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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제니 오델 지음, 김하현 옮김 / 필로우 / 202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가끔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예전에 광고에 나오던 문구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법'은 위의 글과는 맥락이 다르다.
오히려 '열렬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광고 멘트가 더 적합하다.
저자는 첨단 기술의 메카라 할 수 있는 실리콘밸리에서 나고 자랐다.
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것은 살고 있는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다.
인간다움, 온전한 삶...
이것이 저자가 생각하는 인생이다.
이런 삶을 살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삶을 더 알아차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 되고자 하거나 더 큰 생산성을 갖추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알아차림'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삶을 경험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온전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나를, 주변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매일 같은 길을 다니면서도 눈으로는 스마트폰을 보고, 귀로는 음악을 듣는다.
대부분 자신과는 크게 관련없는 기사, 뉴스, 소식을 탐독한다.
과연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 것인가?
제니 오델은 다른 존재와의 연결에서 완전한 이해나 해석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순수한 관심'과 '지속적인 만남'이 필요하다.
지속적으로 만나 깊이 있게 바라보면 더 온전한 연결이 일어난다.
작가는 또한 계속해서 대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같은 대상을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순수한 관심'과 '지속적인 만남'이다.
일상에서의 모든 것이 내가 얼마나 관심을 갖느냐, 얼마나 오랫동안 만나느냐에 따라 달리 보인다.
이런 변화는 당연히 인생에도 영향을 끼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절반은 우리의 관심을 도구화하는 디지털 세계의 관심경제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나머지 절반은 다른 무언가에 다시 연결되는 것이다.
그 '다른 무언가'는 다름 아닌 실제 세계의 시간과 공간이며, 시공간에 다시 연결되는 것은 우리가 그곳에서 서로 관심을 가지고 만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이 글이 책의 핵심내용이라 할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반은 하지 않는 것이고 반은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 않아야 할 것은 저자가 관심경제라 말하는 디지털 세계로 부터의 관심을 거두는 것이고, 해야 할 것은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직접 맞닥뜨리는 공간과 시간과의 만남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무언가 말할 것을 만들어내기 이전 단계로 기능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사치도, 시간 낭비도 아니다.
오히려 의미 있는 생각과 발화의 필수 요소다.
여기서 말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은 모든 감각의 정지를 말한다.
오직 뇌만을 움직이는 생각만이 예외이다.
주변을 보면 무언가 자극을 받지 않으면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눈으로 보든, 귀로 듣든, 입으로 먹든...꼭 무언가를 해야 안심이 된다고 한다.
가만히 '생각'을 할 시간이 없다.
그렇기에 '지식'은 많지만, '지혜'나 '통찰'을 기대하기 어렵다.
'생각'은 나의 주체성을 찾는 가장 적극적인 행동이자 가장 기본적인 행동이다.
우리의 현실을 만드는 것이 관심(관심을 기울일 대상에 대한 결정)이라면, 관심의 통제권을 되찾는 것은 곧 새로운 세계와, 그 세계를 헤쳐나갈 새로운 방식을 발견하는 일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우리의 저항 능력을 키울 뿐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진짜 삶에 닳을 기회를 만들어 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세계를 새롭게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새로워진다.
관심의 통제권을 되찾는 것.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나의 생각으로 이뤄지고 있는가?
뉴스, 영상을 보고, 게임을 하고, 심지어 운동을 하면서도 디지털 세계에 연결되어 있다.
(인공지능을 가장한) 그들의 제시하는 것들을 수동적으로 탐하고 있진 않은가?
너무 자연스럽게 다음 것을 보고, 계속해서 진행한다.
저자는 이런 관심의 통제권을 가져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진짜 삶'이라는 개념이 주관적일 수 있지만, 디지털 세계와의 거리만큼 진짜 삶과 가까워진다고 주장한다.
내가 생태지역주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데는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관심이 우리가 철회할 수 있는 마지막 자원이듯이, 물리적 세계는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마지막 기준점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강조하는 것, 2가지를 모두 담고 있다.
관삼세계에 대한 관심을 철회하는 것, 그리고 물리적 세계(현실세계)에 대한 공유.
우리는 현실 세계를 살고 있지만, 비현실 세계에서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이제 현실세계로 돌아올 시간이다.
주변 사람과 만나고, 풍경을 보고, 새 소리를 들어라.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위해 성공적인 저항 사례를 찾아보면서 현상의 공간이 계속 되풀이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 과정에서 한 가지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물론 다른 의사소통 방식의 도움을 받긴 하지만, 현상의 공간은 대개 물리적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
새로운 아이디어는 오로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현상의 공간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반드시'라고는 할 수 없지만 공김이 가는 글이다.
'현상의 공간'보다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이른바 집단지성이다.
물리적 공간이 아니더라도 모두의 의견을 청취할 수 있는 공간에 있어야 한다.
일방이 아닌 서로가 소통할 수 있는 공간에 머물러야 한다.
내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주고 다른 체계에서 다른 무언가를 도모하기 위해 현재의 체제(관심경제)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상상하는 건전한 소셜 네트워크는 현상의 공간이다.
이곳은 오랜 시간 친구와 함께한 산책, 전화 통화, 비밀 채팅방에서의 대화, 동네 주민 모임 등 매개체를 경유한 만남과 대면 만남이 결합된 공간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소셜 네트워크는 우리의 일상적인 의식에서 시간과 장소의 역할을 되찾아줄 것이다.
현실에 대한 자각을 말하고 있다.
무언가를 보고, 듣기만 하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생각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발전과 생산적인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나의 이러한 행동은 비행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장소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마침내 관심을 기울인 사람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나의 삶을 실제로 경험하고 있었던 사람이며, 나는 죽을 때 결국 이 사람에게 대답할 것이다.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책의 마지막 글이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전달하는 내용은 시류에 어긋나 보인다.
그럼에도 '다른 관점'을 보여주었기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출퇴근에 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보거나,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무언가를 듣고 있다.
가끔은....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발딛고 있는 이 세계를 '적극적으로' 느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