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 인간의 시계로부터 벗어난 무한한 시공간으로의 여행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보희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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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책 제목만으로는 철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은 과학, 그 중에서도 물리책이다.




저자는 양자중력의 전문가이다.
그 중에서도 루프 양자중력, 이른바 '루프이론'이라고 불리는 이론을 만들어 낸 과학자이다.
저자와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책으로 처음 만났는데, '시간'에 대해 과학적 접근을 할 수 있어 좋았었다.

이번 책은 '루프 양자중력'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 이론을 발견하기까지의 자신의 행적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20세기의 과학적 대혁명은 두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양자역학이고, 다른 하나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다.
양자역학은 미시 세계를 훌륭하게 서술해 물질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뿌리째 흔들었고, 일반상대성이론은 중력의 힘을 명확히 설명하면서 시긴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하지만 두 이론이 세계를 서술하는 방식은 언뜻 보기에도 양립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너무 다르다.
마치 서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각 수립되었다.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이론은 이름만 들어본 수준이다.
모두 과학계에 끼친 영향이 상당하다고 알고 있다.
이 둘의 이론이 완전히 상충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각각의 이론으로 존중받고 있다는 것이 과학계의 특징일까?
무척 특이하다.

그는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이들과 더불어 탐구하고 연구하는 것이며,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에는 그 공로를 함께 나누는 정직함과 관대함을 온전히 드러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과학계에 있는 모두가 그러하듯, 나 역시도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아이디어들을 도둑맞은 적이 있었다.

정직함과 관대함.
이는 과학계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존중받아야 할 가치이다.
창업분야에서도 좋은 아이디어를 쉽게 공유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더 나은 아이디어로 만들 수 있지만, 아이디어를 도둑받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혼자가 아닌 우리가 더 발전하고 성장하기 위한 상생의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인문학계와 과학계 사이에 존재하는 서로에 대한 불신은 사회 전체가 가지고 있는 과학에 대한 이미지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편에서는 과학을 여전히 '확립된 진리'로 여긴다.
따라서 과학은 필요에 따라 기준으로 삼을 수 있고, 떠받들어야 하며, 문제해결을 위한 기술적 교본이라고 여긴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과학이 정신적 가치를 부인하며, 나아가 우리 사회를 위협하고, 기술만능주의의 기반이자 전문가달의 근시안적 오만의 터전이며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낸 두려움의 원천이라고 비난한다.

인문학계와 과학계의 대립은 '창조론'과 '진화론'의 그것과 같을 정도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양쪽 모두 올바른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반대편 입장에서 보면 틀린 주장이다.
그렇기에 이 둘의 화합이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모두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정-반-합 논리처럼 이 둘의 논리적이고 합당한 반대를 통해 더 나은 이론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두 관점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과학적인 문제일까 철학적인 문제일까?
나는 이것이 과학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유가 과학이 공간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제시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는 과학이 두 관점 중 세상에 대해 보다 더 효율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어느 쪽인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과학적 진술의 진리 문제의 핵심이 있다.

과학계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글이다.
올바른 시각에 대한 기준이 '효율'이라면 과학적 문제가 맞다.
하지만 그 기준이 '가치'나 '효용'이라면 철학적 문제가 될 것이다.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문제의 성격이 달라진다.
이와 같은 것이 어디 이 문제뿐이겠는가?

'문화'를 만들고 기초지식을 추구하는 학문인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는 곤두박질치고 있다.
사회는 더 이상 과학자들에게 '지식'을 요구하지 않고 있다.
그 대신에 판매할 만한 제품이나 무기를 개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문장 그대로다.
이것이 지금 기초과학을 대하는 팩트이다.
지금 당장 '판매'할 수 있는 기술이나 제품이 아니라면 투자를 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들이 원하는 기술과 제품은 탄탄한 기초과학 바탕위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과학적 사고란 우리의 무지를 의식하는 것이다.
나는 한발 더 나아가 과학적 사고란 우리의 무지가 얼마나 방대하고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역동적인지를 의식하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를 전진할 수 있게 하는 것은 확신이 아닌 의심이다.
그리고 바로 이 의심은 데카르트가 남긴 뿌리 깊은 유산이기도 하다.
과학을 신뢰해야 하는 이유는 과학이 확신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과학에 대해 철학적인 고찰이다.
확신이 아닌 의심이야말로 과학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이유이다.
역설적으로 이런 의심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과학적 사고이며, 결과물이 '현재'의 과학이다.
불확실성이 과학을 신뢰해야 한다는 이유라는 말은 아이러니하게 들리지만 사실이기도 하다.

이 책은 양자역학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 중간중간에 설명하고 있는 과학에 대한 다양하고 전반적인 시각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편협했던 과학에 대한 나의 시각이 이 책을 통해 바꿀 수 있었다.
기술의 진보와 같은 과학의 혜택을 누리고 살면서도 그에 합당한 대우를 못받고 있는 과학계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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