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한 사람들에게 - 공감하라! 행동하라! 세상을 바꿔라!
스테판 에셀 지음, 유영미 옮김 / 뜨인돌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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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지구민들은 자신의 행동을 책임져야 합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택이 미래를 좌우하는 투표에서 말입니다.… 한국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힘을 얻기 바랍니다.’

 

이 책이 국내에서 출간된 2012년 10월, 스테판 에셀이 한국 독자들에게 전한 메시지다. ‘지구민’이라는 표현이 유난히 가슴을 때린다. 우리 모두가 지구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과연 지구상에서 학살과 전쟁이 지금처럼 끊임없이 일어날 수 있을까. 모두가 가족, 모두가 ‘우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처럼 세상이 척박하고 정글처럼 두려울까.

 

책을 통해 스테판 에셀은 민주주의, 참여, 인권, 사회복지를 모든 인류의 공통된 요구라 정의한다. 그리고 그것을 존중하지 않는 자는 분노에 직면할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인간이 타인과 자연에 대한 공감으로 이기심을 초월할 수 있다고 믿은 스테판 에셀. 이미 그의 삶 자체가 그것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책은 《분노하라》이후 스테판 에셀의 신념과 가치에 공감해온 세계의 많은 이들에게 던지는 또 다른 메시지다. ‘단지 분노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가 지금 분노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우리들의 삶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그의 외침은 그가 떠난 지금에도 물론 유효하다.

 

우리 국민들은 결코 어리석지 않다. 아니, 이 세상에서 진정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다만 정당한 분노를 애써 외면하거나 참고 있을 뿐이다. 주로 기업인, 정부 조직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학계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 주문처럼 되풀이하는 말이 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이 그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남들이(정확히 말하면 자신들에게 이득을 안겨주는 이들) 노는 꼴을 못 본다.

 

대체 휴일제를 시행하면 경제적 손실이 몇 조 원이니, 정당한 파업에도 국가 경제 전체에 끼치는 손해가 몇 백억 원이니 떠드는 이유다. 하지만 그들은 정작 더 중요한 것은 잊고 있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다. 바로 자신들이 스스로 없다고 외치고 있는 그 ‘공짜 점심’을 가장 크게 원하고 있는 이들이 자신들이란 점을.

 

당최 무언지도 모르겠는 ‘신자유주의’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수입한 이후, 우리 사회는 매우 기형적이고 천박한 사고방식의 주입까지 강요받았다. 즉 돈이 많고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이라면 그들이 당연히 ‘훌륭한’ 사람일 것이라는 전혀 근거 없는 믿음 말이다.

 

삼성의 이건희는 단지 삼성가에서 태어나 회장 자리를 얻었다는 이유로 존경받는 CEO로 숭배 받는다. 그 기세는 조만간 역시 한 것이라고는 ‘태어난 것’ 밖에 없는 이재용에게 ‘승계’될 예정이다.

 

이명박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과 17범의 범죄자는 성공한 CEO라는 전혀 근거 없는 이유만으로 대통령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국민들은 고통 받아야 했고, 이 땅과 강, 바다는 더럽혀졌다. 아울러 독재자의 딸은 덤으로 떠안게 되었고 말이다.

 

이러니 잘 나가는 걸그룹의 어린 여자아이는 ‘민주화’의 뜻을 모른다고 자랑스럽게 떠들고, 대기업의 간부부터 영업사원까지 자신보다 경제적 지위가 아래라 여기는 이들을 ‘버러지’라 생각한다.

 

급기야는 미국에 ‘신고 인사’하러 간 대통령을 수행하는 대변인이 현지에서 성추행을 일삼는 코미디까지 연출한다. 그리고는 사과 없이, 반성 없이 억울하다 떠든다. 대통령이란 작자도 사과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이미 자신은 원하는 자리를 얻었으니 더 이상 국민들에게 아쉬울 것이 없으리라.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치열하게 투쟁하거나 단지 착취의 대상으로만 본다면, 그 사회는 아비규환의 지옥이라 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를 천박한 돈의 노예로 만들고,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간다면? 그 사회는 반드시 썩게 된다. 역사는 항상 이를 증명해왔다.

 

그럼 이렇게 썩을 대로 썩어버린 세상을 살고 있는 ‘힘없어 보이는’ 우리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스테판 에셀은 이미 그 답을 제시한 바 있다.

 

“분노하라!”

 

자유와 존엄의 조건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체제에 분노하기도 전에 우리는 새로운 자본의 질서에 의해 분노를 스스로 거세당해 버린 것이다.(홍세화)

 

과연 우리는 ‘분노의 기억’을 잊어버린 것일까? 어찌 보면 가깝게는 해방 후 지금까지 쉴 새 없이 정당한 분노를 통해 세상을 조금씩 바꿔온 것이 바로 우리 아닌가. 그런데 왜 지금 이토록 무력하고, 무능하고, 무지해 보이기만 할까. 무참해 보이기만 할까.

 

스테판 에셀은 “인간은 나비로 변신할 수 있는 애벌레와 비슷하다. 분노하지 않는 한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라는 에드가 모랭의 비유를 인용하며 말한다. 단지 분노하지만 말고 그러한 모든 부조리와 자신의 삶을 결부시키라고. 그렇지 않으면 진정 나비가 될 수 없다고.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이제 더 이상 우리와 함께 호흡할 수는 없지만, 이미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숨결을 남기고 떠난 스테판 에셀. 내 삶과 이웃의 삶, 나아가 모든 지구민의 행복을 옥죄는 부당한 모든 것에 대해 마땅히 분노하고 저항하고 창조하는 것.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살기 위한 호흡과도 같은 것임을 그의 생애를 통해 다시 한 번 느낀다.

 

오스카 와일드가 남긴 말. “세계지도에 유토피아라는 나라가 없다면, 세계지도를 들여다볼 가치가 없다”는 그 말. 가슴에 담고 살아야겠다. 우리는 분명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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