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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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을 기대하는 유토피아적 희망은 삶의 무시무시한 리얼리티와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먹고 자란다. 세상은 아름다운 만큼이나 추하고, 사람들은 선한 만큼이나 악하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도 있지만, 짐승만도 못한 인간도 있는 법이다. 이러한 세속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삶의 리얼리티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환등상의 등불을 끄게 만드는 힘의 근원이다. 거창하게 말하면 유토피아적 희망, 소박하게 말하자면 좋은 삶에 대한 기대는 약간은 가슴 쓰라린 세상의 리얼리티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물정(物情). 세상일이 돌아가는 실정이나 형편을 말한다. 세인의 인심이나 마음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흔히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말은, 그다지 칭찬은 아니다. 그리고 아쉽게도 여전히 나에겐 완전히 해석되지 않는 어려운 단어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스스로 생각해도 전혀 세상 물정에 밝아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김이설 작가의 소설 환영을 그야말로, 무참한 마음으로 읽으면서, 문득 나의 아둔함이, 어리바리가 끝내 누군가의,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 주변 사람들, 부모와 아내, 자식을 힘들게 만드는 것은 아닐지, 어쩜 이미 그들에게 불행을 안겨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놀랄 만큼 두려웠다.

 

동시에, 스스로 생각하는 아둔함이, 사실은 아둔함이 아닌 무책임과 회피, 나태와 방관은 아니었는지, 정녕 그렇다면 그 무지막지한 잘못을 어찌 해야 할 것인지, 눈물이 날만큼 두려웠다.

 

사실 그랬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진정 책임을 느끼고 행동했던 것이 얼마나 되었는가. 치기와 어리석음을 정의와 용기로 생각하고, 무책임과 회피를 고뇌와 결단으로 둔갑시키며 살아온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 나는 딱 그만큼 형편없는 녀석은 아니었을까.

 

나는 다만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남산골 샌님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짐짓 말만 주절거린 한심한 건달, 떠버리는 아니었나. 주변 사람의 땀과 눈물에 기생하며, 나의 땀을 고의로 누락시킨 양아치는 아니었나, 그런 참혹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이내 주저앉아 버렸다.

 

어느덧 세상이 마냥 아름다운 곳은, 것은 아님을 알아버린 나이다. 물론 그 이전 어린 시절에도 그렇게 느끼진 않았지만, 그 강도는 나이 듦과 더불어 훌쩍 더 늘어나 버렸고, 지금은 절반의 냉소와 절반의 희망이 늘 치열하게 맞붙는, 그리 아름답지 못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도 아쉽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 인생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없어 보였다. 그저 한심하게 한심했다.

 

도대체 이 세상의 무엇을 꿰뚫어야 비로소 세상 물정에 밝다고 할 수 있을까, 무엇을 깨달아야 난 세상물정 좀 아는 녀석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주식에 빠삭해야 하고, 경제에 통달해야 하며, 인맥관리의 달인이자, 부동산의 흐름을 눈 감고도 예언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 아니면 재테크의 달인? 투자의 귀재? 인문학과 심리학에 정통한 선비를 가장한 장사꾼?

 

나에 대한, 두려움과 한심함이 교차하며, 문득 싸가지 있는 학자가 반가운, 아주 슬픈 세상에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저자 역시 반갑기에 희귀한 이들 중 하나였음을 고백한다. 각자의 소중한 삶은 선동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책을 시작한 저자는 덜 실망할 수 있지만, 때문에 덜 희망하게 되는 세상에 대한 대화를 독자와 나눈다. 마땅하지 않은 세상, 결코 만만치 않은 세상을 덜 아파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때론 세상의 민낯을 보여주고, 때론 그럼에도 희망이 있음을 증거 한다.

 

자신의 처지를 공통감각과 연결시키지 못하는 한, 자신의 삶에 대한 절실하고 치열한 생각은 팔자타령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저자의 지적이 따끔하다. 아울러, 비판이란 본래 투덜대지 않으면서도 세상에게 불만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말 앞에 나의 비겁함을 숨길 수 없다. 형편없이 형편없는 나의 형편없음에 좌절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나에겐 여전히 용기가 필요함을 느끼게 해준 고마운 책이다.

 

책은 수준 높은 서평집이기도 하다. 하나의 주제를 이야기하며, 그것과 연관된 의미 있는 책들을 호명하고 인용한다. ‘노동이라는 주제를 이야기하며 마르크스의 임금노동과 자본, 엥겔스의 잉글랜드 노동계급의 처지를 호명하는 식이다. 책을 덮고 나면 수많은 철학자와 경제학자, 역사가와 사회학자를 만난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세상물정을 잘 안다는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결국 도돌이표다.

 

상식에서 언론’ ‘성공’ ‘명예’ ‘섹스’ ‘남자’ ‘자살’ ‘노동’ ‘인정’ ‘가족’ ‘죽음에 이르기까지 25개의 키워드를 통해 저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들여다본다. 사회학자의 눈과 평범한 우리의 눈으로 함께 바라보려는 노력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때문에 주눅 들지 않고, 또한 얕지 않다. 어쩔 수 없는 비관이 배경 음악으로 흐르지만, 사소하지만 빛나는 희망 역시 감출 수 없다. 저자의 고의적 배려라 해도 전혀 괘씸치 않다. 자신이 소개한 책들에 대한 친절한 안내까지 부록으로 담았으니, 인상 깊었던 키워드에 대한 보다 세심한 들여다보기도 가능케 도와준다. 고마운 일이다.

 

저자의 표현처럼 배운 괴물들이 지배하는 사회다. 이러한 사회에서 덜 배우고 덜 빠른 이들은 착취나 이용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공포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일개미와 볼트의 역할에 안주하게 만든다. 지금은 그 정도가 아니라, 일개미조차 될 수 없다는 절망에 몸부림치다 스러지는 이들이 무수하다.

 

그런 세상에서 나의, 우리의 좋은 삶을 지키기 위한 기술을 책은 알려주고 있다. 적당한 공격과 방어, 그것은 교활함이 아닌 영리함을 갖추었을 때 가능하다. 그리고 그 영리함은 세상의 이치를 어느 정도 알았을 때, 역시 가능하다. 저자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그 이면의 세상을 동시에 보여준다. 실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것처럼,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세상,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그렇게 단호하게 냉정하고, 단정하게 아름답기도 하다.

 

나의 나태와 방만과 어리석음과 후안무치로, 고통을 겪고 있다. 자업을 했으니 자득은 당연하지만, 자득이 행여 타인에게 고통을 전가할 수 있다는 공포감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짐짓 믿어버리고 살아온 무책임이 심한 미안함으로 다가온다. 날 아껴주는 이들의 존재를 당연하다고 생각해 온 뻔뻔함에 스스로 무참하고 참담하다. 부끄럽다는 표현은 과분하다.

 

어쭙잖은 오만으로 그렇게 세월을 낭비해 온 것은 아닌지, 돌이켜본다. 그리고 당최 여전히 알 수 없는 세상 물정을 앞으로 어떻게 알아가야 할지 난감하기도 하다. 하지만 빤한 이야기지만, 늦었다 해도 시작은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해도,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있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무모하게 다시 들여다 볼 생각이다.

 

좋은 책을 만나면 늘 신세를 지는 기분이다. 그리고 언젠가 나 역시 누군가에게 부채감을 안길 수 있는 그런 책을 써보고 싶다는 당토 않은 생각도 해본다. 자학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늘 돌이켜 봐야 할 것이다. 세상이 썩었다고 비관하는 시간보다는 나의 부패를 경계하는 시간이 더 필요한 지금이다. 내 삶의 상책은 무엇인가, 나는 얼마나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한 용기가, 지금 나에겐 절실하다.

 

당신의 이 삶은 또한 그저 세계의 사건 중 한 조각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의 사건 전체이다. 다만 이 전체는, 한 번의 시선으로 개관할 수 있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각 구성원은 어떤 의미에서는 짐이 곧 국가다라고 말할 권리가 있다.” - 슈뢰딩거, 물리학자의 철학적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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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하드보일드를 읽는다 김봉석의 하드보일드 소설 탐험 2
김봉석 지음 / 예담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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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아름답다, 고 믿으며 살아가는 이들은 눈물겹지, 라며 생각하고 살아간다. , 그렇다고 내가 세상을 오직 아비규환이나 생지옥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지극히 당연하지만, 이 우주에서 딱 잘라 정의할 수 있는 것은 드물다. 고로, 세상은, 생각하기 나름이고 늘 제멋대로다.

 

그럼에도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은 새파란 희망 보다는 온통 잿빛, 핏빛이다. 소설보다 더 살벌한 일들이 눈앞에서 버젓이 일어난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리 잔인해졌지? 라고 묻기엔 민망할 정도의 무자비가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이다. 사실 우린 잔인한 지 좀 되었다. 그리고 난? 살짝 새가슴이다.

 

때문에 굳이 참혹한 이야기가 주를 이룰 수밖에 없는 하드보일드, 범죄 스릴러 소설을 왜 읽는가, 물으실지 모르겠다. 이쯤에서, 그럼 저자는 왜 하드보일드를 읽는지 들어보자.

 

이 피로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애티튜드로서의 하드보일드. 집단의식이나 이데올로기에 중독되어 달려 나가는 것이 아니라 쉽게 타협하지 않고, 도취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꾸준히 걸어 나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취해야 할 태도임을.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은 때로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악과 맞서 싸우기도 하지만, 대부분 우리 일상생활 속 숨어 있는 평범한(!) 악을 쫓는다. 소설 말미에 등장하는 범인, 혹은 그 어떤 악마가 기실 평범한 우리 이웃이었음이 드러날 때, 우리는 팽팽한 소름과 함께 전율을 느낀다.

 

그렇다면 그런 악과 맞서 싸우는 이들은 마블의 슈퍼 히어로들일까. 그렇지 않다. 초인적 능력의 영웅이기보다, 주어진 현실 속에서 그저 눈앞에 닥친 일을 묵묵히 처리해 나가는 것뿐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그들의 태도에 주목한다. 정의롭지 못한 체제, 혹은 대상 앞에서 그들은 그 어떤 거창한 명분이나 사명감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세상이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거나, 정의는 반드시 승리 한다는 따위의 환상도 없다.

 

동시에 그들은 쓸데없이 오버하지 않는다. 지독한 절망에 빠지지도 않고, 혁명을 꿈꾸지도 않는다. 그냥, 그저 그렇게 생존해 나가기 위해 발버둥 칠뿐이다. 바로 그것이 빌어먹게도 위대하다. 자신의 자리를 말없이 끝내 지켜나가는 것. 하드보일드를 통해 우리가 위안 받는 것은 권선징악의 고루한 빤함이 아닌, 평범한 이들의 고군분투인 것이다.

 

지금 이 세상을 보면, 알보다 더 작은 이들도 이미 아시겠지만, 이름 없는 이들이 묵묵히 제 자리에 있기에 그나마 어느 정도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들이 없다면, 애초 팍팍한 이 세상은 어쩜 진즉 더 황당한 무간지옥으로 변해버렸을지 모른다. 정말 그런 것 같다.

 

그들이 꼭 공권력일 필요는 없다(왜 굳이 공무원을 이렇게 부르는가. 나도 참). 평범한 시민들도 제각각 땀 흘리며 분투하는 사이, 스스로 빛나곤 한다. 전혀 쓸데없는 자학이나 비관, 절망이나 냉소보다는 그저 그렇게 제 자리에 있는 이들의 삶은 때문에 수많은 이야기를 말없이 전한다. 그런 삶의 태도는 순응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바보들도 순응과 복종을, 타협하지 않으며 제 할 일을 하는 것과 구분할 수 있다. 고로, 야매는? 어지간하면 바로 걸린다. 수 쓰지 마시라.

 

전혀 평범하지 않은, 과하게 비도덕적이고 반사회적인 인사가, 공공연히 상식과 정의를 떠들어대는 것을 심심하지도 않은 데 봐야 하는 순간이 있다. 고역이지.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거나 뭐, 암튼 인정조차 하지 않으며, 오직 억울하다고 얼굴에 힘을 쫙 풀며 상식과 정의를 중얼거린다. 공허하지만, 또 마냥 그렇지도 않은 게 거기에 순간 넘어가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걸 보는 것도 고역이지.

 

어쩌면 하드보일드는 하찮게 잔인하고 절망적인 세상에 보다 뻔뻔히 맞설 수 있는 용기, 자세일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쓰레기 같은 인간을 목격했을 때의 반응. 그들에게 정말 한심한 마음을 담아 쓴웃음을 지어줄 수 있는 것, 그리고 혹시나 아무도 안 볼 때에는 한 대 콱 쥐어박아줄 수 있는 여유로움이랄까.

 

우연인지, 우연을 가장한 인연인지, 내가 좋아하는 스릴러의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무언가 하나 부족한 듯한, 결핍되고 위태로운 이들이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이 캐릭터는 이제 신화가 되었지만),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로렌스 블록의 매튜 스커더’, D. 맥도널드의 트래비스 맥기등 알콜 중독자거나 순정 마초거나 아님, 때때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웃과 약자에 대한 끝없는 연민과 애정이다.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늘 강자를 조롱하고, 약자를 보호한다. 이게 바로 하드보일드 소설의 매력이자, 내가 이 장르를 즐기는 이유다. 나 역시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에. 때로 하루에도 수없이 그 반대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책은 다양한 하드보일드 작품을 소개하며, 그 안에 담겨진 메시지를 독자에게 알뜰히 전달한다. 물론 독자에 따라 어떤 작품은 그야말로 수 천 가지로 달리 해석될 수 있다. 이 책은 저자 개인적인 감상이자, 태도이다. 우리는 그저 저자의 느낌을 공유할 뿐이다.

 

하지만 간결하고도 힘 있는 문장을 통해 다양한 작품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매우 바람직한 책이라는 것을 부정할 순 없다. 더불어 이런 종류의 책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 즉 소개된 작품들을 전부 다 찾아 읽어봐야겠다는 열의를 불태우게 된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물론 유쾌한 유혹이다.

 

범죄소설은, 당연히 그 시대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교과서 중 하나다. 또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삶과 마음을 읽기에도 그만이다. 저자의 이야기인데, 공감한다. 엽기적인 살인과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는, 딱 그렇게 사회가 엽기적이고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범죄 드라마나 소설이 그야말로 차고 넘치는 미국은 다 이유가 있다, 라고 감히 해석해본다. 현재 미국은 사상 최악의 총기 사고로 또 충격을 먹었다. 사상 최악이라는 수식어가 이번에는 부디 오래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책에서 아쉬운 점은 국내 작가의 작품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국내에서는 아직 하드보일드가 그리 각광 받는 장르가 아닐뿐더러, 토종 작품들이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중원 어디에선가 오늘도 열심히 피바람을 일으키고 있을 고수들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화려한 부상을 늘 기다리고 있다.

 

과거에 비해 우리 영화나 문학이 한층 잔인해졌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종종 들린다. 아울러 아이들의 폭력성이 잔인한 게임이나 영화 때문이라고 헛소리를 배도 안 부르게 주절거리는 이들도 있다. 뭐 바보는 끝내 바보로 사시라 하고. 암튼 왜 과거보다 잔인한 영화들이 많이 나오는지, 그리고 왜 이젠 어느 정도 잔인하지 않으면 눈 하나 깜빡 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는지, 그 이유는 어쩜 우리 스스로가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희망이 없는 세상은 그렇게 점점 슬래셔 무비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비정한 세상 속에서, 잔인하고 절망적인 세상에서도, 나는 한 권의 하드보일드를 들고 집을 나설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으려 발버둥 칠 것이다. 오늘도 어디에선가 누군가로부터 강한 공격과 조롱과 비난을 받아 상처 입은 그대여. 부디 좋은 꿈꾸시라. 난 언제나 그대의 편이다.

 

사랑과 상실감 속에서 밤은 항상 신성하다. 인간이 그렇게 만들 수 있을 때에만 멋진 세상이 될 수 있다.” - 해리 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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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 민족21 통일이야기 3
정창현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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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오해는 마시라. 현존하고 있는 이들이 모조리 머저리라는 말은 물론 아니다. 워낙 작금의 상황이 한심. 답답. 씁쓸. 쓸쓸. 우려스럽기도 하고, 아울러 남북관계에 있어 굵직한 획을 그어버렸던 이들은 말 그대로 이미 모두 이 세상 분들이 아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지금도 제 잘났다고 거품을 물고 다니시는 이들이 좀 많은가. 그 분들은 모두 다 잘 났다!고 말씀드린다. 자알 나셨다.

 

그런데 그렇게 잘 나신 분들이, 그렇게도 남북관계는 물론이거니와 동북아, 나아가 국제관계의 모든 것을 꿰뚫고 계신 분들이 차고 넘치는 대한민국 이 땅에 이 시점에서, 왜 남과 북은 아직도 이렇게 한심하다 못해 처참한 상황으로 남아 있을까. 이 모든 것이 오로지. 무조건. 단호하게. 의심의 여지없이. 명쾌하게. 순전히. 온전히. 100% 북한의 잘못된 행동 때문일까. 아니면 그 어떤 정신 나간 돌+아이들의 말처럼 북한에게 핵 개발 자금을 갖다 바친 개성공단의 기업인, 노동자 때문일까. , 내가 말해놓고도 정말 어이가 없다.

 

책은 2014년 출간되었다. 작금의 상황에서 본다면 그야말로 씁쓸하지 않을 수 없는 제목이다. 하지만 책의 내용까지 그런 것은 아니다. 왜 남북정상회담이 필요한지, 왜 이명박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의 기회를 살리지 못했는지, 그 때문에 5년을 얼마나 처참하게. 암담하게. 참담하게. 보내야만 했는지, 똑똑히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무얼 좀 아는 이들이 사라진 다음, 어설픈 관료와 쭉정이들이 남북관계를 어찌나 아름답게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지, 우리는 MB 5년을 통해 그야말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내 말이 틀렸다고 항의하고 싶으신 분들이 물론 계시겠지만, 결과적으로 지금의 남북관계를 보신다면, 뭐라 하시려나. 솔직히 그러거나 말거나.

 

장난으로 짖는 말이 아니다. 웃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그야말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이들이 고통을 겪어야 했다. 금강산에서 사업을 일구어가던 상인들, 기업인들, 노동자들은 모두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었다. 정말 생을 달리한 이들도 계시다. 적지 않다. 강원도 고성은 그야말로 폐허가 되었다. 비단 금강산만이 아니다. 남북경협에 나섰던 많은 이들이 인생을 망쳤다. 다른 표현할 길이 없다. 그냥 인생을 망쳐버렸다. 거기에 누구하나 책임지지 않았고, 알은체 하지 않았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정부의 손으로 이뤄졌다. 경협인들은 단 하나의 죄도 짓지 않았다. 경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단 말이다.

 

현 남북관계 파탄의 책임이 북한의 연이은 도발과 핵 능력 고도화에 있음도 물론 사실이다. 하지만 내 나쁜 기억에도 현 정부의 출범 당시 북한이 핵 개발 포기나 느닷없는 대남 유화정책을 펼 것으로 기대했거나 예상한 이들은 그다지 없었다. 오히려 정부 출범 초기 3차 핵 실험이 있었고, 그야말로 분위기는 살벌했다. 출발부터 그다지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4차 핵실험이 현 정부가 참을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다는 셈인데, 정말 그런 것인가? , 정말? 그게 아니면,

 

지금 국제사회의 대북정책은 무장하지 않은 영국 경찰이 범죄자를 체포하려고, ‘멈춰, 그렇지 않으면 또 멈춰 라고 소리칠 거야하는 것과 아주 흡사하다. 진실은 국제사회가 북한 문제와 관련해 효과적인 옵션을 다 써버렸다는 것이다. 이제 선택지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돈으로 안보를 사는 대타협을 통해, 북한의 핵무기 규모를 검증 가능하게 제한하는 것이다. 북한의 페어플레이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군사공격도 할 수 없으니 이게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이다. 더 나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당장 외쳐 보라.”

 

는 어느 외국 언론인(데이비드 필링,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아시아편집장. 2013213일 칼럼)의 주장에 대한 나름의 대답으로 더 나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것인가. 그런데 더 낫긴 한 건가? 과연? 지금 국제사회와 정부는 북한을 붕괴시키기 위해(아니라고는 말하지만 누가 봐도), 안간힘을 쓰고 있다. 중국에게 온갖 아양을 떨며, 관대하고 그러면서도 단호한 처분을 기다리며, 2300만 동포들을 궁지로 몰아넣으려 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이 아니라 북한 정권을 압박하는 것이라는, 매우 순진무구한 말씀을 차마 안 듣겠다.

 

그런데, 북한이 그렇게 염원대로 무너질까? 지금까지 이명박 정부 5년 내내 무너지기를 바랐던 북한이, 아울러 지금 역시 간절히 바라고 있는 북한의 붕괴가 뜻대로 이뤄질까? 현재로써 답은 자명하다. 그냥 7차 당 대회를 돌아보면 된다.

 

참 이상하다. 왜 하필 지금 중국에 있는 북한 식당에서 근무하는 종업원들이 집단으로 도망쳐, 그것도 한국으로 왔을까. 왜 그들의 입국을 이례적으로 정부는 빵빵 공개 했을까. 북한이 납치라고 주장하며 가족들을 만나게 해 달라 요구하는 데 왜 모르쇠로 일관하고, 숨길까. 왜 남측 변호사들의 접견도 막고 있을까. 답은 역시 자명하다. 설명하기도 짜증난다.

 

그야말로 상식을 탑재한 중학생도 웃을 만한 짓거리를 연일 해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다. 말장난과 유치한 험담을 서로 공식적으로주고받는다. 이 모든 해괴한 일들이 지난 70여 년 동안 오직 분단이라는 핑계로, 버젓이 일어났다. 그래놓고, 해당 부처는 통일공감대를 형성한다고 그야말로 XX하고 있고(그것도 세금으로), 북한이탈주민의 우리 사회 적응력 확대를 위해 노력하시겠다고 한다.

 

그러게나 말이다. 중학생들이 집단으로 웃을 일들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통일교육이 중요하다면서 반통일적인 행동을 연일 아름다운 퍼포먼스로 보여주고, 민족동질성의 회복을 강조하며, 정작 북한은 망해야 한다고 고사를 지낸다. 다시 한 번 묻는다. 이 모든 일이 오직 북한이 4차 핵실험을 하고 그 능력을 더 키워가고 있기 때문인가? , 정말?

 

개성공단이 문을 닫았다. 그리곤 돈으로 지원해 준다고 한다. 한 쪽에선 핵 개발 자금을 개성공단 기업들이 조달한 셈이라고, 거품을 문다. 그 거품을 그대로 삼키고 좀 닥쳤으면 좋겠지만, 또 안 되는 것이 그들도 그 거품을 튀겨야 먹고 살기 때문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그래야 먹고 살기 때문이다. , 기업들에게 돈으로 지원해준다고 하는 것도 기실 빚을 안기는 거다. 그냥 주는 게 어디 있나. 이건 거의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공산주의 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거 아닌가.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서 개인의 영리활동을, 경제활동을 강제로 막는다. 아무 죄도 짓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걸 어쩌지?

 

저자는 아까 위에 영국 언론인이 돈으로 안보를 사는 대타협을 얘기했지만, 그게 아니고, 가장 현실적으로 안보를 안보로 사는 대타협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거국적으로다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금처럼 유치하게 굴지 말고(요건 내 의견이다. 저자 표현 아니다), 큰 틀에서 한반도 정세와 남북대화를 사고하라, 입으로만 통일이 어쩌고 하지 말고, 당사자와 끈질기게 이야기하란 소리다. 상대방 없이 중얼거리는 건 약간 정신이 혼란스러운 사람 아니면, 연극배우 아닌가.

 

그리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나서라. 평화체제, 평화협정을 이야기하지 않고, 과연 북핵 문제가 온전히 해결될 수 있을까. 최첨단을 달린다는 우리는 여전히 1953년 정전체제에서 눈감고 있다. 동북아의 항구적인 평화안보 보장체제 수립을 위해 한반도 정전체제의 종식은 불가피하다. 다들 알면서 언제까지 모른 척하고 있을 것인가. 평화협정은 결국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북핵문제 해결과 평화체제 구축은 저자의 표현대로 동전의 양면이다. 지금 이것을 외면하고 있는 이들은 이데올로그일 뿐 감히 전문가나 학자라고 하긴 창피하다.

 

아울러 지겹고도 눈물 나게 구태의연한 북한붕괴론, 급변사태론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니, 앞날은 모르는 것이니, 벗어나야 한다는 표현보다는, 좀 현실적으로 예측하자는 것이다. 난 솔직히 북한붕괴론, 급변사태론 등이 결과적으로 북한의 핵 능력을 고도화 시키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시간을 질질 끌어줬으니, 북한은 그동안 놀고 있었겠나.

 

마지막으로, 부디 제발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추구해야 한다. 이것이 저자의 간절한 바람이다. 이 정부의 문제점은 과정을 아주 쉽게 생략한다는 것이다. 도대체가 기승전결이 없다. ‘에서 별안간 이다. 통일은 대박인데, 어떻게 해야 대박인지는 며느리도, 사위도, 유 대위도 모른다. 민족동질성을 회복해야 하는데, 남과 북이 텔레파시로 회복하나. 만나지도 않고? 그게 가능하면 신이다.

 

중국은 4차 핵 실험 이후 북한에게 완전 열이 받아, 가만 두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엄포를 놓았다. , 지금은? 보자. 북한보다는 미국과 더 치열하다. 미국은? 당연히 혈맹인 우리의 편이다. 하지만, 그다지 성과는 없다. 전략적 무시, 무관심 정책은 결과적으로 전략이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그냥 무능일 뿐이다. 그 사이, 역시 북한은 육해공으로 핵미사일을 날릴 수 있게 되었다고 공언하고 있다.

 

어찌 해야 하나. 어떻게 할까. 이건 굳이 임재범이 아니어도 알 수 있다. 협상을 해야 하고, 테이블에 일단 나서야 한다. 이제는 늦었다. 북한의 완전한 핵 폐기는 아주 아주 장기적 과제일 뿐이다. 지금은 우선 북한의 핵 개발 능력, 고도화를 멈추게 하고, 북한이 다른 옵션을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줘야 한다. 그냥 마치 과거 부시 행정부처럼, “쟤넨 악이고, 말로 해서는 못 알아들어. 떼만 쓰니까 그냥 무시하거나, 아님 혼 내줘야 해.”라는 무책임한 생각으로는 답이 없다. 그냥 이름만 쓰고 나가야 한다. 바로 F학점이다.

 

, 말이 더럽게 길었다. 때문에 남북정상회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모든 적폐를, 암 덩어리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정상회담뿐이다. 지금 당장 장관급이, 그 어떤 고위급이 만난다 해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다. 남북의 소위() 지도자들이 만나, 이야기를 해야 한다. 상대가 원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일단 들어나 봐야 한다. 솔직히 서로 너무 모르지 않나. 우리가 김정은에 대해 아는 게 무엇인가? 농구 좋아하는 것? 일본인 요리사랑 친하다는 것? 장난 하냐? 상대를 이토록 모르면서, 무슨 통일을 하고 무슨 정책을 만들 수 있나. 아니, 김일성 주석 때부터 독재를 해왔던 우간다 대통령도 만나는데, 남북관계 당사자는 왜 못 만나나? 새마을 운동 안 해서? 이젠 고인인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새마을 운동 인정한 바 있다. 참나.

 

아주 영민하신 분들은, 소위 전문가 중에서도, 이번 정부 내에선 더 이상 남북관계 변화는 없을 것이라 말한다. 물론 일리 있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5년 마다 확확 바뀌는 우리 정부도 짜증날 것이다. 상대하기 싫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정부의 지금 행동과 사고방식으로 봐서는 솔직히 변화가 힘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난 여기에서 완전 뚜껑이 열리는 게, 그렇게 단념하고 그냥 넘어가고, 눈치보고, 적당히 세월을 죽이는 사이에, 정말 사람들이 죽는다는 것이다. 개성공단 기업인, 노동자들이 이 정부의 임기 끝까지 버틸 수 있을까? 얼마나? 어떤 이에겐 하루가 지옥 같은데, 그걸 모른 척 하고, 그냥 시간아 세월아 하면 끝인가? 그게 전문가, 정책 책임자들이 할 짓인가.

 

권력자의 눈치를 보면서, 약자, 국민들의 고통에, 죽음에 눈 감는 것들을 우리는 간신이라 하고, 감히 쓰레기라 부른다. 도끼를 머리에 이고 임금 앞에 무릎 꿇고 바른 말을 하는 이들은 이미 죽었다. 무얼 알기 때문이다. 지금은 예전 난지도의 추억 밖에는 없어 보인다. 냄새 난다고.

때문이다. 그나마 예전 선배들에게, 예전 거인들에게, 예전 천재들이나 예전 큰 산들에게 배움을 얻었거나, 그들에게 깨달음을 얻었던 기억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이들은, 그 무얼 좀 알고 있는 거다. 난 몰라, 난 몰라, 하며 눈 감는 것도 때론 큰 죄다.

 

무얼 좀 아는 이들이 사라진 세상은 쓸쓸하다. 우리가 단순히 그 어떤 거만한 이의 표현처럼 거대한 체스판의 말이 아닌 이상, 미국이든, 중국이든, 일본이든 그 어떤 강대국의 프렌차이즈가 아니라면, 무얼 좀 아는 이들이 끊임없이 발생해야 하고, 행동해야 한다. 두 번의 남북정상회담은 남과 북이 더 이상 강대국들의 프렌차이즈가 아님을 전 세계에 알린 깜짝 놀랄 퍼포먼스였다.

 

난 그게 아쉬운 거다. 누가 대신 북핵을 없애주거나, 이 땅에 평화를 주리라 기대하면, 그것이야 말로 반국가적인, 반통일적인 우습고도 위험한 발상이다. 유치찬란한 마무리지만, 당최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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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예쁜 것 - 그리운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
박완서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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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골똘히 생각하지 않아도, 참 어설픈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며 산다. 어설프게 감정적이고, 또 감히 무엇을 동정하고 동경하기도 한다. 눈물이 많지만, 그 눈물 속의 무엇이 온전히 담겨 있는지 스스로 못 느낄 때가 더 많을 만큼 아둔하다.

 

현 시대를 살아가며 옛 시대를 동경하고, 그 속에서 어떠한 낭만마저 찾아내려 하는 것은 그 어설픈 치기 중 하나다. 지금 이 삶의 부박함을 인정하지 않고, 매정하다 느끼며, 옛 시절에는 그나마 낭만이 있었다고 위로하는 마음. 그것은 현실을 부정하고, 겪어보지도 못한 가상의 추억 속에 빠지려는 나약함의 발로일 것이다.

 

그렇게 서투르게, 남의 잘 쓴 글을 흉내 내고, 어설프게나마 낭만을 꿈꾸며 살아왔던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삶도 언젠가는 낭만으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하찮은 소망을 품으며 살아왔던 것 같다. 단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조차도 명백하지는 않기 때문이리라.

 

따지고 보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추억을 향한 애꿎은 몸짓일지도 모르겠다. 단지 몇 십 년 전의 삶을 담은 드라마나 노래에 환호하는 것을 복고 열풍이나 추억 팔기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것이, 우리는 어쩌면 매일 매일 추억을 되새김질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이미 한 번 소개한 작가의 책을 다시 이야기하는 것은 그러나, 하나만의 이유는 아니다. 박완서라는 작가의 글이 가지고 있는 순하지만, 동시에 매서운 힘을 새삼 느끼고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매정한 시대에 그의 글이 가지고 있는 따스함과 처연함과 무심함이 사무치기 때문이다.

 

작가 김훈의 부친은 시대의 불의에 끝내 섞이지 못하고 스러진 지식인, 혹은 지극한 선비의 삶을 살아냈다. 덕분에 김훈은 어린 나이에 무참함을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 무참함이 그의 손에서 종이로 옮겨졌다. 그리고 우리는 그 덕을 톡톡히 입고 있다.

 

김훈의 부친과 비교한다면 박완서의 삶이나 글은 어쩌면 간이 덜 배어 있는 싱거움으로 비칠 수 있을 것이다. 무난하고 무던하게 살아온 삶. 물론 남편과 자식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아내와 어머니의 삶을 감히 무던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겉으로 보기에 작가의 삶은 특별히 그악스럽지도, 한없이 평안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어쩌면 작가의 글을 크게 소중히 생각지 않고 살아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명징한 글이 뿜어내는 환한 기운을 외면할 수 없었음에도, 이는 곰삭은 작가의 경륜과 지혜가 담긴 훌륭한 문장일 뿐, 피와 눈물과 정의가 담겨 있는 뜨거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도 결국 늙어가게 되고, 그 사이 지혜와 현명까지는 못되겠지만, 점차 어떠한 방향으로 변하게 되는 것일까. 시간이 갈수록 작가의 글이 소중하고 또 고맙게 여겨진다. 세상을 향한 분노와 불의에 대한 참을 수 없는 혐오감, 이름도 없이 스러져가는 내 이웃들의 아픔을 피와 눈물로 써내려간 글 역시 여전히 가슴을 뜨겁게 하지만, 세상을 한없이 따뜻하게,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아름답게 보려 한 작가의 싱거움도 이제 더 이상 싱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깊고 맵다.

 

죽어가는 벗과 그 곁에서 새로이 꿈틀거리는 어린 생명 앞에 절로 세상에 예쁜 것감탄이 나오는 삶. 크게 서럽지도 크게 기쁘지도 않게 그렇게 편안히 삶을 바라보고, 또 사랑할 수 있는 힘.

 

반복해서 생각하는 것은 주로 어린 시절이고 그립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죽은 사람들이다. 이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보다 저세상에 더 많구나, 그런 생각이 나를 한없이 쓸쓸하게 한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고 사랑한 사람들 역시 나를 좋아하고 사랑해주었다고 생각하면 인생은 아름답고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 힘으로 이룩한 업적이나 소유는 저세상에 가져갈 수 없지만 사랑의 기억만은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면 죽음조차 두렵지 않아진다.”

 

주어진 삶을 부지런히 살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나태와 무지가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후려치고, 아집과 교만은 순간마다 내 등을 서늘하게 적신다. 건방진 말 한마디와 독기서린 한 문장의 글만으로도, 나는 그 얼마나 무서운 짓을 저지르는 것인가. 나의 말과 글 속에 담긴 독기와 분노가 행여 다른 이의 마음을 비틀기라도 한다면, 그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작가의 글을 읽을 때마다, 입과 손을 놀린다는 것의 엄중함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다잡고 다잡게 한다. 내 연약하고 흔들림 많은 마음을.

 

무작정 이 세상이 아름답다고, 무작정 우리는 살 만하다고 작가는 말하지 않았다. 쓰지 않았다. 그도 크나 큰 고통을 겪었고, 크게 미워하고 역정을 내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사랑하는 이들로 아름다웠고, 때문에 태어남을 다행이라 여겼다.

 

내가 살아가고 누군가의 손을 잡아줄 수 있고, 울 수 있고, 웃을 수 있다는 사실. 오늘도 아귀아귀 밥을 먹고 시원하게 트림을 할 수 있고, 내일은 들입다 술을 퍼마시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어설프게 시대를 불평할 수 있다는 사실. 잠든 아이의 조그만 발가락을 살며시 잡으며, 그렇게 하찮은 속울음을 할 수 있다는 사실. 늙어가는 어미와 아비의 뒷모습에 낯설게 슬퍼할 수 있다는 사실. 그 모든 것의 애틋함, 아름다움을 그저 고마워 할 수 있다는 사실.

 

온통 억울한 사람 천지이고, 무서운 일뿐이다. 사람 탈을 쓰고 어찌 저럴 수 있을까, 가슴 쓸어내리게 하는 일들도 숱하게 벌어진다. 이 세상은 지옥과도 같아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꾸역꾸역 입안에 주어진 양식을 집어넣으며, 내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그리고 내일도 오늘처럼 무사하리라는 막연함으로 하루를 끝내 살아간다. 그 시간 속에 사랑이 없다면, 누군가의 따스한 손길이 없다면, 우리는 온전히 살아낼 수 있을까.

 

누구나 깊은 산 중에서 반갑게 만나는 옹달샘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보드라운 흙을 만지며, 그 속에 겸손하고 감사하며, 그렇게 아름다움을 느끼며 누군가와 살아갈 수는 있다. 그 삶이 생각보다 하찮지 않음을 차츰 깨달아가면서.

 

나의 보잘 것 없는 업이 있는지라, 산문집에 담겨 있는, 2008년에 작가가 쓴, 고향 개성에 대한 글이 눈에 밟힌다. 그의 고향은 지금도 여전히 푸르고 또한 사무치리라. 아름다운 작가를 둔 우리는 행복하다. 때로는 김훈의 무참한 아름다움과 삶의 또렷한 현실성을 절감해야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박완서가, 아니 자주 박완서를 살펴볼 일이다. 아마 그렇게 될 것 같다. 아주 오랫동안.

 

“6·25 전까지만 해도 개성은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이남 땅이었지만 전쟁과 휴전을 거치면서 휴전선 이북의 갈 수 없는 땅이 되었다. 그러니까 앞서 말한 고향 풍경은 내 스무 살까지의 마을 풍경이고, 그동안 쌓인 그리움이 더욱 우리 시골을 이상화시켰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리움은 곰삭아 한이 되었다. 한이 풀릴 날도 얼마 안 남은 것 같다. 관광객이 자가용으로 휴전선을 넘는 걸 보면서 가슴이 다 울렁거렸다. 개성에 관광 갔다가 한두 시간 정도 말미를 얻어 내 고향 마을 박적골에 다녀올 수 있는 날을, 그런 꿈같은 날을 내 생전에 볼 수도 있을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그 생각만 하면 좀 더 오래 살아 그날을 꼭 보고 싶다.(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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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굴욕
크리스 헤지스 지음, 김한영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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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른 바 새내기라 불리던 시절. 나름 파란만장한 경험을 했다고 자부한다. 지금 돌이켜보면 심히 부끄러운 짓을, 당시에는 거침없이 저지르고 다녔고, 그야말로 철이 없다는 것과 무지하다는 것의 엄중한 차이를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돌이켜보자면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이 더 많이 남아있다. 박완서 선생님의 말씀처럼 시간이 결국 신()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그 중 지금도 미국이란 단어를 끄집어내면 자연스레 딸려오는 기억이 있다. 맞다. 바로 그 새내기 시절의 이야기다. 당시 갓 생겨난 학과의, 무려 제1기라는 부담과 원인모를 자부심을 함께 지니고 있던 나는, 이른 바 직속 선배의 부재가 얼마나 큰 손실인지 미처 모르고 있었다.

 

물론 훗날 뒤늦게 휴학-입대-제대-복학생의 수순을 밟아가며, 매일 털리는 지갑을 통해 선배의 운명과 애환을 절감케 되지만. 암튼 선배의 고마움과 위대함을 알기에는 아직 덜 자란 녀석이었다.

 

당시 문학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당연히 음주가무를 통한 호연지기가 주된 활동이었고, 시를 끼적거렸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곳은 선배가 있었다. 선배의 좁은 자취방에 구겨 앉아 다른 친구의 어느 시 구절에 그만 울컥해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켜고 벌게진 눈을 끔뻑거리곤 했다.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당연히 떠오르지 않지만.

 

그런데 당시 내 어리석음과 치기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작은 사건이 벌어졌다. 오줌을 누러 밖에 나가, 먼 산 바라보며 담배에 불을 붙일 때였다.

이 자식, 영 글러먹은 녀석 아냐?”

따라 나온 한 선배가 하니 던진 말이었다.

? 선배 무슨 말이에요?”

먼 산을 바라보며 담배를 태우며 오줌을 갈기는 나의 삼중 동작에 왜 기함을 한단 말인가. 순간 납득이 되질 않았다.

생각이 있는 자식이냐? 양담배에 지포 라이터까지. 네가 양키냐, 이 새끼야?”

 

솔직히 취기가 번쩍 깨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게 당최 뭔 소리지?’ 하며 어리둥절할 수밖에. 물론 품질 좋은 국산담배도 있고, 삼백 원짜리 일회용(이라 쓰고 수백 번 사용 가능한 놈이라 부른다.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라이터도 있다(거의 다 중국산입니다요!).

 

나도 안다. 하지만 개인적인 취향을 이유로 나를 양키라 폄하하는 선배에게 표현할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고작, 기껏, 겨우 담배와 라이터로 사람을 이렇게 함부로 평가해도 되는 것인가. 나를 그렇게 매도할 정도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리고 울 엄마도 아니면서 어따 대고 새끼야!

 

하지만 그 자리에서 나는 그만 침묵하고 말았다. 내 침묵의 의미가 아마도 자신의 지적에 대한 부끄러운 수긍이자, 반성의 표현이라 느낀 것 같은 선배는 오줌을 시원스레 갈기고, 역시 시원스레 담배를 빠끔거리다 방으로 들어갔다. “빨랑 들어와 인마! 더 마셔야지!” 한마디와 함께.

 

스스로 납득을 하지 못했음에도 그 자리에서 선배에게 제대로 된 반박 또는 항의를 하지 않은 이유. 그것은 근원을 알 수 없는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정작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스르르 느껴지는 뭔가 잘못했다는 느낌. 설명하기 힘들다.

 

학교에 오기 전 공부와는 담을 쌓고 대신 조그만 구멍을 뚫어 그 사이로 딴따라 짓거리에 매진해온 나. 물론 세상 돌아가는 것이나, 미국이란 나라에 대한 온전한 사색 따위도 전무했다.

 

그랬기 때문일까. 난 깜빡이도 켜지 않고, 갑자기 육박해온 선배의 힐난에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물론 다시 말하지만 부당한 지적이었다. ‘양키인 것과 양담배, 지포라이터는 언뜻 연결되는 것 같지만, 과도한 일반화였다. 지금도 그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케 마신다고 모두 쪽바리로 매도할 순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난 부끄러웠다. 아무리 뇌 속에 들어있는 것이 빈약한 놈이었다 해도 양담배와 지포 라이터의 상징성을 아주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억울해도 참았고, 슬그머니 반성 비스무리한 것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당시 나쁜 선생을 만나 우리의 참담한 현대사를 비로소 깨우쳤고, 고교 시절 얌전하고 홀로 고독을 씹고 다니던 한 녀석이 건네준 ‘5·18’ 비디오 테잎으로 내 인생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아주 의식이 넘치는 그런 분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알고 있었다. 미국이라는 존재의 복잡 미묘함을.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나름 고민했던 시간을 조금은 가질 수 있었다.

 

난 이른 바 양키 음악을 좋아해서 딴따라 생활을 했다. 헤비메틀, 락앤롤, 하드락, 얼터너티브, 하드코어, 트래쉬 메틀, 스피드 메틀, 프로그레시브 메틀, 고딕 메틀, 바로크 메틀, 데쓰 메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양키 음악을 섭렵했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급기야는 쪽바리의 음악까지 다양하게 들었다. , 생각해보니 맞아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인 것일 수도.

 

곧 죽어도 변할 수 없는, 나만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은 분명했다. 예술에는 국경이 없고, 인종도 없고, 빌어먹을 증오와 적대감 따위도 가질 수 없다고. 나에게 감동을 주고,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음악이라면, 그 어떤 노래든 나는 거부하지 않았다. 덕분에 난 편견과 차별 따위의 단어와는 애초부터 쿨하게 이별할 수 있었다. 이건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만, 무작정 추종하거나, 묻지마 애호가 아니었다. 지금도 변함없고.

 

그러니 양담배와 지포 라이터도 나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 고교 2년 당시 나에게 담배를 가르쳐준 아주 아름다운 친구 녀석이 건네준 최초의 담배가 말보로 레드였다는 구차한 변명도 여기에 덧붙여 본다. 고마운 새끼, 아주 그냥.

 

미국은 분명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국가다. 맹목적인 친미와 반미 사이에서 대충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며 같잖은 양비론을 들이밀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객관적이고,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역사를 똑똑히 기억하고 그러한 역사를 바탕으로 미국이란 국가를 평가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아메리칸드림이라는 선망의 대상. 피로 맺어진 동맹. 동시에 철저히 자국의 이익에 입각해 한반도를 분단시켜버린 국가. 지금도 한반도의 운명을 마치 체스판의 말처럼 다루는 국가. 여전히 세계 초강대국의 위치를 놓지 않으면서 전 세계를 이익 관철의 장으로 삼고 있는 국가. 암튼 미국은 단순한 평가가 불가할뿐더러 앞으로도 어떤 형태로든 우리와 인연을 맺을 수밖에 없는 국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녕 미국을 잘 알고 있을까? 이 땅 대부분의 먹물들이 미국 유학 출신이라는 것을 가장 큰 벼슬로 삼고 있고, 그를 바탕으로 카르텔을 형성해 권력의 중심부에 진출하고 또 승계하는, 아주 진부하고도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자면 분명 그 중 아주 조금이라도 미쿡 전문가는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무지하게 찾기 어렵다는 것이 짧은 내 생각이다. 미국을 추앙하고 숭배하고 우러러 마지않는 이들은 널렸으나, 정작 미국을 꿰뚫어보는 이들은 찾기 어려운 현실. 뭐 어쩌랴. 이게 약소국의 팔자려니 해야지, 하면서도 가끔 울화가 치미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저자는 언론인이다. 50개국 이상을 취재한 경험이 있고, 나름 글발도 인정받은 이다. 이런 그가 미국이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가 말하는 5가지는 많은 부분 한국의 현실과도 겹친다. 대중연예문화, 포르노그래피 산업(이건 우리에겐 성매매 문제로 더 심각하다), 엘리트주의 교육, 당최 의심스러운 돈벌이 긍정심리학 그리고 금융위기다. 5가지 주제에 대한 소제목만 보아도 저자가 느끼고 심각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지식의 환상 - 대중문화의 덫과 문맹의 부활, 사랑의 환상 - 포르노그래피와 인간성의 종말, 지혜의 환상 - 돈에 물든 교육과 비판적 지성의 죽음, 행복의 환상 - 긍정심리학의 허구와 조작된 행복, 미국의 환상 - 법인형 국가의 실체와 껍데기뿐인 제국.

 

그의 비판은 신랄하다. 프로 스포츠, 연예 산업과 유명인 문화, 리얼리티 예능 프로가 전 국민의 눈과 귀를 홀리고 일상을 규정하는 나라, 소수의 지배층이 권력과 돈, 지식과 정보를 독점한 채 자신들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그것들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이용해먹는 나라. 우왁, 어디서 어인 일인지 상당히 친숙하다.

 

어느 새 우리도 그렇다. 이 엿 같은 현실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스마트폰에, TV에 얼굴을 처박는다. 심각하고 골치 아픈 것은 싫다. 바로 그 심각하고 골치 아픈 것이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좌우한다는 사실을 애써 모른 척 한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으면 된다.

 

아울러 그는 지적한다. 자유 시장과 세계화가 한때 전 세계의 번영을 약속했지만, 결국 손쉬운 사기의 두 부분임이 폭로되었다고. 전체주의는 신념의 시대라기보다 정신 분열의 시대라고. 그는 조지 오웰의 말을 인용한다. “사회의 구조가 극악하게 인위적으로 변할 때, 그 사회는 전체주의가 된다. 이때 통치 계급은 자신의 기능을 잃고 무력이나 사기를 이용해 권력에 집착한다.”

 

미국은 여전히 강대국이다.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상당 기간 그 지위를 놓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 국민들이 행복했던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행복하다고 스스로 세뇌시키며 살아온 이들도 이제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이 미국의 저력인지도 냉철히 인식해야겠지만, 무엇이 미국을 무너지게 만들고 있는지도 분명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붕괴 역시 막을 수 있는 희망을 찾을 수 있다.

 

과연 우리는 몇 가지의 불편한 진실을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이들의 눈물과 죽음을 덮고 있을까.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은 불신이고, 그를 바탕으로 한 진정한 악의 탄생이다. 때문에 우리는 먼저 우리 내면을 돌아봐야 한다.

 

어렵지 않게 읽히면서도, 동시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미국을 보라. 무엇이 보이는지. 우리는 알게 모르게 모두 어느 정도 미국물이 들어있다. 자의든 타의든. 하지만 그 물에서 어떻게 놀지는 각자의 책임이자 권리가 될 것이다. 아님 뭐 스타일이라도.

 

, 여전히 난 양담배를 즐겨 태우고 지포 라이터를 가지고 다닌다. 정답은 없는 것이다.

 

진실을 보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파멸에 이를 뿐이지만, 순수함이 사라진 뒤에도 계속 순수 상태에 머물기를 고집하는 사람은 괴물로 변한다.”

- 제임스 볼드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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