를 유지하며, 지금껏 자기들만의세상을 유지해왔다고 말한다. 그 사이 양 국가의 인민들, 시민들은 고통과 억압을 감내해야 했고, 결국 남쪽은 지독한 이기주의와 보신주의, 사대주의와 식민주의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북한은? 그의 눈엔 여전히 왕족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북과 남을 왕족 사회와 귀족 사회로 표현하는 그의 눈빛엔 남북은 일란성 쌍둥이 체제일 뿐이다. “남북한은 한반도가 성취한 근대성의 빛(문맹 퇴치)과 어둠(전 사회병영화)을 동시에 공유한다. 그만큼 서로 돕고 상처를 보듬어주는데 지원하는 것이 정상이지 않을까?”라는 말은 남북이 적대적 의존관계를 벗어나 진정한 협력과 상생의 관계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그의 진심이 담겨 있다.

 

아울러 그는 통일로 가는 문은 우리가 북한을 또 하나의 정상이라고 받아들이는 순간에야 열릴 것이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정상의 비정상화에 몰두하고 있는 이 시대에, 여전히 멀게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왜 굳이 우울한 내용의 책을 읽으려 하냐고. 우울하고 말도 안 되는 세상에서, 책이라도 즐겁게 읽으면 안 되는 거냐고. 물론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슬픈 영화는 어쩐지 보기 두렵듯, 나 역시 즐겁고 싶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며 느낀 몇 안 되는 교훈 중 하나는, 혼자 즐겁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것이고, 그마저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함께 즐거워야 참으로 즐거운 것 아니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땅의 더러움과 대면할 수 있는 용기,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내 눈물겨운 이웃들과 어깨걸이를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가만히 있으라고 가만히 있지 않고, 대들 수 있는 용기와 배짱이 있어야, 그나마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고, 야매가 되지 않고 버틸 수 있다. 그래야 정말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이 비굴의 시대에 모두 다 혁명투사가 되라고 선동하지 않는다. 그럴 수도 없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타인의 고통을 직시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고 말할 뿐이다. 비굴하고 잔혹한 시대를 철저히 응시하고 결연한 목격자가 되어 연대하는 길. 그곳에서 희망은 나타날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 더 추가하고 싶다. 겉과 속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을, 그 무슨 병행 전략이라느니, ‘전략적 모호성이라느니 떠들지 말자는 것이다. 말과 행동엔 당연히 책임이 따른다. 상대는 우리의 말과 행동에 따라 대응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주먹을 날린 후, 상대에게 화해의 장으로 나오라고 하는 것은 코미디다. 지금 우리 정부가 북에게 그런 우스운 꼴을 보이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가뭄과 역병이 창궐하는 시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늘과 땅과 이웃들에게 덜 부끄럽고, 덜 해를 끼치는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 같다. 부끄러워 아이를 쳐다볼 수 없는 지금이다. 가뭄과 역병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이들, 살기 어려워 스스로 생을 저버리는 사람들. 너무 미안하고, 죄스럽다. 그럼에도, 우리, 희망을 놓지는 말자.

 

그러나 우리는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 마음껏 외치고 힘껏 연대하면 된다. 사회는 보수화되더라도 진리는 그대로 진리다.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인간을 왜곡하고, 장기적 차원에서는 다수를 절대적이거나 상대적인 빈곤으로 빠뜨리며 결국 위기, 공황, 전쟁을 낳는다는 것은 진리다. 나는 그냥 저들이 내 입을 힘으로 막을 때까지 그 진리를 크게 이야기할 생각이다. 그렇게 해서 파쇼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후손들에게 부끄럽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보수화된 사회의 경제적 상황이 불가피하게 악화되어 다수의 삶이 망가져가는 대로 연대와 투쟁의 폭을 계속 넓히면 된다. 그래도, 그래도 희망은 마지막에 죽는다.” - 6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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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복종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지음, 심영길 외 옮김 / 생각정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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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는 스스로 굴복한다. 민중이 독재자에 대한 굴종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독재자는 스스로 무너진다. 그에게서 무엇을 빼앗을 필요도 없다. 단지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 된다. 나라가 그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 단지 자신의 이해에 반하는 짓만 안 하면 된다.(중략) 민중은 흔히 자발적으로 굴종을 택하고 스스로 자신의 목을 자른다. 노예가 될지 자유인이 될지를 선택하는 것은 민중 자신이다. 자유를 버리고 멍에를 짊어지며 잘 정비된 법률 하에 권력의 보호 아래로 기어들어가는 것은 동시에 근심과 압제, 불의 그리고 오직 독재자 한 사람만의 기쁨을 위해 살기를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본문 46~47페이지

 

결국 6·15 기념행사가 올해도 반반 쪼개져 치러졌다. 열다섯 돌이라는, 그리고 광복 70주년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올해, 끝내 남북이 다시 한자리에 모여 평화와 화해, 통일을 노래할 수 있기를 염원했던, 그것을 위해 부단히 땀을 흘렸던, 많은 이들의 가슴이 무너졌다. 무안해졌고, 서글퍼졌다. 다시 그렇게 되었다.

 

어쩌면 남북 모두 칠십년 세월동안 압슬의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굴종과 순응이라는 기둥에 묶여, 불신과 증오를 깔아놓은 자리에 무릎 꿇려 그 위에 천근만근 분단이라는 돌을 얹는 형벌. 동족 간 피비린내 나는 지옥을 만든 것도 부족해, 칠십년이나 갈라져 살아온, 그 지독한 노둔함에 대한 벌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칠십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은 것이 아니었다. 그 시간동안 섬이나 매한가지인 채로 살아온 우리는 어느 새 옹춘마니가 되어버렸고, 청맹과니가 되어버렸다. 그리곤 오히려 시퍼렇게 분단의 현실을 바라보고 분노했던 이들을 아갈잡이해버렸다. 염치도 양심도 없는 그런 이들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분단체제를 애써 유지하며 그 안에서 온갖 추잡스러운 짓을 서슴지 않았던 이들이 부와 권세를 누렸고, 누리고 있다. 푸독사마냥 힘없는 이들을 찍어 누르고, 그들을 착취하며 호위 호식하는 이들은, 그야말로 분단으로 인해 목숨 줄을 유지하는 두억시니 그 자체였다.

 

자발적 복종은 흔히 먹고 살기 위해라는 변명과 공존한다. 이웃의 고통에 눈감고, 동포의 굶주림에 눈감을 수 있는 그 뻔뻔함과 치졸함은 어찌 되었든 나는 살아야 한다는 구차함으로 합리화된다. 이는 저자가 살았던 16세기와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아 보인다.

 

여기에 우리의 현실은 더욱 참담하다. 적어도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만조백관들은 지극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남북의 화해와 통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 그들이 그렇게 하찮게 생각하는 국민들보다 더 땀을 흘려야 지당하다. 하지만 그런 이들을 찾는 것은 갈수록 쉽지 않다. 입으로는 통일을 떠들고, 대박을 외치지만, 실상 그들이 원하는 것은 분단체제의 지속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모두 만무방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일제 치하 독립투쟁을 했던 이들이 동가식서가숙하며 눈물겨운 삶을 이어간 것처럼, 지금 이 땅에서 분단체제의 균열을 내고, 남북의 모든 생명들이 다시 만날 수 있도록 땀 흘리는 이들은 치열하게 분단시대를 살아내고 있다. 그들은 기어이 자발적 복종을 거부한다.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유인의 굴곡진 삶을 선택한 것이다.

 

이제 메르스 사태는 진정 국면이 아니라 오히려 전 방위적인 확산을 두려워해야 할 상황으로 가고 있다. 더 이상 비난하기조차 지겨운 정부의 무능력에 국민들은 이제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손을 깨끗이 씻으면 메르스 따위는 두려울 게 없다는 대통령의 말씀(!)은 순식간에 메르스로 생명을 잃은 분들을 죄다 비위생적인, 몰상식한 이들로 만들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대통령 앞에 신하들은 국궁사배를 해대기 바쁠 뿐이다.

 

굴종은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무릎을 꿇는 것이다. 스스로 인정하여 승복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안위만을 위한,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다. 하지만 단지 먹고 살기 위함이라는 명분으로 모든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칠십년 분단이 오로지 우리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어쩔 수 없었던 시간이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부끄러워 마땅할 일이다.

 

은폐와 거짓으로 점철된 정부의 메르스 대응 앞에 많은 국민들이 정당한 비판과 함께, 자발적 순응을 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지긋지긋한 분단시대를 무비판적으로,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끊임없이 비정상을 비정상이라고 되 뇌일 수 있는 용기가 지금 우리에겐 필요하다. 불의에 대한 자발적 복종은 결국 굴종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아이들의 즐거운 수학여행을 지켜주지 못한 나라, 전염병 하나로 온 국민이 서로를 슈퍼 전파자인양 두려워하게 만든 나라. 그런 나라가 감히 통일 대박을 떠들고, 그 어떤 통일을 위한 프로세스를 떠들었다는 자체에서, 우습다 못해 서글퍼지는 지금이다.

 

정부의 무능력으로 말미암은 시민들의 두려움을 단지 와언으로 치부해 오히려 처벌하겠다는 뻔뻔함과 대통령의 침묵과 유체이탈 화법에 신물이 난 시민들의 두목답답함이 오가고 있다. 그 와중에 은근슬쩍 멍첨지를 총리로 앉히려는 몰염치까지 보인다. 세간의 와언을 처벌하겠다는 것도, 하자뿐인 이를 총리로 끝내 앉히겠다는 것도, 항상 그 명분은 사회적 질서 유지를 속히 확립하기 위함이라 말한다. 하지만 정부가 말하는 사회적 질서는 시민들이 생각하는 그것과 다르다.

 

질서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현실의 권력층은 항상 그들 세력의 욕구를 강요하고 만족시키기 위해 질서를 주장한다. 문제의 앞뒤 순서가 바뀐 것이다. 통치하기 위해 질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의미 있는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통치력을 동원해야 한다. 질서가 정의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질서에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 본문 149페이지

 

기억해야 한다. 부당하게 권력을 차지한 이들이 그들만의 사회적 질서를 위해, 지난 칠십년 간 지겹게도 우려먹은 것이 바로 북한이었음을. 국정원 댓글 조작의 변명도 종북 세력의 댓글 공작을 방해하기 위한 보안적 공작이 아니었나.

 

세월호 이후의 대한민국이 전과 같을 수 없듯, 이제 메르스 이후의 대한민국 역시 그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주 조금이나마 새로운 희망이 담겨 있으리라 믿고 있다. 집권자의 우렁잇속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 시민들,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고 차별하며 기생하는 수많은 이 시대의 들 앞에, 이 땅의 각다귀들 앞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 시민들이 자발적 움직임이 그것이다.

 

이제 이러한 자각과 함께, 분단시대에 대한 자발적 복종 역시 끝내야 할 때가 왔다. 메르스 때문에 가려져 있지만, 메르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극악한 탄저균 사태에 대해 정부는 입을 다물고 있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속국입니다, 당당히 외치는 것만 같아, 처참하다.

 

자발적 복종을 끝장낼 수 있는 것은 통렬한 자각뿐이다. 난 노예가 아니라는, 그리고 분단은 지극한 비정상이자 불의라는 자각. 물론 이대로 살 것인지,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고 결심할 것인지는 온전히 나의 몫이다.

 

남북 모두에 시원한 단비를 간절히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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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진 2015-08-23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서평 잘 읽었습니다^^
부산의 인문학 서점 인디고 서원에서 8월 27일 목요일 저녁 7시에 <자발적 복종>으로 인문학 세미나가 열립니다. 자발적 복종 대신 능동적 참여와 시민의식을 길러낼 방법을 모색해보고자 합니다. 자세한 안내는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indigoground.net/jBoard/view.html?bcode=indigo_22&no=2357&page=1

소중한 참여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시인이다 - 시인 김규동의 자전적 에세이
김규동 지음 / 바이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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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멋진, 아니 이제 더 깊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할리우드 배우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월드 워 Z>(World War Z/2013)라는 영화가 있다. 공포영화의 단골객인 좀비가 등장하는 작품인데, 당시 꽤 흥행한 것으로 기억한다. 개인적으로는 이스라엘 외곽에서 높디높은 장벽을, 그야말로 개미떼처럼 달려들어 시내로 넘어가는 좀비들의 모습이 기억난다.

 

영화는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제목에서 보여주듯, 좀비와 지구인(!)과의 목숨을 건 사투가 주된 줄거리이다. 나는 좀비 소설, 좀비 영화를 이렇게 해석한다. 인간성을 파괴하는 자본주의가 낳은 배제와 차별, 억압과 불평등이, 다름 아닌 좀비로 표현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영화의 결말을 보면 어쩐지 나의 가설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닌가?

 

어느 한 순간 나락으로 떨어진 이웃들을,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닌 타인’, 배제해야 할 그 무엇으로 규정해 버린다. 어쩜 이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 노동자, 탈북인 등 모두를 대한민국 내부의 좀비로 규정하여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끔이면서도 또 자주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꼭 그들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들을 극심한 정신적·물리적 폭력으로 대하는 정부와 이를 추종하는 세력들을 볼 때, 나는 과연 그들이 유가족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인식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물론 지금 메르스와 관련된 이들은 말할 것도 없다. 잘못과 책임은 정작 누구에게 있는지 헤아릴 생각도 않고, 길거리에는 좀비를 피하고자 하는 군중들뿐이다. 마스크가 상식을 가릴 수는 없을 텐데, ‘나라도 살고 보자는 또 다른 폭력이 제2의 피해자들을 낳고 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영화에서 좀비 바이러스의 근원지로 다름 아닌 한국이 지목된다. 때문에 주인공은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으로 향한다. 다름 아닌 평택의 미군 기지다. 참 의미심장하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북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이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 북의 상황은 어떤지 묻는다. 그 대답이 기가 막히다. 북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가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왜냐고? 모든 인민들의 이를 뽑아 버렸거든.”

 

여기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어쩜 나만 느낀 것일 수도 있겠지만, 북에 대한 미국의, 서구의 뿌리 깊은 적대감과 조롱이다. 이미 북은 미국의 사랑스러운주적이 된 지 오래다. 백악관을 북의 특수부대가 점령한다는 황당한 이야기부터, 최근 김정은 위원장을 풍자한 영화 등에서 볼 수 있듯, 마치 북이 미국과 세계의 안보에 가장 치명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는 국가라도 되는 것 마냥 떠든다. 구 소련, 이라크, 쿠바, 시리아, 아프간 등등 과거 미국의 주적들이 사라지거나 그 힘을 잃은 후, 다행스럽게도 미국이 발견한 주적은 이었다. 이를 북 지도부가 자랑스럽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서글프고 웃지 못 할 블랙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좀비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전 인민의 이를 뽑아버릴 수 있는 나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미국은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북의 전체주의? 독재? 폐쇄성? 무지? 억압? 차별?(어쩐지 미국에게도 해당되는 것들이 많아 보인다) 어찌 되었든 긍정적인 면은 전혀 없을 것이다. 정작 탄저균과 같은 메르스보다 몇 배는 치명적인 균을 인위적으로 한반도에 들여온 이들이, 북을 이따위로 묘사한 것에 다만 분노를 느낄 뿐이다.

하지만 북의 보건의료 시스템, 의료체계가 현재 상당히 허약하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남북의료협력이 잠시 이뤄졌던 시기에는 그나마 미약하게나마 개선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도 버겁다. 결핵으로 인해 해마다 약 2,500명의 주민들이 사망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전문가는 실상 그보다 10배는 될 것이라는 우울한 분석을 내놓는다.

 

때문에 북은 외부로부터의 전염병 유입을 막기 위해 더 고심할 수밖에 없다. 에볼라 창궐 당시 북의 조치에서도 알 수 있듯, 일단 철저한 차단이 급선무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 정부는 그 첫 단계를 태만하여 지금 이 꼴이 난 것 아닌가. 때문에 앞으로 당분간 북은 남쪽으로부터의 그 어떤 유입, 방문을 차단할 가능성이 높다. 그들이 보기에 이미 우리는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우울하다. 6·15의 뜨거운 상봉이 불투명해진 지금, 때 아닌 외부 질병으로 인해 남북관계가 또 다시 흔들리고 있다. 광복 70주년이라는 명분도 이미 빛이 바랬다. 아마도 북은 남측의 대통령이 6·15공동선언 15주년 기간에 미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미 우리의 진정성을 파악했을지 모른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히 북도 이해하기 어렵다. 남북관계 개선에 의지를 거듭 표명한 대통령이 정작 6.15선언 15돌에는 미국으로 가버리는 상황. 어느 천치가, 어느 반편이가 진정성을 믿을 수 있겠는가.

 

이처럼 남북관계에 대한 안타까움이 깊어만 가고 있는 와중에, 김규동 시인이 떠올랐다. 책은 시인이 세상을 떠나기 6개월 전 펴낸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회상 문집이다. 함경북도 종성 출신인 시인은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니다 1948년 홀로 월남했다. 그리고 1950년대 초 박인환, 김경린 등과 함께 후반기 동인으로 참여하여, 당시 전통 보수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한 인물이다. 시인 김정환은 김규동 시인의 시를 숱한 민중시들과 정반대로 시 순정 자체를 심화, 통일의 열망조차 순정의 극치로 전화했다고 평가한다.

 

시를 쓴다는 것은 삶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죽어감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어쩜 희떱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누구나 나름의 시를 쓰며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어리석은 모든 몸짓도, 때론 활활 타오르는 뜨거움까지도 모두 한 구절 한 구절 시가 되어 흘러가는 것. 그마저 서럽게 턱턱 막히더라도, 그럼에도 터져 나오는 것. 나는 그것이 시라고 믿어왔다. 그렇다면 우린 지금 참으로 서러운 시를 써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김규동 시인은 평생 살기 위해시를 써내려갔다. 스스로 혼돈과 무질서, 허위와 광기의 시대를 용케도 시라는 무기가 있어 그나마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시는 존재 이유였고 삶의 목적이었던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시인일 수 있어 행복했다는 김규동 시인. 그는 시대의 아픔과 불의에 눈 감지 않았던, 약자와 가려진 이들을 외면하지 않았던 시대를 배반하지 않은 선비였다.

 

아울러 그는 전쟁으로 헤어진 어머님을 눈 감는 날까지 그리워했던, 실향민이었다. 고향집 앞 느릅나무를 생전에 꼭 한 번 다시 보기를 바랐던, 아름드리 그 나무에 기대어 그리운 고향의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 했던, 천하의 불효자였다.

 

울고 다시 헤어지는 만남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분단의 슬픔과 비극을 두 번 겪어보는 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저는 금강산에 갈 생각을 못합니다.” 이 구절에서 어쩔 수 없는 울컥함에 잠시 머뭇거렸다. 과연 시인의 이 처절한 하소연 앞에 남북의 권력자 중 그 누가 감히 당당할 수 있을까. 지금도 서러운 눈을 감고 있는 이산가족들 앞에, 도대체 그 어떤 고귀한 명분으로 변명 따위를 늘어놓을 수 있을까.

 

시인은 전쟁의 참상과 도시문명의 삐뚤어짐을 비판한 모더니즘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잠시 동안일 뿐이라 믿었던 이별이 영영 이별이 되어버린 분단의 아픔 앞에서 한없이 목 놓아 울었던, 그 피울음을 원고지에 꾹꾹 담아냈던 분단 시대의 시인이기도 하였다.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시대, 사람의 감정과 추억, 사랑과 우정마저 금액으로 계산하고, 예측하고, 평가하는 시대. 감정을 팔고 사는 추레한 시대. 이 땅을 살아가는 분단인이라면 누구나 고민해야 할 통일과 남북화해의 노력마저, 계산기를 두드리고, 굳이 대박을 이야기해야 그나마 귀 기울이는 이 시대는 분명, 김규동 시인에게 커다란 빚을 지고 있다. 이 땅의 모든 이산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있다. 아주 부지런히, 오랫동안 말이다.

 

아울러 그럼에도,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속울음을 눌러가며 걸어온 이들에게, 차가운 소주 한 잔에 비친, 그대의 뜨거운 눈 속에 비친 서러운 이 땅을 위해 오늘도 평화와 통일의 시를 써내려가는 모든 이들에게, 몸둘 바 없는 고마움을 가져야 마땅하다.

 

메르스도, 에볼라도 그 어떤 것도 지금 한반도의 분명한 잘못됨을 합리화할 순 없다. 이 땅에 살았던 김규동 시인은, 딱 그이만으로 족하다. 이제 시인들은 사랑을 노래하고 평화를 말해야 한다. 서러움 대신, 눈물 대신, 어울림과 함께 걸어감을 노래해야 한다. 그들에게 시를 돌려주어야 한다. 광복 70주년을 그야말로 빈껍데기로 만들고 있는 이 시대에, 내가 바라는 한 가지이다.

 

삼팔선 넘어올 때 딱 3년만 남쪽에서 공부하고 돌아오겠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벌써 수십 년이 지나갔지 뭐예요. “어머니, 3년만 있다 올게요.” “그래, 몸조심하고.” 어머니와 나눈 마지막 대화입니다. 불효자식도 이런 불효자식이 없을 거예요. 왜 말들 하잖아요. 기쁜 일이 있으면 마누라를 찾고 슬픈 일이 있으면 어머니를 생각한다고요. 제가 그렇습니다. 어머니가 너무 그립습니다. - 48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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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이 대전환의 길을 묻다 - 큰 적공을 위한 전문가 7인 인터뷰
백낙청 외 지음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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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면서도 또한 뛰어난 적응력을 갖춘 동물이기에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 그렇기에 나름 만물의 영장이네 뭐네 하며 거들먹거리며 젠체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망각과 뛰어난 적응력이 때로는 얼마나 큰 재앙을 불러오는가.

 

어디? 어디? 하며 멀리 둘러 볼 필요조차 없다. 그냥 거울을 보면 된다. 주위를 둘러보면 된다. 광복 70주년이라는 역사적인 올 해 대한민국의 슬프고도 어처구니없는 지금의 모습을 보면 된다.

 

광복 70주년은 곧 분단 70년이다. 차마 할 말이 없어야 마땅하다. 심히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다. 어느 분의 말씀처럼 동서독의 통일둥이25세 청년이 되었는데, 한반도의 해방둥이는 칠십 노인이 된 상황. 그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운가, 그리도 잘나서, 그처럼 성대하게 축하하고 싶은가.

 

짧은 생을 돌아보면 나의 은사 중에서는 유독 국어, 역사를 가르치셨던 분들이 많았다. 담임선생님 중 대부분은 국어 아니면 역사 선생님이셨고, 졸업 후 지금까지 가끔씩이나마 소식을 전해 듣는, 인사를 드리는 분들 역시 국어, 역사 선생님들이다.

 

그 중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두 분이 계시다. 모두 중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셨다. 한 분은 1학년 때 담임이셨던 역사 선생님, 또 한 분은 2학년 담임이셨던 국어 선생님이시다. 어쩜 어리바리한 어린 녀석의 삶의 방향을 급선회하게 만들었던 분들이라고, 지금 와서야 느끼곤 한다.

 

역사 선생님은 왼손의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한 마디씩 절단된 분이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왼손이었다. 그 배경엔 역사가 담겨 있었다. 4·19혁명이었다. 당시 서울대학교 사학과 청년이었던 선생님은 벗들과 함께 경무대 앞으로 달려 나가, 이승만 부패정권의 퇴진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부상을 입게 되셨다. 선생님이 경무대 앞 바리게이트를 넘어서는 모습은 <TIME>지 기자의 카메라에 담겼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소개하는 글이 담긴 타임지의 표지 사진이 되었다.

 

선생님은 완고한 분이셨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들에게 가차 없이 회초리를 드셨다. 어린 기억으로는 공부를 잘 하지 못했던 아이들에게도 크게 꾸짖곤 하셨던 것 같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개인적인 감정으로 매를 드신 적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분명 맞는이유가 존재했다. 난 그 명쾌함이 어린 나이에도 맘에 들었다. 비록 많이 맞았어도.

 

역사 선생님은 후에 정년퇴임을 하신 뒤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진보적 성향의 온라인 매체에 기고를 하시고, 크고 작은 집회나 행사도 참여 하신다. 페이스북을 통해 잘못된 한국 근현대사의 어두운 민낯을 알리기도 하셨다. 부끄럽고 어처구니없는 역사라도 남의 것이 아닌 우리의 역사이기에.

 

2학년 담임이셨던 국어 선생님은 이른 바 빨간 물(!)이 들었다는 전교조선생님이었다. 물론 어린 내가 전교조에 대해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주위에서 소곤거리는 잡스런 소음으로 선생님에 대한 전설(!)이 퍼졌다.

 

총각이셨던 선생님은 평소 오지랖 넓기로 자타가 공인하는 어머니의 중매에 의해 같은 학교 음악 선생님과 결혼에 골인했다. 뭐 그것 때문에 어머니가 중신에 대한 대가성(!) 금품을 수수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암튼 두 분은 참 잘 어울려 보였다.

 

국어 담임선생님과는 참 즐거운 한 해를 보냈다. 북한산 자락으로 아이들 몇 놈들과 등산을 갔다 길을 잃어 해매다, 냇가를 발견하고는 여기서 우리 홀딱 벗고 미역 감을까?” 하시던 호연지기! 그때 나타난 군인들에게(도대체 북한산 자락의 군인들은 어디에 숨어있다 나타난 것일까!) “여기는 들어오면 안 되는 구역입니다!”라는 경고성 멘트를 듣고도, 순전히 몰랐다는 이유로, 고의성이 다분히 없었다는 이유로 끝까지 미역을 감고 철수한 또 다른 호연지기! 선생님은 작은 체구에서도 수많은 에너지가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 분이었다.

 

선생님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참 많다. 하나 같이 이제는 소중한 기억이자, 추억이다. 그런데 그 중 가장 아프고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시간이 있었다. 국어 수업 시간, 선생님은 카세트 플레이어를 들고 오셨다. 영어 시간도 아닌데, 어인 플레이어? 국악이라도 들려주시려나? 아이들은 이 분이 또 어떤 음모(!)를 꾸미려고 하는지 의혹의 눈초리로 쳐다봤다.

 

오늘은 진도를 나가는 대신에 너희들에게 노래 한 곡을 들려주고 싶다. 정태춘·박은옥이라는 분들의 노래야. 제목은 <우리들의 죽음>이다. 너희들과 다르지 않은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노래란다. 가사를 잘 들어보고, 왜 이 아이들이 죽어야 했는지, 잠깐이라도 생각해보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도 좋다. 그냥 노래를 들어보기만 하자

 

그리고 선생님은 노래를 들려주셨다. 가난한 맞벌이 노동자 부부. 그들에겐 예쁜 딸과 아들이 있었다. 아이들은 부모님이 일하러 나간 사이, 달리 갈 곳이 없었다. 부모들은 행여나 아이들이 밖에 나가 그 어떤 사고라도 당할까봐, 좁디좁은 방 안에 아이들이 먹을 점심 밥상과 요강을 두고 밖에서 문을 잠그고 일터로 나가야만 했다.

 

남겨진 아이들은 심심했다. 밖의 세상이 궁금했지만, 나갈 수 없었다. 낮에는 텔레비전도 나오지 않았다. 밤에 나오는 텔레비전에도 엄마와 아빠는 나오지 않았다. 우리 동네, 우리 집도 나오지 않았다. 온통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아이들은 좁은 방안을 떠돌다 성냥을 발견했고, 호기심에 불을 당겼다. 그리곤 다시는 엄마와 아빠를 볼 수 없는, 먼 길로 떠나고 말았다. 혜영이는 다섯 살이었고, 영철이는 세 살이었다.

 

중학교 2학년 까까머리 녀석들에게 그 노래는 의문의 연속이었다. 왜 문을 담그고 나가신 거지? 왜 아이들은 불장난을 한 거지? 왜 남매에겐 친구들이 없었지? 그리고 왜 이 아이들은 그렇게 죽어야 했던 것인지.

 

선생님은 노래가 끝난 뒤에도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감상문 따위를 쓰라는 말씀도 없었다. 그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계셨다. 솔직히 당시 그 노래가 강렬한 충격으로 내게 다가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유 없이 비릿한 슬픔과 의문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난생 처음 그 어떤 아픔을 느낀 것 같았다. 그저 아팠다.

 

그 이후에 세상은 참 많이 달라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때론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치곤 한다. 지금도 가난에 의해 살해당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그리고 다른 한 편에선 돈으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들이 득시글거린다. 정의와 평등, 상식의 가치는 여전히 저 멀리에 있다.

 

이 자식이, 왜 또 뜬금없이 백 교수님의 책을 소개하면서, 딴 얘기를 늘어놓고 있나 하실 분들 많으시겠다. 이제 그 이유를 말하겠다. ·고등학교를 지나는 동안에도 여전히 나의 머릿속은 였다. 생각 없이 한심하게 살았다. 그러다 음악에 빠져 공연한답시고, 돌아다니며 만만치 않은 양의 소음을 살포하기도 했다.

 

그러다 대학을 준비하며, 과연 내가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살짝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내 점수로 그리 많은 선택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다행스럽게도 부모님 역시 학과 선택에 대한 모든 권한을 나에게 위임해주셨기에, 온전한 나의 선택만으로 학과를 정해야 했다. 그런데, 무얼 배우지?

 

훌륭하신 담임선생님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던 덕분에, 나에게 생긴 단 하나의 좋은 습관이 있다면 그것은 독서였다. 특히 선생님들은 역사에 대한 개인 공부를 강조하셨다. 무려 공교육의 최 일선에 계신 분들이 역사는 교과서보다는 따로 공부하라는(!) 불순한 말씀을 하셨다. 때문에 다른 것은 몰라도 역사 공부는 나름대로 혼자 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가. 그동안 난 단 한 번도 온전한 우리의 역사를 배우지 못한 것이 아닌가. 북쪽의 역사를 빼고, 어떻게 역사를 제대로 공부했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거기에 의문을 품은 사람들은 많지 않아 보였다. 다른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였다.

 

또 하나의 이유, 해방 후 지금까지 남쪽의 역사가 파란만장하게 걸어온 이유, 때론 뒤틀리고 왜곡되고, 정의가 땅바닥에 떨어지게 된 근본 이유는 결국 분단이라는 족쇄 때문이라는 나름의 결론을 얻었다. 분단이 가져온 온갖 기형적인 것들이 이 땅을 살아가는 모두를 구속하고 있음을 느꼈다. 진정한 민주주의도, 평화도, 결국은 분단극복이 이뤄져야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막연히 꿈꾸던 국어선생님이라는 꿈을 버리고(우리 교육계를 위해 정말 잘 한 선택이라고 지금도 믿는다), 신생 학과였던 북한학과에 지원했다. 도대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북쪽을 배우고 싶었다. 그리고 통일이라는 민족의 숙원을 위해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왔다. 대학 입학 후 부터 따져보니 거의 20년이 되어간다. 그동안 조금씩의 차이는 있었지만, 결국 난 북쪽이라는 화두, 통일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재능과 근면함이 없기에 내공 따위는 쌓을 수 없었지만 말이다.

 

아주 당연하게도, 그리고 어쩜 다행스럽게도, 돈 따위는 모을 재간이 없었다. 명예나 권력과도 거리가 멀었다. 지금도 빚이나 다 갚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끈질기게 살아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후회는 없다.

 

그 이야기를 2학년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린 적 있다. 한창 기자로 살아갈 때였다. 선생님은 오랜만에 연락한 녀석의 해괴한 논리의 글을 읽으시고는, 한 마디 하셨다. “당장 뭐 먹고 살까를 궁리하며 학과 선택을 하고 배움의 길을 가는 세상에서 네가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대견하다.”

 

어쩜 그 말씀으로 지금까지 버티고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도, 그 어떤 명예나 권력 따위가 없어도, 나름 자부심과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 그것은 선생님과 같은 분들의 따뜻한 격려와 위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모른 척(!) 내 길을 응원해주는 가족들의 존재도 크디크다.

 

여전히 나의 생각은 변함없다. 과거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대통령이 죽기보다 싫었던 사람들은 모든 건 노무현 때문이다!”라고 외쳤고, 이명박 시대엔 모든 건 MB때문이라고 소리 질렀다. 그리고 지금은? 답하기 싫다.

 

그런데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분단 때문이다.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지극히 비정상적이라는 자각에서부터 해결의 출발점을 찾아야 한다. 분단을 모른 척하고, 북쪽을 외면하고, 우리가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하다. 진리이자 상식이다.

 

백 교수님이 정치, 경제, 여성, 교육, 노동, 환경, 남북관계 등 우리 사회의 주요 분야 전문가들과 만나 나눈 이야기들은, 하나 같이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보다 더 사람답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모든 것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역시나 분단체제극복으로 해석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비정상화의 극대화가 이뤄지고 있는 현 시기에, 무정부 시대라는 슬픈 이야기들이 나오는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결국 상식과 정의에 기반 한 온전한 평화다. 너와 내가 안심하고, 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대, 그런 꿈을 현실로 하나하나 만들어갈 수 있는 노력, 그런 적공이 필요하다.

 

평화체제를 이야기하고, 평화협정을 말하면, 그것이 마치 북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으로 비쳐질까, 두려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어느 순간부터 평화체제, 평화협정을 이야기는 이들이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도대체 광복 70주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백 교수와 대화를 나눈 전문가들은 모두 나름의 적잖은 내공을 지닌 분들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다가오는 총선과 대선을 포함해, 어떠한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박노자 교수는 우리 사회 지식인들의 두뇌 속에 각인된 사대주의를 비판하며, ‘내지’ ‘내지어란 단어를 사용한 바 있다. 미국과 영어를 의미한다. 이것이 과연 과도한 표현인지, 우리 사회의 지식인을 자처하는 이들의 두뇌 속에 과연 내지와 내지어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바로 이런 뼛속까지 박혀있는 사대주의의 극복이 결국 분단극복의 출발이자, 광복 70주년이 주는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동안, 어쩔 수 없는 나의 무력함으로, 좌절하며 드러눕고만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다시 일어서야 할 것이다. 강렬한 저항과 자각의 과정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황에서 느끼는 무력감을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앞으로 매서운 눈초리와 근면함으로 좋은 책 알리기에 부지런해질 것을 말씀드린다. 그동안의 나태함을 용서해주시기 바란다!

 

나는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나, 바뀔 수 있나를 묻기 전에 나 스스로 얼마나 바뀌었고 바뀔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 순서라는 생각이다. 다음으로 주위에 바뀐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찬찬히 살필 일이다. 그리고 두 질문에 모두 아무것도 안 바뀌었다는 답이 나온 게 아니라면, ‘그런데도 세상 전체는 왜 이다지도 안 바뀌나를 묻고 끈질기게 파고들어야 할 것이다.” - 34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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