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아빠 육아스쿨
아민 A. 브롯 지음, 김세경 옮김 / 황소자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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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핑계대고 미루고 미루다 종합검진을 받았다. 귀찮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고 인정해야겠다. 하지만 뭐, 그냥 그랬던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병원을 다녀왔다. 그리고는 결과를 받았다.

 

역시 뭐, 별 다른 것은 없어보였다. 몸무게야 원래 바싹 말랐고, 이른바 헤비 스모커에 해당하는 놈이니 폐활량이나 위가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았다. 그런데 눈에 새로운 문장이 와서 박혔다. 대장암 표지자 수치….

 

이건 무슨 뜻이냐. 첨엔 와 닿지 않았다. 그러다 병원에서 재검사를 받으라는 전화를 받고서야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음, 도대체 무엇이냐. 이것은.

 

2013년 3월 27일, 새 생명을 얻었다. 과분한 행복, 상상치 못한 기쁨이 다가왔다. 나를 보며 꺄르르 웃어버리는 또 하나의 생명 앞에서, 내가 누군가의 부모가 되었다는 냉엄한 현실을 받아들였다고,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정말 아빠였을까. 아니 그 이전부터 나는 아빠라는 이름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인간이었던가. 갑자기 찾아온 대장암이라는 녀석 앞에 난 그렇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판단이 서지 않았다.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만약 내가 정말 암이라면 이제 첫 돌을 맞는 딸아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지, 난감하고 무참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고통 그리고 후회가 밀려왔다. 아빠라는 이름이 그저 출산이라는 결과만, 주어진 대로 받으면 되는 줄 알았다. 누구나 아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철저한 착각이었다. 무지의 극치였다. 아빠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를 얻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펼쳐든 책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책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육아로 인해 삶의 방식이 바뀌어버린 아내에 비해 나는 아빠를 거부하고 여전히 ‘나’로 살아가려 했다. 때문에 이 책이 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나는 그저 ‘나’로 살아가길 무심결에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희생이라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난 그것을 태산 같이 여겼다. 아이에게 살갑게 다가가고 웃어 보이면 그것이 ‘아빠’라고 생각했다. 그저 얼마 되지도 않는 경제적 부담을 감당하는 것으로 나는 부모라고 믿어버렸다.

 

그 모든 것이 착각이었고, 오만이었음을 암이라는 녀석이 알려 주었다. 그리고는 다시금 이 책을 펼쳐들게 만들었다.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저자는 뒤늦게 후회하고 있는 나에게 이렇게 꾸짖었다.

 

“피아노를 샀다고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아이를 가졌다고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니다.”

 

왜 나는 이처럼 단순한 진리를 몰랐을까, 아니 거부하려 했을까. 아이가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이에게 다가가야 함을. 내 삶을 송두리째 걸고 다가가야 할 순간도 있음을, 왜 몰랐을까.

 

당연하게도 그 어떤 것들도 눈에, 귀에, 마음에 다가오지 않았다. 정의도, 진리도, 상식과 불의도, 그저 먼발치에서 나를 무표정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결국 깨달았다. 내가 온전한 ‘나’이길 원한다면, 이제 다시 ‘아빠’로 태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그것이 나를 희생하는 것이 아닌, 나를 찾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신이라는 존재가 분명 있다면, 나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준 셈이다. 여전히 나는 어리석고, 어린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아빠’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한 번 주어졌다. 이젠 놓칠 수 없음을 느낀다.

 

2014년 3월 27일, 나의 딸은 첫 돌을 맞았다. 그리고 나 역시 아빠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물론 여전히 어설프고 어리석은 아빠이다. 하지만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다. 고통스러운 세상, 온갖 상처와 치욕 속에 살아가야 할 세상이지만, 이젠 손을 잡고 함께 갈 것이다.

 

책은 아이의 탄생 이후 첫 돌까지의 시간을 어떻게 현명하게 보내야 하는지 친절히 안내하고 있다. 아이가 자라나는 과정을 통해 아빠가 어떻게 함께 성장하는지도 꼼꼼히 설명한다.

 

그렇다. 내가 아이를 키운 것이 아니었다. 아이가 날 다시 태어나게 만들어준 것이었다. 이젠 후회하지 않도록 사랑하고 또 사랑할 일만 남았다. 그리고 아이에게 ‘아빠’인 ‘나’의 모습을 영원히 남겨줄 것이다.

 

첫 생일 축하해. 아빠가 너무 사랑해. 우리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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