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 - 지성의 근본주의 비투비21 5
마크 네오클레우스 지음, 정준영 옮김 / 이후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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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류의 진보를, 그리고 인간 이성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낳았던 홀로코스트. 그리고 나치즘, 파시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는 스스로 ‘과연 우리는 이성적인 동물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나 궁금했던 것 한 가지. 과연 나치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특별한 인간이었던가?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독재자, 정신이상자들이었을까. 그리고 그 시대 독일, 이탈리아만이 추구할 수 있었던 광기의 축제였을까.

 

독일 나치와 나치즘, 그리고 파시즘은 오랫동안 나에게 흥미로운 연구의 대상이 되어왔다. 기껏 10여 권의 책으로 이 광대한 주제를 통찰할 수 있는 능력도 여건도 되진 않지만, 그동안 히틀러와 무솔리니에 대한 내 관심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앞서 말한 궁금증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과연 그 시대 독일이었기 때문에, 히틀러와 같은 악독한 학살자가 있었기에 홀로코스트와 같은 비극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 하는 부분이다.

 

회의적이었다. 수백만의 유태인을 죽음으로 몰아간 홀로코스트는 단지 독일만의, 히틀러만의 범죄는 아니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러한 인류의 존재 이유 자체를 의심하게 만드는 일들은 언제고 다시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저자의 책은 나의 이러한 의심을 보다 명확히 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파시즘이 단순히 지나간 역사의 유물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의 관계 속에 살아 있는 문제라는 점을 저자는 단언하고 있다. 파시즘 체제가 붕괴되었을 뿐이지, 파시즘이 이데올로기로서 끝장났다고 말할 순 없다는 것이다.

 

“파시즘은 근대 사회의 핵심적인 특징에 대한 대응이다. 파시즘이 살아 숨 쉰다는 사실은 결국 파시즘이 처음 등장했을 때와 동일한 소외 관계가 살아남아 계속 존재해 왔다는 것, 그때와 동일한 객관적 조건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세계사적 형태로 지속되는 자본주의 지배와 더불어 이 체계에 고유한 위기, 자유주의 헤게모니와 자유민주주의 관념, 자본주의가 낳은 사회주의운동과 공산주의운동, 다문화 사회를 사회적 적대로 갈기갈기 찢어 놓는 방대한 인종적·태적·성적 편견들, 합리화가 아직 충분히 합리적이지 못한 사회 등의 조건들이 통상적으로 포함된다”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해버린 자본주의, 그리고 국제금융자본의 무차별적 침략으로 지금 전 세계 99%의 시민들은 고통을 절규하고 있다. 그 고통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되어 표출된다. 그리고 그 와중에 국수주의가 성장하고, 타민족, 외국인 혐오라는 극단적 폭력으로 이어진다.

 

히틀러는 자본주의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탄압과 반대로 많은 독일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뚜렷한 실체가 없어 보이는, 그러나 우리의 생활을 이미 지배하고 있는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공포는 1930년대 독일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민주주의, 다원주의, 다문화주의는 자본주의의 추락, 변태적 전이에 따라 함께 위축된다. 그리고 국수주의, 자국중심주의, 배타주의를 낳고 결국 파시즘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낸다. 타인종에 대한 적대감, 이민자들에 대한 이유 없는 폭력은 비단 네오 나치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이 땅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다.

 

어떤 해법을 모색해야 할까. 자본주의는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파시즘의 부활을 막는 것은 결국 새로운 미래, 보다 안정된 미래를 찾는 것과 통한다. 모더니티와 자본주의의 사회적, 정치적 모순 속에 탄생한 파시즘. 전쟁, 본성, 민족이라는 중심 개념으로 이성의 파괴, 계몽주의의 파괴를 불러왔으며, 사회적 해방에 대한 욕구를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침략적 민족주의로 바꾸어버린 파시즘. 과연 우리는 파시즘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을까.

 

이명박 정부의 패악질에 ‘파시즘’이란 단어를 붙이는 이들이 종종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명박 정권은 파쇼 정권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파시즘의 여러 가지 징후들이 포착되곤 한다. 국민을 통제하고 훈육하려는 욕망, 천박한 민족주의의 고양과 동시에 반민족적 대북 적대시 정책의 병행, 획일성과 통일성에 대한 무차별 강요 등은 분명 파시즘의 아류로 이 정권을 부각시킨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은 미국에 대한 무한대의 굴종, 복종과 함께 세계사적, 국제정치학적 안목 자체가 없는 저능한 정권이다. 이런 정권 하에서 파시즘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나올 수 있다는 위험성도 분명 존재하지만, 그 한계 역시 명확하기에 부정확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 정권은 파쇼 정권이 아니다. 다만 친미반민족, 천박한 자본주의 추종 집단일 뿐이다.

 

비단 파시즘은 특정 국가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어떤 집단, 사회, 개인에게도 파시즘은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하고 있다. 모든 것을 폭력과 일체감, 과대한 망상과 숭고함으로 숨겨진 욕망으로 표출하고자 하는 이들은 충분히 위험한 가능성이 있다.

 

때문에 우리는 증오하기보다 정당한 분노를 표출하는 법을 먼저 익혀야 한다. 증오는 폭력을 낳지만, 정당한 분노는 변화를 낳기 때문이다.

 

파시즘은 여전히 연구의 대상이다. 그 연구는 민주주의와 새로운 가치를 위해 보다 더 필요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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