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라이 트럼프
애런 제임스 지음, 홍지수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일부 시민들이나 외국인들이 보기에 미국이 집단적 총체적 철면피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미국이 자국에 주어진 권리 이상을 누리려 하지 않고, 미국이 내린 결정으로 영향을 받는 이들이 이의를 제기할 경우 기꺼이 귀를 기울일 거라고 보장할 수 있을까? 미국은 상식을 따르려 하지 않고 어렴풋이 닥쳐오는 위기들에 대처할 능력을 상실함으로써, 명목뿐인, 그리고 절차뿐인 민주주의로 전락해버린 건 아닐까?

 

글쎄, 잘 모르겠다. 이런 걱정을 저자가 굳이 트럼프 등장 직전 했다는 것이, 내 생각으로는 늦어도 아주 늦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저자가 앞서 말한 모습들은 그동안 미국 대통령의, 미국의 고유한 특권마냥 인식되어 왔다. 미국은 적어도 내 짧은 생각으로는 언제나 국제사회에서 제멋대로였다. 그리고 미국의 상식은 우리들의 상식과는 차원이 달랐다.

 

트럼프가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제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다. 미 정치판에 트럼프가 등장한 이후 대통령에 당선되어 백악관 입성을 눈앞에 둔 지금까지,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인들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하고 있다. 어떤 연예인도 부럽지 않은 인기(!).

 

하지만 이를 인기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를 지지하지 않은 미국인들은 물론, 세계 많은 이들이 두려움, 나아가 일종의 공포를 느끼고 있다. 과연 트럼프 시대의 미국은, 세계는 어찌 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동안 그가 내뱉어 온 발언들과 행보를 보면 그 이유는 충분하고도 남는다. 한마디로 그는 세계 최강의 철면피(Assholes)이기 때문이다.

 

UC 어바인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이른 바 철면피학(鐵面皮學)을 제시한 인물이다. 가면 갈수록 뻔뻔하고 야비하고 더럽게 저질인, 그야말로 철면피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평범한 우리들이 생존해 나가려면 어찌해야 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인 듯하다. 만약 그렇다면 그 어떤 학문보다 중요하고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드라마 속 좀비마냥 늘어나는 철면피들 덕분에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일정하게 수명이 줄어들었다고, 슬프게도 확신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철면피에 대해 내린 정의는 다음과 같다. “대인관계에서 철저히 자기가 유리한 쪽으로 처신하면서 스스로에게 그럴 만한 권한과 자격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다른 사람이 불만을 표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주로 남성).”

 

그는 미국의 정치 및 자본주의가 어쩌면 이미 철면피라는 수식어를 갖게 된 것은 아닌가 우려하며, 이른 바 트럼프 현상을 계기로 미국의 정치와 자본주의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새롭게 변화해 나갈 수 있는 계기를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실현 가능성은 차치하더라도, 참 지극한 애국자이심은 분명하겠다.

 

그가 말한 기준으로 살짝 우리나라를 살펴보자면, 우리는 그의 정의를 초월하는 철면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된다. 성평등은 기본이고, 그 스케일도 남다르다. 최순실 사태가 해를 넘겨 이 지랄들인데, 지금까지 진심으로 사죄하고 뉘우치는 인간들을 본 기억이 전무하다. 혹시 기억나는 철면피가 있다면 알려 달라.

 

이 와중에 새해를 맞아 많은 이들이 올 한 해를 불확실성이라는 키워드로 전망하고 있다. 글쎄, 언제는 이 세상에 확실한 것이 있었나 싶지만 우리 주변의 굵직한 나라들의 이른 바 리더라는 작자들을 보면, 좀 심각해 보이긴 하다. 하지만 그 심각한 작자 중 우리의 대통령이란 인물 역시 만만치 않았음을 먼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강한 리더십’ ‘강한 지도자라는 말들로 주변 강대국들의 정상들을 표현하는 것을 본다. 정말 그들이 강한가? 강하다는 것의 의미는 진정 무엇일까. 깡패처럼 지 맘대로 굴고, 이른 바 철면피의 극치를 보여주면, 그것이 강한 것인가? 그것이 강한 지도자인가? 트럼프와 푸틴과 시진핑과 아베가, 그리고 윗동네의 김정은이 과연 강한 지도자인가? 오히려 한없이 약한 이들은 아닐까? 그들은 민심을 헤아리지 않고, 혹은 민심을 헤아리는 척,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는 모리배들은 아닐까. 물론 시진핑이나 아베를 그런 지도자라 표현하면 분명 이의를 제기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진정 강한 지도자인가 하는 물음에는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난 그렇다.

 

지난 해 우리가 분노한 것은 상식이 무너지고, 정의가 집에 가고, 양심이라는 것이 실종된 우리 사회의 거대한 적폐(이거 참 어려운 단어인데, 과연 누가 먼저 썼을까. 대통령은 어쩐지 아닌 것 같다.) 때문이 아니었나? 그 빌어먹을 것들이 결국 우리와 우리를 서로 갈라놓고, 빈부 간 격차를 더욱 서럽게 만들고, 죽어간 아이들의 눈물을 더럽혔기 때문이 아니었나? 더러워도 너무 더러웠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담 우리는 늦은 감이 있더라도 철면피학을 진지하게 공부해야 할지 모르겠다. 모든 대학의 필수 과목으로 선정하고, 저자를 모셔와 특강이라도 한 판 치러야 하겠다. 지랄 같은 인간들이 설치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과연 무엇이 필요한지, 진지하게 필사적으로 공부해야 하지 않겠나. 더 이상 힐링이니 위로니 가식 떨지 말고 말이다.

 

그럼 이쯤에서 저자의 주장을 들어보자. 그는 정치계에 철면피들이 들끓고, 물불 안 가리고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어내려는 자들이 대다수인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를 타고 트럼프와 크루즈가 등장한 지금, 공화국의 미래는 불투명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해결책도 마땅치 않다고 인정한다. 그럼 어찌해야 하지? 그는 빤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해결책을 제시한다.

 

위대한 남성이든 여성이든, 대단한 철면피든, 한 개인에게 희망을 걸어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 타락하지 않도록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다잡고, 공화주의자로서 사회의 헐거워진 조직을 다시 촘촘히 엮어나가는 방법밖에 없다.”

 

다시 우리 사회를 보자. 누가 봐도 지금 상황은 정상이 아니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지 않은 한 개인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수많은 이들을 농락했다. 대통령은 그럼에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은 지고지순한 애국자일 뿐이라며 오히려 촛불 시민들을 불순세력으로 몰아간다. 여기에 그를 따르는 참담한 이들의 집단행동이 활개 친다. 태극기와 함께, 다시 한 번 어처구니없게도 성조기가 나부낀다. 뼛속까지 박힌 사대주의, 이는 망국의 지름길일 뿐이다.

 

철면피들이 활개 치는 사회는 곧 또 다른 철면피들을 대량 양산할 수밖에 없다. 전혀 존경스럽지 않은 인간이, 돈과 권력을 쥐고 오히려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회에서는, 누구나 다 그와 같은 자리에 오르고 싶어 할 것이다. 나는 이 정도밖에 썩지 않았는데, 더 썩어버린 인간이 자신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 권력을 휘두른다면 누군들 그러고 싶지 않겠는가.

 

때문에 우리는 이제 다시 품격의 귀환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세상 천지에 철면피들이 가득하다 해도, 우리마저 동참할 순 없다. 강한 리더십이 단지 윽박지르고 폭력을 사용한다고 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바른 삶, 바른 정치, 바른 사회 역시 아무런 노력 없이 이뤄질 수 없다. 때문에, 저자의 지극히 당연한 주장과 호소에 우리가 그럼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기실 세상 제일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린 이미 세상 불가능한 일들을 숱하게 현실로 만들어오지 않았나

 

어쩌면 우리는, 아니 우리 자신만이 개혁할 수 있을지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서로에 대한 모독과 경멸을 삼가자. 좀 더 너그럽고 품위 있게 말하고 행동하자. 서로를 존중하고 상대방의 의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자. 서로 양보하자. 자기 의사를 분명히 하자. 투표권을 행사하자. 자기 혼자서 생각할 때도, 스스로 공공선을 실현할 것을 위임받은 의원처럼 행동하고 불편부당하게 판단하자.……어떤 점에서 서로 의견이 다른지 규명하고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는 어떤 진실이 담겨 있는지 헤아리고 공개적으로 인정하려고 애쓰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국가를 망친 통치자들 - 누가 나라와 국민을 죽이는가
미란다 트위스 지음, 한정석 옮김 / 이가서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속절없이 해를 보내고 있다. 하릴없이 다이어리를 뒤적이며, 일기를 쓴 지도 꽤 오래 되었음을 느낀다. 올 해 어떤 책을 처음 읽었는지 확인해보니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 중 클로저. 그것도 단숨에 읽은 것 같다. 범죄 소설로 한 해를 시작했구나, 느끼며 마무리도 썩 아름다운 책은 아니어서, 적어도 시작과 끝은 그럴 듯하게 모양새를 짓는구나, 싶다. 투정임에 분명하지만, 2016년 참 쉽지 않았나보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한 개인이 국가의 수반이 됨으로 인해 벌어진 한 편의 거대한 블랙코미디로, 많은 이들의 심신이 피곤하고 아팠던 해였다. 때문에 허탈감을 넘어 심각한 자괴감과 회의마저 가지게 된 것 같다. 누구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 김진태 의원처럼 당당하고 동시에 추해질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것도 나름 능력이다.

 

나 역시 그 무슨 특별한 사람이 아니기에, 함께 분노하고 함께 좌절하고 함께 슬픔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시 416일을 그리고, 기억하고, 담아두려 애썼다. 아니, 자칫 희미해질 수 있는 그 날의 눈물을 끝내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이번 사태를 견뎌내는 동안, 다시 한 번 내게 깊은 슬픔을 주는 것은, 대통령이라는 직책, 의미에 대해 여전히 많은 이들이 옳지 못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결코 왕이 아니고, 지배자나 군림하는 자가 아님에도, 많은 이들이 대통령을 절대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물론 과거에 비해 그런 인식을 하고 있는 이들이 현저히 줄어든 것은 나도 알겠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이들이 그러한 생각에서 벗어날 것임을 알고 있다. 이제 다시 일어날 젊은이들은 대통령을 왕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선 현 대통령과 최순실의 공이 적지 않다.

 

왕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럼에도 대통령은 중요한 자리임에 틀림없다. 5년이라는 시간동안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 그냥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구성원들, 자신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국민들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헌신을 다해야 하는 비정규직 공무원이다. 그것을 위해 국민들은 일정한 권한을 위임했다. 그리고 그 권한은 결코 가볍지 않다.

 

박근혜는 가볍지 않은 권한과 책임을 가벼이 여겼기에, 탄핵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궁극적으로 헌재가 결론을 짓겠지만, 이미 국민들로부터는 국가수반의 자격을 상실 당했다. 국민이 위임한 권한을 사적으로 양도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형편없는 대통령 덕분에 많은 이들이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나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러다 책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책은 황제 칼리굴라로부터 우간다의 백정 이디 아민까지 총 16명을 다루고 있다. 대부분 한 번 정도는 들어봄직한 인물들이다. 적게는 수백에서 많게는 수천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그야말로 악인들의 리포트다.

 

그들의 악행에는 권력, 종교, 정치적 신념에서 사디즘, 정욕, 광기 등 다양한 호명과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자기 혼자 잔학한 행위를 저지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동시대의 많은 이들이 그들을 기꺼이 따랐고, 유능한 공범자가 되었다.

 

폴 포트, 히틀러, 스탈린, 이디 아민의 대량 학살에 적지 않은 수의 캄보디아, 독일, 러시아, 우간다 국민이 함께 했음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저자는 많은 사람은 공범 관계가 돈과 권력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경로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사악한 지도자를 추종했다. 자신들이 추종하는 지도자들의 예측 불가능한 행위를 잘 조정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본능에 따라서만 움직였다고 이야기한다.

 

책장을 넘기며,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든 처음 접한 사실이든 참담함과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대량 학살, 강간, 폭행, 살인 등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진 모습들은 지옥 그 자체였다. 그 수많은 주검들 위에는 이념이나 종교의 껍데기가 포장되어 있거나, 국가주의의 망령이 함께 하고 있었다. 인간의 오만과 위선, 어리석음이 인류의 종말을 가져올 수도 있음을 느낀다.

 

인과응보라는 단어가 가장 초라해지는 곳 중 하나가 대한민국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전두환은 여전히 잘 살고 있고, 친일파의 후손들은 오늘도 안녕하다. 대신 정 반대의 위치에서 치열했던 이들과 그 후손들은 비참함이란 단어조차 무색하다. 때문에 16명의 악인 중 여생을 편안히 보내다 삶을 마감한 이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 역시 전혀 이상하지 않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는 해당사항 없음이다.

 

비관적이다. 회의적이다. 잘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백기를 들고 투항하거나 모르쇠로 일관하겠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나는 전두환이, 그 엄청난 죄 값을 끝내 받아야 한다고 믿고, 이는 이명박이나 현 대통령도 다르지 않다. 아울러 최순실이나 김기춘이나 우병우나 누가 됐든 죄를 지었다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게 하룻밤 사이에 가능할 것으로는 믿지 않는다. 미치도록 더디게 진행될지도 모른다. 세월호 참사의 진정한 주범들 역시 마찬가지다. 쉽지 않을 것이다.

 

2016, 많은 이들의 분노와 눈물과 외침으로, 대통령의 탄핵이라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촛불의 함성이 없었다면 정치권은 여전히 이전투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정치 혐오는 우리에게 사치일 것이지만, 쓰레기를 골라내는 일 역시 게으를 순 없다.

 

책에 등장한 16인은 그야말로 세기의 악인들이다. 때문에 현 대통령과의 단순 비교는 어렵다. 하지만 공통점 역시 적지 않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인격과 자질, 책임감과 국민에 대한 경외심을 갖지 않는 자가 지도자의 위치에 오른다면 곧 비극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우리는 희극과 같은 비극을 직접 보고 겪고 있는 중이다.

 

박근혜, 김기춘이나 우병우의 얼굴에서는 권력에 대한 오만함만 보인다. 두려움이 없다. 누가 감히 나를 건드릴 수 있냐는 오만. 이는 재벌들의 얼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천한 너희들이 어찌 감히 나를 능멸하려 드는 게냐, 사극이 매일 같이 21세기에 구현된다. 그러면 비극이 일어난다. 자격과 자질이 없는 이들이 능력을 벗어난 위치에 앉게 되면, 비극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머지 우리들은 오직 자비만을 바라야 한다.

 

민주주의는 전혀 완전하지 않다. 오히려 돈과 권력이 있는 이들에게 최적화된 시스템일지 모른다. 11표가 이미 허구가 되었음은 미국과 우리의 선거를 보면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시장경제, 민주주의 이상의 것을 꿈꾸고 준비하고 만들어내야 한다. 권력이 자신들의 발생 근거지가 어딘지 명확히 인식하면서, 그 한계와 책임을 동시에 인식하면서, 소수가 아닌 다수의 이해를 위해 복무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 그것이 더 이상의 악인 권력 시대를 막을 수 있는 길이다.

 

끔찍한 이야기가 가득한 책이지만,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분명 비극이다. 사랑을 이야기하고 오직 사랑만을 위해 살아도 덧없이 짧다. 그럼에도 우리는 두꺼운 옷을 껴입고, 거리로 나서야만 한다. 연대의 기쁨도 아름답지만, 우리는 사랑을 해야 한다. 그것을 막아서는 정부는 당연히 사라져야 한다. 부디 2017년에는 사랑의 이야기를 읽으며, 사랑을 하며, 시작했으면 한다. 우리 모두.

 

새해 행복하시라, 고생 많이들 하셨다.

 

은 절대권력을 쥔 인물에게서 발생하기 쉬운 것으로 누구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이라는 개념과 현상을 주도하는 개인이나 집단 곁에 항상 의 추종자들이 들끓고 있어서 그들 모두로 인해 이 보편적인 인간 행동의 한 현상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구조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우리는 을 접하며 살고 있고 또 은 우리의 삶 한가운데에 소리 소문 없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 아닌가.” -옮긴이의 말 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00% 엔젤 - 나는 머리냄새나는 아이예요
조문채 글, 이혜수 글.그림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생긴 대로 논다는 말이 있다. 좋아하는 말이다.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문제나 사달은 사람들이 생긴 대로 놀지 않고, 생긴 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벌떡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 분수를 알고 주제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어쩐지 무언가에 순응적인, 그런 뜻만 있는 것은 아니다. , 그게 뭣이 다른디? 할 수 있겠지만 나에게 적당한 편안함을 주는 옷처럼, 자연스럽게 이 세상과 소통하고 공감하며 사는 것이, 결국 행복한 삶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뿐이다. 뭣이 다른지는결국 모르겄네.

 

그런 면에서, 다시 돌아보자면 어린 시절엔 참 생긴 대로 놀지 않으려 발악하며 보낸 것 같다. 심히 부끄럽다. 뭐 애들이 다 그렇지요, 하며 웃어넘길 수도 있겠지만, 어느 새 올챙이의 마음을 잊어버린 못된 개구리 심보가 생긴 것 같아, 더 부끄럽기도 하다. 암튼 늦게나마 생긴 대로 살고, 생긴 대로 놀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본래 심성이 유약하다. 쉽게 흔들리고, 냉정하지 못하다. 어린 시절엔 이를 부끄럽게 여겨 아닌 척 하느라 나름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말 그대로 생긴 대로 보여주며 살아간다. 슬프면 마음껏 슬퍼하고, 행복하면 행복하다 말한다. 여전히 때와 장소에 따라 타인을 의식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렇게 유약한 녀석이, 가장 감당하기 힘든 순간이 있다. 바로 아이들이 고통을 겪는 모습을 볼 때다. 물론 어르신들의 팍팍한 삶 역시 가슴을 찌르지만, 아이를 갖게 된 뒤로는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이 먼저 눈에 밟힌다. 그리고 내 아이가 소중한 만큼,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느끼며 살아간다.

 

언젠가부터 끔찍한 소식들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아이들의 어이없는 죽음과 고통이 이젠 사람들로 하여금 예전보다 더 큰 분노와 상처를 주지 않는 것 같아, 더 아프다. 아이들이 겪어야 했을 고통을 상상하는 것조차, 내겐 벅차다. 때문에 여전히 난 세월호에 대한 가슴 가득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살아간다. 지극히 당연한 모습이다. 끝난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지난 2014년 아동학대와 방치 등으로 미국에서는 1,580명의 아이들이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차마 우리나라의 통계 자료를 살피지 못하는 것은 역시나 유약함의 발로이다. 하지만 우리 역시 해마다 적지 않은 어린 생명들이 무관심과 방치 속에 숨져가고 있음을 알고 있다.

 

아이들이, 어린 생명들이 행복하지 못한 사회는 불행하다. 미래가 담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아이들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그 악순환이 결국 사회를 병들게 하고 희망을 앗아간다. 때문에 우리는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천사들을 지극히 살펴야 한다. 떠나간 후에 뒤늦게 후회해도 소용없다.

 

부모는 단지 아이에게 생명을 준 것으로 그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 없다. 아이가 자라며 세상의 결핍을 깨닫고 타인의 눈물에 공감하며, 그 결핍과 눈물을 받아 안아 함께 공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성장해 나가야 한다. 그게 부모의 역할이다.

 

물론 나 역시 지금껏 심히 부끄럽게도 아빠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만들지 못했다. 무슨 거창한 일을 한다고, 무엇이 그리 잘났다고 주제넘게 설치는 동안, 아이는 아빠와 함께 하지 못하는 시간을 홀로 보내야 했다.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과는 또 다른 의미인 아빠의 시간을 나는, 온전히 전해주지 못했다.

 

‘100% 엔젤은 엄마와 딸이 함께 써내려간 일기다. 딸의 일기에 엄마가 답장을 보내는 형식이지만, 사실 엄마 역시 딸을 위한 일기를 써내려간 셈이다. 엄마는 일기를 통해 아이에게 타인에 대한 공감과 결핍에 대한 인정을 이야기한다. 아이는 머리를 자주 감아도 냄새가 났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여기에 엄마는 말한다. 누구나 사람은 그와 같은 어쩔 수 없는 결함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지만 바로 그 결함과 결핍을 통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고,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나와 그가 다르지 않음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은, 기실 지금 어른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일 수도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은 바로 타인에 대한 공감의 결핍에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상처에 둔감한 사회는 무참함에 대한 인식마저 상실케 되는 것 아닐까.

 

엄마(마빡소녀 조문채)는 딸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칠 생각이 없다. 다만 가식 없이 딸에게 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소중함, 그리고 타인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을 이야기한다. 가족의 따스함이 전해지면서도, 파란 생명력이 글 곳곳에서 전해진다. 편견이 없이, 감정을 숨기지 않고, 때로는 경이롭고 때로는 분노가 솟구치는 이 세상 그 자체를 함께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모녀. 함께 세상과 소통해 나가는 이들의 이야기는 흐뭇한 감동을 전해준다. 그리고 어떤 교육이 참된 교육인지, 과연 교육이란 무엇이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함께 바라보는 것, 그것은 단순한 훈육과 교육이 아닌 수평적인 대화와 소통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그 눈으로 함께 세상을 보려는 엄마의 노력 자체가 이미 그 무엇보다 소중한 양육법이 될 것이다.

 

(배추벌레 이혜수)의 독특한 일러스트가 함께 해 더 빛나는 책. 수없이 많은 학원을 돌리며, 학군을 따라 이사를 반복하고, 아이들을 아이가 아닌 몇 등’ ‘몇 등급으로 나누는 것이 아이의 행복을 위한 길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다면, 잠시 헬리콥터를 착륙시키고, 가벼운 마음으로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우리가 혹시 아이들의 행복을 무단으로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면서.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아껴가며 읽은 책이다. 반성과 감동이 반복되며, 때로는 미소 짓게, 때로는 뭉클하게 만드는, 마술 같은 책이다.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상처 받지 않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성공단 사람들 - 날마다 작은 통일이 이루어지는 기적의 공간
김진향 외 지음 / 내일을여는책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미 버려진 곳이나 마찬가지였던 개성공단에서 숨통이 멎어가는 중환자의 손목을 부여잡고 어떻게든 숨을 이어보려 무던히도 뛰어다녔던 지난 4. 사실 고통 속에 숨만 쉬는 그 환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더 큰 좌절이었다. 그럼에도비정상적이나마 숨통만이라도 유지되길 진심으로 진심으로 바란다.”

 

20117, 이 책의 기획 총괄을 맡은 김진향 교수가 공단을 떠나며 간절히 바란 것은, 다만 개성공단이 비정상적인 상황으로라도 유지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바람은 46개월 후 허무하게 무너졌다.

 

개성공단이 멈춘 지 벌써 6개월째에 접어들었다. 아슬아슬하게 이어 온 남북관계가 그야말로 끝장난 것도 딱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이 상황에서 묻고 싶다.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얻었을까. 그리고 무엇을 잃었을까.

 

개성공단에서 구슬땀을 흘렸던 기업인들, 노동자들은 오늘도 정부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다시 되돌릴 것을 간절히 바라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싸우고 있다. 평범한 시민, 농민, 기업인, 노동자들을 한 순간에 투사로 만들어버리고, 끝내 불순분자’ ‘친북좌빨로 만들어버리는 이 놀라운 능력은 물론 현 정부만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처럼 무참하고 무지하고 단세포적인 결정을 내렸던 정부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는 개성공단을 잃어버림으로써 더 많은 것을 함께 잃어버렸다.

 

이미 많은 이들이 책을 읽었고, 분노했다. 나는 기억한다. 북한의 핵실험이라는 엄중한 상황 속에서도 대다수 국민들은 개성공단의 폐쇄를 원하지 않았다.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하게 북한과의 대화를 통해 위기를 극복할 것을 바랐다. 한 번의 공단 중단이 가져왔던 혼란과 어려움을 이미 경험했기에, 또 다시 불필요한 고통을 자처하지 말 것을 바랐다. 하지만, 정부는 최악의 수를 두고 말았다. 돌이키기 너무나 어려운 결정을 너무도 쉽게 무책임하게 내렸다.

 

남북관계의 상징이자, 평화의 상징으로 불렸던 개성공단은 한 순간에 북의 핵미사일 개발 자금의 온상으로 매도되었다. 도대체 상식이 사라지고 무지가 당당해지는 순간이었다. 공단에서 땀 흘려 일했던 모든 이들은 한 순간에 북에 핵 개발 자금을 건네 준 불순분자 취급을 받았고, 그들이 망하는 것이, 그들의 생계가 위협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열을 올렸다. 문득 기시감이 밀려왔다. 매카시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아니, 이것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처럼 보였다. 합법적으로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국민을 한 순간에 백수로 만들어버리는, 그들의 재산권을 마구잡이로 침해하는, 황당한 일들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여기에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그 지긋지긋하고도 살벌한 이름, 안보였다.

 

이제 개성공단이 북한의 핵 개발을 막기 위한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하는 이들은 없다. 있다면 어용뿐이다. 그 이후에도 북한의 도발은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급기야 이젠 사드마저 배치한다고 한다. 정부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MD체제에 편입되는 것이 아니라고 발뺌하고 있지만, 이미 미국을 비롯한 세계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는 북한이 아닌 미국 때문에 사드를 배치하려 한다는 것을.

 

그렇다면 왜 개성공단을 멈추게 만들었을까. 왜 멀쩡한 이들을 한 순간에 실업자로 전락시켰을까. 그들이 책임져야 할 가족들의 생계는 어찌할 것인가. 그들의 상처 받은 자존감은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그 빌어먹을 안보가 보장되지도 않았는데, 또 어떤 변명을 늘어놓을 것인가.

 

개성공단 사람들은, 우리의 이웃이고 가족이었다. 그곳에서 함께 일했던 북측 노동자들은 우리의 동포이자, 통일의 파트너 그리고 미리 통일을 함께 만들던 동료였다. 이제 그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고초를 겪으며, 어떤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해 나갈지도 모른다.

 

내 젊은 시절 함께 밴드를 하며 락앤롤 정키를 꿈꾸던 친구 녀석이 있었다. 한없이 순하고 착하기만 한 녀석이 어느 날, 먼저 북한을 이야기하고 통일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평상시엔 정치나 남북문제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던 녀석이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녀석이 대뜸, 긴장보다는 안정이, 전쟁보다는 평화가 무조건 좋은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 녀석은 개성공단에 입주한 기업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억한다. 공단이 중단되어 6개월여의 시간이 지날 동안 가슴이 타들어간다고 했던 녀석의 목소리를, 그리고 이제 지금, 한없이 순하기만 했던 녀석은 이 정권은 분명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럴 수는 없는 것이라고. 그 녀석은 세 아이의 아빠이자, 한 여자의 남편이다. 통일박람회에서 녀석이 다니는 기업에서 만든 여성 속옷을 구입했다. 그냥 내가 미안하고, 면목이 없었다.

 

금강산 관광이 멈추었을 때, 사람들은 침묵했다. 개성공단이, 강정마을이, 밀양이, 세월호 유가족들이 울부짖을 때 사람들은 외면했다. 그리고 이제 성주가 울부짖고 있다. 사람들은 다시금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그동안 모르쇠 정부 지지만 했던 그들에게 오히려 잘 됐다고 고소해 할 것인가.

 

이명박, 박근혜 두 정부 기간 동안 북한의 핵 능력은 더 이상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고도화 되었다. 과연 거기에 금강산이, 개성이, 남북경협과 교류협력이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1차 적인 가장 큰 책임은 당연히 정부에 있다. 정부는 국민의 안정과 행복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야말로 사드까지 받아버린 지금,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중국의 살벌한 보복을 대비하는 것일까. 미국에 애걸복걸 매달리는 것일까. 더욱 더 북한을 옥죄어 질식사시켜버리는 것일까. 매일 매일 언론에서 떠드는 것을 볼 때마다, 소름이 끼친다. 나에겐 북한에 대한 제재가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소식들이, 마치 북한의 인민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는 것처럼 들린다. 참혹하다. 경제재재가 가져오는 그 엄청난 후과를 우리는 과연 제대로 알고는 있는 것일까. 우리는 나중에 그들에게 무어라 말할 것인가. 우리가 죽어갈 때 너희는 무엇을 했냐 묻는다면 말이다.

 

참여정부 시절, 돌이켜보면 5번 정도 개성공단을 방문했던 것 같다. 그 이상일 수도, 이하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느낌만은 잊을 수 없다. 설렘, 희망, 미래, 기대, 활기. 지금 그곳은 어떻게 변해버렸을까. 그 때 그 사람들은 어디에 갔을까.

 

친구 녀석은 버티고 있다. 그 녀석의 회사도 버티고 있다. 많은 이들이 지금 버티며 살고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불의에 버티고, 몰상식과 무지함에 버티고, 정상의 비정상화에 버티고, 잔인한 세월 앞에 버티고 있다.

 

남북관계가 어떻게 되던,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람. 그 어떤 관심도 없다는 사람. 누군가가 해주겠지, 그가 혹은 그녀가 나대신 해주겠지. 이렇게 믿어버리는 세상은 결국 멸망한다. 생뚱맞지만, 연설의 달인 오바마는 미국민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누가 대신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가, 당신과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책은 개성공단에 대한 모든 것이다. 바로 그곳에서 공단을 움직였던 이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쓸데없는 논문보다, 보고서보다 확실하다. 뜨겁다. 그리고 눈물겹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음을, 그 지겹게도 당연한 것을 여전히 부정하고, 증오와 분노로 살아가는 시대. 개성공단의 기적과도 같은 이야기는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기적을 만들었고, 10년의 세월동안 가꾸어왔다.

 

이제 하나만 남았다. 귀환이다. 민주주의의 귀환, 주권의 귀환, 정상의 귀환, 정의의 귀환, 그리고 평화의 귀환이다.

 

눈물겹도록 소중한 책을 펴낸이들에게 다시 한 번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그리고 개성에서 함께 땀과 눈물을 흘렸던 남북의 모든 형제들아. 부디 건강하시라. 부디 다시 만나시라. 잊지 않겠다.

 

옥류관에서 점심으로 쟁반냉면을 먹고, 나와서 대동강의 을밀대든 부벽루든 어디에서든 대동강을 바라보며 부장님과 대동강맥주를 맘껏 마셔보고 싶어요. 오늘을 추억하며 말입니다. 그 자리에 지난 4년간 개성공단에서 저와 함께 했던 북측의 여러 성원들 초대해서 다들 건강하셨냐고, 정녕 잘 계셨냐고, 진짜 보고 싶었다고. 그렇게들 반갑게 인사 나누고 싶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각의 배신 -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경제심리 법칙
김종선 지음 / 타커스(끌레마)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순간, 심장이 그야말로 쿵! 하는 동시에 가슴이 무궁무진하게 벅차오름을 느꼈다고 감히 고백한다. 어떻게 이렇게 절묘하게! 어떻게 이렇게 정교하게! 아니, ()이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이러한 통찰력과 예지력과 담대함과 용기를 무차별 동시다발적으로 전개할 수 있단 말인가! 난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책은 짐짓 행동경제학의 다양한 이론을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매일 반복하는 비이성적 결정의 작동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 하고 있다. 스스로 기대 효용 이론에 충실하여 매우 현명한 판단을 내린다고 믿지만, 기실 여러 가지 이유와 변명과 조건에 따라 스스로 제 발등을 찍는 아주 멍청한 결정을 한 뒤, ‘, 내가 그때 당최 왜 그랬을까!’ 후회하는 인간의 심리 배경을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알보다 작은 독자들이 보기엔, 이 책은 행동경제학의 이론들을 소개하며,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비이성적 결정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경제학서적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을 다 속여도, 실버호크의 눈을 가진, 머나 먼 우주 뉴텍사스의 실소유주 우주보안관 장고의 매서움을 가진, , 또 그러니까 결국, 알보다 결코 작지 않은, 알만한! 내 눈을 속일 순 없었다. 행동경제학의 외피를 지녔지만, 기실 그 내부에는 엄청난 비밀이 사뿐히 숨겨져 있음을, 나의 엑스-밴더 레이더는 단 번에 포착해 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 물론 붉어진 얼굴을 애써 감추며 고백할 것이 있긴 하다. 그것은 책을 두 번 읽은 다음에야 비로소 저자의 뜨거운 본심을 자각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 심히 부끄럽지만, 타고난 천성이 거짓을 고하지 못함을 어찌하랴, 하지만 그럼에도 저자의 본심을 나보다 더 빨리 헤아린 이들은 적어도 대한민국엔 없으리라 감히 자부한다. , .

 

, 이제 이 책에 담겨진 엄청난 비밀을 폭로하겠다. 이미 책이 발간된 지 4년이 지나가는 시점에서, 이젠 저자의 뜨거운 마음을 세상에 알려도 무방하리라. 아니,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는 세상이, 지금껏 저자는 야속했으리라. 늦게 깨달아 미안한 마음뿐이다.

 

이 책은 행동경제학의 이론을 단순히 소개한 책이 결코 네버, 단연코, 무조건, 아니다. 사실은 책이 발간되고 5개월 후 탄생한 새로운 정권, 새로운 대통령의 대북정책이 어떻게 전개될지, 그 결과는 어떠한 형태로 다시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올지 정확히 예측한 금세기 최고의 예언서였던 것이었던 것이다! 두둥!

 

, 무지몽매한 서생들을 위해 간략히, 하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썰을 풀어보겠다. 먼저 제1장의 제목 나를 가장 많이 배신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를 보자.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2002년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난 경험을 가지고 있는 현 대통령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세 번째로 북한을 방문해 최고지도자를 만난 경험이 있는 대통령이란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다. 물론 대통령이 아닌 정치인의 자격으로 방북한 것이지만, 암튼 북은 북이니.

 

때문에 대통령은 그 전임 MB보다 대북정책을, 남북관계를 보다 슬기롭게, 뛰어나게,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고 호헌이 아닌 호언장담했다. 그리고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동북아평화협력구상, DMZ세계생태평화공원, 통일준비위원회 발족, 나진-하산 프로젝트 등 화려한 수식어들이 이내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었다. , 부셔! 눈부셔!

 

하지만, 이는 지식 착각 효과에 기반 한 자기 과신이 불러온 오류였다. 지식 착각은 정보가 더 많을수록 오히려 의사결정의 정확성이 떨어지는 것을 말하고, 이는 자기 과신, 즉 자신의 능력을 절대적 혹은 상대적으로 과대평가함으로써 발생하는 오류, 비합리적 결정을 불러오게 된다. 자신이 남들보다 북을 더 잘 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대통령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충분한 고민 없이 정책을 결정해버리는 과감성을 보이셨다. 북과 당연히 논의해야 1센티미터라도 나아갈 수 있는 DMZ세계생태평화공원을 독자적으로 결정하시었으며, 만나야 쌓일 신뢰를 만나기도 전에 먼저 시전 하라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요구를 북에게 하기도 하시었다.

 

뿐만 이랴. 북을 통과하지 않고는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역시 북을 공중부양으로 넘어가신 후 중국 땅을 밟을 심산이셨는지, 단호히 홀로 선언하시었고, 통일은 분명 남과 북이 함께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라는 순진무구한 질문들을 사뿐히 즈려 밟으신 채, 나홀로 통일준비위원회를 당차게 출범하시었다. ! 이 담대함!

 

하지만 이런 깊고도 깊은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북은 기껏 이산가족상봉에 따른 우리 정부의 매우 성의 없음에 기함하고, 개성공단을 덜컥 닫기도 하는 등,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감히 대통령의 재가도 없이 현 대통령 재임 기간에 무려 두 번이나 핵실험을 감행하는 무모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거지.

 

여기에 굴복할 대통령이 아니었으니, 다시 한 번 자기 과신의 오류가 맹렬히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힘으로 북핵을 폐기하게 만들 수 있다는 가히 경천동지할 대담함이었다. 우리가 언제나 눈치를 보며, 해줄 것, 안 해줘도 될 것 가리지 않고 다 해주는 미국과, 집단으로 몰려와 집단으로 치맥간단히 하고 집단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기백을 보이는 중국마저 수 십 년 동안 해결하지 못한 북핵 문제를 ‘6자회담 따위 개에게나 줘버리라며 홀로 해결에 나서신 것이었다. 물론 이 엄청난 기백에 감동한 국제사회가 동참의 뜻을 밝히고 있지만, 그 마지막의 해피엔딩 여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결국 대통령이 제시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동북아평화협력구상,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DMZ세계생태평화공원, 통일준비위원회 중 그 어느 하나도 대통령의 뜻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나를 가장 많이 배신하는 것은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책의 위대함은 이제 시작이다. 1장의 첫 소개 이론은 통제력 착각이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오류를 말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카지노에서 아무리 레버를 당겨도 잭팟은 힘들지만, 오늘도 변함없이 잭팟이 터질 것이라 굳게 믿으며 레버를 당기시는 라스베가스와 정선의 도박꾼들이다. 잭팟? 잭팟? 대박? 통일은 대박? 선견지명 앞에 절로 숙연해진다. , 콧물.

 

이외에도 책은 대통령이 어떠한 모습을 보일지, 정부가 어떤 행태를 보일지 정확히 예언하고 있다. 대충대충 개념 없이 유체이탈적으로 정책을 추진하는 모습은 가용성 휴리스틱(heuristics)’으로, 북한은 반드시 무너진다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 이건 뭐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거지. 북한의 핵 실험 후 결국 이놈들이 이럴 줄 알았다고 무책임하게 단정지어버리는 사후판단경향’, 요건 후견지명이라고도 부른다. 한 번 나쁜 놈으로 인식된 북한은 그 후 무슨 행동을 해도 전혀 와 닿지 않는 대표성 휴리스틱’, 그동안 제재하느라 들인 공이 얼만데, 이제 와서 멈추고 다시 대화를 해? 절대 안 해! 라는 마음의 매몰비용 오류에 이르기까지 행동경제학을 통해 현 정부의 정책을 설명하지 못할 게 없다. 과연 천재의 배열이로고!

 

게다가 2장의 제목이기도 한, ‘내가 선택한 틀이 나를 가두는 함정이 된다는 프레이밍 효과, 3장 제목인 절대 손해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순간 덫에 걸린다는 프로스펙트 이론, 당장의 지지율 등 눈앞에 사소한 이익에 매달려 정작 국가 전체의 위험을 초래하는 근시안적 의사결정’, 사이비 전문가들의 아첨과 헛소리에 묻혀 정책결정 역시 사이비에게 맡기는 양떼행동이론까지, 저자는 정부가 나아갈 방향을 출범 전부터 이미 꿰뚫어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이 저자의 위대함을 논하였다. 역시 알보다 작은 독자들은 당최 무슨 소린겨?! 할지 모르겠으나, 내 알바 아니고, 정 궁금하면 책을 보시라는 말씀밖에 드리지 못하겠다. 하지만, 또 하지만! 저자는 여기에서 책을 멈추지 않았다.

저자는 현 정부의 5년 뿐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5년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묻고 있다. “그렇게 사는 게 사는 거니?” 우린 어쩌면 현 정부가 지금과 같이 남북관계를 파탄 내도록 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지도 모른다. 여기엔 묻지마 지지부터, 우리 역시 양떼 행동, 타협 효과, 근시안적 의사 결정, 아쉬 효과(내가 보기엔 정말 아닌데, 모두가 라 하면 멍청하게도 덩달아 라고 따라하는 행동), 현상 유지 바이어스(여러 대안들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 현재 상태에 머무르고자 하는 경향을 보이고, 더 나아가 다른 대안들이 훨씬 매력적이더라도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어처구니없는 경향. 우린 선거나 기타 등등에서 거의 매일 현상 유지 바이어스를 보여준다. 바이어스가 아니라 바이러스가 아닐까)의 오류 등이 포함된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은 거의 없다.

 

어찌 보면 우리 정부는 행동경제학이 아니라 정통경제학의 기본 원리마저도 무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주는 게 있어야 가는 게 있을 텐데, 북에게 그동안 계속 요구만 해놓고 막상 핵 실험을 감행하니, 배은망덕하다고 거품을 문다. 또한 정상적으로 기업 활동을 하는 기업인들을 순식간에 북핵 협조자로 몰아 거리로 내쫓은 행위는 사회주의국가에서도 요즘은 찾기 어려운 매우 반자본주의적인 행태였다. ‘주거니 받거니는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매일 사드 배치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북한을 강하게 압박하고 제재해 달라고 요구한다. 요구인지 매달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긴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 청산 과정을 보면 애초 협상 자체에 무능한 집단인지도 모르겠다. 그 상황에서 우간다는 왠욜~!

 

어쩌면 이 책은 행동경제학을 가장한 매우 민감한 정치 서적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게 맞다! 때문에 어쩌면 정부의 레이더에 덜컥 걸려 저자가 고초를 겪고 금서조치가 취해지는 비극이 발생할 수도 있다. 신은미 선생의 기행문이 금서가 되어버리는 해괴망측한 세상 아닌가. 먼나라 이웃나라,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왜봐 글면! 때문에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부디 몰래 몰래 책을 구해 보시라. 그리고 꼭! 행동경제학에 대한 교양서적임을 만방에 밝히시라. 그래야 우리의 위대한 저자는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그래야 속편이, , 나오지 않을까?

 

엄청난 감동과 벅차오름을 안고 단숨에 차근차근(말이 되냐) 책을 읽어 나갔다. 그리곤 깨달았다. 내 언젠가 이 책과 같은 위대한 예언서를 집필하고야 말리라. 그리하여 어둠속에 묻혀 있는 고운 해를 떠오르게 하리라! , 독자 제현들이여. 함께 가자! 우리가 허튼 꿈을 마냥 들여다본다면 조심해야 하리라, 결국 그 허튼 꿈이 우리를 집어 삼킬 것이다. 꿈에도 눈이 있다네(말이 되냐).

 

나의 이 자상하고도 상세한 글을 읽고도 이 책의 숨겨진 뜻을 모르는 독자들이 있다면. 그대가 맞는 겁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