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문 앞 보리수를 찾아가듯 그날 이후 텅 빈 채 흘러간 한달의 날들을 돌아본다. 뭔가 부글거리는 것들이 그 안에 있다. 나는 살고 싶은 것이다. 일하고 싶은 것이다.
already but not yet.
- P59

한 생을 세상에서 산다는 건 타향을 고향처럼 사는 일인지 모른다. 그러다가 어느 때가 되면 우리는 문득 거기가 타향임을 깨닫고 귀향의 꿈과 해후하는 것은 아닐까. 나 또한 그러하기를 바란다. 과연 내가한 생이라는 타향의 삶을 잘 살았고 잘 살고 있는지 그것이 내내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 P62

선생님은 지금 비상사태예요, 그렇게 슬프거나 울적할 시간이 없어, 라고 그는 나를 탓한다. 그가 옳다. 나는 존재의 바닥에 도착했다. 단독자가 되었다. 본질적 타자성의존재가 되었다. 이제 나는 나의 삶을 혼자서 다 껴안아야한다.
그런데 내가 이토록 무거웠던가.
- P70

문득 말년의 롤랑 바르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왜 그가 폴 발레리를 따라서 ‘나만을 위한 한 권의 책‘을 쓰고 싶어 했는지, 왜 생의 하류에서 가장 작은 단독자가 된 자기를 통해서 모두의 삶과 진실에 대해 말하는 긴 글 하나를쓰려고 했는지...... 나 또한 나의 하류에 도착했다. 급류를 만난 듯 너무 갑작이어서 놀랍지만 생각하면 어차피 도달할 곳이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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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바라보고 멈춰 서서 찍어온 지난 시간 동안 나는 차츰 내가 되고 싶어졌다. 내가 아닌 무언가가 되려 애쓰는 대신 더욱더 내가 되어야지 하고, 자꾸자꾸 오래오래 그저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나무처럼.
- P167

더디게 자라는 나무가 저 먼 높이에 이르기까지의 세월이란 어떤 것일까.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을 훌쩍 넘어선 나무의 일생을 생각한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뒤에도 이 자리에 계속 남아 있을 나무, 아주 먼 미래에 나 같은 누군가가 똑같이 올려다볼지 모를 나무를.
- P172

여행지에서 그런 식의 독서를 하기엔 시집만큼 좋은 친구가 없다. 이미 읽었던 시가 다시 읽어도 또 좋을 때, 나는 그것이 시인과 함께 걷는 산책 같아 좋았다. 말수 적은 시인의 곁을 따라 걸으며, 드물게 꺼내놓는 말 중에 기억하고 싶은 것이 생길 때마다 마음의 귀퉁이를 작게 접어두는 기분.
- P179

바다 속에서 막 꺼낸 젖은 얼굴 위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 눈을 감았다 뜨는데 머리 위로, 온 하늘에, 진득한 노을이 내리고 있었다. 배를 타고 나왔다고 해도 믿을 만큼 멀리까지 나와 있어서 보이는 주위는 온통 바다였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바다뿐인 곳에서, 짙어가는 노을이 시시각각 하늘과 바다의 빛을 바꾸어 놓고 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 P180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인생을 낭비하지 않으려고 뭐든 열심이지만, 사실 다 살고서 돌아보는 시점에선 그 ‘열심‘이야말로 인생을 낭비한 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건 좀 이상한말이기도, 기운 빠지는 말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대체로 과하게 파이팅이 들어가 있어 기운을 좀 빼도 되는 사람들이니까.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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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 P72

 하밀 할아버지는 빅토르 위고도 읽었고 그 나이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경험이 많았는데, 내게 웃으며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 P96

"너 몇살이니?"
"처음 만났을 때 말했잖아요. 열 살이에요. 오늘이 바로 내 열 번째 생일이에요. 하지만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요? 나에겐 여든다섯 살 먹은 친구가 있는데 아직 살아 계세요."
- P136

나는 아이스크림을 핥아먹었다. 기분이 별로였다. 그럴 때면 맛있는 것이 더욱 맛있어졌다. 여러 번 그런 적이 있었다. 죽고싶어질 때는 초콜릿이 다른 때보다 더 맛있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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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한 누군가를 포기하기란 그리 쉽다. 내가 나빠서가 아니라 네가 더 이상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탓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너 스스로도 포기해버린 너를, 내가 어떻게 포기하지 않겠느냐고 말하기란 얼마나 편한가. 영화는 묻는다. 어쩌면 그동안 우리는 너무 쉽게 포기해온 사람들이 아닌가하고.
- P140

물론 여행이라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곳에서도 신경 써야 할 일은 생기고, 따끈따끈한 후회가 새로 만들어지며, 남들 앞에서 금세 의기소침해지는 자신이 싫어질 때도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모닝 맥주는 말하는 것 같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더 나은 사람이 될 필요도 없어. 지금 맥주 한 잔이 주는 작은 기쁨을 밀어두지 않은 너는, 너에게 충분히 좋은 사람이야.
- P151

그래서 나는 더 기억해두고 싶었나 보다. 별것 아닌, 그러나누군가가 살아낸 것이 분명한 삶의 자리들을 보아두었다가 ‘언젠가 생각나면 들려주어야지 마음먹었나 보다. 멀리 여행 다녀온 친구가 생각날 때마다 낯선 도시의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그러니 나는 앞으로도 여전히 좋아할 것이다. 처음 와보는 동네, 한 번도 오른 적 없는 언덕, 비슷한 듯 모두 다른 골목길, 그구석구석을 걷다가 누군가의 삶을 짐작해보곤 하는 산책을.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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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연애는 늘 그런 문제 아니었던가.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것.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것. ‘썸머Summer‘와 헤어져도 ‘오텀Autumn‘이 온다는 걸 알지만,
지금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썸머이다. 그럴 때 ‘이 다음‘ 같은 건 의미가 없다.
- P101

나는 언제부터 이런 것을 세어보는 사람이 되었나. 인생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면, 지금은 분명 여름일 것이다.
언제까지 여름이라 느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다.
- P105

아무도 여행 오지 않던, 어린 나를 키운 조그만 시골마을에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쌓여 있었는지 나는 안다. 그러니 내가하루나 이틀 머물다 가는 곳에서, 오랜 세월 차곡차곡 쌓여왔을이야기를, 누군가가 보냈을 한평생을 지금도 나는 궁금해하지않을 수 없다. 그 긴 세월에 내 짧은 하루를 포개고 가는 것이 여행이라면, 사실 할 일이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 P122

어디서든 쉬이 외로워지는 우리를 위해, 어디서나 비슷하게 이어지는 일상을 보여주는 창들. 창이 있어 우리가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할 수 있다는 건 다행한 일이었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사람은 처음 막힌 벽을 뚫어 창이란 걸 만들어낼 생각을 했는지도.
- P127

오래전 여행을 하며 창문 바깥에 서서 안쪽을 그리워하던 나는, 이제 생활을 하며 창문 안쪽에서 바깥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꼭 멀리 갈 필요는 없는 거라고 산다는 건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지금 눈앞의 세상을 잘 담아두는 일이라고.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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