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 통곡하는 한
야엘 아쌍 지음, 권지현 옮김 / 반디출판사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오랜 갈등의 역사. 난 이-팔 갈등을 볼 때마다, 우리 한반도가 겹쳐졌고, 이스라엘에 대한 우리 정부의 왜곡된 시각과 교육이 역겨웠다. 때문에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 역시 적지 않았다. 세계의 진정한 ‘악의 축’ 국가 중 하나가 아닌가.

 

하지만 결국 죽음은 평등하고, 평화 역시 평등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의 극우 세력을 제외한 평범한 국민들까지 모두 증오하고 혐오해선 안 될 일 아닌가. 이 책은 그러한 단순한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 ‘소중함’이었다.

 

이스라엘은 미국을 든든한 후원자로 뒤에 둔 채, 온갖 비정상적 악행을 저질러 왔다. 주변 아랍 국가들의 평화를 빈번히 유린했고, 많은 이들의 생명을 빼앗았다. 그리고는 다시 정의를 부르댔다. 내가 가장 혐오하고 저주하는 것이 바로 정의를 부르대는 ‘불의의 세력’이다. 미국 등 서구 세력. 그리고 이스라엘이다.

 

종교의 신념으로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찾는 것은 물론 정당한 일이다. 그런데 만약 자신들의 희망으로 수많은 이들이 살 곳을 잃고 생명까지 빼앗겨야 한다면? 그것이 정당한 일이 될 수 있을까. 돌을 던지는 청년들에게 총을 발사하는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자신들을 위해 타인을 해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일까.

 

최근 노르웨이에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사건도 결국 종교라는 이름으로 이뤄진 참상 아닌가. 인터넷을 보니 국내 일부 네티즌들이 노르웨이 테러범을 옹호했다고 하니, 이따위 것이 종교고, 신자라 부를 수 있을까.

 

예루살렘이 피로 물들고, 수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정처 없이 떠도는 오늘의 현실을 어떤 종교적 가치로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이명박 정권 들어 개신교 신자라는 자격으로 행해진 것들. 기억하기조차 싫은 것들 뿐이다.

 

때문에 사람들의 머리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이미지는 결코 좋을 수 없다. 히틀러 나치에게 학살당한 경험이 있는 민족이 타민족을 학살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다면 이는 비극 중에서도 참극이다.

 

책은 이런 이스라엘의 잘못을 시인하면서도, 결국 ‘적’이기 때문에 화해하고 평화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 주장은 전혀 틀리지 않다. 적을 말살하고 학살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청년 사미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파리에서 고국으로 떠나고 결국 그 곳에서 삶을 마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장을 팔레스타인 소녀에게 기증하며 새롭게 태어난다.

 

우린 적이라 불리는 동족과 총칼을 맞대고 있다. 평화를 이야기하면서도 북쪽의 우리 민족이 굶어 죽거나 백기를 흔들며 투항하기만을 기다린다. 우리가 과연 이스라엘 극우파와 뭐가 다를까. 이것이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인가. 이따위 모습이 백의민족일리도 없지만, 만약 그렇다면 나는 그따위 민족의 일원이기를 거부한다.

 

결국 적이기 때문에 함께 평화를 만들어야 한다. 북한 사람들이 모두 머리에 뿔달린 악마가 아님을 깨달았다면 그들과 평화를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5·24조치 이후 최초로 정부가 북의 밀가루 지원을 승인했다. MB정부의 용기 있는 결단에 박수를 보내며 부디 이것이 새로운 남북관계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언제나 강조하지만, 나쁜 평화도 좋은 전쟁도 이 세상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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