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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 유엔인권자문위원이 손녀에게 들려주는 자본주의 이야기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 시공사 / 2019년 1월
평점 :

꽤 오래 전으로 기억합니다. SBS에서 2010년 방영한 드라마 "시크릿가든" 에서 주인공인 현빈이 읽는 장면이 나와 곧장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 하나있습니다. 바로 유엔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이었던 스위스의 사회학자인 '장 지글러(Jean Ziegler)' 교수가 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가 바로 그 책입니다.
충분히 자급자족할 수 있고, 충분히 농사지을 수 있는 환경에 있으면서도 상시적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비참한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는 이 책에서 그는 1차적으로 부의 불균형과 양극화가 독점 자본가(초거대 기업)의 탐욕에서 기인한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가난한 나라들의 인프라 구축과 탐욕적인 글로벌 기업들에 대한 견제장치 마련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초거대 기업들이 자본주의의 논리로 인해 적정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멀쩡한 식량을 버리거나 소각해 버리는 식량을 아프리카에 지원만 해줘도 세계의 빈곤은 일정부분 해소될 수 있다는 주장은 큰 울림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리는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는 어떤 의미에서 전편의 속편 격의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즉,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는 현실에 분노했던 저자가 이번에는 사상 초유의 불평등을 야기한 야만적이고 비열한 자본주의의 민낯을 해부하고 있습니다.
자본(Cappital; 원금이나 투자금처럼 휴율적으로 이익을 만들어낼 종잣돈)이라는 말이 탄생하게 된 12세기 부터 시작된 논의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부르주아 자본가들이 권력을 쟁취하고 사회 변혁을 일으키는 힘의 원천이 되고, 그 이데올로기의 중심인 사유재산권을 인정한 것이 소위, 자본권력의 착취를 정당화하는 '재앙'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정당성을 획득한 자본권력은 1980년대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와 기술혁명을 통한 '독점화'와 '다국적화' 조류를 틈타 오늘날과 같은 맹위를 떨치게 됩니다. 저자에 의하면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지구상에 일종의 '식인풍습'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독점적 자본주의의 결과, 극히 적은 소수를 위한 풍요와 대다수를 위한 살인적인 궁핍이 그 이유겠죠. 자본주의라는 괴물(?)을 등에 업은 소수의 자본 식인종들은 조직적 탈세와 로비로 초 국가적 권력을 휘두르며, 지금도 여전히 전 세계를 상대로 폭주하고 있음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극히 적은 소수만이 누리는 자본주의적 풍요로움의 원천은 기아에 허덕이는 그래서 선진국에 막대한 빚을 지고 있는 제3세계 국가들의 빈곤과 고통에서 비롯된다는 지적에는 다소 무거워지는 양심을 느끼게 됩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이 유엔 식량농업기구를 방문해 "소수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한 반면, 다수는 너무 적게 갖고 있다" 면서 부의 편중 현상을 비판한 바 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400명(인구의 0.00025%)이 소유한 부가 하위 60%에 속하는 성인 1억 5000만명 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가 최근 보고서를 냈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가진 것이 많은 85명의 부호들이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들 35억명이 소유한 것을 모두 합친 만큼의 부를 축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부의 불균형 문제에서는 전 세계적으로도 결코 뒤지지 않을 겁니다.
자본주의의 탄생으로 부터 프랑스대혁명, 산업혁명, 맑시즘(Marxism)을 지나 현대의 독점 거대 자본주의의 민낯을 손녀와의 대화형식으로 효과적으로 풀어낸 책입니다. 물론 세계 시민의 일부로서 불평등하고 부당한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변화를 위한 시작점에 서자는 저자의 주장은 다소 진부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듯 문제의 핵심을 이해한다는 것 그리고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제는 차분히 우리사회에 만연한 부의 불평등과 부의 양극화 문제를 자본주의 시스템의 재점검으로 부터 시작해야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본서의 마지막에 나오는 파블로 네루다의 시로 마무리 할까 합니다.
"꽃들을 모조리 잘라버릴 수는 있지만, 그런다고 한들 절대로 봄의 주인이 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