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완벽한 2개국어 사용자의 죽음
토마 귄지그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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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우리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살고 있을까요? 최근 우리 사회에서 불고 있는 ‘변화에 대한 열망’‘기득권에 대한 분노’가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님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전 세계가 ‘1% 지배 권력’에 대항해 ‘99%’의 권리를 외치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은 참지 않겠다는 분노의 표현입니다.

 

요 며칠 사이는 그야말로 긴박했습니다. 한미FTA 상정을 막기 위한 국민들의 외침이 전국을 흔들었습니다. 이를 애써 외면하고 모른 척한 주류 방송, 언론들의 뻔뻔함과 비양심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것과는 아예 상관없이 국민들은 당당하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전승국이 식민지 국가에게나 강요할 수 있는 불평등한 한미FTA를 당장 집어치우라고요.

 

어쩌다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요. 현 정부와 한나라당은 오만하고 가증스럽게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름까지 거들먹거리며 한미FTA를 강행하려 합니다. 그렇게 못 죽여서 안달이던, 참여정부의 모든 정책과 성과를 뒤집으며 그들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려 애쓰던, 결국 노무현 대통령마저 죽음으로 몰아갔던 저주의 그 집단이, 이젠 참여정부, 노무현 대통령의 이름까지 팔아가며 외칩니다. 국익을 위한 결단이라고요.

 

하지만 더 이상 국민들은 멍청하지 않았습니다.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한나라당에게 몰표를 주었던 실수를 더 이상 반복하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역사상 국민들에게 가장 많은, 다방면의 공부를 하게 해준 이 아닙니까. 덕분에 많은 국민들이 부동산 문제, FTA, 광우병, 4대강, 국방, 금융 등의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한나라당, 민주당 의원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돈에 눈이 멀어 최악의 선택을 했던 국민들이 어쩌다가 이렇게 바뀌었을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더 이상 정상적인 삶을 이어갈 수, 또 꿈꿀 수 없을 정도로 사회가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강남 3구를 제외하고 말이죠.

 

경제를 발전시키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이명박은 국민의 1%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이에 불과했습니다. 오직 돈이 된다면, 온 국토를 삽질의 천국으로 만들어도 상관없다는 태도, 미국, 일본에게 우리의 모든 것을 다 갖다 바쳐도 상관없다는 태도로 일관해 왔습니다. 그렇게 4년을 보냈습니다.

 

어떤 국민이 여기에 미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떤 이들이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염치도 양심도 가치관도 철학도 없이, 돈을 위해 모든 것을 비상식으로 돌려놓는 이 끔찍한 현실 속에 누가 참을 수 있었을까요. 결국 대통령과 정부, 여당이 스스로 만든 결과일 것입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서울 시장을 한 명 선출하는 데에도 엄청난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국민들입니다. 이제 깨달았을 것입니다. 기득권 세력, 그들의 힘이 얼마나 견고한지. 그들의 이기주의가 얼마나 확고한지.

 

서문이 길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들이, 우리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모든 모습들이, 바로 이 책에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 책은 저자가 말한 것처럼 결코 미래소설일 수 없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인 것입니다.

 

유럽 문단에서 무서운 신인으로 떠오르고 있는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오직 돈을 위해 광기에 사로잡혀 그 어떤 일도 서슴지 않는 인간들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고 서글프게 그려냅니다. 전쟁도 사랑도 평화도 모두 돈을 위해 복무해야 하는 현실, 이는 결코 소설 속의 이야기만이 아니었습니다. 현실의 이야기였습니다.

 

주인공 ‘나’는 마피아의 대부이자, 유명가수 ‘짐짐’의 여자 친구를 폭행했다는 이유로, 조직의 협박을 받게 됩니다. 마피아 대부는 그에게 살고 싶다면, 자신의 라이벌 여가수를 암살하라고 말합니다. 여가수 카롤린은 전장을 누비며 병사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여가수를 보호하는 민병대의 일원으로 들어간 주인공은 하지만, 이내 여가수를 사랑하게 되고, 암살 따위는 까맣게 잊게 됩니다. 그리고 거대 광고주와 매스컴이 주도하는 ‘전쟁 버라이어티 쇼’의 일원으로 전쟁을 ‘연출’하게 됩니다. 대기업의 로고가 박힌 군복을 입고 말이죠.

 

전쟁은 철저히 TV프로그램을 위해 조작됩니다. 무수히 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죽어가지만, 그런 ‘우울한’ 장면은 화면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시청자들의 소비 욕구를 감퇴시키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오직 밝고 아름답고 말초적 스캔들이 가득한 장면만이 만들어질 뿐입니다.

 

이후 이야기는 엉뚱한 사건들의 연속과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주인공은 과연 카롤린과 사랑을 이룰 수 있을까요. 과연 마피아 대부 ‘짐짐’은 그를 살려줄까요. 전쟁 쇼는 언제까지 이어질까요.

 

책의 제목인 ‘완벽한 2개 국어 사용자’는 끝내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바로 ‘완벽한 2개 국어 사용자’입니다. 두 언어, 두 진지, 두 문화 사이에 어정쩡하게 놓인 ‘이중성’의 인간, 즉 회색인간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법도, 신념도, 가치관이나 철학도 없이 다만 생존본능만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군상들. 돈이 된다면 지옥이라도 들어갈 수 있는 이들의 처절한 쟁탈전. 그 사이에서 소모되는 이들은 다만, 말 그대로 소모품일 뿐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주인공을 통해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도, 이 세상이 왜 이따위가 되었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회색인간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얼마 전 한나라당의 어떤 의원님께서 공지영 씨의 《도가니》를 두고, 사실을 왜곡했다고, 조사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습니다. 소설의 정의를 사전에서 찾아보셔야 할 분입니다. 초등학교는 나오셨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소설은 언제나 현실의 철저한 반영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자 역시 이 세상을 그대로 보여줄 따름입니다. 그리고 책을 통해 무엇을 느끼느냐 역시 독자들의 몫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대로 묵묵히 회색인간으로 살아갈 이들도 있을 것이고,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인공과 같이 반수 상태로, 끝끝내 시스템에 갇힌 채 삶을 다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변화의 물줄기는 주인공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내 자신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내 스스로 의식하고, 내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면, 그 변화에 또 다시 휩쓸려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입니다. 이 소설이 우리에게 소중한 그 무언가를 일깨워주고 있다는 증거가. 능동적 인간은 피곤합니다. 손해 볼 각오도 해야 합니다. 반면 수동적 인간은 편합니다. 대충 분위기에 따라 움직이면 됩니다. 하지만 역사는, 민중은, 내 양심은 그 차이를 정확히 꼬집어 낼 것입니다.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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