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애국의 탄생 히틀러 - 독일국민과 히틀러의 공모, 집단적 애국주의의 광기에 대한 르포르타주
라파엘 젤리히만 지음, 박정희.정지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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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는 국민들을 실업과 절망감, 민주주의적 혼란과 국가적 몰락에서 해방시켜 승리의 최정상에 올려놓았다. 독일은 그가 이끄는 가운데 세계의 강대국으로 우뚝 솟았다. 히틀러는 신뢰를 넘어서 국민에게 밝은 미래에 대한 전망을 열어주었다. 독일국민은 그들의 놀랍도록 훌륭한 지도자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살면서 독일인을 만나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독일 문학에 정통하지도, 독일의 문화·예술을 깊이 알고 있지도 못합니다. 기껏해야 독일 철학자·사상가들에 대해 아주 조금 주워듣고, 어설프게 공부했던 기억만 납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제 유년 시절, 독일이라는 국가는 이미 하나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왔던 것 같습니다. 나름 아닌 ‘악마’의 이미지입니다. 할리우드 영화의 세례를 받으며 자라난 제 기억 속에, 거의 대부분의 역사물, 전쟁 영화에서 독일은 ‘나쁜 국가’‘죄악을 저지른 악마의 국가’등으로 남습니다. 이제 그러한 미국의 ‘악마 만들기’가 냉전 시절 소련 등을 거쳐 현재 이라크, 북한, 시리아 등으로 바뀌었지만 말이죠.

 

독일군이 쓰고 있는 철모는 M35, M42 등으로 불리는데, 어린 제겐 그것이 마치 악의 상징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영화에서 당연히 죽어야 하는 나쁜 대상으로 각인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조금씩 먹으며 무언가 석연치 않은 감정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무지하고 무지한 제가 보아도 지금 세계를 어지럽히고, 자기 맘대로 군림하며, 약소국들을 마치 식민지처럼 통제하려는 국가는 독일이 아닌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이 진정한 악의 축으로 비쳐졌습니다.

 

물론 6·25전쟁을 겪으며, 민족의 분단이라는 비극을 경험한 우리에게, 그런 우리를 구원해 준 미국이라는 존재는 단순히 비난하고, 적대시할 수 없는 신성한 그 무엇이었습니다. 때문에 적잖은 혼란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은 결국,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고, 히틀러는 지하벙커에서 자살이라는 선택으로 삶을 종결지었습니다. 전쟁 기간 중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죽어갔고, 그 수의 몇 배에 달하는 이들이 지옥 같은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대부분 각 나라의 평범한 국민들이었습니다.

 

유태인에 대한 잔혹한 학살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집시에 대해서도요. 히틀러가 얼마나 잔악한 사람이었는지, 집요한 사람이었는지, 그것 역시 기억해야 겠지요. 그래서 다시는 그러한 독재자, 학살자가 만들어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유태인 학살을 비롯한 히틀러와 나치정권의 만행은 결코 그들만의 힘으로 저지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히틀러라는 인물은 결코 혼자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당시 궁핍하고 고통스러웠던 독일 국민들 스스로 만들어낸 악마가 히틀러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히틀러를 추종하고 신뢰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이웃이었던 선량한 유태인들의 고통과 죽음을 외면해 버렸습니다. 물론 적지 않은 독일인들이 유태인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한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였습니다. 대다수의 독일국민들은 애국, 국가의 번영이라는 이름으로 유태인 학살을 동조, 묵인, 방조했습니다. 당시 독일의 종교계 역시 대부분 입을 닫았습니다.

 

아울러 미국을 비롯한 영국, 프랑스, 스위스 등 이른 바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국가들 역시 유태인 학살의 일정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태인들을 도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국익 앞에 인권이나 생명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세계 제2차대전의 비극이 비단 독일만의, 히틀러만의 ‘단독 범죄’가 아님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식민지 쟁탈전 등이 섞인 추잡한 전쟁이었을 뿐입니다. 할리우드 영화가, 수많은 책과 이야기들이 전쟁을 아무리 미화하려 해도, 그 전쟁은 더러운 식민지 쟁탈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패권 다툼이었죠.

 

그리고 책은 히틀러라는 인물, 나치라는 집단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과 독일국민들의 집단적 애국, 마치 최면과도 같았던 그들의 복종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집단적 최면에 빠진 민족이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책은 조심스레 말하고 있습니다.

 

최근 탈북자와 관련해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과 한국 정부는 마치 자신들이 탈북자들의 수호신인양 떠들어 대고, 감히 인권과 생명을 주절거립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미국과 한국이 탈북자들을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지금과 같은 호들갑이 도움이 될까요? 오히려 중국에서 북으로 돌려보내진 탈북자들이 더 힘든 상황을 겪게 만들진 않을까요?

 

미국은 북한을 압박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이 인권 국가인양 ‘북한인권법’을 만들어, 탈북자들을 자국민으로 받겠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부시 정권 8년 간 고작 80여 명의 탈북자들만을 받아들였습니다. 미국의 호언장담을 믿고 생명을 건 탈북을 감행한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미국은 정치적 이익이 될 만한, 자국에 도움이 될 만한 이들만 선별적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왜 탈북자들이 미국 의회에 가서 온갖 과장을 섞어가며, 증언을 해야만 하는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MB정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참여 정부는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빚지 않고도 적지 않은 수의 탈북자들을 매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그러던 탈북자들의 남한행이 현 정부 들어 뚝 끊겼습니다. 탈북자 정책에 관한 한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 게 바로 현 정부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탈북자 이야기를 꺼내듭니다. 왜 그럴까요? 4월 11일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탈북자 이야기에 묻혀 자신들의 온갖 비리와 더러운 진실이 묻혀지길 바라는 것입니다.

 

인권을 외치고, 생명을 외치는 이들은 위선적이어선 안 됩니다. 히틀러는 분명 인류 역사상 잊어선 안 될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현 북한 정권 역시 인민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핑계로 소중한 생명을 정치 도구로 이용하는 집단들 역시 경계하고 비난해야 마땅합니다. 악마는 홀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악마를 돕는 이들이 존재해야 합니다.

 

바로 이 시간, 우리는 악마를 돕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물론 순수한 동포애로,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탈북자 문제를 이야기하는 대다수 국민들의 마음까지 싸잡아 비난할 순 없습니다.

 

다만 그들의 순수함이 더러운 목적으로 악용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독일의 사례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고 기억해야 합니다. 집단 애국의 잔악성, 그리고 무관심의 죄악. 무관심은 곧 방조입니다. 그리고 범죄를 묵인하는 행위입니다. 부디 탈북자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어 더 이상 고통을 겪는 이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을, 하다못해 사람의 생명까지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함부로 이용하는 집단.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혐오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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